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김윤기]

그 뒤 그런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이에 신돌석씨는 자신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85년에 해고된 뒤 86년에는 주로 지역 해고자 모임에 속해서 노동운동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86년에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과 관련된 유인물을 만들어서 공단과 인근 주택가에 뿌리고 다니기도 하고, 그 유인물을 보여주기도 하며, 다니던 공장의 노동자들을 만나 설명하면서 분노를 조직하는 일들을 그때 주로 했었다. 사실 그때 신돌석씨 주변의 노동자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공장에서 같은 반에서 일했던 송윤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의 나이였는데 성실하고 노조 만드는 데도 협조적이었었다. 신돌석씨 공장의 노조는 그 전 해에 이미 초토화되어 버렸지만 그때 간부가 아니었던 사람들은 아직 공장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신돌석씨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송윤호는 신돌석씨를 피하지 않고 형처럼 대하면서 따랐기 때문에 계속 만나서 술도 마시곤 하였었다. 그런 그였으니 그를 만나서 성고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유인물을 몇 가지 들고 그에게 주면서 읽어 보라고 한 뒤 울분을 터뜨리며 한참 설명을 하는데,

“형 그 자식 기분 째졌겠다.”

송윤호의 반응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신돌석씨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한 5분은 그랬을 것이다.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송윤호가 어쩔 줄 몰라했다. 그와 동시에 신돌석씨의 주먹이 송윤호의 턱에 날아갔다. 송윤호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신돌석씨가 달려들어 구둣발로 짓밟았다.

“너 같은 인간 쓰레기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나중에 둘이는 다시 만나 서로 사과했고, 송윤호는 그 뒤 군대를 갔다 오고 다른 직장에서 노조 위원장도 했다. 그도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노조 활동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울분이 치솟았다. 이렇게 생각할 정도니 노동자들이 억압받는 것도 싸다는 생각도 한때는 했다. 하지만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신돌석씨 자신의 변화를 생각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노동자들의 생각에 변화가 없을 거라고 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 생각이라고 반성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성고문 사건 뒤 이른바 선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강의를 하던 사람의 말 중에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일본은 뻔뻔스럽게 그것을 부정하는데 왜 스스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히는 사람이 없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은 이중의 억압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그때는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스스로 밝힌 분들이 없었다. 그 뒤 한 분 두 분 밝히면서 그 분들이 모여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시위를 하게 되었고, 신돌석씨도 그 곳에 지지하러 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사람이 없던 때였다.

강사는 그때 ‘화냥년’이라는 말의 유래와 함께 그 까닭을 설명했다. ‘화냥년’이라는 말은 신돌석씨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다. 신돌석씨가 어린 시절 살던 망태산 동네에서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여자들끼리 머리끄뎅이 잡고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나오는 말이 ‘화냥년’이었다. 화자 엄마가 춘자 엄마더러 이 화냥년아 하고 말하면, 춘자 엄마는 화자 엄마에게 니년이 나 화냥질하는 것 봤냐 하면서 대거리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화냥년은 욕이구나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였는데, 이때 강의를 통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환향녀’라고 한 것이 ‘화냥년’이라고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적군에게 끌려 간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 일인데, 돌아온 사람들을 축하해 주고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죄지은 사람 취급을 하다니.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였던 사람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말인가? 사실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기 아내라면, 자기 엄마라면, 자기 딸이라면 그런 생각을 가질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게 대단히 나쁜 사람들의 생각인 것만도 아니었다. 거의 모든 남자들 아니 당사자가 아닌 여자들까지 대부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선옥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쉬쉬 하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반 사람들이 하나 둘 자기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이군주는 아직 담배를 끄지 않은 채 시선을 한 곳에만 주고 멍하니 서 있었다.

“형님, 이제 그만 들어가셔야죠.”

“엉? 응.”

이군주는 신돌석씨의 말에 화들짝 놀란 듯이 담뱃불을 얼른 껐다. 두 사람은 함께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신돌석씨가 물었다.

“어제 도장반 아줌마 만났어요?”

“만났지.”

“얘기 잘 됐어요?”

“뭐 잘 되고 말 게 있겠어?”

이군주는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다.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중국에 가서 살았고, 딸은 시집가서 지방에 살았다. 신돌석씨는 이군주가 혼자 사는 연립주택을 몇 차례 가본 적이 있었다. 지방에 사는 딸이 큰 식당을 하면서 잘 사는 편인데, 자기 집에 와서 사시라고 자꾸 권하기는 하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그의 말이었다. 딸이 진짜 그렇게 말했는지 또 정말로 잘 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공장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자기 집에 금송아지 없는 사람이 없었다. 신돌석씨는 오랜 공장 생활 속에서 이미 그런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항상 한 수 접고 듣곤 하였다. 따지고 보면 어디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도 다 그런 점이 있었다. 그런데 공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현실에 불만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꿈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남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돌석씨는 오랜 공장 생활 속에서 적어도 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얕은 거짓말은 해도 남을 해쳐서 이득을 얻기 위한 거짓말은 못 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부터 회사에 안 나오겠대. 그러면서도 집은 가르쳐 주더라구. 혼자 살더구만. 띄엄띄엄 들었는데 고생 많이 했데.”

그런 말들을 나누다가 어느새 이군주의 기계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신돌석씨는 나이는 들었지만 어딘지 곱상해 보이는 그 아주머니의 인생을 상상해 보았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따지고 보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정조라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특히 육체적 정조는 그렇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육체적 정조를 지키기 힘든 상황을 수없이 맞이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런 상황을 맞았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책임으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윤자. 윤자는 지금 무엇을 하면서 살까? 윤자는 덕자, 신자와 함께 신돌석씨가 처음으로 소모임 지도를 했던 여성 노동자였다. 세 사람은 같은 봉제공장에 함께 다녔다. 셋 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다일을 하면서 미싱을 배웠기 때문에 미싱사로서는 경력이 꽤 되는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씨가 처음 만났을 때 윤자와 덕자가 열 아홉 살이었고, 신자가 열 여덟 살이었다. 이 공장에 취업을 했던 선미라고 하는 학출 노동자가 윤자와 덕자를 조직해서 소모임을 만든 뒤 조직에 보고했는데, 조직에서 신돌석씨에게 지도선을 하라고 했다. 소모임을 지도하는 사람을 그 당시에는 지도선이라고 불렀다. 신돌석씨가 지도선이 된 뒤 신자를 윤자가 데려 왔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한 소모임의 구성원이 되었다.

신돌석씨가 지도선이 되자 이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이지만 같은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친근하게 대했다. 이들은 좀 친해지자 호칭을 뭘로 하냐고 하면서 신돌석씨를 놀려 먹으려고 하기도 하였다. 아저씨라고 해야 하냐, 오빠라고 해야 하냐, 아니면 형이라고 해야 하냐. 그러다가 결혼했으니 형부라고 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신돌석씨는 그때 아내와 막 동거를 시작했던 때였다. 그 소모임 지도를 그만하게 될 때까지 호칭은 하나로 결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리기도 하고 저렇게 불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호칭 없이 그냥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소모임을 하면서 신자는 부담을 느꼈는지 한 달 만에 그만두었고, 윤자와 덕자 둘이가 계속 했는데 덕자는 지금까지도 간혹 보곤 하였다. 알고 보니 덕자는 아내와 같은 공장에 다닌 적이 있던 사이였다. 아내가 미싱을 할 때 시다일을 하던 사이였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덕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돌석씨를 형부라고 불렀고, 아내를 보러 가끔 집에도 놀러 오곤 하였다. 그러나 윤자는 연락이 끊겼고, 현재는 덕자도 윤자의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1986년 가을은 무척 살벌한 때였다. 위장취업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공단 주변의 노동자들 주거지에 사복 형사들이 수시로 들이닥쳤다. 미행도 많았고, 불심검문도 많았다. 그 틈을 뚫고 노동운동조직들은 많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그 날도 소모임을 윤자와 덕자의 방에서 했다. 모임이 끝난 뒤 덕자는 안산에 사는 오빠 집에서 제사가 있다고 먼저 일어났다. 밤이 늦으면 워낙 불심검문이 심했기 때문에 소모임을 끝내면 그 집에서 그냥 자고 오라는 것이 조직의 지시 사항이었다. 그런데 덕자가 가버렸으니 좀 곤란하게 되었다. 윤자와 둘이서 한 방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윤자가 붙잡았다. 밤에 혼자 방에 있으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가서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사왔다. 둘이서 술이나 마시면서 이야기나 좀 하자는 것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러자고 하였다.

▲ [삽화-김윤기]

“내가 밤에 혼자 있는 것 왜 무서워하는지 아세요?”

윤자가 맥주를 두 잔째 마시면서 꺼낸 말이었다.

“글쎄, 어렸을 때 귀신 이야기 좋아했나?”

신돌석씨는 별 생각없이 답했다.

“친구 때문에 그래요. 연선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참 예쁜 애였는데…”

꿈꾸는 듯 멍해진 윤자의 눈이 참 예뻤다고 신돌석씨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꼭 탤런트처럼 예쁘게 생긴 애였어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성수동에 있을 땐데요. 기숙사에 있다가 둘이서 맘이 맞아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두 달쯤 되었는데 날이 무척 더웠어요. 야근 마치고 몸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그만 문 닫는 걸 잊어버린 거예요. 한참 자는데 이상한 거 있죠. 글쎄 연선이 위에 어떤 놈이 칼을 목에 대고서 올라탄 거예요.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데 칼을 나한테 대면서 소리가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더라구요. 꼼짝 못하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쳐다보기만 했어요. 기가 막히더라구요. 근데 다음날 또 왔어요. 불안해서 잠을 못 자고 있는데 똑똑 두들기더라구요. 미친 놈. 이젠 길 텄다 싶은가 봐요. 안 열어 주니까 글쎄 창쪽으로 가서 칼로 모기장을 쫙쫙 그어 놓는 거예요. 별 수 없이 열어 줬어요. 그리고 또 연선이는 당했어요.”

한동안 윤자의 말이 끊어졌다. 윤자는 신돌석씨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준 뒤 자기도 맥주 한 잔을 또 들이켰다.

“그렇게 며칠이 갔어요. 그 놈은 몇 번 더 왔죠. 왜 신고하지 않았냐구 사람들은 말하지요. 신고요? 웃기는 얘기죠. 결국 연선이는 집을 나갔어요. 물론 회사도 안 나갔고요. 며칠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으레 그렇듯이 다른 연락처를 아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경찰에서 찾아왔어요. 연선이가 영동대교 아래에서 발견된 거예요. 다리에서 뛰어내린 거죠. 내가 그걸 보고… 그걸 보고… 연선이라고 확인해 줬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윤자의 두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 내렸고, 숨이 점점 가빠왔다.

“시골에도 연락해 줬는데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어요. 공장 친구들 몇이서 연선이 사촌오빠란 사람과 함께 화장했어요. 그리고 그 재를 산에 뿌렸어요. 저기 도봉산에 가서요. 도봉산에 연선이가 좋아하던 조장 오빠하고 놀러 간 적 있었거든요. 근데 그 오빠는 오지 않았어요.”

신돌석씨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적이 당황되기도 했다. 한참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신돌석씨는 아무 말없이 이불을 깔았다.

“내일 일도 해야 하는데 이제 자야지.”

고작 그런 말만 했다. 그리고는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들어와 보니 윤자는 자는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신돌석씨도 한쪽 귀퉁이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다 깨다를 몇 번 되풀이하면서 이상한 꿈들도 꿨다. 아내가 뭐라고 막 소리를 쳤다. 이어서 헤어진 순덕이가 나타났다. 역시 신돌석씨를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신돌석씨도 소리쳤다.

“니가 날 버렸지. 내가 널 버렸냐? 그러고도 할 말이 있냐?”

그런데 순덕이의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순덕이가 달려들었다.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는 신돌석씨를 자빠뜨리려 하였다. 신돌석씨도 안간힘을 쓰며 버둥댔다. 그런데 생시와는 달리 순덕이의 힘을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순덕이와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싸우다가 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다. 윤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너무나 놀라서 화닥닥 일어났다. 윤자는 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그러고 있는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치밀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간다면 윤자에게 너무나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져 있었다. 윤자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이제 가셔도 될 시간이네요.”

윤자의 목소리는 뜻밖에 침착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반이었다 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이때쯤에는 경찰도 없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인물을 뿌릴 때 일부러 이 시간대를 택하곤 했었다. 가기는 가야겠지만 이대로 간다는 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럼 좀 더 자. 먼저 갈게.”

겨우 이런 말만 던지고 허둥대면서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윤자가 하는 말이 들릴락 말락 하였다.

작업 시간이 끝난 뒤 이군주가 신돌석씨더러 한잔 하러 가자고 했다. 오늘은 이웃 사업장의 노조 간부들과 한잔 마시기로 한 약속이 있었지만 오전에 있던 일도 있고 해서 그 약속을 취소하고 이씨와 한잔 하러 가기로 했다. 둘이 자주 가는 술집이 있었지만 이날만은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자리를 잡았다. 술집에 도착해서 소주 한 병을 온전히 비울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뜸들이는 분위기였다.

“돌석이,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왜 이렇게 인생이 얄궂은지…”

“뭘 어떻게 해요? 같이 사세요.”

“같이 살라니? 나더러 동거를 하라는 말이야? 이 나이에…”

동거, 동거라. 신돌석씨는 ‘동거’라는 말에 멈칫해졌다. 이씨는 ‘이 나이에’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씨의 나이에 새로이 결합해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신돌석씨는 나이보다는 그 ‘동거’라는 말이 주는 미묘함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들은 ‘동거’라는 말에 왠지 거부감을 갖는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알기에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이른바 동거를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 중에 많았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신돌석씨 자신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먼저 동거를 했다. 그리고 힘찬이를 낳고 나서야 식을 올렸다. 첫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덕이와는 동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한 신돌석씨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동거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그 이전에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이었다. 양말 공장에 다니던 여자였다. 이름이 재희였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공장 옆에 양말 공장이 있었다. 그 공장에 다니던 아가씨들과 근처 술집에서 자주 어울렸다. 당시로서는 첨단을 달리던 술집이었다. 그때 유행하던 음악다방과 같은 기능을 소주, 막걸리, 맥주를 팔던 그 술집에서 했었다. 술값도 싸고 근처에 공장만 있었으니까 손님들 성향도 비슷해서 가기에 편했다. 거기서 재희를 만난 뒤 급속히 가까워져서 개천가 문간방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보증금은 없었고 한 달에 삼만 원을 냈던 것 같다.

▲ [삽화-김윤기]

첫달치만 낸 뒤 신돌석씨는 공장을 그만뒀다. 그리고는 빈둥빈둥 놀았다. 살림살이라곤 재희의 비키니 옷장과 옷가지 그리고 이불과 요 하나씩뿐이었다. 양말공장은 이교대였으므로 어떤 때는 낮에 둘이서 방에서 뒹굴 때도 있었다. 재희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희는 밥을 전부 공장에서 지정해 준 식당에서 먹었다. 신돌석씨는 재희가 돈을 주지 않아서 삼백원짜리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개천 건너편에 시장이 있었는데 시장 사람들 대상으로 파는 싸구려 국수가 있었다. 그것을 사 먹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희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술집에서 양말공장 기사와 술을 마시며 노는 재희를 발견했다. 술집 뒤 공터에서 그 기사와 한판 붙었다. 신돌석씨가 일방적으로 패주는 것으로 상황은 끝났다. 신돌석씨의 상대가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더욱이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그런데 술 취한 채 자빠진 그가 간신히 일어나려고 하면서 신돌석씨에게 던진 한마디가 비수처럼 와서 꽂혔다.

“계집년 빨아먹고 사는 주제에 주먹만 세 가지고…”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저 그랬다.

“야, 새끼야. 그 년을 뭐 너만 먹었는지 아니? 따지고 보면 우린 동서야, 구멍 동서. 그것도 내가 맏동서라구. 하하하.”

신돌석씨는 괜한 배신감에 떨었다. 재희는 둘이 싸우는 동안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재희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런데 재희는 따귀를 한대 맞더니 눈을 치뜨면서 노려보는 것이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맥이 풀렸다. 그 자리에서 서울에 있는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틀 뒤 동거하던 방에 가보니 이불까지 싸가지고 재희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재희와 동거를 한 건 철없는 불장난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때 주변에서 동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름대로 절실한 이유 때문이었다. 남녀가 사귀면서도 각각 따로 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노동자들 중에서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동거를 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노동자들도 대부분 동거의 길을 택했다. 그것 때문에 교회나 성당과 갈등도 발생했다. 나이가 많은 목사나 신부들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동거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노동자들의 현실이나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조금 지난 뒤 젊은 신부나 목사들이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신돌석씨가 군대 갔다 온 뒤에는 공단 근처에 그런 정서를 가진 신부나 목사가 있는 성당과 교회가 꽤 여럿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동거라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새삼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부담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 신돌석씨는 동거에 대해 부유층이나 지식층들이 매우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보았었다. 사실 그런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오래 된 지배층 중심의 성문화이다. 그리고 동거는 깨질 수 있고, 그것은 여자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니 그런 여자들을 마치 커다란 죄나 지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이제는 이군주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분명히 하지 못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일들이 꼬여 왔던가.

신돌석씨는 윤자와 그런 일이 있던 그 날로 소모임 지도선을 교체해 달라고 조직에 보고했다. 자기가 남자라서 구성원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사실 그런 점도 있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있었던 일이나 윤자와 나눈 이야기는 전혀 보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출 노동자인 선미가 이들의 지도선으로 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뒤 윤자가 소모임을 그만두고 공장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미가 신돌석씨를 만나 전한 말로는 윤자가 신돌석씨에게 이 한마디를 꼭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연선이란 애는 없다구. 그런 애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애라는 것이었다. 무슨 뜻일까?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덕자에게 들은 이야기들과 윤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다. 덕자 말로는 윤자는 남자만 보면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한 번도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왜 그런지 덕자도 자세히는 몰랐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칼 들고 들어온 놈이 연선이라는 애만 겁탈했을까가 의문이었었다. 이제 뭔가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난다면,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아니 그때 그런 것을 좀 알기라도 했다면 좋은 상담을 해줬을 텐데.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선옥이는 결혼을 한 뒤 5년 동안 애가 없었다. 신돌석씨는 무척 애가 탔다. 혹시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선옥이는 애를 낳았다. 그것도 셋씩이나 낳았다.

▲ [삽화-김윤기]

도장반 여자는 이군주와 만난 뒤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다. 하지만 이군주는 그 여자가 사는 곳을 안다고 했다. 그 여자는 몇 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혼자 산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이제 그 여자와 함께 살도록 이군주를 설득해야 한다. 신돌석씨는 이군주의 잔에 술을 따른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잔을 들이켰다. 이제 좀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은 이군주의 얼굴에 앉은 검버섯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듯함을 느끼면서 신돌석씨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군주는 결국 그 여자와 결합한 뒤 공장을 좀더 다니다가 귀농을 하였다. 귀농한 뒤 몇 차례 이 모임에서 찾아간 적이 있었고, 그가 이리로 와서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좀 뜸해졌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투 이야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자식들 이야기, 손주들 이야기로 분위기가 흥겨워지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가을이 되면 이군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흥겨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계속)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 경력> 2004~08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겸임교수
        2014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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