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김윤기]

영정에 조의를 표한 뒤 이필수와 함께 옆에 따로 마련된, 문상객을 접대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필수는 신돌석씨를 안내하고 옆에 앉았다가 누군가가 부르자 조문객을 맞으러 다시 일어나서 갔다. 신돌석씨는 혼자가 되자 조문객들을 둘러보았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영안실의 커다란 규모나 화환들이 많은 것에 비하면 조문객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몇 사람씩 모여 있는 조문객들 중에는 신돌석씨와 낯익은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그 중에서는 이필수가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에 같이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90년대 말 이후 이필수는 노동운동을 그만 두고 작은 기업체를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노동운동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돌석씨가 이필수를 80년 이후에 만난 것은 87년 8.15 기념 집회에서였다. 그 전에도 한두 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을 것 같은데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 날 만남은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뚜렷이 기억이 났다. 그 집회는 옛 서울고 자리인 경희궁터에서 진행됐는데, 그 전 해에 성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과정을 꿋꿋이 폭로했던 권인숙씨가 참여해서 감동을 줬던 집회였었다. 권인숙씨가 소개되고 연단으로 나오자 참여 했던 군중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누가 시키지도 안았는데 ‘동지’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었다. 신돌석씨는 그 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운동 가요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없었다. 신돌석씨를 만난 이필수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네가 이런 데를 오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돌석씨는 이필수가 운동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놀랄 일이 없었다.

그 뒤 대선을 앞두고 수도권지역 노동운동단체 및 정파들이 모여서 노동자선대본이란 것이 꾸려졌는데 그 모임에 나가서 이필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 만나면서 이필수도 신돌석씨가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언제 한 번은 이필수가 모임에 나오지를 않았다. 신돌석씨는 궁금해서 이필수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필수의 본명을 모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필수의 가명이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모임에서도 지역이나 단체 또는 정파 이름만 대면 됐지 이름을 부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살모사 말이군요. 오늘 어머니 추도식이라서 못 오겠다는군요…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살모사라니? 신돌석씨는 귀를 의심했다. 그 순해빠진 이필수가 살모사라니? 그리고 이필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가?

그 친구 별명이 살모사예요?

신돌석씨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 보았다.

본인이 없을 때만 부르는 별명이죠. 본인은 자기를 그렇게 부르지만 남들이 부르면 난리를 쳐요…

그런데 왜 살모사죠?

왜 살모사가 에미 죽이고 태어난다고 하잖아요? 학생운동 할 때부터 스스로 만들어서 부른 별명이라고 하던데요. 강집 당하면서 어머니가 쓰러졌다고 하죠 아마. 그리고는 반신불수로 누워 있다가 노동운동 하면서 수배됐을 때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쓰러지거나 돌아가신 건 꼭 살모사 그 친구 때문만은 아닌가 봐요. 친구라면서 그런 이야기 모르세요?

그는 신돌석씨가 묻는 것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이필수가 신돌석씨 옆으로 왔다.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맙다…

별 소릴 다한다. 임마, 내가 안 오면 누가 오냐?

이필수는 많이 울어서인지 자지 못해서인지 눈이 좀 부어 있었다.

하긴 그래…

뭐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검은 상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얼굴이 하얀 여자가 쟁반을 들고 가다가 멈춰 서서 물었다.

▲ [삽화-김윤기]

신돌석씨는 문득 망태산에서부터 이필수네 동네까지 이어지던 다방구의 물결을 떠올렸다. 신돌석씨의 어린 시절에 망태산 동네 애들과 이필수네 동네 애들은 보통 술래대를 이필수네 동네에 두고 다방구를 하였다. 두 동네 합해서 쉰 명이 넘는 애들이 한꺼번에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 술래는 다섯 명 정도 되었다. 이필수는 다방구를 할 때면 신이 나서 함께 하곤 하였으나, 워낙 작고 운동을 잘 못하는 아이였으므로 번번이 일찍 술래에게 붙잡혀서 술래대에 잡혀 있곤 하였다.

사십 명 이상 잡혀 있는 경우에 잡힌 아이들이 원을 그리면서 술래를 그 안에 가두어 두곤 할 때도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정말 흥분을 자아내게 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이필수네 집 창가에는 조그마한 여자애가 창틀에 기대서 바깥을 내다보곤 하였다. 이필수의 여동생이었다. 이필수가 엄마를 닮았다면 그 아이는 아빠를 닮았다. 유난히 얼굴이 희면서 이목구비의 윤곽이 뚜렷하던 아이. 신돌석씨는 그 아이를 보느라 술래이면서도 다방구를 하러 오는 애들을 놓친 적도 있었다. 신돌석씨답지 않은 행동에 애들은 투덜댔지만 보통 두 사람 이상 몫을 하는 신돌석씨였으므로 그것 때문에 대놓고 핀잔을 하는 애들은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망태산 애들과 한길가의 제재소 동네 애들과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제재소 애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뭉쳐진 망태산 애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애들은 제재소 동네였기 때문에 나무 막대기로 무기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싸우려 하였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으레 중간 지대인 이필수네 동네 입구쯤이었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지다가 제재소 동네의 대장격인 6학년 애와 신돌석씨가 붙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그때 4학년이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망태산의 6학년들이 그 녀석의 몽둥이에 밀려서 이쪽저쪽으로 피해 있었다. 신돌석씨 역시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 녀석을 피하다가 이필수네 집 앞까지 물러났다. 이필수네 대문 앞에는 이필수가 겁먹은 얼굴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필수네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장독대가 눈에 띄었다. 장독을 묻어 둔 곳에 큰 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고 나갔다. 그 녀석은 의기양양한 몸짓을 하면서 동네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거기 서…

녀석이 돌아봤다. 험상궂은 얼굴을 하면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돌을 집어 던졌다. 녀석은 몽둥이로 돌을 막았다. 몽둥이가 부러졌다. 신돌석씨는 그 순간 달려들어서 두발차기로 녀석의 가슴을 내질렀다. 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은 녀석은 울기 시작했다. 신돌석씨의 두 주먹이 다시 얼굴을 갈겼다. 녀석의 울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으쓱해진 신돌석씨는 주위를 둘러봤다. 겁을 먹은 제재소 동네 애들이 밑으로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그때 이필수 옆에는 누이동생이 함께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애를 생각할 때 그런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신돌석씨는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로 뽑혀서 2학년 교실과 3학년 교실을 순례해야 했다. 2학년 교실을 돌 때 정말 도망쳐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필수의 동생이 있는 반을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필수의 동생은 옆자리 친구와 이야기를 하느라고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일부러 외면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말 죽고 싶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이웃집에 인석이라고 하는 3학년 녀석이 신돌석씨가 구구단을 못 외워서 자기네 반에 왔다고 떠들어댔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녀석을 숲으로 끌고 가서 해가 질 때까지 두들겨 팼다. 누구도 구구단을 외우라고 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굳이 구구단을 외울 필요를 못 느끼다가 그렇게 모욕을 당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새삼 서글퍼질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신돌석씨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필수의 동생은 신돌석씨보다 고작 두 살이 아래이므로 이제 예순이 다 된 나이어야 한다. 그런데 좀 전에 본 여인은 젊어 보였다. 마흔을 갓 넘긴 듯하였다. 좀 더 들었다고 해도 오십이 안 되어 보였다. 사람이 아무리 젊게 보여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필수의 태도는 신돌석씨가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필수는 여인의 그런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신돌석씨에게 뭐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아마 동생이었으면 신돌석씨에게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소개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신돌석씨는 순간적으로 이필수가 언젠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누이동생이 몇 명 있는지 아니? 넌 내 동생이 하나인 줄 알지? 자그마치 다섯 명이 있다. 내가 아는 바로만…

그게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야 자식아.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른단 말야?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신돌석씨와 이필수는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게 된 이후로 간혹 만나게 되었다. 여럿이 함께 모이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둘이 만나서 술을 마신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필수는 예전의 이필수가 아니었다. 한번은 이필수가 술상을 뒤엎은 적이 있었다. 서울 교외에 노동단체들이 자주 찾아서 모임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평화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 곳에서 여러 노동단체가 모여 모꼬지를 할 때였다. 이필수의 그런 행태는 사람들한테 익숙한지 사람들이 별로 말리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달랐다. 이필수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게 신돌석씨의 생각이었다. 그게 신돌석씨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필수에 대한 신돌석씨의 생각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필수가 어린 시절처럼 연약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필수는 이필수 나름의 장점이 많은데 어쩐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필수 너 많이 컸다…

신돌석씨가 내뱉은 말이었다. 이필수는 신돌석씨의 말에 움찔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흥분한 이필수는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뭐가 어째 이 새끼야…

이필수는 신돌석씨에게 달려들었다. 둘이서 멱살을 잡고 뒤엉켰다. 신돌석씨는 아직은 이필수를 충분히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엉켜서 남들이 뜯어 말릴 때라야 떨어졌다. 다음날 술이 깬 뒤 이필수는 신돌석씨에게 사과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그처럼 필름이 끊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했다. 그런데 이필수가 혹시 빈번하게 그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만나다가 둘이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이필수가 학생운동을 하게 된 동기 중에 자기 아버지의 삶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순진하기만 한 애였다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쟎냐? 대학 들어갈 때까지 공부만 한 내가 뭘 알았겠냐? 경영학을 공부해서 유학 갔다 온 뒤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를 맡아서 경영하는 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런 생각으로 그저 하라는 대로 공부만 열심히 했어.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 내가 생각했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계속 눈앞에 펼쳐지는 거야.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서 혹은 동정심에서 아니 어쩌면 열등감도 갖고 참여했지. 선배들의 압력에 눌려서 그랬는지도 몰라. 네가 알다시피 나는 사람들이 나를 연약하게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하거든. 아버지는 늘 사내자식이 그래서 어디 쓰겠냐고 했지. 아버지는 육사를 나와서 육군 장교로 월남까지 갔다 왔거든. 그런 아버지지만 나를 연약하게 키운 것도 사실이야. 그저 공부 이외에는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엄마는 그런 나를 늘 안쓰러워했지.

1학년 때 선배들 따라서 야학을 했어. 아버지를 속이고 했지. 아버지는 내가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다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에 다닌 적이 있던 여공들을 내가 가르치게 된 거야. 거기는 노동야학이라고 해서 공부를 가르친다기보다는 서로 함께 이야기하고 도와주고 뭐 그랬지. 대학생 선생들을 가배라고 하고, 배우는 노동자들을 배가라고 했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친다나. 그런데 그 여공들 말에 따르면 우리 아버지는 정말 악덕 기업주인 거야. 일요일 아침이면 기숙사에서 자고 있는 여공들을 교회 가라고 깨우는데 양동이로 물을 퍼붓곤 했대. 그때까지는 나도 기독교인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좀 안 좋지만 뭐 그냥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거야. 현장에서 얼굴 좀 반반한 애들은 사무실로 올라가서 경리를 한대. 중학교를 졸업했어도,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상관없대. 그리고는 어느 날부터 안 보인대. 정말 그 이야기를 들을 땐 귀를 막고 싶더라구. 그 사람들은 내가 아들인 줄 모르고 말했지. 선배들이나 동기들도 우리 아버지 이야기인 줄 몰랐어.

그러다가 80년 여름에 너도 알다시피 그때 아버지가 내가 뭐하는지를 알게 된 거야. 아버지한테 엄청나게 맞았지. 하지만 나도 대들었어. 그때까지는 대드는 수준이었지. 그리고는 가출도 했지. 결국 강집 대상이 됐지. 어머니가 쓰러지신 건 그때야. 어머니는 정말 불쌍한 분이야. 아버지한테 눌려서 평생을 그냥 가슴앓이만 하다가 가셨지. 내가 군대 가던 날 아버지는 말했어.

네가 죽을 정도가 되면 그때 연락해라. 그때까지는 누구 아들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라…

전방 근무를 했는데 강집 대상이니까 비무장지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 그 대신 수색대 훈련만 세 차례를 계속 받았어. 정말 죽고 싶더군. 하지만 나도 오기가 있으니까 아버지 이름은 대지 않았어. 그런데 걔들이 벌써 다 알더라구. 모를 리가 없지.

▲ [삽화-김윤기]

제대하고는 집을 나갔어. 현장에 갔지. 아버지는 나를 계속 쫓아 다녔지. 하지만 이때쯤에는 나도 아버지와 막 싸웠어. 제대하고 얼마 안 돼서야.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글쎄 주민등록증 좀 보자는 거야. 그리고는 이름을 적어 두는 것 있지.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열 받아서 내가 그 종이를 찢어 버렸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횡포가 조금 주춤해졌어. 88년 말인가. 전두환 청문회를 한 적이 있었지. 글쎄 아버지가 그래도 전두환이 때문에 경제도 안정되고 올림픽도 하고 나라가 제대로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는 나도 좋게 아니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막 화를 내더라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마루에 걸어 놨던 아버지 표창장, 전두환이가 준 건데 뭐 모범 중소기업인 표창장인가 그런 거야. 들어다가 박살을 내버렸어.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냥 멍하니 나를 보더라구.

이필수가 만나서 했던 이야기들을 대략 간추려 보면 그랬다.

밥 안 먹었지?

이필수가 물었다.

먹었어. 지금이 몇 신데 밥도 안 먹고 오겠냐?

아냐, 그래도 밤이 늦었으니 출출할 거다. 이 사람 국밥 한 그릇 갖다 주고 소주 한 병 가져 와라…

다소곳하게 지시를 기다리는 듯이 서 있던 여자에게 이필수가 말했다.

내 이복동생이다. 셋짼지 넷짼지 잘 모르겠다…

쟁반 든 젊은 여자가 가자 이필수가 말했다. 어머니가 다른데도 이필수의 친여동생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따지고 보면 쟤도 불쌍한 애다. 첩 자식이라고 어둡게만 자랐지. 시집 가서도 첩 자식이라고 구박이 얼마나 심한지.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똥깨나 싸는 놈 집에 시집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다. 쟤는 우리 어머니가 키웠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시집 갈 때까지 집안 살림은 도맡아서 했지. 그리고는 시집을 갔는데 아무래도 행복해 보이진 않아…

그런 말을 하며 소주를 털어 넣는 이필수의 얼굴에 마치 데드 마스크가 씌워진 듯하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자정이 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젊은 사람들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밖이 왁자지껄해지면서 접수대에 있던 이필수의 매제라는 사람이 이필수를 불렀다. 이필수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야당의 중진인 국회의원이 조문을 왔다고 했다. 이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문을 받으러 나갔다. 신돌석씨는 평소의 이필수 언행으로 봐서 약간 걱정되기도 했다.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주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마음에 들지 않을 사람임에 틀림없을 텐데도 보통 때와는 달리 점잖게 맞는 것 같았다. 국회의원이 왔다는 말을 떠올리자 신돌석씨에게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왜 이 병원이 낯설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 꽤 오래 전에 있었던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례식 때 같은 길을 따라 이 병원에 왔었다. 벌써 20여 년은 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국회의원이었다. 신돌석씨가 국회의원의 장례식에 간 것은 그 때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사람도 신돌석씨와 개인적으로 잘 알던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신돌석씨가 징역에서 나온 뒤 아르바이트식으로 다니던 노동문제 연구소에 가끔 오던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 정도였다. 처음 그 사람이 그 연구소에 왔을 때 신돌석씨는 그가 국회의원인 줄 몰랐었다. 인자하면서도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사람은 노동계에서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아마도 신돌석씨가 노동계 사람들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 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은 국회 노동위원회의 의원들이 어느 기업에서 돌린 돈봉투를 받았다는 것을 언론에 폭로함으로써 국회와 기업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매우 곤혹스런 위치에 있던 때였다. 노동계나 시민단체에서는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역시 노동운동가 출신다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라고들 말하였다. 그는 40년대 말 대한노총 시절부터 노동조합운동을 줄곧 해온 사람이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가톨릭 계통 노동상담소를 운영하기도 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평생을 노동운동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껍데기만 민주화되어 있던 세상에서 전국구이지만 국회에 진출한 것부터가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언론에서는 정치권의 이야기를 슬슬 흘렸는데, 돈키호테식 행동이라거나 자기 이름을 알려 보려는 소영웅주의라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좀 좋게 말하는 곳에서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순진한 사람 아니냐 라고들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가 마음고생을 할 때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돈키호테식이라거나 소영웅주의라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신돌석씨가 보기에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겹쳐져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역시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당시 여당으로 가서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뭔가 개혁적인 일을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망상이란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조간신문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와 나란히 서서 당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폭로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전직 안기부 고위직 출신도 있었다. 그 자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때 안기부 수사단장으로 고문은폐조작을 기획한 사람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때는 직접 서 의원을 구둣발로 차고 짓밟고 했다는 사람이다. 그밖에도 많은 조직 사건의 고문 조작에 깊숙이 개입했던 자였다. 그런 자와 그가 나란히 서 있다는 것부터 신돌석씨에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그가 노동자를 대상으로 했던 교육이 생각났다. 그는 말했었다. 세상이 아무리 잘못되어도 적어도 자기 나라를 찾으려고 싸우는 사람을 고문한 자들만큼은 잡아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것이 안 되다 보니 그들이 다시 독립투사를 잡아 가두고, 그 후예들이 민주 인사를 고문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 그 말을 기억할까? 아니 그런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을까? 설마 자기와 같이 서 있던 자가 그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뭐라고 말할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신돌석씨는 그의 매끄러운 말솜씨는 그런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도 신돌석씨에게는 그의 이미지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그의 이미지 중 아직도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은, 신돌석씨가 해고자가 되던 85년 가을에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삼민헌법을 쟁취해야 된다며 열변을 토하던 노동운동가의 모습이다. 그는 대학 출신으로 아주 일찍 현장에 들어가서 70년대 말에는 노조지부장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 뒤로도 노동운동에 전념해서 85년에는 구로동맹파업을 조직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 성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이라는, 줄여서 서노련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이미지 뒤에 겹치는 것은 언젠가 파업 현장을 방문한 그의 멱살을 노동자들이 잡고 끌고 가던 모습이었다. 그때 그 노동자들의 선두에 이필수가 서 있었다. 이필수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박근혜의 탄핵이 부당하다며 이른바 태극기 집회라는 곳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최근의 그의 모습까지 생각하면 정말 인간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삽화-김윤기]

한쪽 벽에 기대서 잠깐 졸다가 눈을 떠 보니 새벽 4시가 되었다.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 두 패가 있을 뿐이었고, 이제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이필수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영정 있는 곳으로 가보니 이필수가 영정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신돌석씨는 뭔가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아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필수가 울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는 죽이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슬프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필수가 평소에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으로 볼 때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것은 신돌석씨에게는 조금 뜻밖이었다.

돌석아, 너 우리 아버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쉽게 말하면 위선자지. 열여덟 살에 월남해서 육사를 나오고 별을 따지 못한 채 대령으로 예편한 뒤 기업가로 살아왔지. 교회 장로라면서 좋은 일을 한답시고 했는데 왼손이 하는 일도 오른손이 알게 한다는 식으로 했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여자도 많이 건드렸는데 그것만큼은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식으로 했어. 그러면서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큰소리 쳤고, 내게도 그것을 강요했지만, 아버지는 누구든 의심하면서 믿지 못했고, 항상 불안해서 약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런 면에서 위악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최근에는 아버지가 많이 약해진 것이 서글퍼질 때도 있었어. 얼마 전부터는 나와 싸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더라구. 이전에 했던 남북정상회담에는 눈길도 안 주고 비난만 해댔거든. 그런데 이번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병석에 누워서 보더니 은근히 고향에 갈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어. 그러다가도 김정은이가 어떤 인간인데, 김일성이 손자면 그 놈이 그 놈이지. 뱀 새끼가 뱀이지, 용이 되간. 고저 육이오 때 맥아더 말대로 핵폭탄을 썼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 말이면 다냐구.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모두 죽기를 바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내 눈치만 보는 거야. 팔순을 넘긴 뒤에는 급격히 약해지셨지. 그러다가 간암이라는 판정이 나온 게 석 달 전이었는데, 그 뒤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으면서 요즘 정세를 묻는 거야. 고향에 가기는 가는 거냐구. 북한이 좀 변하긴 했냐구. 특히 판문점 회담 때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를 않더라구.

이런 이야기 끝에 이필수는 한숨을 쉬었다. 신돌석씨는 그냥 이필수의 어깨만 감싸안았다. 이필수를 뒤로 하고 병원을 나섰을 때는 7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병원 문을 나설 때 이필수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울렸다.

전태일 열사는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노동자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학생운동 하면서 했었다. 그러다가 너를 떠올렸지. 위선도 위악도 필요 없이 살 수 있는 너를 보며 내 삶에 채찍질을 했어…

그런 말을 하면서 이필수는 다산 정약용은 어느 한시에서 그런 사람을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라고 표현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한시야 신돌석씨야 읽은 적도 없지만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개천을 넘어 전철역 뒷길에 접어들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마치 골인 지점을 향해 경보 경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몰려가고 있었다. 해고된 직후 공단 입구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돌리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갔었던 개소식에서 젊은 친구들이 율동을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또 어린 아이들이 뛰놀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도 떠올랐다. 이렇게 세대를 이어 가면서 올바른 길로 가면 반드시 통일의 날은, 민중해방의 날은 오리라는 생각이 갑자기 가슴을 벅차게 했다. 은은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이 전철역 유리창에 번져 나가면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붉게 물들여 나가고 있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 경력> 2004~08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겸임교수
        2014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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