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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전적지 답사 (3)<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7)
임방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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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2  21: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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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봉두산으로 떠나다

2012년 4월 27일 오후 5시에 마장동에서 저녁을 먹고 박정덕 동지, 나, 박소연 작가,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이 출발했다. 박정덕 동지는 60년 만에 100여 미터의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던 장소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봉두산을 찾아가는 길이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2시간 전에 나와 있었고 차 안에서도 호기심 많은 소연 작가의 질문에 빨치산 이야기, 고향 이야기에 감정이 흠뻑 묻어 나왔다. 날씨가 좋았다.

산 여기저기에 아카시아 꽃, 철쭉 꽃이 무늬를 박아놓은 듯 눈 안에 들어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으로 빠져나갔다. 정부영은 어느 여관 앞에 차를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돌아온 부영은 빈 방이 없고 주인이 몇 군데 민박집을 알아보았으나 잘 곳이 없다고 했다. 여수로 갈 수밖에 없었다. 차는 되돌아나와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30여 분 만에 여수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박정덕 동지의 약력
 

   
▲ 봉두산 밑에서 박정덕 선생이 그 지역 유격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두 개의 방에 짐을 풀고 곧 박정덕 동지와 대담을 했다. 옷 매무새를 고치고 카메라 앞에 앉은 박정덕 동지에게 정부영이, “선생님이 살아오신 경위를 간략하게 들려주시지요.” 하고 여쭙자,
 
“그러지요. 내 고향은 아까 들렀던 곡성군 죽곡면 당동리 1구고요. 아버님 박양래, 어머님 정아지, 두 분은 1남 3녀를 두셨는데, 나는 막내로 1930년 1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안 살림은 중농으로 넉넉했습니다. 죽곡국민학교에 다녔고요. 선생님이 되는 게 어려서의 내 꿈이었는데 깨지고 말았습니다.
 
일제 말엽에 왜놈들이 조선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어가자 아버님은 나를 정신대에 안 보내려고 친구분 아들하고 혼인 언약을 했거든요. 해방 후에 신랑감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좌익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미군정 하에서 그 분이 피해다니자 아버지와 시아버님이 언약을 했으니 이름이라도 지어놓자고 혼인을 서둘렀고 1947년 가을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내 남편은 피해다니는 몸이라 하룻밤 자고는 떠났어요.
 
1948년 10월 여순 군인 봉기가 있자 시숙, 남편, 오빠는 모두 입산했습니다. 그로부터 남편을 찾아내라고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지서 뜰 안에 움막을 쳐놓고 입산자 가족들을 수용했는데 그곳에 끌려가서 날마다 주먹과 몽둥이로 얻어맞았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거의 죽어가는 나를, 아버님은 전답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놈들에게 주고 꺼냈습니다.
 
아버님은 나를 데리고 전북 김제에 사는 언니 집에 맡겨놓고 가셨어요. 언니 집에서 또 경찰에게 잡힌 나는 전주경찰청 지하실에 가서 죽도록 고문을 당했습니다. 남편이 왔다 갔다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대라는 거예요. 악마 같은 놈들은 옷을 다 벗기고 알몸인 나를 고문 의자에 묶었습니다. 주전자 물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머리채를 뒤로 제치고 코에 들이부었습니다. 손목을 천장에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치고요.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놓고 비틀었습니다. 또한 자궁을 몽둥이로 짓이기고, 수치심과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손가락 끝에 전선을 감고 전기고문을 했는데 몇 번이나 기절했는지 모릅니다. 날짜가 며칠이 지났는지 가늠이 안 가는 어느 날 유치장 간수가 나오라고 하데요. 가까스로 벽을 짚고 밖에 나갔더니 아버님이 와 계셔요. 부녀는 부등켜 안고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또 얼마나 많은 돈을 놈들에게 주고 나를 빼냈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날로 형부 친구분 집에 가서 숨어살다가 전쟁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를 데리러 오셨어요. 나는 고향에 가서 그리도 보고 싶던 남편을 만났어요. 많이 울었습니다. 남편은 석곡면당 위원장으로 있었고 나는 석곡면 여맹 선전부에 있다가 9.28을 맞이했습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입산했지요. 입산 초기에는 산 밑의 마을에서 생활했어요. 여맹원들은 주로 의복을 만들어서 부대에 보냈습니다. 1950년 12월로 기억되네요.
 
하루는 군여맹에서 소환장이 날아왔습니다. 군여맹에 갔더니 도당학교에 가래요. 선 요원을 따라서 화순군 평지 양지 마을에 갔어요. 당시에 전남도당이 화순군 백아산에 있었어요. 다음 날 나는 도당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수님들은 다 김일성대학 교수였어요. 영광이었습니다. 2주 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곡성군 군여맹에 돌아오자 오곡면 여맹위원장으로 배치하데요. 말골 골짜기에 갔더니 오곡면 일꾼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백아산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말골을 거치는 동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미제의 세균전으로 열병에 걸린 동무들과 총상 환자들을 보살피는 게 주된 임무였어요. 1951년 봄과 여름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이를 가졌다가 사산하기도 하고, 사업차 나오셨던 도당조직부장과 압록강 골짜기에서 함께 뛰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돌아가시는 것도 목격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1951년 12월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우리에게 고통은 몇 곱으로 다가왔습니다. 식량이 떨어져서 굶주리던 우리가 곡성군당위원장 정운찬 동지의 고향인 반내골에 갔다가 기미를 챈 경찰에게 포위되어 동무들이 경사가 급한 곳으로 튀었습니다. 나는 100여 미터가 넘는 빙판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그만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 날이 1952년 2월 9일로 기억되네요. 저녁에 찾아온 동무들이 나를 업고 석굴에 갔습니다. 두 끼 밥과 식량을 털어서 나에게 주고 입구를 막아버렸어요. 밥 생각은 없고 물만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인가 삼일 후에 살 썩는 냄새를 맡고 온 것인지 들쥐 한 마리가 굴 안에 들어왔어요. 밥데기를 던져주면서 그놈하고 노는데 웬걸 쥐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습니다. 밥도 식량도 쥐들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요. 밤에 의무과장하고 면민청위원장이 밥과 식량을 짊어지고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동무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갈 길이 먼 동무들은 치료를 해주고 곧 떠났어요. 혼자 남은 나는 공세 때라 사방팔방에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그 사선을 뚫고 찾아온 동무들, 친형제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보다 더한 동무들의 뜨거운 사랑을 심장 깊이 깊이 느끼며 울었습니다. 쥐들이 이제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지냈어요. 밥도 나누어 먹고 식량도 조금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는데도 쥐들이 떠나지 않데요. 가까이 오면 썩은 살을 뜯어먹을까봐 나뭇가지로 휘저었는데 나중에는 그 힘마저 없었어요. 살 것 같지 않고 쥐들도 숨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눈을 떴다가 감고 비몽사몽 하는 게 자는 거지요. 머리가 빠개지게 지끈거리는데 부모형제와 고향, 남편과 동무들이 그립고 미치게 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목이 타던지 입술에 막이 생겨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붙여놓아요. 뜯어내면 또 생기고요. 더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물이나 실컷 마시고 죽자고 입구를 막아 놓은 큰 돌을 죽을 힘을 다해서 흔들었습니다.

돌을 허물고 기어나가서 개울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릅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데요. 냇물 속에 대사리가 있어서 주워 먹었습니다. 죽어도 굴로 돌아가기는 싫고 기어서라도 봉두산에 갈 결심을 하고 냇가 빈집에 몸을 숨겼어요. 사람 썩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길 가던 농부한테 발각되어 그대로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날이 3월 28일. 50일간의 석굴 생활은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길었어요. 며칠 후에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감옥에서 7년을 살고 1959년에 출소했어요. 불구된 몸으로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재혼했어요. 영감이 몇 년 전에 죽었어요. 아들을 두었는데 생활이 어려워 함께 못 살고 봉천동 시 공영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매일처럼 봉천동 노인복지관에 나가서 붓글씨를 익히고 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잠자리에 들어갔다.

 박정덕 동지의 고향
 
4월 28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출발했다. 차는 어젯밤에 왔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죽곡으로 빠져나갔다. 가게에서 사과, 배, 바나나, 술을 사고 식당에 들어가서 추어탕을 시켰는데 맛이 좋고 특히 도토리묵이 푸짐했다. 9시가 지나서 식당을 떠났다. 죽곡초등학교 운동장에 차일이 쳐 있고 고깔 쓴 풍물패가 보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으로 보아 무슨 행사가 있는 듯싶었다. 어려서 다닌 학교라 차를 세울까 하고 물었는데 박정덕 동지는 그냥 가잔다. 부영은 차를 천천히 몰았다.

산모퉁이를 돌아나가자 오른쪽으로 제법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보성강이란다. 사방이 산인데 높지 않고 운치가 좋았다. 큰길가에 당동이라고 쓴 돌이 서 있고 차는 왼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박정덕 동지가 어려서 살던 마을이란다. 널찍한 공터에 차를 세웠다. 박정덕 동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불편한 다리에 지팡이를 짚고 부산하게 마을 위쪽으로 걸어갔다. 옛날에 쌓은 돌각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샅길을 빠져나가자 제법 넓은 들이 나타났다. 층층이 논둑마다 돌로 쌓아놓았다. 수백 년 세월이 돌에 묻어 있었다.
 
“앞산 기슭에 아버님 묘가 있습니다.”
 
박정덕 동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기슭 여기저기를 다 뒤져도 박양래라고 쓰여 있는 묘비를 찾지 못했다. 김영진은 훨씬 위쪽에 가보고 아래에 내려가서 찾았지만 끝내 못찾고 말았다. 박정덕 동지는 모자를 벗고 깊숙이 절을 하면서 “아버님! 불효 여식은 여기까지 왔다가 아버님 묘를 못 찾고 갑니다. 살아 생전에 집안 어른들을 납골당에 모시게 되면 꼭 오겠습니다. 편히 계세요.”
 
거듭 절을 올렸다. 우리는 돌아나와서 잠깐 박정덕 동지의 육촌 언니를 만나보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삼남매가 구 빨치산 남편 가묘에 술을 따르다

   
▲ 산에서 전사한 남편의 가묘에 술을 따르는 박정덕 선생. [사진제공-임방규]

이웃 화산 마을에 갔다. 박정덕 동지의 시작은어머니를 모시고 시가댁 선산에 갔다. 동지는 시할아버지, 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숙 내외분 묘 앞 상석에 과일을 놓고 집에서 가져온 술을 따라놓고 절을 했다. 마지막으로 시신이 없는 가묘지만 남편이 떠오르는 듯 물끄러미 묘를 바라보다가 절을 했다. 우리도 함께 묵념을 올렸다. 모두 양지바른 잔디 위에 앉아서 과일을 들고 술도 한잔씩 돌리면서 박정덕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옆에 계시는 이동수 우리 시숙님은 해방 후에 일본에서 나오셨는데 맑스주의 사상가로, 내 남편도 같습니다만 열렬히 싸웠습니다. 곡성군당 조직부장으로 일찍이 입산하셨고 1949년에 전사하셨습니다. 시숙 밑에 이정님 시누이도 오빠와 동생과 함께 입산한 구 빨치산인데 살아서 합법을 맞이했고 승주군 여맹위원장으로 있다가 9.28. 후에 또 입산, 산에서 전사했습니다. 내 남편 이병관은 내가 잡힌 후에 말골에서 적의 매복에 희생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삼남매가 구 빨치산이고 최후를 영예롭게 마쳤네요. 혁명가 집안입니다.”
 
내가 한마디 하고 그곳을 떠났다.

 건모마을 학살지
 
정부영은 박정덕 동지에게 물어서 다음 목적지 건모마을을 길 안내판에 입력시키고 차를 몰았다. 보성강 강둑에 나있는 포장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리던 차가 오른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왼쪽 능선과 오른쪽 능선 사이에 꽤 넓은 들이 위로 이어졌다. 드문드문 산기슭에 마을이 보이고 밭에 보리가 모개를 내놓고 있었다. 9.28. 이후 1951년 3월까지 이곳이 모두 해방구라고 했다. 건모마을 들머리에 차가 섰다. 박정덕 동지는 밭 매는 노인한테 다가갔다. 이 마을이 고향인가 하고 묻자 고개를 흔들면서 50여 년 전에 시집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전쟁 때 경찰들이 마을 청년들을 죽여서 한 구덩이에 묻었다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고 묻자 들어서 알고 있단다.
 
“큰 길로 올라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왼쪽에 밤나무가 있어요. 그 위에 사과밭이 있고요. 사과밭 맨 앞 왼쪽이랍니다.”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노인이 밭에서 나왔다. 직접 가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차에 함께 타고 갔다. 밤나무 위로 올라갔다.
 
“여깁니다. 이 사과밭을 몇 년 전에 우리가 샀어요. 전 주인이 알려주데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대요. 혹 그 중 어느 분의 가족인가요?”
 
“아닙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인데 어느 문헌을 보고 찾아왔어요.”
 
“여기에 수십 명이 묻혔다는데 찾아온 가족들을 한 분도 못 보았어요.”
 
“지금은 무서워서 그럴 겁니다.”
 
그렇다. 학살당한 분들이 이 근방에 살았을 테고 누구의 아들이나 형제 아니면 남편이었을 것인데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도, 이곳에 못 오는 것도 학살자들이 무섭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봉두산
 
우리는 돌아 나와서 노인을 밭머리에 내려드리고 태안사에 갔다. 절 입구에 경찰 위령탑이 있고 돌로 둥글게 쌓아올린 돌탑이 있고 작은 연못이 있었다. 우리는 싸목싸목 절 안으로 들어갔다. 노승과 합장하고 산 높이를 물었다. 753미터라고 알려주었다.
 
“좋습니다.”
 
“산이 봉황새 머리처럼 생겨서 봉두산이라고 하구요. 이곳이 명당자립니다.”
 
나는 빨치산을 생각하고 스님은 명당자리에 초점을 맞췄다. 스님이 어찌 내 속마음을 알 것인가. 김영진은 부지런히 봉두산을 카메라에 담았다. 절에서 나온 나는 땅 위로 불거진 바위 끝에 앉아서 쉬고 있는 박정덕 동지에게 봉두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봉두산은 높지 않지만 능선과 골짜기가 많아서 구 빨치산이 활동을 했고 곡성군당, 특히 죽곡면당이 활동한 곳입니다. 입산 초기에는 4-50명이 있었어요. 산 아래 부락에 있다가 적의 공세가 심해지면서 봉두산으로 들어왔지요. 무장은 없었구요. 503부대가 자주 왔습니다. 100여 명의 부대원이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도 많이 하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 들었는데 다 잊고 기억을 못합니다.”
 
더 물을 것이 없었다. 살아남은 부대원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다리가 부러지고 석굴에서 들쥐와 함께 살았던 반내골
 
도로 안내판에 반내골을 입력시키고 우리는 태안사를 떠났다. 중간에 박정덕 동지는 왼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말골입니다.” 한마디 했다. 내가 뒷자리에 있어서 동지의 표정을 못 읽었지만 자신이 한동안 있었던 거점이며 남편이 적에게 살해당한 곳이라 님이 떠오르고 동무들이 겹쳐 와서 눈물을 삼켰으리라.

차는 어느덧 반내골에 들어갔다. 어느 식당 앞에서 박정덕 동지는 노인에게 이 부근에 돌샘이 있는데 혹 아시는가 하고 물었다. 요 밑에 다리를 건너서 내려가면 오른쪽에 개천이 보이고 그 골짜기로 2-30미터 올라가면 샘이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가다가 개천가에 차를 세워놓고 모두 내렸다. 박정덕 동지는 내를 굽어보면서 내가 이렇게 크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고, 여기가 아니라고 했다. 60년 전 내하고 지금의 내가 어찌 같을 것인가. 김영진은 카메라를 메고 올라갔다. 한참 만에 돌아온 김영진은 위에 돌샘이 있다고 했다. 불구가 된 박정덕 동지는 산을 못 타지, 들쥐와 함께 지냈던 석굴하고 발이 부러진 낭떠러지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는 떠났다.

 이상률 동지의 묘에 찾아가다
 
정부영은 구례 화엄사를 안내판에 입력시키고 차를 몰았다. 이상률 동지가 누워 있는 묘소에 가기 위해서였다. 두 번 가본 곳이라 찾을 것 같았다. 샛길을 지나쳤다가 돌아오고 공동묘지에 가서도 약간 헤맸지만 비석이 있는 이상률 동지의 묘를 찾았다. 석상에 과일과 잔에 술을 부어놓고 함께 절을 올렸다. 이상률 동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이상률 동지는 해방 후 일찍 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에서만 일해 온 조직통입니다. 1948년에 입산하여 구례군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합법을 맞이했고요. 합법 시기에는 승주군당위원장으로 밤낮없이 일했고 9.28 후에 조개산에 입산하여 1954년까지 당을 지도했습니다. 비트에서 체포된 이상률 동지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와서 결혼했고요.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전향을 안 했기 때문에 사회안전법으로 재구금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한동안 한 방에서 나하고 같이 지냈어요. 언행은 물론 일상생활에서 당 일꾼으로 본이 되었고 고결한 풍모가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오기 몇 해 전에 이상률 동지는 독방에서 의식을 잃은 채 사경을 헤매다가 석방되었는데 감호소 문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적들이 살해한 것이지요. 동지와 한 방에 있을 때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요. 둘째 광희가 홍시를 따러 감나무 높이 올라갔다가 그만 가지가 부러져서 떨어졌대요. 바닥은 돌인데 마침 집에서 키우던 개가 돌 위에 있다가 박살이 나고 광희는 살았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오금이 저렸고, 지금도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여겨집니다. 비석 뒤에 적혀 있는 광희 이 녀석 두 세상을 삽니다. 아들을 살리고 죽은 개를 잘 묻어주었다고 아주머니는 편지 말미에 적었대요.”
 
말을 마치고 우리는 떠났다.

 조개산
 
화엄사 옆에서 점심을 먹었다. 계획은 송송학 동지와 경남 남부지구를 돌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내일은 짬이 없다고 연락이 왔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서 이상률 동지가 활동했던 조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부영은 선암사를 안내판에 입력시키고 차를 몰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선암사 앞까지 들어갔다. 절은 거의 다 큰 산 밑에 있고 숲에 쌓여서 아늑하지만 특히 선암사는 자연과 어우러져서 운치가 있었다. 500년 된 매화나무가 담 옆으로 열 지어 있고 경내와 주변에 수령 500년이 넘는 고목이 수두룩했다. 꽃도 많고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수백 년 동안 사람이 가꾼 흔적이 보였다. 쓰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서 받침대를 여러 개 세워놓고 둘레에 돌로 담을 쌓아 놓았다. 이끼 낀 돌담은 수백 년 흘러간 세월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목이 된 소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어 있고 본래의 모습인 듯 이름도 와송(누운 소나무)이라 부르고 있었다. 김영진은 자리를 옮겨가며 조개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개산 지구에서 싸운 동지가 있어야 대담을 할 것인데 없어 아쉬움을 남겨놓고 우리는 조개산을 떠났다.

 인민을 구하고 1개 중대 70여 명이 장렬하게 전사한 여분산
 
내일은 여분산에 오르기로 했다. 남원을 지나면서 오수 한일석 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걸었는데 응답이 없었다. 토요일이라 부부가 나들이를 간 것인지? 우리는 순창을 거쳐서 회문산 자락에 민박을 겸하고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저녁을 시켜서 먹고 곧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음 날 냇물에 세수하고 아침식사를 하고 떠났다. 민재에 간 우리는 박정덕 동지가 산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차로 순창 고추장 마을을 구경하고 가마골에 다녀오든지 주변에 아름다운 곳을 둘러보고 오후 1시에 민재에 오라고 했다.
 
나, 정부영, 김영진은 신발 끈을 조여매고 떠났다. 여분산은 찻길이 없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꽤 높은 산이라 마지막 길일지도 몰라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오르기로 작심하고 떠나는 길이었다. 잡목을 헤치고 오르다가 쉬고 또 쉬고 여러 번 쉬었다가 올라갔다. 1시간 반 넘게 걸어서 정상에 이르렀다.

20년 전에 왔을 때는 전호 흔적이 뚜렷했는데 많이 훼손되었다. 5-6년 전만 해도 전호 자국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메꿔져서 몇 군데나 끊겨 있었다. 동무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51년 6,7월경에 이곳에 왔을 때 탈육이 된 70여 명의 뼈가 전호 안에 흩어져 있어서 동무들이 눈물을 흘리며 묻은 전호다. 울컥 핏덩이가 넘어오는 것 같았다.

1951년 3월 적들의 춘기 공세 때 금산골 일대에 몰려온 인민들이 쌍치 안전지대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종일 1개 중대가 싸웠다. 적들의 13차에 걸친 돌격에 반돌격으로 물리치고 전호 안에서 중기부사수 한 명이 살아남고 전원이 전사했다. 자신들의 죽음으로 만 명이 넘는 인민들을 사지에서 구출한 불같은 애국애민의 혼을 싸안고 있는 여분산이다. 상봉에 저들이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전호는 거의 없어지고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 산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설명을 하고 연대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내려갔다.
 
능선 위 평평한 곳은 멧돼지가 몇 군데 파헤쳤을 뿐 예나 다름이 없었다. 집회와 출정식, 오락회를 가졌고 중대간부 이상 고급 세미나와 중대 단위의 집체학습을 가졌던 곳이다. 우리 연대가 오수 기차 습격 후 노획한 총과 총탄을 전남에 보냈는데 답례로 전남 예술단원 동무들이 능선을 타고 멀리 돌아와서 축하공연을 가졌던 자리이기도 하다. 노래하고 춤추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곰방대인 양 허리춤에 차고 곱사춤을 추던 동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연대 본부, 대대, 중대 본부가 있었던 곳은 거의 다 사라지고 대여섯 곳에 흔적만 남아 있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지형보다는 훨씬 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벌똥산에 올라가는 짤트막한 바위 위에 앉아서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떠났다. 전에 다녔던 길이 산죽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칙칙한 산죽을 헤치며 내려갔다. 살이 찐 정부영이가 애먹었다. 미끄러져서 눈가에 상처를 입었다. 삼분의 이쯤 내려오자 산죽밭이 끝나고 오솔길이 나타났다. 옛날에 다니던 길이다. 민재부락에 내려와서 차를 타고 밤재를 넘어갔다.

 귀로
 
종암식당에 들렀다. 세 시가 되어서 먹는 점심이라 게눈 감추듯 배를 채우고 쌍치를 떠났다.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쌍치. 김정근 동지, 김광열 선생, 신우현 선생을 못 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가 달려갔다. 박소연 작가에게 두 여성 동지가 오기로 했다가 못 와서 얻은 바가 적었을 것이라고 하자 아니란다. 우리가 산에 올라갔을 때 박정덕 선생과 김은정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서 좋았다고 흐뭇하게 여겼다.

날이 어두워질 때 서울에 도착했다. 모두 고생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3호선 전철 안에 몸을 부려 놓고 이번 답사를 돌아보았다. 생각만으로도 투지에 불을 붙이는 여분산, 박정덕 동지의 굴곡 많은 생애가 아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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