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이필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신돌석씨가 들은 것은 어제 한밤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 지방선거에 기초의원으로 출마하는 지인의 개소식이 있는 날이라서 그것이 끝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요일인 오늘 가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민주노동당 때는 당원이었으나 당이 분열된 뒤에는 당적을 갖지 않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진보정당운동과 거리를 두고는 있었지만 지역 내에서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지역 연대 차원에서 가깝게 지내 왔다. 특히 오늘 개소식을 하는 사람은 부부가 모두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마침 선거운동본부장이 신돌석씨와 나이가 같은 노동자 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함께 활동해 왔기 때문에 친근감도 있었다.

개소식은 성황리에 잘 치러졌다. 신돌석씨는 진보정당의 선거운동사무소 개소식에 많이 가 봤지만 이곳처럼 어린아이들이 많이 오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만큼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많이 받고 있다고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개소식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한 뒤 부근에 있는 호프집으로 갔을 때였다. 텔레비전에서 문대통령과 북의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4월 27일의 판문점 회담을 다시 방영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2차 판문점 회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북미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다가 미국 측에서 안 하겠다고 하고 나와서 정상회담 효과가 사라지나 하고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는 때에 전격적인 2차 정상회담을 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호프를 마시던 사람들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미국과 사이에 어떠한 먹구름이 끼더라도 남북 정상이 이렇게 수시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희망이 있다는 생각들이 감탄사와 함께 흘러 나왔다. 그런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신돌석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필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내일 아침이면 발인이므로 오늘 밤에는 반드시 가야 했다. 오늘은 가서 이필수와 함께 밤을 새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만큼 이필수는 신돌석씨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 점에서는 그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필수 아버지의 초상이 치러지는 곳은 어느 재벌이 경영하는, 한강변에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전철역에서 내려서 개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병원까지 가는 동안 신돌석씨는 이 길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 길을 따라 이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개천의 다리가 꽤 높아서 밑을 보면 아찔하기까지 하였던 기억이 났다. 밑에는 갈대만 우거져 있을 뿐 물은 거의 없었다. 이 병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들어 보는 병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람들이 알려 주는 대로 와 보니 오는 길이 이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 동안 병원의 이름이 바뀐 모양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전철역에서 내려서 그 병원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영안실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영안실 앞에 있는 넓은 주차장에는 차를 세워 둘 틈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들이 있었다. 이필수 아버지의 영안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화환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신돌석씨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을 때는 모두 빈손으로 간다고들 하던데 누가 그런 헛말을 했을까?

이필수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화려하게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11월 말의 밤이었다. 밤이 늦도록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통금이 있던 때였다. 통금 시간이 가까울수록 아버지가 오지 않으므로 걱정할 만도 하련만 신돌석씨와 형, 그리고 누이동생은 아무 걱정도 없이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구한 날 술 먹고 통금에 걸려서 새벽에 돌아오곤 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 어렴풋이 잠들었을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돌석씨 형제보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먼저 짜증스런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 주었다. 경찰과 방범대원이었다. 신돌석씨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여기 사냐고 물었다. 형과 신돌석씨가 함께 나갔다. 누이동생은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았다. 신돌석씨의 형은 그때 공장에 다니다가 방위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경찰이 찾아온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개천에 빠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급하게 옷을 입고 달려간 곳은 그때 서대문 부근에 있던 적십자병원이었다. 아버지는 그 날 밤에 숨을 거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소식을 듣고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달려 왔고, 아버지는 초라한 초상 끝에 벽제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졌다. 유산은 물론 유언 한 마디 있을 리가 없었다.

이필수 아버지와 신돌석씨의 아버지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이필수 아버지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이면 인자한 얼굴로 망태산 산동네에 오곤 하였다. 교회 사람들과 함께 새벽송을 하러 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 네는 망태산 꼭대기에 있는 산동네에 살았고, 이필수 네는 망태산에서 한길가로 내려가는 중간쯤에 있던 이층집에 살았다. 그 동네에는 모두 10채의 이층집이 있었고, 동네 입구에 문까지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는 꽤 잘 살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이필수 아버지는 거기에서 좀 더 내려가면 있는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신돌석씨가 살던 산동네에서도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새벽송을 하러 올 때 가져오는 선물들은 대부분 이필수의 아버지가 마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 [삽화-김윤기]

새벽송을 하러 오면 동네 사람들이 나가서 구경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인자한 웃음을 띤 이필수 아버지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채로 선물들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돌석씨의 어머니는 그때 산동네 너머 한강 쪽으로 한참 가면 있는,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면 거기에 가 있었고, 아버지는 으레 술에 취해서 잠들어 있곤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이 셌던 신돌석씨의 형은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신돌석씨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나가서 선물을 받아오곤 하였다. 한번은 평소보다 술이 덜 취한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오다가 새벽송을 하러 온 사람들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아마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선물을 받은 신돌석씨의 뺨을 때리면서 선물꾸러미를 내동댕이쳤다. 놀란 신돌석씨와 누이동생이 얼른 집으로 들어가 대문간에 기대서 숨죽이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해 하고 있었다.

쳇, 재수 없게 한밤중에 웬 예수쟁이들이야. 시끄러우니까 너들 동네에나 가서 떠들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누가 기뻐? 나는 맨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데도 복은커녕 이 모양 이 꼴이다…

아버지가 말하는 주님은 주(酒)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모셨다는 것은 술을 마셨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말을 쓰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리곤 하였었다. 그래도 새벽송을 하는 사람들은 찬송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찬송이 끝난 뒤 이필수 아버지가 아버지 앞으로 다가와서 인자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많이 취하셨군요. 그래도 예수님은 선생님을 사랑하십니다. 돌아오는 새해에는 주님을 영접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 내가 왜 당신 선생님이야? 빨리 꺼지지 못해…

아버지는 이필수 아버지가 쓴 산타클로스 모자까지 벗겨서 내동댕이치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필수 아버지는 그 인자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형이 나와서 아버지를 끌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는 혼자 날뛰다가 이필수 아버지를 때리기라도 할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는 형에게는 꼼짝 못했다. 그때 형은 겨우 중학생이었는데 초등학교 정도까지 형을 마구 때리던 아버지는 중학생이 된 뒤부터 형을 때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형이 뭐라고 하면 마지못해 따라하곤 하였다. 아마 그때부터 형이 신문팔이나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면서 집안 살림을 끌어갔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나중에 신돌석씨는 나름대로 해석을 하곤 하였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던 아버지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인자한 웃음을 멈추지 않던 이필수 아버지. 그것은 흡사 마귀와 천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신돌석씨는 어린 나이에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필수 아버지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필수 아버지는 그 뒤에도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면 망태산을 찾아왔다.

▲ [삽화-김윤기]

영정 속에 들어가 있는 이필수 아버지는 죽어서도 인자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적당하게 살찐 얼굴에서 풍기는 여유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이필수 아버지를 가까이서 직접 대하고 이야기를 나눈 건 스무 살이 넘은 80년 여름 때가 처음이었다. 이때 신돌석씨는 이필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먼발치에서 본 것처럼 인자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1980년 7월 말쯤이었다. 신돌석씨는 동네에서 아는 선배와 술을 마시다가 경찰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이 날이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를 끌고 가기 위한 일제 단속이 있던 날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다니다가 말다가 하면서 놀 때였다. 신체검사를 보고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1년 넘게 영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허구한 날 하는 것이 술 마시는 일이었다.

그때 함께 술을 마신 김동학이라고 하는 선배는 전과자였다. 신돌석씨가 살던 동네에서 전과자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 폭력 전과였는데, 그렇지만 조직폭력배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칠게 살다 보니 싸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파출소로 끌려갔고 그런데 누가 빼주는 사람이 없으니 구속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김동학은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조직폭력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조직폭력배에 가깝다고 한 것은 조직폭력배치고는 별로 재미도 못 본, 말하자면 얼치기였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싸움을 하다가 상대가 잘못 맞아서 숨을 거둔 사건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폭행치사로 실형을 살고 나온 뒤 술집 웨이터를 하면서 살아갔는데, 그 뒤에도 폭행으로 두세 차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와 특별히 친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멀리 할 이유도 없는 사이였다. 한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냥 형 동생 사이로 가끔 만나서 술이나 마시는 정도였다. 그날 김동학이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던 나이트클럽 근처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해서 따라가게 되었다. 밀린 돈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김동학은 한 달 전부터 놀고 있었는데 이번에 돈을 받으면 근처 색싯집에서 한턱 쓰겠다고 하면서 신돌석씨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결국 돈을 못 받고 부근의 대폿집에서 한잔 하고 있던 중이었다.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김동학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른바 신군부가 폭력배를 소탕한다는 구실 아래 지시를 내려서 관할 경찰서에서 폭력 전과가 있는 사람들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무조건 연행해 갔는데 아마 그 나이트클럽에서 형사들에게 찌른 모양이었다. 그들로서는 귀찮은 놈 하나 남의 힘을 빌려서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김동학과 신돌석씨는 형사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형사들은 김동학과 안면도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냐구요…

몰라 임마. 잔말 말고 손 내밀어…

잘못 한 게 있어야 내밀고 말고 할 거 아닙니까.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밀린 돈도 못 받아서 기분도 꿀꿀한 사람을…

이 새끼가 정말 말이 많네. 얌마, 계엄사에서 깡패는 무조건 잡아들이라고 그랬어…

아니 내가 왜 깡패입니까. 왜 멀쩡한 사람 깡패 만들어요…

이 새끼가 말로는 정말 안 되겠구만…

그런 말과 동시에 형사의 주먹이 김동학의 얼굴을 강타했다. 김동학은 벌렁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형사가 발길질을 하고는 김동학의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신돌석씨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서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날아온 것은 주먹 세례였다.

결국 신돌석씨도 수갑이 채워져서 끌려가게 되었다.

김동학이 잘 들어라. 지금은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깡패와 학생이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것이 계엄사의 지시다. 그러니 이럴 때는 순순히 따라라…

두 사람을 한 수갑으로 채운 뒤 권총을 빼든 형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경찰서 형사계는 끌려온 사람들로 왁자지껄하였다. 시간이 늦은 밤이어서인지 대부분 술에 취해 있었다. 김동학은 경찰서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큰소리로 외쳐댔다.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민주국가에서 이럴 수 있냐고. 하지만 형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형사계로 들어서는 순간 김동학은 M16의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쓰러져야만 했다.

김동학을 친 사람은 형사들이 아니라 수경사 헌병이었다. 지금의 수방사를 그때는 수경사라고 했는데 계엄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경찰서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행은 군부의 지휘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김동학이 얻어맞고 쓰러지자 형사계 안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빠져 들어갔다.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술이 깨는 분위기였다. 신돌석씨도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형사들은 헌병의 행동에 힘을 입었는지 의기양양해지며 연행된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신돌석씨는 이틀 동안 경찰서 형사계 바닥에 쇠사슬로 이어진 수갑을 찬 채 있어야 했다. 주먹밥이 끼니때마다 주어졌고, 화장실에 갈 때만 쇠사슬에서 분리해줬다. 이틀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이 연행되어 왔는데 형사계에서 밖으로 불려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다른 곳에도 사람들이 묶여 있는 모양이었다. 이틀이 지난 뒤 경찰서 강당으로 끌려가서 심사를 받았다. 신돌석씨는 일단 D급으로 분류되었다. D급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약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가만히만 있었으면 잡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김동학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는데 그와는 첫날 갈라졌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그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았다. D급으로 분류된 신돌석씨는 보안과 보호실로 갔다. 그때는 경범죄나 청소년 선도 등을 다루던 곳이 보안과였다. 신돌석씨는 보안과 보호실에서도 여자 보호실로 들어갔다. 남자 보호실에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갈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자 경범들은 보안과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신돌석씨는 남자 경범들과 함께 여자 보호실에서 밤을 새웠는데 남자 경범들은 새벽에 즉결심판을 받으러 떠났다. 신돌석씨 혼자 남겨졌다. 아침을 먹고 혼자 넓은 보호실에서 이리저리 걸으며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형사 한 명이 두 사람을 수갑 하나에 채운 채 보안과로 들어서는 것이 보엿다. 신돌석씨는 그들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그 중 하나가 이필수였던 것이다.

▲ [삽화-김윤기]

이필수와 신돌석씨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이런 데 올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이런 데 올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돌석씨가 갖고 있는 그에 대한 이미지로는 경찰서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필수 하면 떠오르는 것이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일이었다. 그때 이필수는 반장이었다. 그렇다고 이필수가 통솔력이 있거나 활달한 성격이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였다. 수줍음을 잘 타고 애들한테 얻어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변두리에 있던 그 학교 학생 중에서는 드물게 잘 사는 집 아들이었다. 아마 그런 이유로 그가 반장이 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반장이던 여자애가 반장처럼 행세하는 판이었다. 이름이 유현미라고 했던 그 애는 이필수보다 공부는 좀 떨어졌지만 키도 훨씬 커서 둘이 함께 서 있으면 꼭 누나처럼 보이는 애였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예뻤던 그 애 앞에서 이필수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숙맥처럼 행동하곤 했다. 신돌석씨는 학교가 끝난 뒤에는 이필수를 데리고 유현미를 쫓아서 그 집까지 가면서 머리댕기도 잡아당기고 가방도 빼앗아서 팽개치곤 하면서 괴롭히곤 하였다. 그때 신돌석씨 말로는 이필수가 기죽고 있는 꼴을 못 봐서 기 좀 살려 주려고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유현미의 하얗고 예쁜 얼굴을 자꾸 보고 싶고 그 애 관심을 끌어보고 싶은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 계속되자 유현미가 드디어 담임선생에게 이필수가 자기를 자꾸 괴롭힌다고 일러 바쳤다. 유현미가 그 말을 하자 담임선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필수가 유현미를 괴롭힌다는 것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고소가 들어왔으니 담임선생으로서도 접수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이필수가 불려 나갔다. 그런데 이필수 말이 걸작이었다. 신돌석이가 시켜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담임선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필수더러 돌석이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냐고 하면서 군밤을 한대 때렸다. 그리고는 신돌석씨를 불렀다. 그날 이필수는 군밤 한대로 끝났고, 신돌석씨는 한참을 얻어터진 뒤 오전 내내 걸상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업이 끝난 뒤에는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했다.

그날 벌을 받으면서 신돌석씨는 무척 참담함을 느꼈다. 유현미는 왜 담임선생에게 이필수가 괴롭힌다고 일러 바쳤을까? 사실 괴롭힌 사람은 이필수가 아니라 신돌석씨였다. 이필수는 쫓아다니면서 조금씩 그랬을 뿐이다. 물론 이필수가 평소답지 않게 행동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필수가 괴롭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현미가 신돌석씨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밖에는 안 됐다. 그리고 담임선생은 이필수더러는 돌석이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냐고 걱정하는 투의 말을 했지만, 신돌석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필수에게는 어떻게 저렇게 공부도 못하는 놈 말을 따라서 노냐는 것이었고, 신돌석씨에게는 너는 원래 그런 놈이니 힘으로 눌러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겠다는 투였다.

그 날 이후로 신돌석씨는 한동안 이필수를 멀리했다. 이필수에게 서운한 마음은 별로 없었다. 이필수는 공부 잘하고 잘 사는 애 치고는 드물게 신돌석씨와 같은 애와 잘 어울렸다. 물론 신돌석씨와 동네가 가까워서 학교 오가는 길에 같이 다니는 점 때문에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신돌석씨가 이필수의 보디가드와 같은 노릇을 한다는 점도 작용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필수가 못사는 사람, 소외된 사람과 어울릴 줄 아는 품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나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쩐지 둘이는 어울려서는 안 될 사이인 것 같아서 멀리하였다.

공부를 잘 하는 이필수였지만 평준화 정책 때문에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버스를 갈아타야만 갈 수 있는 신생 중학교로 배정되었고, 공부를 못 하는 신돌석씨는 종로 한복판에 있는 명문 사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서로 거의 보지 않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는 한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시 평준화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필수야 물론 연합고사를 안중에 두지 않을 성적이었고, 신돌석씨는 공고를 지원했지만 낙방했고 그래서 인문계에 간당간당한 점수로 배정되었다.

이필수네 집은 중학교 때 이사 가서 이미 한 동네가 아니었다. 신돌석씨네도 여러 번 이사를 했지만 그 근처에서 맴돌았다. 고등학교 때는 서로 마주치면 아는 체나 하는 사이로 3년을 보냈다. 이필수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고, 신돌석씨는 약간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이필수는 여전히 모범생이었지만,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꽤 의젓해졌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어린 시절로 평가를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신돌석씨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자기가 하라면 하는 아이라는 이필수에 대한 이미지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 가까이 하기가 더 어려웠는지도 몰랐다.

그런 이필수를 경찰서 보호실에서 만났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이필수와 또 한 사람을 끌고 들어온 형사는 형사계의 형사들과는 달라 보였다. 형사계 형사들은 대부분 남방이나 티 차림이었는데, 이 사람은 그 더위에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정보과 형사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때만 해도 정보과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그 형사는 이필수와 다른 한 사람을 함께 채운 수갑을 풀더니 이필수를 보안과 사무실에 앉혀 놓고 다른 한 사람을 신돌석씨가 있는 여자 보호실에 넣었다. 그 사람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한 구석에 있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반팔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얼굴과 팔 여기저기에 멍든 자국들이 있었다. 아마 검거되면서 격투를 벌였던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이필수는 정보과 형사가 나간 뒤 신돌석씨를 보면서 재빨리 아는 체를 했다. 신돌석씨 쪽으로 오려고 했는데 근무를 서고 있는 경찰이 제지를 해서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필수와는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요…

피곤한 듯 앉아 있던 사람이 비로소 신돌석씨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신돌석씨는 무어라고 말을 할지 몰라서 그냥 우물우물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신돌석씨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여기 온 것일까?

나 필수 선배입니다. 김철우라고 해요. 5.18 때 수배되어서 지금까지 다녔는데 그만 잡히고 말았지요. 필수가 내가 숨어 다니는 동안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해주곤 했는데, 오늘 필수 만나다가 잡혔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이 사람은 데모하다 잡힌 사람이구나 하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러면 이필수도 데모를 하는 사람인가? 신돌석씨는 그것도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이필수가 공부를 잘 해서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학 들어간 뒤에는 본 적이 없었다. 소식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데모를 하는 사람은 뭔가 깡다구도 세고 그런 사람인 줄 알았던 그 당시의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이필수가 데모를 한다는 것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두 시간 뒤에 정보과 형사가 다시 왔고 김철우와 이필수가 함께 불려 나갔다. 그리고는 서너 시간이 지나서 저녁때쯤 되어서 김철우만 혼자 돌아왔다. 이마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머리를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김철우의 말로는 이필수는 훈방되었다고 했다. 이필수는 그때 단순히 연락을 맡아 준 모양인데 김철우가 이필수만은 놓아 달라고 하자 사실 별로 캘 것도 없으므로 그냥 집으로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날 밤을 김철우와 함께 새웠다. 김철우는 그때 이미 서른 살이 넘었던 사람이었는데 70년대에 반정부 활동 때문에 징역을 두 번이나 갔다 온 사람이었다. 이필수가 다니던 학교의 선배였는데 80년에 이른바 ‘서울의 봄’이 되면서 복학하여 이필수를 알게 되었고, 5.18계엄 확대 이후 수배되었다가 이번에 붙잡힌 것이었다. 이필수는 그때 2학년이었는데 아마 김철우가 있던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돌석씨 나이로는 80년에 4학년이 되어야 하는데 이필수는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대학은 1년을 조금 더 다닌 셈이었다.

당연히 이필수는 그때까지 정보기관의 주시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수배자들의 연락을 맡아서 해주는 사람으로 적임자였던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이필수가 연락을 해줘서 어떤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가 잡힌 것인데, 그 당시에는 그 까닭을 몰랐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김철우는 이필수가 뭔가 실수를 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뒤에 확인된 바로는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이 정보기관에 신고하는 바람에 잡히었다고 하였다.

김철우는 처음에는 신돌석씨를 운동권 학생으로 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다. 그러다가 신돌석씨가 이필수와 그저 초등학교 때 친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자 좀 머뭇거리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서 경범죄 위반에 걸린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나마 서로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둘뿐이라는 것을 생각했는지 다시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김철우는 잡힐 때의 정황과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당시 시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했는데 사실 그때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나중에 다시 되새겨 보면서 그런 이야기였구나 하고 이해한 것도 많았다. 김철우는 이필수가 나이는 어리지만 심지가 굳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앞으로 크게 될 놈이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몰라도 그런 평에는 왠지 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음 날 점심때가 될 때까지 김철우를 부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 때가 거의 다 되어서 전날에 이필수와 김철우를 데리고 왔던 정보과 형사가 보안과로 왔는데 김철우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신돌석씨를 부르러 온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금방 갔다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김철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 형사를 따라 나섰다. 자기를 정보과 형사가 부르러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경찰서에 연행된 뒤 줄곧 형이 찾아올까봐 걱정을 했었다.

그래도 형, 동생 순서가 제대로 되어서 우리 집안이 이제는 좀 자리를 잡을 거다…

고모의 말이었다. 고모의 말로는 신돌석씨는 아버지를 닮았고, 형은 작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술 좋아하고 성질만 더러워서 못 살고, 작은 아버지는 착실하면서 악착같아서 혼자서 야간 대학까지 마쳤다는 것이 고모의 주장이었다. 아버지 형제는 형, 동생이 바뀌어서 집안이 망했다고 하고, 신돌석씨 형제는 순서가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리는 신돌석씨에게는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형이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고 하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듣다 보니 그럴 때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긴 말들이었다.

신돌석씨는 고등학교 때 형처럼 중퇴를 생각했었다. 형은 공고를 다니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공장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의 수입이 거의 없어지면서 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80년에는 방위를 마친 뒤에 금형을 배우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공장에서 인정을 받는 기사로 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신돌석씨는 공고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상태에서 인문계를 다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선택 같지 않았다. 공부에 흥미도 없고 자신감도 없었으며 설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집안 형편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학교 다닐 맛이 나지 않았고, 껄렁대는 애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형은 생각이 달랐다. 자기가 책임을 질 테니 공부만 해서 기어이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신돌석씨는 형이 어려웠다.

고2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한다고 중국집에 한 20명이 간 적이 있었다. 옆방에서는 졸업을 앞둔 이웃 학교 고3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방이래야 칸막이로 구분한 정도였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한마디도 빠짐없이 다 들릴 정도였다. 시비가 붙었다. 칸막이가 넘어지고 우동 그릇, 짬뽕 그릇이 날아갔다. 수적으로 우세한 신돌석씨네 편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중국집에서 신고를 한 것이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고 대부분 연행되어 갔다. 경찰서에 있을 때 담임선생님과 형이 달려 왔다. 그때 형은 신돌석씨를 데리고 나온 뒤 한강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 말도 없이 담배만 세 대를 연달아 피운 뒤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돌석아, 우리 같이 죽자. 한강에 빠져 죽자. 이리 살아서 뭐하냐…

그리고는 뜸을 들이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돌석씨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형은 방위 훈련을 마치고 이틀에 한 번씩 나가서 하루 밤을 새면서 보초를 서는 방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날은 오전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형이 별안간 신돌석씨를 주먹으로 발길질로 패기 시작했다. 한참을 때렸다.

아버지처럼 쓰레기같이 살다 죽으려면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자 말이다…

그리고는 형은 신돌석씨를 끌어안았다. 둘이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이었다.

정보과 사무실은 경찰서 뒤쪽에 있었다. 그쪽은 수사과나 보안과와는 달리 절간처럼 조용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통제구역이라는 팻말이 있었는데 괜히 으스스해졌다. 정보과 사무실로 들어섰더니 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었다. 뜻밖이었지만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이필수의 아버지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필수를 그 전날 아버지가 와서 데리고 갔는데 이필수가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신돌석씨가 훈방되도록 보증을 선 것이었다. 이필수의 아버지는 육사 출신으로 대령 예편을 했고, 중소기업이었지만 기업체도 운영하는 유지급 인물이었으므로 신돌석씨의 보증인으로서는 과분한 편이었다. 사실 신돌석씨가 붙잡혀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필수로서는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뒷날 생각했다.

신돌석씨는 그 길로 이필수 아버지와 함께 나와서 이필수 아버지가 사주는 점심을 근처 식당에서 먹었다. 이필수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필수 아버지는 삼겹살을 시킨 뒤 소주까지 주문했다. 이필수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언제나 인자한 웃음을 띠는 이장로인 줄만 알았는데 술도 마신다는 사실이, 또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이필수 아버지는 신돌석씨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주면서 인자한 웃음을 띠다가 말을 시작했다.

▲ [삽화-김윤기]

너도 알겠지만 나라가 지금 말이 아니다. 다행히 전두환 장군 같은 분이 나서서 급한 불은 껐지만 정말 이번에 큰일 날 뻔했다. 빨갱이 새끼들 다 쓸어버려야 하는 건데. 내가 삼팔선 넘어오기 전에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아냐. 정말 빨갱이들은 죽이는 길밖에 없어. 한번 그 물이 들면 평생 지워지지 않아. 그런데 필수 그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다냐. 정말 어이가 없다. 네가 좀 만나서 잘 말 좀 해라. 그리고 김동학이 같은 놈하고는 어울리지 말아. 그런 새끼들은 빨갱이가 들고 일어나면 부화뇌동할 놈들이야. 돌석이 너는 심성이 착하다고 예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다 말했었지. 내 말 알지? 내 말 명심해야 할 거야…

신돌석씨는 이필수 아버지의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는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돌석씨를 심성이 착하다고 한 이야기에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김철우가 이필수를 심지가 굳고 속이 깊다고 한 것보다 더 이상하게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필수 아버지는 신돌석씨에게 돈까지 쥐어 줬다. 받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냥 받고 말았다.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때 돈으로 5만 원이었는데 신돌석씨가 공장에서일하면서 받는 한 달 봉급 정도였다. 도저히 안 받을 수가 없는 액수였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 경력> 2004~08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겸임교수
        2014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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