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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4)
임방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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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21  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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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전설의 병바우

2010년 11월 27일 밤 9시 30분에 우리는 용산을 출발했다. 김해섭 동지와 한재룡 동지, 나, 송계채 동지,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7명이 12인승 승합차에 탔다. 자리가 넉넉해서 편하게 갔다. 12시가 넘어서야 예약한 선운사 호텔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부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호텔을 떠났다. 단풍철이라 대형 관광버스 여러 대가 길을 메우고 있었다. 차가 선운사 초입에서 제지를 당했다. 차는 못 들어간단다. 이른 아침이라 차 왕래도 없고 이삼십분 촬영을 하려는데 걸어갔다 오려면 세 시간 이상 걸릴 것이 아닌가 하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60이 넘은 내가 직장이라고 다니는데 규율을 어기면 목이 달아난다.”고 더는 말도 못 붙이게 잡아떼었다. 할 수 없이 다음에 오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산마다 단풍이 들어서 곱고 특히 길가에 빨간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나무가 일품이었다. 한재룡 동지가 안내를 했다. 차창 밖으로 운해에 감싸인 병바위가 위만 기묘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선경이었다.
 “임진왜란 때 3,000명이 피신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3,000명은 아니고 300명 정도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병바위 밑에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술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바윕니다.” 한재룡 동지의 설명이었다.
 
“고창군 유격대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들려주시지요.”
 
“고창군에는 1, 2, 3중대가 있었구요. 3중대가 30여 명 정도에 무장은 12정이 있었습니다. 1, 2중대는 무장 40-50정에 중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민군 남해여단이 전남 강진에 있다가 후퇴하면서 일부가 이곳에서 입산을 했습니다. 인민군 출신이 많이 있었지요. 1중대는 음곡이라는 마을에 있었고 3중대는 재실에 있었고, 2중대는 방장산에 있다가 용계 마을로 왔습니다.”
 
“저들이 고창읍에 언제 들어왔습니까?”
 
“1950년 12월까지 우리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무도 보고 오일장도 섰습니다. 1950년 10월초에 미군이 고창에 들렀다 갔는데 그때 인민위원회에서 근무하던 일꾼들 십여 명이 잡혀서 영광으로 실려 갔습니다. 바로 고창부대와 영광부대가 합동으로 영광읍을 들이쳐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무들을 석방시켰습니다.”
 
“후퇴 직후에 저들이 고창에 들어오지 못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저들이 힘이 미치지 못한 데 기인하지 않았을까요?”

 부정마을
 
차가 부정마을 앞에 섰다. 한재룡 동지가 설명을 했다.

“이 마을은 우물이 없어요. 그래서 부정마을이랍니다. 냇물을 길어다 먹었어요. 이 마을에 군당조직부, 선전부, 군사부가 있었구요. 여기에 방앗간이 있었어요. 후방부가 저 마을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 길은 험하고 좁았습니다.”

우리는 차 안에서 한재룡 동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큰 길이 나고 동네가 없어졌습니다. 요 아래 마을에서 1953년에 신형복 동지가 경찰의 기습을 받아 돌아가셨답니다. 마을 분들이 시신을 그곳에 묻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신형복 동지는 고창중학교 선배로 국대안 반대 동맹휴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동지다. 대가 세고 말 잘하고 장래가 유망한 동지였다. 입산 후에는 고창유격대 참모장으로 유격부대를 지휘했다. 신형복 동지의 명복을 빌었다.

적의 기습으로 여러 동지들이 희생된 연계리

   
▲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곳에서 한재룡 선생이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차는 연계리 다리 옆에 멈췄다.

“저 부락에 우리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흥덕 작전에 나갔다 오구요. 그러니까 1951년 3월 18일입니다. 첫 새벽에 경찰들이 마을 뒷산으로, 앞산으로, 골짜기로 쳐들어 왔습니다. 불시에 적의 기습을 당한 우리 동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여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김종건 선생이 저 뽕나무 밑에서 돌아가시고 군민청 위원장도 죽고 조직부장도 희생되었습니다. 김영복 선생, 후방부장 등 여러 명이 잡혔습니다. 나는 돌다리를 건너려고 이쪽으로 달려왔는데 바닷물이 들어와서 물이 벙벙하지 않아요. 강폭이 100미터도 넘게 보였어요. 얼른 옷을 벗고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수영을 좀 했거든요. 물 밑으로 헤엄치다가 숨이 차면 물 위로 코만 내놓고 숨을 쉬면서 헤엄을 쳤습니다. 저 아래 강이 굽어지는 데가 있지 않아요? 강 건너에 마을이 있구요. 강을 따라 가다가 그곳에서 강을 건넜습니다. 3월이지만 물밖에 나오니까 오사하게 춥데요. 사격권 밖이라 총 맞을 염려는 없는데 추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아무 집이나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없데요. 몇 집을 들렀는데 사람이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어느 집에 들어가서 그 집 남자 옷을 입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종일 강을 사이에 두고 적아 간에 대치하고 있었어요. 그 애들이 박격포를 쏘아서 박격포탄을 소모시킨다고 산 위에서 인공기를 흔들었습니다. 저들이 박격포를 쏘면 포탄이 터졌던 구덩이에 엎드렸다가 또 나와서 인공기를 흔들었습니다. 포탄이 떨어졌던 그곳에 또 포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점을 이용한 것이지요. 회문산에서 배운 전법을 그날 잘 써먹었습니다.”
 
미군 탱크가 못 들어오게 큰 길을 세 군데나 파버렸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데, 서울이나 지방에서 잘 되는 장어집은 거의 다 풍천장어라는 간판이 붙어 있잖아요? 이게 풍천강이고 여기서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합니다. 자연산 장어는 바닷물이 들고나는 강에서 잡힙니다. 굽건 지지건 맛이 좋지요. 그런데 장어를 여기서 잡으면 얼마나 잡겠습니까? 그 많은 풍천장어 집에 다 대겠어요? 고창에 몇몇 집을 빼고는 다 양어장에서 키운 장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차에 탔다. 가다가 차를 세운 한재룡 동지는

“9.28 후퇴 후에 이 지역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미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세 군데나 파버렸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래,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좋아할 민족이 세상에 있을까? 여러 형태로 저항하는 법이다.
 
“저들은 친일했던 서정주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 산 너머 사람입니다.” 우리는 심원면 면소재지에 갔다.

해방구
 
“이 지역 전부가 해방구였습니다. 1951년 3월 19일 화랑부대 11사단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했습니다. 그날 밤에 우리는 상하로 빠졌어요. 여기서 잡힌 이 지역 남자들을 적들은 다 죽였답니다. 좀 더 가면 건당 마을이 나오는데 경찰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학살해서 여러 집이 한날 제사를 지낸다고 심원이 고향인 유양원 선생이 전에 들려주더군요.”
 
인민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는 한재룡 동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모두가 분노했다. 우리는 심원면 소재지에서 아침을 먹고 상하 쪽으로 달렸다.

용감한 김용태 동무

“저 건너가 격포입니다. 여기가 동호해수욕장이구요. 1월말에 나는 여기에 없었습니다. 저들이 이곳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답니다. 심원과 상하를 막는 곳이지요. 그래서 우리 부대들이 들이쳐서 해방시켰습니다만 그것도 며칠이고 다시 놈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때에도 용태 동무가 역할을 많이 했답니다. 태복이가 변절하기 전 참모장으로 있을 때도 태복이보다 용태 동무가 앞장을 섰고 이름이 더 알려졌습니다. 체격 좋고 키도 크고,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1951년 1월 1일에 화폐개혁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용태동무는 대원 두 사람을 데리고 고부에 들어가서 고부협동조합을 털었습니다. 세 사람이 돈을 배낭에 가득가득 담아가지고 왔어요. 도당에 돈을 많이 보냈습니다. 내가 1954년에 군산형무소에 가니까 용태 동무 일행을 재워주었던 고부 소방대원 김부영이 그때까지 묶여 있더군요. 그 일로 자그만치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김태복이 그 자는 고창유격대 참모장으로 있다가 자수를 했어요. 우리 내부를 환히 알고 있잖아요. 고창경찰서, 부안경찰서, 장수경찰서 정보과장으로 있으면서 우리에게 피해를 참 많이 주었습니다. 벌써 뒤졌어요. 저 살겠다고 여러 사람을 죽이고 못살게 굴었던 태복이 그 자는 천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달렸다. 얼마 동안 달리다가 굴을 지나자 바다였다. 섬들이 보이고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이 보였다. 차를 세운 한재룡 동지는 여기가 미군을 잡은 곳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미군을 잡은 곳

“1951년 2월쯤,  당시에 나는 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마을 아주머니들이 꼬막을 캐러 나왔다가 미군을 보고 기겁을 해서 도망갔답니다. 미군 소식을 들은 동무들이 와서  매복을 했대요. 미군함이 바다 가운데 떠 있고 미군 네 사람이 고무보트를 타고 물가에 와서 측량을 하는 것인지 왔다갔다 하는데 사격거리가 멀어서 물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까이 접근시켜 놓고 때렸답니다. 권총 네 자루를 노획했고, 시체는 미군이 거둬 갔답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얼마를 갔을까. 차를 세운 한재룡 동지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기좌실을 중심으로 성남리, 금산리, 용대리, 하장리 마을에 1951년 3월 19일까지 목포시당, 영광군당, 장성군당, 함평군당, 무안군당, 고창군당 산하 기관들이 있었다고 설명을 했다. 큰 산도 아닌 작은 산 밑, 들 가운데 마을 들인데 1951년 3월까지 합법을 유지했을까? 변방에다가 고창 경찰력이 미미한 데 반해서 유격대 무력이 막강한 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갑오농민전쟁 때 창의선언문을 선포한 구암리
 
우리는 공음면 구암리에 갔다. 갑오농민전쟁 창의 선언문을 선포한 곳이다. 손화중 장군이 활동한 갑오농민전쟁 발상지다. 돌비석이 높이 서 있고 몇 점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너무도 허술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도 고창읍 덕정리라고 합니다. 전봉준 장군은 고창 농민군을 인솔하여 고부로 가는 도중에 흥덕에서 농민군이 결합하고 정읍 태인 농민군과 연합하여 고부를 들이쳤대요. 그뿐 아니라 1950년 봄에 전남도당 위원장 김선우 동지가 구암리에 와 있었고 이 마을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지하에서 나온 김선우 동지도 잔치를 크게 했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9.28 후퇴 후에 난리가 났답니다. 고창중학교 9회 졸업생인 나대순씨가 자수해서 부락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했대요.”
 
한재룡 동지는 차를 안내하다가 어느 언덕 위에 세웠다.

600여명의 인민을 살해한 선동리

“우리가 내장산으로 들어갔을 때 11사단이 저 아래 선동리에서 무장면, 공음면, 대산면 인민들을 600여 명이나 학살했답니다. 과거사 진상위원회에서 조사해 갔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을 한두 명도 아니고 제 놈들은 애미 애비도 없던가.

문수사

   
▲ 문수사 들머리에서 가을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문수사로 떠났다. 노송과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어우러져서 독특한 정취를 자아냈다. 우리 일행은 깊은 산중에 온 듯 가을의 막바지에서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불타는 듯한 단풍나무 밑에서 사진도 찍고, 문수사 경내에 들어갔다. 관광객들이 절을 둘러보고 있었다. 문수사는 숲 속에 묻혀 있는 아담한 절이다. 새 건물을 지으려는 것인지 포크레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부질없는 바람일까? 집은 짓되 문수사만이 지니고 있는 아담하고 포근한 점은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수사는 내가 고창중학교 1학년 때 원족을 왔고, 영광으로 1951년 9월에 복수투쟁을 나갔다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간 곳입니다. 1950년 9.28후퇴 후에 영광에 들어온 군인들이 불갑산 안팎에서 3,000여 명이 넘는 인민들을 학살했습니다. 학살 1주기가 되는 1951년 9월 27일에 우리 부대가 영광으로 복수투쟁을 나갔습니다. 갈재 밑으로 해서 방장산 능선을 타고 영광에 갔는데 나무를 이중으로 총총히 박아놓고 안에 전호를 파놓았데요. 경찰서와 주변 지서를 한꺼번에 쳤는데 나무를 톱으로 자르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못 먹고 어쩔 수 없이 후퇴했습니다. 500명이 넘는 큰 무력이 방장산을 향해서 대낮에 능선을 타고 행군을 했어요. 영광 고창 간 국도로 병력을 가득히 실은 트럭이 끝없이 들어오데요.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퍼놓고 갔습니다. 행군하는 우리 대열의 중간을 자르기 위해서 기어 올라왔습니다. 산악전에 능한 유격대가 아닌가요? 더욱이 높은 곳을 장악한 우리들은 도처에서 그들을 작살냈습니다. 우리가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는데 참모장 동지가 일 개 중대가 앞에 나갔으니까 동무들이 뒤따라가서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 중대원들은 앞에 동무들이 나갔으니까 안심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척구도 없이, 거리보장도 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두 번째 고개를 오를 때 갈밭에 숨어 있던 경찰들이 불시에 일어나서 총을 갈겼습니다. 맨 앞에 두 소대장이 가고 다음에 목포가 고향인 박두진 부소대장이, 그리고 내가 갔는데 총성과 동시에 부소대장이 총탄에 맞은 듯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나는 엎드리면서 박동무의 가랑이를 힘껏 잡아챘습니다. 급경사에 억새밭이라 미끄러지고 굴러서 위험지구를 금세 벗어났습니다. 총알이 박동무의 허벅지를 뚫고 나갔어요. 부축해서 집결지로 갔습니다. 앞에 간 부대가 전투를 하다가 옆으로 빠진 것을 모르고 마음 놓고 가다가 경찰의 매복에 걸려들었어요. 저들의 간뎅이가 컸더라면 그날 죽었습니다. 우리 대열이 적의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때렸으면 어쩔 뻔했어요? 다 죽었습니다. 우리 중대 동무들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무섭게 달려드는 기세에 경찰들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저들의 매복 장소에 갔더니 두 소대장 동무가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어요. 머리에 얼굴에 구멍이 여러 군데 뚫려 있었습니다. 동무들은 슬픔을 삼키며 시신을 묻어주고 떠났습니다. 연대본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적의 박격포 유탄에 연대장 엄정기 동지가 말 한마디 못하고 절명하셨다는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대장을 잃은 동무들은 침통한 심정으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양지 쪽에 고이 묻어드리고 떠났습니다. 이곳 문수사에 왔어요. 사찰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이 부근이 넓지 않아요?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하룻밤 하루 낮을 쉬고 문수사를 떠났습니다.”

고창을 지나다

“고창은 동무들이 전선을 다 절단했기 때문에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불빛 하나 없고 이따금 총성이 대지를 덮고 있는 고요를 찢어놓았습니다. 동무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고창읍 외각으로 고창천을 넘고 내가 학교 다닐 때 」양팔 정낙진 친구의 집 옆으로 갔습니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아직 초저녁이라 친구들이 자지 않고 있겠지? 총을 멘 이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고창중학교에서 북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큰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긴장이 되데요. 그런데 밤마다 산 능선이나 울퉁불퉁한 좁은 길을 걸어 다니다가 평평한 큰 길을 걸으니까 거저 가는 것 같데요. 차츰 긴장이 풀어지는지 동무들은 두 명 세 명씩 이야기를 나누며 열을 짓지 않고 큰 길 가득히 걸어갔습니다. 대부대라 매복은 고사하고 지서 옆으로 가는 데에도 총 한발을 안 쏘데요. 입산 후 큰 길로 30여 리를 걸어보았고 그때의 정서가 오롯이 남 아있습니다. 이밤산 입구에 가자 날이 새더군요.”
 
문수사를 돌아 나오면서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데 옛 일, 가신 님들이 떠올라서 이따금 분노의 응어리가 말 속에 튀어나왔다. 1950년 9.28 직후 고창군당이 입산한 문수사 밑에 고수면 은사리에 가서 둘러보고 돌아 나왔다. 저수지 옆에 차를 세워 놓고 한재룡 동지가 입을 열었다.

한재룡 동지의 체포

   
▲ 한재룡 동지가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저기 저 너머에 사리재(새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지시문을 받고 도당에 갔다 오다가 이밤산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당원이 아니면 군당 조직부 산하 연락원이 될 수 없어요. 나는 1950년 12월에 추천을 받아 당에 입당하고 연락임무를 맡았습니다. 무장도 없이 혼자 다니는 연락원들은 희생이 많았습니다. 내 뒤에도 여러 동무가 죽고 잡혔습니다.” 당에서 주는 네포를 몸 안에 깊이 간수하고 사리재를 떠나던 자신, 마지막이 되어버린 당의 과업을 완수하고 돌아오다가 잡힌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오르는 듯 말을 마치고 먼 산을 바라보는 한재룡 동지는 엄숙하게 보였다.

고창중학교

   
▲ 한재룡 선생과 임방규 선생이 다녔던 고창중고등학교 전경.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고창고등중학교에 갔다. 한재룡 동지는 손으로 학교 건물을 가리키면서
 
“학교 밑에 계단이 있지요? 우리가 다닐 때는 잔디가 있고 그냥 언덕이었습니다. 1948년 가을에 학살단이 고창에 와서 취조도 안 끝난 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농민 세 분을 저 계단에서 학살했습니다. 나도 그날 나가서 보았습니다. 중학생, 직장인, 고창 농민들을 운동장에 끌어다 놓고 그들 앞에서 총살했습니다. 정읍농업학교에서, 장성에서도 학생 12명을 살해했다고 들었습니다. 48년에 학살단이 돌아다니며 살해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에 남겨야 합니다.”
 
고창중학교는 고창농민들이 쌀을 모아서 만든 학교인데 재단이 5,000석이고 일 년에 100명을 모집했습니다. 전북을 통틀어서 사립학교는 고창중학교밖에 없었습니다.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의식을 가진 선생들이 여러 명 계셨습니다. 1926년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사건 때 동조했고 일제 때는 물론 해방 후에도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년이 아닌 우리 학급에서만 싸우다 가신 동무가 박금열, 이계수, 김시봉, 조재문이 있고 감옥 생활을 한 동무가 김영수, 유종현, 한재룡, 임방규, 이칠규 다섯명입니다. 그 중 네 명이 비전향으로 나왔어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색테러

“좀 거슬러 올라가서 1947년에 백색테러단이 경기도에서 충북, 충남을 거쳐 전북 일원에서 백주에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군, 면 간부는 물론 리간부에 이르기까지 살림살이를 모조리 때려 부쉈고 잡히는 대로 몽둥이로 두들겨 팼으며 감옥에 보냈습니다. 악명 높은 테러단이 정읍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고창중학교 학생들이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200명씩 고창중학교와 큰 길을 주야로 지켰습니다. 그 정보를 접한 테러단은 고창에 못 들어왔고 고창만은 테러를 모면했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떠났다.

학살당한 60여 명이 묻혀 있는 곳

고창고등중학교에서 흥덕 쪽으로 300여 미터 가면 오른편에 홍익문이 나온다. 한재룡 동지는 차를 세우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홍인문 담을 따라서 왼쪽으로 돌아갔다. 한재룡 동지는 담 옆에 콩밭을 가리키며 “이곳에 60여 명의 무고한 인민들이 묻혀 있습니다. 학살당한 태반이 장성 피난민이라고 합니다. 제 아버님이 소식이 끊긴 내가 여기에 묻혀 있지 않나 해서 시체를 다 뒤져 보았으나 아들을 못 찾고 당신 혼자서 시체가 쌓여 있는 큰 구덩이에 흙을 떠다가 묻었다고 하시데요.”

우리는 잠깐 묵념을 하고 떠났다. 신림면 용초동에 갔다.

“저 쪽에 폭포가 있습니다. 1951년 5월에 고창군당 위원장 안경환 동지가 여기서 전사하셨습니다. 못된 놈의 신고로 경찰의 포위 속에서 권총으로 대항하다가 마지막에 자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용태부대가 이 마을에서 조직되었어요. 방장산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저쪽에 가면 굴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옛날 동학군이 많이 있었다는 자연굴입니다.”

한재룡 동지의 설명이었다. 우리는 흥덕으로 떠났다. 흥덕 시내 구도로 언덕에 차를 세우고 한재룡 동지가 설명을 했다.

미군 쓰리코터와 승용차를 깐 곳

여기서 1950년 10월경에 매복하고 있다가 쓰리코터 한 대와 승용차 한 대를 깠답니다. 미군이 타고 있었대요. 총 7,8정을 노획하구요. 미군부대가 줄포 쪽에 있었는데 포만 쏘고 달아났답니다. 뒤에 시체를 가져갔대요. 이 작전을 용태 동무가 지휘했다고 들었습니다.

직사포 두 문을 빼앗기다

“1950년 11월에 경찰이 흥덕 배풍산을 장악했습니다. 전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했어요. 그래서 고창군 3개 중대가 연합해서 들이쳤습니다. 후퇴 시에 버리고 간 직사포를 가져다 쏘고요. 포는 있는데 포사수가 없었습니다. 포 쏘는 것을 보기만 했다는 인민군 동무가 쏘았는데 안 맞데요. 가마니를 말아서 괴여 놓고 쏘니까 포탄이 전호 옆에서 터지데요. 낮에는 쉬고 밤에만 전투를 했는데 워낙 적들의 화력이 세서 배풍산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 뒤로 보급로를 차단했어요. 저들은 보급품이 끊어지자, 우리도 모르게 빠져버렸고 우리가 배풍산을 장악했습니다. 이어서 성내면 해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보름 만에 성내면을 점령했는데 국방군 11사단 300여 명이 진격해 왔습니다. 우리는 완강하게 방어하다가 성내면을 3일 만에 내주고 직사포 두문을 놓아둔 채 철수했습니다. 용대동무와 태복이가 부상당했는데 태복이는 작아서 동무들이 업고 뛰었지만 용태 동무는 무거워서 타작하던 볏단을 덮어주고 왔습니다. 해거름에 용태 동무는 샛길로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돌아왔어요. 동무들은 모두 놀라며 반가워했습니다. 대포는 얼마나 크던지 큰 길에서는 20여 명이 끌지만 좋지 않은 길에서는 한 쪽에 20명씩 40명이 끌고 다녀서 짐이 되기도 했지만 빼앗기고 나니까 그렇게 허퉁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애통했던 정서가 지금도 남아있는 듯 말 속에 묻어나왔다.
 
1948년 대낮에 들을 가로지르던 구빨치산
 
차가 정읍으로 달리는데 송계채 동지가 안내를 했다. 좁은 길로 들어가다가 송 동지가 차를 세우고  “저 안쪽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아까 지나 온 소성국민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정읍농업학교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내가 열일곱살 때, 그러니까 1949년이지요. 보리가 누렇게 익었을 땝니다. 학교에 갔다 오는데, 아마 너댓 시 되었을 겁니다. 부안 쪽에서 일곱 분이 총을 짊어지고 오데요. 처음에는 일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보니까 국방색 옷을 입고 있어요. 뚝방에서 좀 쉬고 떠났는데 뒤에서 총을 쏘아대더군요. 나는 국사봉으로 올라갔습니다. 왜가리 동지와 정일 동지 등이 변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그분들을 잡으려고 차에 경찰을 가득가득 싣고 가다가 동지들의 매복에 작살났답니다. 대승을 거둔 우리 동지들이 노획물을 한짐씩 짊어지고 대낮에 들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뻤습니다.”
 
설명하는 계채 동지는 소년시절로 돌아간 듯 석양빛까지 비쳐서 앳되게 보였다.

9.28 직후 정읍군당이 입산한 새암바실

우리는 이밤면 새암바실 골짜기로 갔다. 날이 어두워가고 있었다.

“정읍군당이 9.28 직후에 입산한 곳인데 정읍 각 기관과 유가족, 산간지역 인민들이 만 명도 넘게 이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정읍 유격대는 소총 7,8정으로 시작했는데 1951년 6월경에는 적의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 200여 명의 막강한 전투부대로 성장했습니다. 정읍군당은 이곳이 평야지라서 얼마 후에 거점을 저 산 넘어 항가래실로 옮겼습니다.”
 
송계채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쌍치로 떠났다. 종암식당에서 저녁을 잘 먹었다. 밥상을 치우자마자 김영진은 비디오 카메라 장치를 해놓고 대기했다.

한재룡 동지의 인터뷰

정부영이 한재룡 동지에게, “살아오신 내용을 간략하게 들려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자 한재룡 동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향이 고창입니다. 고창국민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 고창중학교에 다녔습니다.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하여 임방규 동지와 조직생활을 좀 하고요. 우리는 저학년이라 큰 일은 못했습니다. 삐라를 붙이고 봉화투쟁할 때 장작을 나르고 정한 시간에 불을 붙여서 봉화를 올린 게 다입니다. 조직적으로 집체학습을 했습니다. 총화도 짓고요.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영암이 고향인 두 선배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중학교나 국대안 반대, 모스크바 삼상결정 지지 등의 내용으로 한두 번씩은 동맹휴교를 했는데 광주서중학교(지금의 제일고) 학생들이 일찍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은 서중학교 주모자들을 지명수배하고 심지어 극우분자들을 시켜서 서중학교에 불을 지르고는 서중학교 좌익학생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서중학교가 불탈 때 불을 질렀다는 학생들이 실은 우리 집에 있었어요. 지명수배로 피해 다니던 서중학교 학생들이 순천중학교 모자를 쓰고 우리 집에 하숙하고 있던 선배를 찾아왔습니다. 고창중학교로 전학하기 위해서 온 학생들이라고 해서 나는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그 학생들은 우리 집에서 며칠 있다가  목포로 갔다가 순천에 가서 잡혔습니다. 그날 학생들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서중학교에 불을 질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경찰이 조작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점은 밝혀졌지만 서중학교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진범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많이 느꼈습니다.”

김해섭 동지 인터뷰
 
“나는 정읍 덕천면에서 1928년에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와서 책방 점원을 하면서도 강의록을 보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전주공업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사학년 수료를 하고 학교 선생으로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쳤어요. 그런데 6.25 전쟁 후 그것이 의식적으로 대한민국에 충성했다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자위대원을 따라서 사무실에 갔는데 자위대장 법동이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다가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방으로 선전사업도 나가고 강습을 받은 대로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요, 인민공화국이야말로 민중이 주인인 정의롭고 진정한 정부라고 가르쳤습니다. 9.28 후퇴 후에 의용군에 나갔던 선생이 혈서를 써 들고 자수를 했습니다. 그 자가 공화국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나한테는 몇 차례 학교에 나오라는 통지가 왔구요. 안 나가니까 같은 학교 선생인 질녀가 아재는 상 받아야 할 사람인데 왜 안 나가느냐고 하데요. 한 입 가지고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이 좋다고 했다가 나쁘다고 하고 인민공화국을 정의로운 정부인데 또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합니까? 도저히 못 하겠더군요. 인민공화국에 대한 확신도 있었구요. 그래서 입산했습니다. 내 나이 여든넷인데 옳은 길에 들어섰을 뿐, 길을 닦는 데 조약돌 같은 역할도 못해서 서운합니다.”
 
“유격대에 있을 때 제일 기뻤던 때는 언제셨나요?”
 
“대승했을 때입니다.”
 
“제일 괴로웠던 때는요?”
 
“동지를 잃었을 때입니다.”
 
“하시고 싶은 일은요?”
 
“책도 많이 읽고 싶고 집회에도 나가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에 오염되어 내 앞만 가리는데 설령 오늘 좋은 직장에 있을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책을 찾아야 합니다. 민족문제 해결이 없이는 계급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의 일차적 과제는 통일입니다. 통일에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족대단결 정신으로 단결합시다.”
 
밤이 늦어서 인터뷰를 마치고 곧 잤다. 다음날 아침에 밥을 먹고 떠났다.

노일환의 고향
 
운암마을에서 차를 세운 김해섭 동지가 입을 열었다.
 
“전북 도당이 회문산에서 후퇴할 때 정읍, 순창, 장성 투쟁 인민들하고 비무장 기관 동무들이 만 명도 넘게 보였습니다. 저 위 신광사 재를 넘어서 요 골짜기로 들어왔습니다. 비무장 대열의 퇴로를 보장하기 위하여 기포병단 한 개 중대가 여분산 상봉에서 결사전을 전개했습니다. 한 동무가 살아남고 전원이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여분산 줄기를 바라보는 해섭 동지는 사지에서 안전지대 쌍치로 빠져나왔던 그날이 떠오르는 듯, 인민을 살리고 자신을 바쳤던 동무들을 생각하는 듯 엄숙하게 보였다.
 
“이 마을이 1949년 이승만 정권이 국회 프락치 사건을 날조하여 구속시켰던 노일환씨 고향입니다. 그의 동생 노장환이 우리 동집니다. 징역을 15년인가 살고 나왔는데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막내 동생 노영환씨는 지금도 쌍치에 살고 있습니다. 일제 때 만석군에다 대학들을 나왔는데 경향이 좋았답니다.”

한 쪽 귀를 잘린 처녀
 
“이 마을에 합법 때 리 여맹위원장인가, 조직부장인가 한 처녀가 있었는데 국방군이 한 쪽 귀를 잘라가 버렸어요. 오월 공세 때입니다. 저들의 추격에 어머니와 함께 쫓기다가 총에 맞아 쓰러졌답니다. 어머니는 멀지 않은 덤불 속에 숨어 있었구요. 해가 지자 어머니가 딸이 쓰러진 곳에 갔는데 총탄이 하복부를 관통하고 한 쪽 귀가 없는 피투성이의 딸이 살아 있었대요. 업어서 옮길 수도 없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 어머니는 목 놓아 통곡을 했답니다. 그 부근을 지나던 연락원 동지가 밤에 산중에서 통곡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갔답니다. 얼른 업고 가마골 연락부트로 왔어요. 동무들의 정성스런 간호로 완치되었습니다. 내가 사령부 호위 부대에 있을 때 연락부트와 가까이 있어서 자세히 듣고 보았습니다. 총을 맞고 쓰러졌을 때 군인 놈이 와서 총대로 얼굴을 들쳐보고 괜찮게 생겼는데 죽었다면서 귀를 자르더랍니다. 꿈틀거리면 살아 있다고 총을 쏘지 않겠어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은 듯이 그 아픔을 참아냈답니다. 한 쪽 귀는 내놓고 잘린 쪽은 머리로 가리고 지냈습니다.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봤습니다. 지금도 안산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쌍치에 와서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그 분 아들만 만나보았네요. 빨치산을 사살했다는 허위보고가 올라오자 증거로 귀를 잘라오라고 지시했던 모양입니다. 확실한 근거 없이 전쟁 때 국방군이 귀를 잘라갔다면 곧이 듣겠습니까?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나 범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그것도 동족을 그럴 리가 없다고 글쓴 나를 도리어 욕하고 규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 잘린 여성이 살아 있는 데에야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요. 과거사 진상 규명 직원이 귀 잘린 사진을 찍어 놓았습니다. 잡힌 여 동무들에게 자행한 저들의 갖가지 만행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 음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김해섭 동지가 안내했다. 차가 구불구불 돌아서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갔다. 순창군 쌍치면 부정리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이 마을은 부촌이고 정읍군 덕천면, 이평, 정읍, 감곡, 신태인, 태인 면당이 입산 초기에 있었습니다. 인민성이 좋았어요. 좀 밑으로 외양실이 있고 빈촌이지만 인민성이 좋았습니다. 우리가 있다가 떠날 때 설 차례음식도 싸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 밑이 터실, 국사봉 중턱의 만수동은 번개병단의 거점이었습니다.”

부상당한 나를 동무들이 사지에서 구하다.

농바우 좀 위쪽에서 내가 차를 세웠다.

“이 논에서 내가 죽을 뻔했습니다. 북재 뒤 고지에서 부상당한 나는 적의 추격을 받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이 논을 질러가는데 놈들이 앞산 밑에 와버렸어요. 치백 동무는 몸이 약해서 나를 업고 뛰지도 못하지, 동무의 어깨에 얹혀서 가다가 엎어지고 또 넘어지고 은폐할 곳이 있어야지요. 적탄이 팍! 팍! 둔탁한 소리를 내며 논바닥에 박히자 치백 동무에게 한 사람이라도 살게 빨리 뛰라고 하는데 저 골짜기에서 다섯 동무가 총알처럼 달려오데요. 세 동무는 논둑에 엎어져 엄호 사격을 하고 두 동무는 달려와서 나를 들쳐 업고 뛰었습니다. 동무들이 안 왔으면 그 날 나는 이 논에서 죽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한 동무들, 안전지대에서 밥을 입에 떠 넣어주고 해진 바지를 꿰매주던 고동무가 떠올랐다. 우리는 길이 포장되어 있는 농바위 옆으로 달렸다. 북재! 1951년에는 집 열대여섯 채가 있던 아담한 마을이었는데 집이 없고 폐촌이었다. 대밭하고 집터만 남아 있었다.
 
“북재 뒤에 능선이 있잖아요? 저기서 1951년 4월 24일 11시경에 제가 부상당했어요. 접근전을 하다가 왼쪽 1미터 옆에서 수류탄이 터졌는데 소리는 못 듣고 폭발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메로 오른쪽을 내리치는 듯 큰 타격에 총이 떨어졌습니다. 후퇴 신호를 하고 얼른 총을 들어서 왼쪽 어깨에 메고 뛰는데 피는 줄줄 흐르고 오른팔이 제멋대로 덜렁거려요. 팔이 나간 줄 알았습니다. 팔 하나를 끊고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데요. 나는 확 돌아서 앉았습니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손으로 따발을 앞으로 돌렸습니다. 따발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가기 때문에 왼손으로도 사격할 수 있거든요. 60여 발 남은 총탄을 적에게 퍼붓고 그 자리에서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탄창 한 편이 구겨져 버리고 총신 두 군데와 묘준기가 날아가 버렸어요. 몽둥이만도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서서 뛰었습니다. 고지에 올라갔더니 동무들이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놀라데요. 웃옷을 벗기려고 해요. 그러지 말고 팔소매를 찢으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위생병이 가위로 쭉 찢었습니다. 상처가 드러나자 내가 놀랄까봐 못 보게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데요. 응급조처를 끝내자 놈들이 고지에 올라왔습니다. 또 뛰는데 자꾸만 엎어지니까 사령관 동지가 이치백 동무에게 임동무를 어떻게든지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고 모두 산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급했거든요. 논 몇 배미를 지나서 건너편 산에 붙어야 하는데 뒤에 처져 있던 나와 치백 동무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 논에서 죽을 뻔했고, 수류탄이 터졌을 때 오른팔을 뚫고 나간 큰 파편이 내 왼쪽 위 호주머니의 수첩을 날려버렸어요. 런닝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른쪽 가슴에도 일곱 군데나 작은 파편이 박히구요. 2cm만 앞에 나가 있었어도 가슴이 날아가서 죽었지요.”
 
죽음이 순간에 달려 있던 장면을 들려주고 우리는 돌아 나왔다. 김해섭 동지가 둔전마을 앞에 차를 세웠다.
 
“내가 입산해서 이 동네에 있었습니다. 부촌인데 인민성은 과히 좋지 않았어요. 부대가 주둔한 일은 없고 연락원이 자고 가곤 했습니다. 동네 뒷산이 국사봉입니다.”
 
차가 신성리를 지날 때 해섭 동지는 마을 앞에서,
 
“저 고지가 가파르지 않아요? 한 곳만 경사가 느슨합니다. 위는 대접을 엎어놓은 듯 오목하고요. 1951년 여름으로 기억되네요. 국방군 한 개 중대가 날이 어두웠는데 빠지지 않고 고지 위에 자리를 잡고 잤어요. 작전에 능한 문중기 작전 참모가 그걸 까겠대요. 다음날 첫 새벽에 두 동무를 데리고 떠나면서 총성이 들리는지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단 세 동지가 1개 중대를 기습하다니 말은 안했지만 불안했습니다. 우리는 아챙이 앞산에 있었어요. 날이 새기 직전입니다. 총소리가 콩 볶듯 볶아댔습니다. 한바탕 요란하던 총소리가 뚝 그치더니 그 후로는 총성이 들리지 않데요. 우리는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세 동무가 보이지 않아요? 동무들이 달려갔습니다. 탄알을 한 짐씩 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동무들을 얼싸안았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넘겨받아서 지고 거점으로 왔어요. 문중기 동지가 기습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셋은 가파른 곳을 올라갔어요. 놈들은 이중으로 보초를 세워 놓았데요. 가만히 기어서 보초선을 돌파했습니다. 저들은 총을 세워놓고 즐비하게 자고 있고 장탄한 중기가 걸려 있어요. 숨을 죽이며 접근했습니다. 자는 놈들에게 총을 쏘아봐야 몇 놈이나 맞겠습니까. 그래서 비상! 비상! 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겁먹은 놈들이 모두 자리를 차고 일어날 때 중기와 자동총으로 드륵드륵 갈겼습니다. 총은 아래로 던지고 탄알을 주섬주섬 배낭에 주워 담았습니다. 저들의 저항이 전혀 없었습니다.’
 
세 동지가 그것도 한 개 중대를 기습하는 게 쉬운 일입니까? 문중기 동지나 그런 대담한 작전을 계획했고 수행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지역 인민들로부터 48구가 들것에 실려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때가 떠오르는 듯 노전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여시목 밑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갔다. 걸음이 불편한 해섭 동지가 기어이 가겠다고 해서 싸목싸목 걸었다.
 
“여시목! 이 지역에서 전투를 참 많이 했네요. 거의 매일처럼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길로 위아래 고지를 발이 닳도록 다녔습니다. 여시목도 그렇고 고닥산에서도 전투를 많이 했는데 희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치고 빠지는 유격전법에 능했기 때문이지요. 쌍치 서북쪽을 담당했던 정읍 부대는 계속되는 투쟁을 통해서 강군으로 성장했고 쌍치해방구를 1951년 12월초까지 지켜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해섭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서울로 떠났다. 2박 3일 동안 꽤나 강행군을 했다. 특히 김영진은 동지들이 산에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앞뒤로 뛰고 격전 지역은 더 자세히 부근마을과 산을 연결시켜서 입체적으로 담아내느라고 뛰어다녔다. 김은진 또한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노트북을 때리고 수첩에 적고, 정부영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장시간 차를 모느라 애썼다. 다시 한 번 세 분의 열정과 노고에 노 동지들을 대신하여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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