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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에 그리는 자화상 (2)<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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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4  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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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선생님 성함이 참 특이하네요. 신돌석이라면 의병장 이름 아니에요?

김윤배가 화제를 돌려서 이름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그렇다. 신돌석씨의 이름을 듣고 누가 잊으랴. 잡혀 가는 조철구를 구해 주려고 하다가 함께 끌려가던 날, 신돌석씨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맞았던 매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매를 맞았다. 경찰 버스에 실려서 계속 짓밟히고, 보호실에 들어가서 또 전경들에게 뭇매를 맞고, 경찰서 강당으로 끌려가서 또 맞았다. 맞을 때마다 몸부림을 치고 전경을 맞받아치기도 하다 보니 더욱 맞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래서 많은 매를 맞아도 빗맞았는지도 몰랐다. 신돌석씨를 때리는 전경들도 신돌석씨에게 맞을까봐 몸을 조금 사리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이곳저곳으로 분산돼서 조사를 받았다. 신돌석씨가 간 곳은 조사계였다. 조사계 어느 형사에게 배당되자 그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못하겠다고 했다. 맞으면 맞을수록 성질이 솟아나는 것이 신돌석씨의 성격이었다. 지금까지 맞았는데 무릎을 꿇다니 말이나 되냐는 생각으로 거절했다.

이 새끼가 환장했나?

산돼지같이 생긴 형사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했다. 열이 받아서 신돌석씨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조사받을 때 꿇어앉으라는 법이 어느 법 몇 조에 있어?

그러자 형사는 신돌석씨의 그런 행동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은 당황하면서 씩씩거리기만 했다. 그때 들어서던 주임이라는 자가 산돼지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산돼지는 씩씩거리다가 그냥 의자에 앉으라고 턱짓을 했다.

이름?

신돌석.

신돌석? 야 무슨 이름이 그러냐? 가명 아냐?

본명입니다.

그러면 돌돌이란 말이냐?

산돼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타자를 치다가 멈추면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더니 실없는 웃음을 웃었다. 그때 서무를 보는 듯하는 전경이 한마디 했다.

신돌석이라고 유명한 의병장이 있잖아요? 그 사람 이름 따서 지은 모양인데요.

신돌석 의병장.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조철구도 신돌석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신돌석씨는 할아버지가 존경하던 사람이 의병장 신돌석이고,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삼촌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삼촌은 아버지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고학을 해서 비록 야간대학이지만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그때가 중학교 때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한번은 그게 사실이냐고 고모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고모는 헛웃음을 웃었다.

니 아버지 아는 한자가 ‘돌’자 하고 ‘석’자 뿐이야. 그래서 그렇게 지은거지. 뭐? 의병장? 니 할아버지도 처자식 팽개치고 어디로 싸다니던 사람인데 무슨 의병장을 존경해? 웃기지 말라고 해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실망스러웠다. 신돌석씨는 고모 이야기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하면 생각나는 것은 술에 찌든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다. 신돌석씨가 어린 시절 자란 곳은 망태산이라고 하는 산꼭대기 동네였다. 그곳에서 밑으로만 10여 분 내려가면 시장통이 나왔다. 그곳 생선가게 한 귀퉁이에 아버지가 하는 구두 수선 점포가 있었다. 점포래야 한귀퉁이에 비를 막을 천막이 처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소주를 됫병으로 갖다 놓고 마시면서 구두 수선을 했다. 동네에서 꽤 알려진 솜씨였지만 집에 가지고 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집에 오면 이 노래 저 노래 부르며 흥얼거리다가 자기가 일쑤였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이 신돌석씨의 어린 시절이었다.

신돌석씨는 아버지를 만나는 일을 되도록 피했다. 아버지가 신돌석씨에게 하는 말이라곤 술 사오라는 것과 담배 사오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도 그랬지만 아버지가 일하는 점포와 붙어 있는 생선가게에는 한 반이었던 계집아이가 살았다. 경옥이라고 하는 아이였다. 남자 아이처럼 걸걸한 아이였는데 신돌석씨를 보면 잘 놀리곤 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신돌석씨를 돌돌이라거니 똘썩이라거니 하면서 놀려댔다. 뿐만 아니라 돌돌이 아빠는 주정뱅이라고 놀려 댔다. 한번은 성질이 나서 그 애를 두들겨 패 줬는데 그 다음 돌아온 것은, 낮에는 담임의 무지막지한 구타, 밤에는 집에서 아버지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그런데 그 뻔뻔한 계집애는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놀려 댔다. 그 아이를 보기 싫어서도 아버지한테 가기를 싫어했었다.

신돌석씨의 이름을 갖고 의병장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했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 그런 사람이 아주 가끔 있었다. 하지만 공부도 못하고 집안도 지지리 못 사는 신돌석씨를 그런 유명한 인물과 견주는 일 자체를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신돌석씨는 이름 덕을 톡톡히 봤다. 만나는 사람마다 의병장 신돌석씨와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래서 의병장 신돌석씨의 이야기가 실린 글들을 찾아 읽어 보기도 했다. 그가 부하의 배신으로 잡혀서 죽게 된다는 것이 왠지 마음이 아팠고, 나중에 조직 사건에 걸렸을 때 가까웠던 사람 때문에 잡힌 일을 생각하면서 나중에 괜히 비슷한 운명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산돼지는 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신돌석이 의병장 이름이야? 그러면 이 새끼 혹시 빨갱이 집안 아니야? 빨갱이 새끼들이 보면 의병장이니 독립군이니 하면서 사실은 빨갱이짓 하더라구.

기가 막혔다. 신돌석씨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욕하는 건 참지만 조상 욕하는 건 참기 어려우니까 그만 합시다.

뭐야, 이 새끼야?

산돼지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소리쳤지만, 아까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그만하고는 이어서 취조를 했다.

구류를 살고 나온 신돌석씨는 조철구가 소개해 주는 노동자 소모임에 들어가서 함께 모임을 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신돌석씨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여기저기서 노조 준비모임이 생겼고, 해고자도 많이 생겼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돌석씨의 현장에서 함께 노조를 준비했던 사람들도 거의 다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함께 구류를 살았떤 김철배와 김강배도 마지못해 모임에 나오지만 신돌석씨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시 재취업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재취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현장 이야기 이외에 정치 이야기를 하면 멈칫했던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새로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해고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사는 보람을 느꼈다. 그 가운데 자기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못했다. 사실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이 자기 자신인데 말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계속 지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세계 혁명운동사에서도 이런 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고들 하였다. 신돌석씨가 있는 지역은 좁은 지역이라서 그런지 웬만한 공장에 학생 출신 노동자 한 명 없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리고 조철구나 장선우 때와는 달리 준비가 덜 된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신돌석씨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한 해를 보내고 나자 1987년이 되었다. 신돌석씨가 활동하던 지역에서도 시위가 끊일 날이 없었고, 7월에 들어서는 여기저기서 파업 투쟁이 벌어졌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파업 투쟁을 지원하느라 뛰어 다녀야 했다. 이때 신돌석씨는 자신이 원래부터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이 현장 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다음 해인 88년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89년이 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업 투쟁을 하는 사업장들이 경찰의 침탈 등으로 깨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조직에 대한 일대 검거 작업도 생기기 시작했다.

90년 말 쯤에 신돌석씨는 공안정국의 여파로 몰아닥친 조직 사건으로 수배가 되었다. 신돌석씨는 그 이전인 88년경부터 수배가 되어 있었다. 죄명은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금지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가 한 일이라고는 소그룹에서 공부를 하고, 어린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한 정도였다. 또 몇 개 사업장의 노조 조직과 쟁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도라기보다는 경험자로서 조언을 해준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일이 법에 어긋난다면 그건 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리고 경찰들도 별로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 그때는 파업을 하고 있는 사업장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 사업장에 가 있으면 경찰들이 함부로 잡으려고 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 같았다. 죄명도 국가보안법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공안정국이라는 것이 시작되더니 이런 저런 조직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돌석씨가 속한 조직도 드디어 이른바 중앙이라고 하는 사람들 일부가 한꺼번에 침탈을 받고 구속이 되더니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수배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어마어마한 조직이라는 것도 대부분 부풀려진 것이었다. 결국 그런 조직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조직의 명칭이나 조직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인맥으로 연결되면서 좀더 큰 조직을 지향해서 논의를 하고 있기는 하였다.

그 시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국적인 전위조직의 건설이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사람에 따라 조직에 따라 다종다양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궁극적인 지향이 전위당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가는 길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면 그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서로의 생각은 크게 달랐다고 보아야 했다.

그 해 겨울은 집을 나와서 피해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것, 그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신돌석씨는 구류를 살아 본 적은 있었지만, 수배를 당해서 쫓겨 다니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니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으로 수배된 때는 있었지만 그때는 집에만 안 들어갈 뿐 쫓긴다는 느낌이 없었다. 집에도 가끔씩 들를 수 있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그런 조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단지 어렴풋이 어떤 조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데 신경을 쓰기에는 그때는 너무나 할 일이 많고 바빴다.

신돌석씨는 조철구가 지역을 떠나면서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해서만 그 그룹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지역의 여러 노조와 노동운동단체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이 같은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신돌석씨가 피해 다닐 이유가 뚜렷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철구가 수배되었다고 하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지역 내 사람이 연행되어 갔다고 했다. 그곳은 홍제동에 있다고 하는 대공분실이라고 했다. 연행된 사람들의 명단과 조직의 명칭 및 체계는 신문에도 나왔다. 일단 집을 나왔다가 다시 집에 들어간 어느 노동자가 연행되었다가 구속되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순덕이와 헤어진 뒤 바로 이듬해에 해고자 출신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상태였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결혼식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는 85년에 해고된 뒤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돈벌이는 아내 몫이 되었다. 아내는 현장을 다니다가 애까지 낳았다. 아내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큰 애는 아들이고, 그때 다섯 살이었다. 이름은 힘찬이라고 지었다. 딸인 둘째 애는 그때 두 살이었다. 이름은 아름이라고 지었다.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 짜리 딸, 그리고 힘겹게 가내 공장에서 미싱을 돌려야 하는 아내를 두고 떠돌아 다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집에 있다고 해서 집안일에 도움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해 겨울을 이 집 저 집에서 신세지던 신돌석씨는 봄이 되자 학생출신 활동가 하나와 함께 옥탑방을 얻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를 가끔씩 만났다. 아내는 해고자 출신답게, 노동운동에 뜻을 같이 한 동지답게 신돌석씨의 현실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옛날 같지는 않았다. 아내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 지쳐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이 아내의 건강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 25.8×35.5cm 종이에 수채 2018 [삽화-김윤기]

그해 여름이 다 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9월 초에 신돌석씨는 아내가 미싱을 하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 일이었다. 쓰러진 아내도 문제지만 놀이방에 맡기던 두 아이가 문제였다. 아내는 가평에 있는 친정에 아름이와 함께 갔다. 아내의 친정은 아내 혼자 가서 있기에도 불편한 곳이었다. 결국 힘찬이는 신돌석씨가 맡게 되었다.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하면서 다섯 살 난 아들까지 보아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두 달을 그렇게 보냈다. 힘찬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모임도 했다. 대낮에 음침한 레스토랑에서 모임을 할 때도 많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레스토랑, 그 시절에는 레스토랑에 보통 칸막이가 있었는데, 그런 곳에 아이를 앉혀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힘찬이도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레스토랑 안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하고 구경도 하곤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대낮에 레스토랑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아이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별로 눈치 보이지 않는 일이었고, 아이가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밤에 만나는 모임은 문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자취방에서 학습을 하고, 토론을 할 때 힘찬이는 한쪽 구석에 그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힘찬이가 오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자기 자식이나 조카나 되는 듯이 예뻐해 주었다. 하지만 담배 연기가 자욱한 자취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힘찬이를 보면 정말 가슴이 저린다는 표현이 절감되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 거듭될수록 힘찬이를 짜증스럽게 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어느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맡기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끝내는 엉뚱한 짓을 저지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다. 신돌석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아내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내는 절대로 그런 짓을,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빠와 엄마의 차이일까? 수컷과 암컷의 차이일까? 아니면 자기만 아는 자와 남도 생각하며 살아갈 줄 아는 자의 차이일까? 아무튼 그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괴롭고 또 괴로운 일이었다.

11월에 서울 대공원에 갔다. 썰렁했다. 더욱이 평일이라서 사람들이 없었다. 힘찬이는 벌써부터 서울 대공원에 가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내일, 내일 하면서 미루어 왔다. 약속을 하고 나면 어디서 농성이 있다고 했고, 없던 회의도 갑자기 잡히곤 했다. 아내가 혼자 힘찬이를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 같은 곳에 간 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내도 일요일까지 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근무가 없는 날에는 밀린 집안 일 하기에 바빠서 좀처럼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못 가던 곳을 오히려 수배를 당하고 난 뒤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인 일이었다. 힘찬이는 그 동안 고생을 다 잊은 듯 매우 들떠 있었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들어갈 때부터 힘찬이는 끊이지 않고 재잘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 동안 말을 잊어버린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신돌석씨가 처음부터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힘찬이를 어린이 자동차에 태우고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다. 한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딱해 보였다. 언젠가 본 뉴스가 생각났다. 생활고 때문에 아이를 놀이공원에 버리는 부모가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뉴스를 볼 때 처음에는 분개했었다. 부모가 돼서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그러다가 이해되는 마음도 생겼다. 측은한 마음에 연민의 정이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모를 일이었다.

힘찬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신돌석씨는 기회만 찾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동물원이 좋을까? 놀이공원이 좋을까? 아니면? 역시 놀이공원이 좋을 듯했다. 힘찬이 혼자 놀이기구를 타게 하고 난 뒤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면 되는 것이다. 단 몇 초 사이의 결단과 인내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노동운동을 아니 혁명운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러는 수밖에 달리 무엇이 있으랴? 이것은 힘찬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힘찬이는 좀더 여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이제 적당한 놀이기구를 찾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끝내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몇 걸음을 떠났다가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힘찬이는 아빠가 없으면 두리번거리다가 놀이 기구 위에서도 아빠를 큰소리로 불렀다. 그런 힘찬이를 두고 간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동강내서 가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그 뒤 신돌석씨는 그 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진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의심하고는 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것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생각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은 뒤 보름쯤 뒤에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모임이 끝난 뒤 그를 졸라서 둘이서 밤새 술을 마셨다. 그는 신돌석씨보다 한 살이 위였지만 그때까지는 총각이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아니 그것보다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그는 신돌석씨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왜 대전이나 청주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전향하지 않는 줄 아느냐고 하였다. 자식에게 떳떳하고 싶다는 것, 그것도 그들이 전향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면서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사실 그때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들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그저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서 술을 마셔대며 울기만 했었다.

신돌석씨의 도피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까지 보냈는데 그 다음해 봄이었던가. 신돌석씨는 마침내 체포되고 말았다. 신돌석씨가 체포된 것은 신돌석씨가 활동하던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어느 다방에서였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선배 노동자인 김달근이었다. 그가 신돌석씨 때문에 무척 시달림을 받는다는 것은 신돌석씨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김달근은 신돌석씨가 군대 가기 전에 가방공장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그마한 가내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신돌석씨는 그를 통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가방공들의 지역 노조 결성 때도 위원장을 자기 현장에 다니는 것으로 신고해 줄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고, 의리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씨는 도망다니는 중에도 거의 정기적으로 그를 만났었다.

이 날도 미리 정해 놓은 약속에 따라서 만난 날이었다. 신돌석씨는 늘 그래왔듯이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나가서 약속 장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낌새를 못 채서 다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입구 바로 앞 탁자에 두 사람의 낯익은 형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들은 신돌석씨가 자신들을 못 알아보리라고 생각하고 체포조로 와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돌석씨는 몇 차례 경찰에 연행되고 구류를 사는 과정에서 그들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신돌석씨가 그들을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그들도 눈치를 채고 뒤쫓아 나왔다. 이윽고 그들과 신돌석씨 사이의 쫓고 쫓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신돌석씨는 앞에서 달려든 사람이 발을 거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쫓아오면서 ‘도둑 잡아라’라고 소리를 쳤으므로 앞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신돌석씨가 도둑인 줄 알고 다리를 걸었던 것이었다. 그럴 때는 자기도 ‘도둑 잡아라’라고 소리를 치면서 뛰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구치소에서 절도범들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이때는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달리는 것뿐이었다. 신돌석씨는 뒤쫓아 오는 형사들보다 나이도 젊었고, 평소 운동을 잘하는 편이었으므로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만 엉뚱하게 지나가는 사람 때문에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신돌석씨가 넘어지자 뒤쫓아 오던 형사들이 달려들었다. 이때 보니 두 명이 아니었다. 아마 다방 안에 두 명이 앉아 있었고, 다른 형사들은 밖에서 잠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림짐작으로 예닐곱 명쯤 되어 보였다. 머리가 짧은 젊은 애들도 두세 명 있었는데 전경인 것 같았다. 그들이 넘어진 신돌석씨에게 달려들어 두 팔을 잡아서 꺾고 머리채를 잡으려 하였다. 신돌석씨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 내가 잡혀 가도 아무도 모른다면 조직원들은 그냥 평소처럼 움직일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 둘씩 잡힐 것이다. 나 때문에 조직이 깨진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잡혀 간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서 막혔다. 힘이 빠졌다. 무어라고 할 것인가. 내가 누구라고 말할 것인가. 같이 자취하던 학생출신 노동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전 해에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한 사람이 비합법 지하조직 건으로 수배되었다가 체포됐던 적이 있었다. 그는 잡힐 때도 유명 인사답게 자기가 누구라고 하면서 언론에 알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뉴스를 보면서 그 학생출신 노동자는 우리는 잡히면 누구라고 해야 하나 라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그 와중에도 머리를 스쳐갔다. 그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다가 다시 안간힘을 썼다. 몸부림을 있는 대로 치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고 해서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20년쯤 됐을까. 체포되던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한 젊은 여자가 밀치면서 뛰어 내리고 이어서 여러 명이 ‘도둑 잡아라’ 하면서 뛰쳐나왔다. 먼저 뛰쳐나간 여자는 지나가던 사람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서 잡히고 말았다. 머리채를 잡아 채이고 양팔이 꺾인 그 여자는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쳤다.

시민 여러분, 저는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수배당한 정의대학교 총여학생회장 김박00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하신 분들은 꼭 저희 대학 총학생회에 연락해 주십시오.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수배당한 학생인 모양이었다. 그 여자가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리다시피 하면서 지하철역 밖으로 끌려 나갔다. 신돌석씨는 몸이 부르르 떨려 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을 도와주려고 달려들 생각은 나지 않았다. 분노해야 할 사건들을 너무 많이 겪은 탓에 생긴 둔감 때문이었을까.

끌려가면서도 여학생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한총련이라는 것과 대학교 총여학생회장이라는 것은 분명히 들렸는데 이름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요즈음 남녀평등의 차원에서 부모 성 함께 쓰기나 성 안 쓰기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이 학생도 그 때문인지 김박이라고 하는 성이 특이해서 귀에 잘 들렸다.

문득 처음 신돌석씨가 경찰에 끌려가던 날 속옷이 다 드러날 때까지 몸부림치면서 끌려가던 여성 노동자가 생각났다. 지금의 아내였다. 오늘 아침 장선우의 부탁으로 1인 시위하러 간다고 아내에게 말했을 때 아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그것이 아내의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돌석씨는 아내가 보수적으로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는 이제는 노동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여전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 정의파로 불렸다. 아내는 보수적이 되기보다는 생활인이 되었다.

해고자 시절에 아내는 조철구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기차 바퀴가 네모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아내는 조철구의 말이라도 반신반의하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으로 변했다. 아내의 비판의 초점은 그를 비롯한 인텔리들이 노동자들의 생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목적을 세우고 밀어 붙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내의 생각은 논리정연하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의 그런 생각은 신돌석씨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결국 아내는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서라기보다 생활인으로서 운동가에게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내가 생활인이 되어 갔듯이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져서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대낮에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머리채를 잡히고 속옷이 다 드러난 채 소리를 치며 끌려가는 젊은 여성이 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이른바 유비통신으로만 들었고, 들은 뒤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는 그런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냈다. 들어도 곧 잊어버린다. 왜 그럴까? 그러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동안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다시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촛불 시위. 박근혜 탄핵과 구속, 이명박 구속.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지만 아직도 굴뚝 위에 올라가야 하는 노동자가 있고, 그들을 지원한다고 소비가 넘쳐흐르는 도심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명의 구둣발이 계속해서 신돌석씨의 몸을 가격하였다. 힘이 다시 빠져 나갔다. 이제는 지쳤다. 수배 생활을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 순간 힘찬이가 떠올랐다. 힘찬이는 나중에 아빠의 오늘을 무어라고 말할까? 이대로 간다면 동지들은 내가 어디로 간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며칠 동안 고문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끝내 많은 것을 털어 놓겠지. 지켜야 한다.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한다. 되도록 강해지려고 동지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당시 비합법조직을 하던 사람들은 조직을 지키려고 자기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며 무기징역을 받았던 70년대 말의 어느 지하활동가를 영웅처럼 이야기했었다. 또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알리려고 차에 뛰어들어서 불구가 된 어느 학생 비합조직의 활동가 이야기도 했었다.

놔라, 이 개새끼들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했다. 아니 어쩌면 두려움에 떨면서 빨리 그 자리를 뜨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그곳은 신돌석씨가 살던 지역도 아니었으므로 신돌석씨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도 용의자나 소매치기 정도가 잡힌 것으로 알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구둣발이 가슴의 급소를 겨냥하며 날아왔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신돌석씨는 눈이 가려지고 수갑이 채워진 채 승용차 뒷자석에 앉아 있었다.

아내를 만난 것은 경찰청 대공분실을 거쳐 구치소로 넘어간 뒤 열흘이나 지나서였다. 아내는 별로 말이 없었다. 신돌석씨가 잡혀간 뒤 혼자 버려진 듯이 있던 힘찬이를 데리고 오던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을 멈추고 눈물을 닦곤 하였다. 신돌석씨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내를 모욕하는 말이 될지도 몰라서 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니 아내를 그때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대공분실에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갔다가 구치소로 넘어가던 날 대공분실 앞에서 차를 가로막으며 뛰어드는 여자들이 여럿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신돌석씨가 관련된 조직 사건의 가족들이었다. 이미 재판이 끝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신돌석씨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자 함께 와서 싸워 줬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나중에 석방되고 나서야 알았다. 아내가 보였다. 아름이를 업고 있었다. 아내를 보는 순간 너무 가슴이 뛰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으나 그건 분명 우는 상태였다. 힘찬이는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보면 그래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20일 동안의 기간 동안 이미 그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 이외에는 더 불지 않았다는 점이 그런대로 여유를 갖게 했다.

선배 노동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80년대의 조직 사건 때는 노동자 출신이라서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신돌석씨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비교적 수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구타는 당했다. 처음에는 물고문도 당했다. 주로 조철구가 어디 있느냐에 초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자들이 들어 와서 신돌석씨를 회유하려고 했다. 인텔리들이 너를 이용한 것이다. 왜 바보같이 그들의 야심에 이용되느냐고 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고문이 자행됐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취조가 멈췄다. 그리고는 닷새 정도를 그냥 밥 먹고 잠만 자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취조에서는 집중적으로 회유를 했다. 나가서 자기들과 손잡고 일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놈의 면상에 침을 뱉어 주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두려웠다. 아마 경찰서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사실 두려웠다. 더욱이 신돌석씨는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을 밖에서 아는지 모르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취조가 멈췄을 때쯤에 밖에서 아내가 이미 재판중이거나 재판이 끝난 가족들과 함께 대공분실 앞에서 시위를 했고, 변호사가 접견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때 변호사 접견은 초기 며칠을 제외하곤 대체로 이루어졌는데 신돌석씨는 그곳에서 나갈 때까지 끝내 변호사 접견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는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약 4개월 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소를 했다. 출소한 뒤의 상황은 참담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집안을 꾸려온 사람답게 혼자서 가내봉제공장에 다니면서 아이들도 키웠다. 신돌석씨더러 계속 노동운동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말이 없었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계속 노동운동을 하려고 해도 사실 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이전의 선들은 다 끊어지고, 자신과 연결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속 상태였다. 그리고 지역 내 다른 단체나 조직들에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이상한 풍조도 만연하였다. 과거를 반성하자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왜 사회주의의 붕괴 때문에 흔들린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신돌석씨는 다시 현장에 가는 길을 택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신돌석씨인지라 지역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몇 군데 직장을 옮기다가 정착한 중소기업에서 작년까지 근무하였다. 그 곳은 이미 노조가 세워져 있었고, 신돌석씨는 노조 대의원을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참여하는 정도로 노조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신돌석씨를 경험이 많은 선배로 대접했다. 신돌석씨는 선배로서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할 뿐 더 이상 나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보다는 섣불리 나서서 집행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가 현장에 들어간 뒤 한 차례 집행부 교체도 있었다. 신돌석씨에게 집행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현장에서는 신돌석씨가 집행부를 하기에는 나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대의원으로서 자기 몫을 열심히 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때 나서서 하리라고 다짐하며 다녔었다.

그런데 회장이란 친구는 왜 돌리지도 않을 공장을 인수했대요?

신돌석씨가 궁금해서 물었다.

부동산 때문이겠죠. 그 사람 여기서 무슨 광고 간판 회사를 하는데 엄청 잘 된대요. 그러니까 우리 공장에는 관심도 없어요. 그저 부동산만 생각하고 니들 그래봤자 지쳐 떨어질 거라는 거지요.

김윤배의 말을 듣자 정말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놈을 어디 한 둘 봤나. 그러니까 자꾸 둔감해진다. 요즘 뉴스에서 한창 떠드는 재벌 가족의 갑질을 보면 그 정도만 아니라도 다행이겠구나 싶으니 안 그러랴. 신돌석씨는 문득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둘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1시가 다 되었다. 이제 정리하고 다시 굴뚝 밑으로 간단다. 신돌석씨는 김윤배도 학생 출신을 만났냐고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민주노총이 생긴 것만 해도 얼마가 지났는데 이제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자신이 젊은 날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노동자가 의식화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제 환갑이 된 나이에 30여 년 전을 떠올리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조철구가 새삼 그리워졌다.

신돌석씨는 지난 삼십여 년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만감이 교차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 세월 동안 많이 전진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로 우리는 거대한 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 또한 확실했다. 비록 그 부대가 일사불란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적들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은 이럴 때마다 신돌석씨가 거듭 되뇌어 보는 믿음이었다. 그런 사이에 어느덧 신돌석씨는 환갑이 되었다. 이순의 나이였다.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한번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신돌석씨의 가슴에 강하게 울려 왔다.

김윤배와 함께 승합차에 대자보판들을 싣고 악수를 하고 다음에 꼭 만나자고 인사한 뒤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 칼라텍 노조의 투쟁을 도와준다고 온 하루였지만 신돌석씨의 30여 년을 돌아보게 만든 하루이기도 했다.

한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저 세상은 잘난 놈이 있고 못난 놈이 있고, 나는 못난 놈은 아니지만 잘난 놈 되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의리, 사나이답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걸어가는 길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사나이는 떳떳하고 싶어서 의리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옆길로 새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어느덧 와보니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사나이는 그때 그때마다 자기 의지로 그 길을 간 것이다. 싸우면서 간 것이다. 누가 내게 이 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조철구, 장선우를 만난 것도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필연일 것이다. 그 시절에 올바로 살아간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노동자라면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신 살아준 것도 아니고, 그들을 대신해서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의 뜻에 따라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

올 봄에는 조철구의 무덤에 오랜만에 찾아가 봐야겠다. 아내와 꼭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힘찬이도 아름이도 데려가고 싶었다. 3월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잘못도 많이 했고 어리석은 짓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을 하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계속)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 경력> 2004~08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겸임교수
        2014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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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2)
원남숙 (wonpharm514) 2018-08-10 20:32:36
오늘도 시간 여행 자~~~~~ㄹ 하고 갑니다
급 반전의 지점에서 얼렁 돌아왔다는 ..ㅎㅎ
1 0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08-04 12:02:49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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