<천안함 범죄를 완전히 증명한다>

국방부가 자행한 천안함 범죄를 완전하게 증명하는 천안함 범죄시리즈를 매주 월요일 총 12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저는 함장과 국방부를 천안함 46용사의 살인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사람으로서 이 글의 주장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1. 천안함 범죄를 단칼에 베는 보배로운 칼 (5월 20일)
2. 조작이 불가능한 10가지 물리적 증거 (5월 27일)
3. 해군과 신상철이 주장한 좌초가 불가능한 이유 (6월 3일)
4. 신상철과 네티즌이 주장한 잠수함 충돌이 불가능한 이유 (6월 10일)
5. 국방부가 주장하는 어뢰폭발이 불가능한 이유 (6월 17일)
6. 모든 물리적 증거와 일치하는 유일한 반파원인 (6월 24일)
7. 천안함의 반파모습은 천안함 범죄의 제1증거이다 (7월 1일)
8. 스크루 프로펠러의 손상은 좌초증거가 아니다 (7월 8일)
9. 반파 후 1초 만에 사라진 함미의 비밀 (7월 15일)
10. 천안함 장병들의 삶과 죽음을 가른 비밀의 문 (7월 22일)
11. 너무도 원통한 46용사의 죽음을 기억하라 (7월 29일)
12. 천안함 범죄자 국방부는 8천만 겨레에 사죄하라 (8월 5일)

<한민국 박사의 천안함 저서 및 카페>

1.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천안함 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 (밥북, 2019)
2. 한사람을 기다리며 천안함을 고발하다1.2 (밥북, 2015)
3. 천안함 고발카페 http://cafe.daum.net/warship772

 

지금까지 10회의 연재를 통해서 ‘해군이 주장한 좌초, 국방부가 주장하는 어뢰폭발,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한 기뢰폭발, 그리고 신상철 전 조사위원과 네티즌이 주장하는 잠수함 충돌에 의한 반파가 모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증명했습니다. 또한 제가 주장하는 수밀문 폐쇄가 조작이 불가능한 모든 물리적 증거들과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오늘은 천안함의 좌초에서 반파까지 과정과 국방부가 천안함 사건을 조작한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수밀문이 폐쇄된 함미에 갇혀서 죽음을 맞이하는 46용사의 입장에서 그들의 너무도 원통한 죽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하 존칭생략)

천안함의 좌초와 이동경로

천안함의 좌초에서 반파지점까지 이동경로는 〈한사람을 기다리며 천안함을 고발하다1.2〉(한민국, 2015)에 상세히 기술되었다. 한민국은 천안함의 반파 후에 제기된 모든 좌표들의 신뢰도를 분석하여 진실(True)이 되는 좌표와 거짓(False)이 되는 좌표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진실이 되는 좌표로 천안함의 좌초와 이동경로 및 반파과정을 밝히고, 이러한 주장의 진위(True or False)를 조작이 불가능한 물리적 증거로 증명하였다.

천안함의 좌표분석에 기초한 천안함의 좌초 및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 천안함의 좌초와 이동경로.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천안함 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밥북, 2019), 160쪽]

천안함이 밤 9시 15분경 대청도 서해에서 좌초한 후에 함미에 바닷물이 들어차는 상황에서 함미에서 함수로 통하는 수밀문이 폐쇄되었다. 이후 천안함은 백령도 근해로 북상을 하고, 멀리 북방한계선을 앞두고 백령도 근해에서 좌회전을 시도하다가 우측으로 넘어가면서 정지하였다.

천안함의 함미에 들어찬 바닷물로 좌회전 중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 천안함의 정지와 함께 바닷물이 들어찬 함미가 가라앉고, 함수가 공중으로 솟았다. 천안함의 정지로 바닷물이 들어찬 함미를 들어 올리던 추진력(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안함의 반파 전 모습

한민국의 수밀문 폐쇄 주장에서 천안함의 반파 전 모습은 다음과 같다.

▲ 천안함의 반파 전 모습.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천안함 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밥북, 2019), 125쪽]

한민국이 주장하는 천안함의 반파 전 모습은 조작이 불가능한 10가지 물리적 증거를 이용한 인과관계 검증으로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천안함의 좌표분석과 물리적 증거들은 ‘천안함이 대청도 서해에서 밤 9시 15분경에 좌초하고, 백령도 근해에서 밤 9시 45분경에 반파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천안함의 좌초에서 반파까지 약 30여분 동안 수밀문이 계속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천안함의 반파과정과 장병들의 모습

천안함은 함미가 가라앉고 함수가 공중으로 솟은 상태에서 반파가 빠르게 진행된다. 천안함의 반파과정 5단계와, 이러한 반파과정에서 예상되는 천안함 장병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천안함의 반파과정 5단계.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천안함 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밥북, 2019), 127쪽]

∙반파과정 1단계: 천안함이 우현으로 넘어가면서 정지한 후 함미가 가라앉은 상태이다. 천안함의 함미가 가라앉을 때에 함장은 가라앉는 함미를 들어올리기 위하여 스크루 프로펠러를 최대로 작동시키고, 이 과정에서 우현 스크루 프로펠러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천안함이 무동력 상태로 조류를 따라서 함미 침몰위치 가까이 내려온다.

천안함은 파도(평균 2.5m)의 운동과, 함미에 가득한 바닷물의 운동이 교차하면서 매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즉, 함미의 뒷부분을 고정점으로 함수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린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운동에서 함수가 흔들리면서 하강하다가 반작용(증가된 부력)에 의해서 상승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절단스트레스는 최대가 된다. 이러한 절단스트레스의 누적으로 천안함은 반파하였다.

여기서 절단스트레스는 우현하단에 작용하는 수축압력과, 좌현상단에 작용하는 팽창압력이다. 이러한 절단스트레스가 빠르게 누적되면서 천안함의 무게중심부분에서 천안함의 반파를 알리는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천안함의 반파를 알리는 전조증상이 시작되었다.

이 단계에서 함수와 함미의 장병들의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자. 공중으로 솟은 함수에 있는 장병들은 천안함의 반파를 알리는 전조증상에 따라 극심한 공포를 경험하였다. 구조를 위해 도착한 고속 경비정들도 천안함의 반파가능성으로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함수의 장병들은 천안함의 반파에 대비해서 자신들의 몸을 천안함에 단단히 고정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함미의 장병들처럼 사망할 수도 있다는 숨 막히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천안함의 반파를 기다린다.

그리고 수밀문의 폐쇄로 혼란과 공포에 떨었던 함미의 장병들은 빠르게 들어차는 바닷물에 삶의 희망을 잃는다. 함수에 있는 지휘관들과 전우들에게 수밀문 개방을 요구하는 외침도 사라지고, 그들에게 느낀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도 희미해진다. 자신과 형제처럼 지내던 전우들이 한사람씩 바닷물에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바닷물이 가득한 함미에서 장병들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반파과정 2단계: 천안함의 무게중심 부분에 가해지는 절단스트레스로 함수가 부러지는 순간이다. 즉, 공중으로 솟은 함수와 수면 아래 함미의 무게중심부분이 절단되는 순간이다. 공중으로 솟아있던 함수가 부러지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천안함이 순간적으로 ⋀자(역V자) 모양이 된다.

이 단계에서 함수와 함미의 장병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함수에 있던 장병들은 공중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그러나 함수의 장병들은 천안함의 반파 전에 발생하는 전조증상(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징후들)에 따라 반파에 대비하였다. 천안함의 반파 시에 생존 장병들은 천안함의 일부에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또한 부러진 함수가 바닷물에 떨어졌기 때문에 함수의 장병들은 부상을 당할 정도의 물리적 충격은 없었다.

그러나 천안함의 무게중심 부분(절단 부분)에 있던 일부 장병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천안함의 무게중심 부분이 찌그러지면서 손실될 때에 그 자리에 있던 장병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안함의 절단 부분에 위치한 중요시설에 있던 장병들은 함장의 지시에 따라 마지막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반파과정 2단계에서 사망한 것으로 판단한다.

∙반파과정 3단계: 천안함의 반파 부분이 바다에 부딪치면서 상당한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고, 천안함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자 모양이 된다.

이 단계에서 함수의 장병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자. 대부분 장병들은 천안함에 자신의 몸을 단단히 고정해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생존자는 몸이 튕겨 올라 천안함에 몸을 부딪치면서 가벼운 부상을 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반파과정 1단계에서 익사한 함미의 장병들은 2단계 내지 3단계 반파과정에서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함미에 가득한 바닷물이 천안함의 반파 시에 발생하는 충격에서 사망 장병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반파과정 4∼5단계: 반파과정 4단계는 수면위의 함수와 수면아래 함미의 일부가 연결되어 잠깐 동안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반파과정 5단계는 수면위의 함수와 수면아래 함미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다.

이 단계에서 함수의 장병들의 어떠했을까?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자. 반파가 끝난 후에 함수에 있던 장병들의 일부가 상황을 살펴본다. 이때 장병들은 함수와 연결된 함미의 일부가 흔들리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천안함의 반파와 함께 함미가 단 ‘1초’만에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이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생존 장병들은 함미에서 사망한 전우들의 생각에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였다. 함미에 있던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함수에 있는 장병들이 해경에 의해서 구조된다.

해군이 반파원인을 ‘백령도 근해의 좌초’로 조작한 이유

해군은 사고 다음날 평택 해군사령부에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백령도 해안에서 천안함이 좌초하였다’고 보고하였다(한겨레신문, 2010,6,27; KBS 추적 60분, 2010.5.5). 당시에 실종자 가족이 해군관계자에게 입수한 해군작전도는 해군이 설명한 좌초위치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천안함의 좌초가 표시된 해군작전도. 아시아경제, 2010.3.27.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해군이 실종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천안함의 좌초를 보고할 당시에 천안함의 공식적 반파시간은 밤 9시 30분이다. 따라서 해군의 보고는 ‘천안함은 밤 9시 30분경에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하였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군이 천안함의 좌초를 실종자 가족들에게 보고한 그날 그 장소에서 함장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암흑같은 상황이였고 저희 함정의 반쪽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생존자 당직자들이 증언하기로는 순간적으로 1초였다고 했습니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10.4.17.)

해군이 사고 다음날 실종자 가족들에게 보고한 좌초와, 함장의 증언을 종합하면 해군이 보고한 좌초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천안함이 밤 9시 30분경에 백령도 근해를 정상적으로 항해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좌초를 당했다. 천안함의 좌초로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반파되고, 반파 후 곧바로 함미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러한 해군의 좌초보고는 물론 100% 조작이요, 거짓말이다. 그러면 좌초에서 반파까지 전 과정을 훤히 알고 있는 해군이 천안함의 반파원인을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로 조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좌초에서 반파까지 전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함장이 해군의 조작에 동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범죄에 관여된 경우에 그 책임을 피하려고 증거를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거짓말이나 범죄행위에 대하여 그럴싸한 이유로 합리화(rationalization)한다. 천안함의 46용사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천안함의 반파 원인을 ‘백령도 해안의 좌초’로 조작한 이유는 46용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천안함의 반파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46용사의 사망원인과 그 책임문제이다. 이것이 국방부가 천안함의 반파 원인을 조작한 가장 큰 이유이다.

해군의 발표대로 천안함이 백령도 해안에서 갑작스럽게 좌초해서 반파할 경우에 함장과 해군지휘부는 46용사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 또한 천안함의 지휘관들과 생존 장병들도 모두 46용사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정상적으로 항해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쾅’하는 소리와 함께 천안함의 함미가 ‘1초’만에 가라앉은 경우에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좌초에서 반파까지 30분간 계속된 수밀문의 폐쇄로 천안함이 반파한 경우에 함장과 해군지휘부에 살인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천안함의 좌초 후에 함장은 해경이 아니라 지휘계통에 따라 해군지휘부에 먼저 좌초를 보고하고 구조요청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밀문 폐쇄 상황도 분명히 보고했을 것이다.

따라서 천안함의 좌초에서 반파까지 계속된 수밀문 폐쇄의 책임은 함장과 해군지휘부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46장병들이 함미에서 사망하기 까지 끝끝내 수밀문을 개방하지 않는 행동은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될 것이다. 천안함의 좌초에서 반파까지 30여분 시간동안 그들이 ‘수밀문 폐쇄로 함미의 장병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천안함이 대청도 서해에서 좌초한 사실(해경의 최초보고)과,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한 사실(해군의 조작)은 그 책임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해군은 46용사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천안함의 반파 원인을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로 조작한 것이다.

국방부가 반파원인을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조작한 이유

천안함 사고 다음날 해군은 ‘46용사의 사망원인을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로 조작하였다. 그러나 해군의 좌초 조작은 2가지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실종자 가족의 강력한 저항: 2010년 3월 27일에 있었던 해군의 좌초보고에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은 해군관계자에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함장의 차를 가로막았다(연합뉴스, 2010.3.27). 이후에 실종자 가족들은 9시 16분경에 핸드폰 문자가 끊겼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게 된다(연합뉴스, 2010.3.30; 한겨레신문, 2010.3.30). 그리고 국방부(해군)의 좌초보고에 반발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MBN뉴스, 2010.3.28; 한겨레신문, 2010.4.20).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부는 ‘유가족들의 협조 없이는 천안함 사건의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다.

∙해경의 좌초 보고: 해경은 사고당일 밤 최초의 보도자료에서 천안함 사고의 발생시간을 밤 9시 15분이라고 밝혔다(경향신문, 2010.4.4). 해경은 천안함 사건의 초기에 보도자료 및 언론을 통해서 천안함이 밤 9시 15분에 대청도 서해(37-50N, 124-36E)에서 좌초했다는 사실을 전했다(MBC 뉴스데스크, 2010.4.3; 한겨레신문, 2010.4.3; 오마이뉴스, 2010.4.3). 그리고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서 해경관계자들은 ‘천안함의 대청도 서해에서 밤 9시 15분 좌초’를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부는 해경을 강력하게 통제하지 않고서는 천안함 사건의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2가지 저항으로 해군이 주도한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는 실패로 끝난다. 이후 천안함 사건의 조작은 해군이 아니라 국방부의 주도로 진행된다. 강력한 힘을 갖는 국방부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조사와 발표를 주도하면서 해경 관계자들의 ‘대청도 서해에서 좌초증언’을 빠르게 사라지고, 실종자 가족들의 반발도 점차 수그러든다.

결국 국방부는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46용사들이 사망했다’고 조작함으로서 46용사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은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죽음(국방부의 주장)에 따라 ‘전사자에 대한 명예와 예우, 그 보상’을 받았다.

또한 함장과 지휘관들, 그리고 생존자들은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46용사의 사망(국방부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서 ‘46용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부 생존자는 천안함 재판에서 거짓증언을 하고, 다수의 생존자는 46용사의 죽음에 침묵하였다.

국방부의 심리전에 생존자와 유가족이 당하다

나는 국방부(해군)가 천안함 사건의 초기부터 천안함의 생존자들, 고통받는 유가족들, 다수의 목격자들, 그리고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심리전을 벌인 것으로 판단한다. 여기서 심리전은 ‘사실(정보)을 조작하고, 조작된 정보를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심리전의 일차적 대상은 당연히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이다. 천안함의 반파 과정을 훤히 알고 있는 생존자들과, 46용사의 죽음으로 고통받는 유가족들의 협조가 없이는 천안함 사건의 조작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방부(해군)는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어떠한 심리전을 펼쳤을까? 국방부는 어떻게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국방부의 조작에 동의하거나 침묵하도록 하였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국방부 역시 다르지 않다. 함장과 생존자들은 46용사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46용사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질 경우에 법적인 책임이나 도덕적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서 국방부는 생존자들이 천안함 사건의 조작에 참여하거나 침묵하도록 한 것으로 판단한다.

해군은 사고 다음날 실종자가족을 대상으로 ‘천안함이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로 반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해군이 좌초를 보고한 그날 그 장소에서 함장은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천안함이 반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해군이 46용사의 사망원인을 좌초로 조작하고, 이러한 조작에 함장이 협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군의 좌초 발표는 실종자 가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한다. 이러한 유가족의 거센 반발을 누르기 위하여 국방부가 유가족의 심리적 혼란과 취약성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한다. 당시에 유가족들은 국방부가 자행한 46용사의 사망원인에 대한 정보통제와 왜곡으로 사망원인을 알지 못하고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또한 ‘백령도 해안에서 좌초로 인한 사망’이라는 해군의 발표로 ‘사망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와 보상’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유가족들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유가족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심리적 취약성)를 국방부가 심리전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결국 국방부는 46용사의 사망원인을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조작함으로서 유가족의 협조를 받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국방부의 조작으로 함장과 생존자들은 46용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국방부의 조작에 협조하거나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전사자에 대한 명예와 예우, 그 보상’을 받고, 국방부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침묵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46용사의 죽음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함장과 지휘관 및 생존자들이 국방부의 심리전에 당한 것이요, 46용사의 죽음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유가족들이 국방부의 심리전에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너무도 처참한 46용사의 죽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음의 과정이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천안함 46용사의 죽음이 너무도 처참한 이유는 바로 죽음의 과정에 있다. 함미에 갇혀서 죽음을 맞이하는 46용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안함의 수밀문은 밤 9시 15분경 좌초에서 밤 9시 45분경 반파할 때까지 폐쇄되었다. 함미가 좌초한 상황에서 함미의 장병들의 유일한 탈출로인 수밀문의 폐쇄로 함미의 장병들은 약 30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경험하였다.

천안함의 좌초로 함미에 바닷물이 들어차자 함미에서 함수로 통하는 수밀문이 폐쇄되었다. 수밀문 폐쇄로 함미에 갇힌 장병들은 큰 공포와 함께 혼란에 빠졌다. 함미에 바닷물이 들어차는 위기상황에서 함미의 장병들이 구멍(틈새)을 찾아서 막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탈출로가 막혀서 함미에 갇혀서 공포에 떠는 장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함미에서 함수로 통하는 수밀문이 폐쇄된 후에 극도의 공포와 혼란이 함미를 지배했다.

천안함의 함미에 바닷물이 들어차는 위기상황에서 함장과 지휘관들은 함미의 장병들을 함수로 이동시키면서 차례로 수밀문을 폐쇄시켰어야 한다. 이러한 수밀문 사용의 기본원칙이 천안함의 좌초상황에서 적용되었더라면 천안함의 장병들은 모두 살았을 것이다. 수밀문의 설치 목적은 좌초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사람들을 선내에 들어차는 바닷물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이다. 수밀문은 지상에서 방화벽과 같다.

또한 함미의 장병들이 바닷물이 잠기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가까운 대청도 서해의 해안으로 이동했어야 했다. 좌초 후에 수밀문이 폐쇄된 상태로 가까운 대청도 해안으로 이동만 했어도 46용사들은 모두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도 천안함은 좌초 후에 백령도 근해로 이동하다가 우현으로 넘어가고, 곧바로 함미가 가라앉으면서 파국을 맞았다. 함미가 가라앉으면서 함수에 있던 장병들 역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수밀문을 개방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천안함의 좌초에 반파까지 약 30여분은 46용사들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그들은 바닷물이 계속해서 들어차는 함미에 갇혀서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들은 전우들이 바닷물에 차례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너무도 원통한 46용사의 죽음

천안함의 수밀문이 폐쇄된 사실을 알고서 함미에 갇힌 장병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함미에 갇혀서 차례로 죽어가는 46용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함미에 갇힌 장병들은 수밀문 폐쇄로 자신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함수에 있는 지휘관들과 장병들에게 수밀문의 개방을 처절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수에 있는 어떤 누구도 함미의 장병들을 구하기 위해서 수밀문을 개방하지 않았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함장과 지휘관들과, 그들과 동거 동락하던 전우들은 그 누구도 함미에 갇혀서 죽어가는 46용사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미에 갇혀서 차례로 죽어가면서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함장과 지휘관들에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로 절망하였다.

이것이 46용사의 죽음이 너무도 원통한 이유이다. 세상에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한 맺힌 죽음은 없을 것이다.

46용사의 죽음이 너무도 원통한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이 죽어서도 백령도 앞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들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산자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백령도 깊은 바다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심리전과 산자들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46용사의 죽음은 백령도 앞바다에 묻혀버렸다. 46용사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은 46용사의 참혹한 죽음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아아. 이 세상에 영혼이 있다면 46용사들은 너무도 원통해서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안함 범죄 완전증명 ⑫ 예고>

다음 〈천안함 범죄 완전증명 ⑫ 천안함 범죄자 국방부는 8천만 겨레에 사죄하라〉는 8월 5일(월)에 연재합니다. 마지막 연재로 천안함 범죄자 국방부의 사과와 문재인 정부의 대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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