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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1)
임방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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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31  10: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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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 왼쪽부터 고 송계채, 임방규, 최정범, 고 이성근, 조순덕 민가협 상임의장, 이영 민가협 전 상임의장. [사진제공-임방규]


2010년 10월 30일 오후 8시 30분에 우리는 서울을 출발했다. 이성근 동지, 송계채 동지와 나, 이영 전 민가협 회장, 조순덕 민가협 회장,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조영란 총 9명이 차 안에서 잡담을 하는데 조순덕 어머니가 배낭에서 꾸러미를 꺼냈다. 닭튀김이었다. 식성이 좋은 정부영의 입이 벌어졌다.

지리산까지는 야간이라 네 시간 정도 예상되기 때문에 느긋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전을 지나서 어느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가 떠났다. 점점 말소리가 줄어들다가 끊겼다. 운전하는 김영진 말고는 모두가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도 눈을 반쯤 붙인 것 같은데 산내면이란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어느 민박집에 찾아들었다. 외등이 켜 있는 뜰, 처마 밑에는 실에 꿰어놓은 깎은 감이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평상 위에 덜 말린 곶감 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곶감 하나를 집어서 입 안에 넣었는데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은 밤이라 방에 들어가자마자 발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는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숙소를 떠났다. 단풍이 든 지리산! 맑은 물이 흐르고 골짜기로 굽이굽이 돌아갈 때마다 눈 안에 들어오는 가을 산이 아름다웠다.

 ‘하황리 종이 공장’ 
 

   
▲ 전북노동신문, 남원군당 선전지 등을 제작했던 남원농민들의 한지 공장. [사진제공-임방규]

이성근 동지가 길 안내를 했다. 묻고 또 물어서 하황리 냇가를 타고 올라갔다. 집은 헐려서 없고 기구와 재료인 듯 비닐로 싸고 검은 비닐 망으로 덮어 놓았다. 언덕 밑에 바짝 마른 닥나무 너댓 묶음이 비스듬히 뉘어있고 닥나무를 삶아 고던 자리며 한지를 뜨던 시설이 가리개도 없이 드러나 있었다. 재래의 한지공장은 운명을 다한 것인가 마음이 울적했다.
 
“여기서 자신들이 생산한 한지를 이곳 농민들이 산에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농민들의 땀이 배어 있는 한지를 긴요하게 사용했습니다. 전북노동신문, 남원군당 기관지 투보를 한지로 발행했고요, 각종 벽보나 삐라 등 선전물은 물론 학습용지로도 사용했습니다.”
 
이성근 동지의 설명이었다. 우리는 상여집 같은 한지공장을 뒤로하고 떠났다. 하황리 동구 앞에 최정범(전 남원유격부대 부대장) 씨와 조광익(현대사 연구) 씨가 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최정범 씨에 따르면 하황리 냇가에 1950년에 한지공장이 십여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산내면 해방 투쟁’
 

   
▲ 산내면 해방투쟁에 참가했던 최정범, 고 송계채, 고 이성근의 산내면 지서 옛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제공-임방규]

최정범 씨의 안내로 산내면 면소재지 북쪽 능선에 올라갔다. 나무도 없고 밭도 아닌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산내면 지서가 있었습니다. 건물이 아니라 보루대 안에 지서가 있었습니다. 보루대 밖으로는 빙 둘러서 목책을 세워 놓고요, 1951년 8월 중순으로 기억되는데, 제가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동쪽으로 길 건너 소나무 밭이 있지 않아요? 거기에도 여기보다는 작았습니다만, 전방 보루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작은 보루대를 기습했어요. 고도로 은밀성을 보장하면서 접근했습니다. 논두렁 밭두렁으로 기어가던 앞선 동무가 보초를 생포했습니다. 보초로부터 비밀 암호를 입수한 동무들은 보루대 안에서 잠자고 있던 7,8명을 총성 없이 생포하고 이곳으로 오는데 돌격 총성이 울렸습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이곳 보루대 정문 앞에서 암호를 대고 목책 안으로 들어가서 순식간에 보루대를 점령했습니다. 전투개시 후 20분이 채 안 되었을 것입니다.”
 
지팡이를 잡고 앉아서 산내면 해방작전 전모를 들려주던 최정범 씨는 말에 힘이 있고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산내 해방작전에 참가했던 이성근 동지는,
 
“우리는 전날 달궁 느티나무 밑에서 점심을 해먹고 푹 잤습니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 18킬로를 걸어서 산내면에 도착했지요. 새벽 다섯 시쯤 총 공격을 했는데 보루대에서 불꽃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봤습니다.”
 
“나는 도사령부와 함께 산내 해방작전에 참가했는데 사령부에서 박격포 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발에 명중했습니다.”
 
송계채 동지가 보충했다.
 
“아닙니다. 내가 총지휘를 했습니다. 남원 유격대에 포도 없었고요, 포사격은 없었습니다.
 
“내가 포 쏘는 것을 직접 보았다니까요.”
 
송계채 동지가 안 본 것을 보았다고 말 할 리가 없고 60년이 지난 일이라 연락받은 내용을 잊을 수가 있다고 두 분의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 결론을 내렸다.
 

   
▲ 경축대회, 보고대회, 학습 등 진행되었던 달궁에는 아직도 그때 상황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산내지서를 탈환한 후에 포로와 함께 소학교 운동장에서 경축대회를 가졌습니다. 총소리에, 무서워서 숨어버린 것인지 인민들은 없고 우리 100여 명이 전승 보고와 구호를 외치고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경축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한지에 산내면 당 사무소 인민위원회, 농민회, 여맹위원회, 민청위원회라고 쓴 현판이 가게문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건물이 없는 공터에서 이성근 동지가 설명을 했다. “산내 지서에서 노획한 소총과 총탄 피복류와 식량을 지고 달구지에 싣고 유유히 달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지서장은 팬티만 입고 뒷문으로 도망쳐서 원천리 생태마을 감나무 위에 숨어 있다가 살았답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전북부대의 쉼터 달궁으로 갔다.
 

   
▲ 달궁에는 60년전 느티나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사진제공-임방규]

“이 느티나무는 60년 전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곳은 해방구라서 동무들이 오며가며 나무 그늘에서 쉬어갔구요, 보고대회나 학습도 하고 연락장소로도 이용했습니다. 1951년 8.15 경축행사를 아래 주차장에서 가졌어요. 전북도당 및 산하기관, 무장부대 투쟁인민이 이 골을 가득 메웠답니다.”
 
설명에 열이 오른 이성근 동지는 스물 한 살짜리 빨치산으로 돌아간 듯 능선 너머에 전북도당 트가 있었다고 설명을 했다. 6개 도당회의에 참가했던 송계채 동지는 반야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도당 트 위에 평평한 곳이 있는데 거기서 6개 도당 위원장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고 증언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를 오르내리며 옛 트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단심 폭포와 석실’
 

   
▲ 빨치산이 발행했던 신문.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달궁을 떠나서 뱀사골로 들어섰다. 겨우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차를 몰았다. 왼쪽은 아찔한 낭떠러지로 단풍이 들어서 곱고 골짜기 여기저기 잎이 진 감나무에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운치를 더했다. 찻길 끝에 석실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예닐곱 채가 있었던 마을인데 지금은 달랑 집 한 채가 있었다. 등산객들이 막걸리 한잔씩 나누며 쉬었다 가는 주막집이었다. 우리도 부침개에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고 떠났다.

길 아래로 내려가면 석실이 나온다. 석실 앞 푯말에 전북도당 출판부가 있었던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성근 동지는 도 출판부가 석실에 있지 않았고 길 위쪽 공터에 있던 집에서 출판사업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석실에서 5킬로쯤 올라가면 유명한 단심폭포가 나오는데 멀기도 하려니와 다른 일정이 있어서 단심폭포에 못가고 섭섭하게 돌아 나왔다.

단심폭포는 높지도 않고 수량도 적지만 뜻 깊은 곳이다. 폭포 앞에 넓은 곳이 있는데 남녀 빨치산들이 출정식이며 크고 작은 행사를 가졌으며 그때마다 폭포를 향해서 한 몸 조국에 바칠 것을 맹세했던 곳이다. 그 이름을 동지들이 붉을 단(丹) 자와 마음 심(心) 자를 써서 단심폭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와서 이성근 동지로부터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왔다. 뱀사골 입구에 빨치산 전시관이 있고 소위 충혼탑이 있다. 전시관에 들어갔다. 사진 몇 장은 옛날을 회상하게도 했지만 남의 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며 온갖 범죄를 자행한 미군이 섞여 있는 사진은 분노를 자아냈다.

‘김지회 부대가 최후를 맞이한 반선마을’
 
우리는 빨치산 전시관을 나와서 김지회 부대가 밀고자에 의해 전멸한 반선마을 옛터에서 이성근 동지가 구해온 14연대 애국병사들이 거병할 때 발표한 결의문을 김은정이 낭독했다. 
 

   
▲제주도 출병거부 병사위원회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제주도 출병거부 병사위원회 결의문>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정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할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지금 제주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단독 선거에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4.3 인민항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웅적으로 투쟁하여서 목숨을 바치고 있다. 이승만 도당은 무수한 애국자들을 살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14연대의 대대 병력 파견을 거부하고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의 편에 서서 동족상쟁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⑴ 우리 조국을 해방시켜 준 위대한 소련군은 북조선에서 철퇴하겠다고 서명했다. 따라서 남조선에서 인민의 학살을 조장하고 있는 미군도 더 이상 점령할 이유가 없으므로 즉시 철퇴를 거듭 촉구한다.
 ⑵ 우리 제 14연대 병사위원회가 봉기한 것은 진정한 조선인민의 군대로서 참여하여 우리 손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저희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여수 인민들은 저희들과 함께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에 다함께 매진합시다. 1948년 10월 20일.

결의문 속에 애국 군인들의 절절한 충정이 담겨 있다.

 ‘회문산에 가다’
 
우리는 반선마을을 떠났다. 되도록 여러 곳을 돌아보기 위해서 서둘렀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남짓 달려서 회문산에 갔다. 매표소에서 촬영하겠다고 했더니 그냥 들어가란다. 저들이 꾸려 놓은 전북도당 트에 들렀다. 밖에 보초가 서 있고 안에는 후방부 의무과 병기과를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도록 어설프게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출판부는 아예 없고 틈만 있으면 학습을 했는데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령관실이라고 쓰여 있는 별실에는 사령관과 권총이 있고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회문산 빨치산은 냇물의 낙차를 이용해서 수력발전을 했고 부근 몇 집은 전등을 켜고 있었으며 각 고지마다 여분산까지도 전선을 늘어뜨려서 전화로 적정을 보고받고 전투 지시를 했는데 전화기는 그 점을 나타낸 것이다.

도당 트는 위쪽 민가에 있었지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트 자리는 아니다. 우리는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장군봉에서 뻗어내린 중턱인데 헬기장이 있다. 쾌청한 날은 내장산은 물론 이밤산, 추월산, 무등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1개 중대 전원이 전사한 여분산 전투’
 
옛 모습 그대로 우뚝 솟아 있는 여분산을 죽기 전에 한번 꼭 가봐야겠다.
 
“골짜기 저 너머 최고봉이 여분산입니다. 우리 동지들 일개 중대 6,70여 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1951년 3월 19일경에 앞에 보이는 저 골짜기에 투쟁인민과 기관 동지들이 만 명도 넘게 모였습니다. 적은 사방에서 공격하고 있지, 더는 회문산을 지켜낼 수 없다고 본 사령부는 지리산으로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무장부대는 포위망을 뚫고 빠질 수 있지만 비무장 군중은 중간에 짤려서 전원이 죽거나 생포당할 수밖에 없게 되자 비무장부대를 안전지대인 쌍치로 뺄 작전을 세운 것 같습니다. 여분산이 떨어지면 저 안에 있던 만 여 명이 전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분산을 방어하고 있던 기포병단 1개 중대에게 인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최후까지 싸우라는 군사명령을 내렸답니다. 중대병력 6,70명은 포 집중사격을 받으면서 동지들의 시체를 방패로 전호에서 결사전을 전개했습니다. 13차의 반돌격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물리치며 인민의 퇴로를 보장했습니다. 최후의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희생되면서도 여분산을 사수하며 인민들 모두를 안전지대인 쌍치로 이동시켰습니다. 죽음으로 사지의 인민들을 구출한 영웅들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여분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동지가 1951년 가을에 우리 중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와서 그 여(汝)동무로부터 여분산 전투와 살아남은 경위를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여 동무는 중기 부사수로 중기분대원들이 다 죽고 중기 사수도 전사하자 자신이 중기를 잡고 사격하고 있었는데 뒷문에서 총을 쏘며  ‘손들어!’라고 하는 바람에 휙 돌아보자, 국방군이 겨누고 있던 M1에서 탄케이스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 순간 여 동무가 무섭게 달려 나가자 빈총을 들고 있던 겁먹은 그 자는 움찔 물러났고 그 틈에 눈이 쌓여 있는 북쪽으로 굴러서 살아났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중대가 1951년 6월경에 여분산 상봉에 올라가서 전호 속에 육탈이 된 동무들의 뼈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닦으며 옆에 있는 흙을 떠다가 묻어주었습니다.”

회문산 골짜기에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군사간부학교 옛터에 들려서 이성근 동지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장방형으로 지어 놓은 트에서 40여 명이 사십여 일 동안 당건설, 유격전술, 소련 당사를 배우고 총 다루는 법과 매복작전 기습작전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금산골로 갔다. 1차 기차습격에서 대승한 우리 부대가 노래하고 춤추고 환희의 밤, 경축행사를 했던 곳이다. 이미 어두워서 촬영을 다음으로 미루고 떠났다.

 ‘이성근 동지의 입산 동기와 빨치산 활동’
 
쌍치 종암식당에서 짐을 풀고 저녁을 잘 먹었다. 김영진은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카메라 장치를 했다. 정부영이 입산하게 된 동기와 산에서의 활동을 간추려서 들려주시라고 하자 이성근 동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정읍 농업학교에 다녔는데 전쟁 중에 학도병에 나가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형님이 포고령 위반으로 6개월을 감옥에서 사셨고, 매부도 좌익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가정적인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 같습니다. 1950년 7월 20일 쌍치 지역이 해방되자 쌍치면 당위원장 현순기 동지가 동무는 중학교에 다녔으니까 노동신문을 읽고 농민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여 농민들에게 선전사업을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노동신문은 정치적 술어가 많아서 이해를 다 못했지만 모르는 부분은 물어가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쌍치면당에서 사업하던 김인태, 노승근이 불러서 화선 입당을 했습니다. 남원 유격대에 가서도 입당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당에 두 번이나 입당을 했으니까요. 당시에는 통신사업이 미비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입산 후에도 쌍치면당에서 선전사업을 하다가 추천을 받아 노령학원(군사간부학교)에 갔습니다. 40일 동안 교육을 받고 특공부대 부소대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부대장은 정일 동지, 문화부 부대장은 김일성대학 출신 김규락 동지였습니다. 첫 전투는 칠보 해방작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경찰이 주둔하고 있던 학교를 점령했습니다. 특공대는 도당을 호위하는 게 주된 임무였어요. 1951년 3월에 도당이 회문산을 적에게 내주고 성수산, 팔공산, 덕대산을 거쳐 운장산으로 갔는데 운장산에서 전북 북부지도부와 만났습니다. 전북 북부지도부는 완주군 명지목에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어요. 공세 때 잠시 운장산에 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운장산에서 저녁밥을 준비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특공대장 박정일 동지가 선장소로 뛰어가다가 적탄에 쓰러졌습니다. 부대장이 전사하자 참모장 적성 동지가 부대를 통솔했습니다. 부대원은 4,50여 명이었습니다. 부대원 앞에서 도당위원장 방준표 동지가 자기 지휘관을 잃은 데 대하여 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얼마 동안이지만 왜 그런 곳에 거점을 정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갑니다. 김규락 동지가 불러서 사람에 의한 통신연락이 불가능할 때 활용하도록 신호법을 개발하여 익히고 가르치라는 과업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나는 김규락 문화부 부대장의 지도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통일이 되면 김일성대학에 추천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김일성대학의 학생이 된 듯 젊은 가슴이 한껏 부풀었답니다. 1951년 5월경에 남부군이 청주시를 해방시키고 덕유산으로 왔습니다. 6개 도당회의가 있었고요, 우리 특공대는 51병단으로 개편되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서 해산되었습니다. 나는 남원유격대에 배속되었어요. 제일 주요한 전투는 위에서 언급한 산내해방작전이었고 대강면 전투는 지서 주변에 목책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불과 사다리만 가지고 보루대를 점령했습니다. 대강면 지서 경찰들은 땅굴을 통해서 옆 산으로 도망가서 허탕쳤습니다. 남원군당은 전북도당을 무력으로 보위했을 뿐 아니라 식량과 필요한 용품을 조달하는 후방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51년 11월 1일 정령치에 주둔하고 있던 경찰을 기습해서 축출했습니다. 11월 15일경에 만복대 정령치 노고단에 올라온 국방군이 내려오면서 포위망을 압축했습니다. 퇴로는 한 군데밖에 없는데 적이 장악하고 있는 만복대를 탈환해야 가능했습니다. 우리 결사대는 빙판에 나무뿌리를 움켜잡고 기어 올라가서 벼락 치듯 해치우고 만복대를 점령했습니다. 만복대에서 달궁 사이 달궁에서 뱀사골로 인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비행기의 기총사격을 받으면서 때로는 싸우고 밤으로는 걷고 15일 만에야 장안산에 갔습니다. 백운산과 장안산 사이가 지지골인데 논개 사당이 있는 곳이지요. 지지골 너머가 번암입니다. 후퇴할 곳이 장안산 밖에 없었습니다. 새벽에 장안산은 정적에 쌓여 있었습니다. 90부 능선까지 오르자 바위틈에 숨어 있던 국방군이 불시에 기습공격을 했습니다. 아침에 기습을 당하면 여간 불리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대낮에 백운산으로 튀었습니다. 그런데 백운산에도 국방군이 있었어요.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지지골로 빠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북도당 성원들 여맹원 위생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지리산에서 15일 동안 제대로 못 먹고 낮에 전투하면서 밤으로 걸어서 장안산까지 왔다가 장안산과 백운산, 지지골에서 엄청난 인적 손실이 있었습니다. 나는 장안산에서 헤매다가 대천에 갔습니다. 국방군 수색조가 깔려 있데요. 양병선 동지는 앉아서 콧물을 흘리다가 움직이지 않데요. 흔들었더니 나무토막처럼 쓰러졌습니다. 동사했습니다. 적의 추격으로 나까지 6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남원과 광주를 거쳐 전주에 가서 사형언도를 받고 15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군사조직은 사령관 김명곤 동지, 부사령관 기관덕 동지, 작전참모장 적성 동지, 특공대장 정일 동지, 정치부 부대장 김규락 동지, 특공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중대장 완도사람 장, 2중대장 노석대 동지, 3중대장 이호 동지, 남원 군당과 군사체계 남원 군당위원장 김장록 동지, 부위원장 이은수 동지, 조직부장 안경호 동지, 선전부장 안창선 동지, 항일유격대 간부부장 이강소 동지, 기호과장 유병일 동지, 군사부장 이정수 동지, 2대대장 이상룡 동지(나는 인민군 총위로 알고 있는데 최정범 씨는 인민군 중좌라고 했다.), 초기 1중대장 이상룡 동지, 2중대장 최정범 동지, 3중대장 모르고, 최정범은 후에 남원 유격대 부대장으로 있었고 남부군 훈련대장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나는 남원에서 정치부 중대장으로 있었습니다.”

 ‘송계채 동지의 입산 동기와 빨치산 활동’
 
송계채 동지는 입산동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는 숙부님 영향을 받았습니다. 숙부님은 1949년 겨울에 고창군당 위원장으로 계시다가 밀고자에 의해서 체포되셨는데 고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온몸이 퍼렇게 멍들어 있대요. 숙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우리 집 대청마루 밑에 비트를 파놓고 어머님이 지성으로 숙부님 뒷바라지를 하셨고, 나는 연락사업을 했습니다. 빨치산과 지방조직과 연결하는 선사업을 하다가 1950년 봄부터는 거점을 아예 산에 두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때 백안기 동지나 적성 동지, 정일 동지 등을 알게 되었고, 1950년 7월에 그분들과 함께 정읍으로 입성했습니다.”
 
밤이 늦어서 우리는 이부자리를 깔고 잤다.

 ‘빨치산과 인민이 운동회를 가졌던 쌍치국민학교’

   
▲  ‘빨치산과 인민이 운동회를 가졌던 쌍치국민학교’ [사진제공-임방규]

10월 31일 일찍 일어나서 송계채, 이성근 동지와 나는 1951년 6월 25일에 운동회를 가졌던 쌍치국민학교에 갔다. 김영진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왔다. 학교 운동장을 질러서 건물 모퉁이로 돌아가자 신축건물에 영어실습실이란 간판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일어만을 배우고 일어로 대화하도록 강요했던 일제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나는 마음이 상해버렸다. 마침 숙직을 한 듯 30대 중반의 젊은이가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이 학교 교장이란다. 어린아이들까지 영어를 가르쳐야 하느냐고 했더니 수출 위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라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익혀야 한단다. 논쟁할 곳이 아니라 몇 마디 불만을 말하고 떠났다. 운동장 가운데에서 송계채 동지가,
 
“1951년 6월 25일에 이 학교 운동장에서 빨치산과 인민들이 어울려서 운동회를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고지마다 보초를 세워 놓고요. 각 부대 대항경기라서 대표로 출전한 동무들은 부대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씨름과 말 타고 상대방 깃발을 빼앗기, 100미터와 400미터 경주, 사격 등 종목도 다양했습니다. 씨름은 고창 김용태가 1등을 했어요. 인민과 빨치산이 스크럼을 짜고 이 운동장을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농악도 울리고요. 참 그날 소년 빨치산 대장이던 노일환 씨 아들이 연단에 올라가서 열변을 토했는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회상되는 듯 한참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빨리 와서 아침 드시라는 전화가 왔다.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일찍 떠났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피로리’

   
▲ 전봉준 장군 동상  [사진제공-임방규]

피로리로 갔다. 동학농민전쟁을 기획했고 지휘했던 총대장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다. 전봉준 장군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서 평소에 믿었던 하급장교 김경천 집을 찾아갔는데 상금에 눈이 멀었던 김경천이 밀고해서 담을 뛰어넘다가 적의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져 잡히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은 들것에 실려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재판관 앞에서 침착하고 당당하게 질문마다 반론을 제기했고 종로사거리에서 내 목을 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온몸으로 조국을 사랑한 충신이시다. 우리는 시설물을 돌아보고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서 장군의 생애와 최후를 그려보며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번개병단 사령관 장성구 동지’
 
피로리에서 조금 국사봉 쪽으로 올라가면 내동이 나온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번개병단 사령관 장성구 동지의 옛 집터를 보고 가자고 이성근 동지가 제의했다. 우리는 이성근 동지의 옛집을 둘러보고 내동으로 갔다. 장성구 동지의 친척들이 지금도 내동에 살아 있고 연세 많은 분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대밭 밑에 집은 없고 공터에 콩이 심어져 있었다. 이성근 동지가 입을 열었다.
 
“장성구 동지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머슴살이를 했고 커서는 산판이나 숯을 구워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장성구 동지는 48년 유격부대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쌍치가 해방된 직후였어요. 빨치산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과 먹산리로 구경을 갔습니다. 30여 명이 풀로 위장을 하고 오는데 개선장군처럼 보였어요. 부락민들은 나무 그늘에 앉았는데 그분들은 탱자나무 밑 뙤약볕에 앉아서 쉬데요. 장성구 동지가 이장을 만나보고 나서 열을 지어 갔습니다. 얼마나 부럽던지 나도 빨치산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성구 동지 아들이 오수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들의 생사는 모릅니다. 구 빨치산이고 합법 때 쌍치면당 위원장 현순기 동지도 내동이 고향입니다. 입산해서는 순창군당 조직부장으로 계셨어요. 아들 현병국이 서울에 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메데로 향했다. 도중에 차를 세웠다.
 
“1949년 여름에 이 근방에서 쓰리쿼타와 트럭에 탄 경찰들이 매복에 걸려서 다 당했습니다. 저 내에 꼬라박힌 차를 내가 보았습니다. 이영회 부대인지 장성구 부대인지는 모릅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가로 난 급커브 위에 퇴로가 보장된 매복하기 아주 적절한 곳이 있었다.
 
“틀림없이 저곳에 부대가 매복한 것 같습니다. 급커브라 차가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 사격을 들이대면 차는 망가질 것이고 적은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강폭이 넓고 물이 흐르고 있어서 강으로 들어가면 전멸하지 않겠습니까?”
 
매복하기에 절묘한 곳이었다.

 ‘대승한 메데 매복작전’
 

   
▲ 메데작전을 목격했던 이정옥 어르신께서 당시 상황을 직접 설명하셨다/이성근 선생도 함께.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떠났다. 길가의 표지판을 보고 우로 굽어서 다리를 건넜다. 마을에 팽나무와 정자가 나오고 더 올라가면 두 번째 팽나무가 나온다. 세 번째 팽나무와 정자가 나오는데 그 마을에 이정옥 노인이 살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전에 와본 적이 있는 이성근 동지가 집에 찾아들어갔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고무신은 있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계십니까?”
 
음성을 높이자 노인이 문을 열고 바듯이 나오셨다. 85세의 고령에 몸은 야위고 거동이 불편하셨다.
 
“전쟁 때 여기서 빨치산한테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던데 그때 상황을 좀 들려주시지요?”
 
“많이 죽었지요. 앞산 뒷산에서 저 밑에까지 총소리가 콩 볶듯 했으니까요. 우리는 무서워서 숨어 있었어요. 얼마 후에 나가보니까 팽나무 옆 내에 30여 구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데요. 그날 늦게 치안대가 시체를 수습해서 들것에 메고 가다가 옥천동 앞에서 또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참 많이 죽었습니다. 못 가져간 시체는 다리 미처 못 가서 왼쪽에 묻어 놓았습니다. 옥천동 무명용사의 묘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디 건강하시라고 몇 번이나 당부 말씀을 드리고 떠났다. 나오다가 묘비가 있는 곳에 들렀다 봉분이 아주 큰 묘가 있고 묘 앞에 ‘무명전몰용사 추모비’라고 쓰여 있었다. 뒷면에 1950년 음력 10월 4일 14시에 화랑사단 13연대 8중대 150여 명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학도병이란다. 우리야 미군정을 반대하여 학생운동을 했으며 목적이 뚜렷하고 의식이 확고한 학생으로 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했지만 학도병은 다르다.

동창인 박학규 벗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전주공업학교의 경우 4학년 이상 상급반 학생들을 학교에 소집해 놓고 학생복을 입은 채로 트럭에 실어갔단다. 포항전투에서 전멸했는데 나의 절친한 벗 손성국도 포항 정형읍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애석했다.

메데작전에 참가했던 이학천 동지로부터 전에 이곳에 와서 자세하게 들었다. 기포병단이 양 능선에 매복하고 있는데 정찰도 않고 국방군 대부대가 겁도 없이 총을 어깨에 멘 채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고 한다. 내를 건너지 않은 병력이 있었지만 선두가 2킬로 정도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양 능선에서 일제사격을 들이댔다고 한다. 도망갈 데가 있는가. 내를 타고 달아났는데 먼 거리라 거의 다 죽고 강을 건너다 또 죽었다고 했다. 죽은 숫자는 잘 모르고 총은 150정이 넘게 노획했다고 들려주었다. 한 개 대대가 전멸했다는 설도 있다.

메데 전투 이후 국방군은 보복으로 쌍치는 물론 주변 산간 부락 집들을 모조리 불 지르고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사살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드러내놓고 말을 안 하신다. 내가 1951년 4월 중순에 쌍치에 갔는데 집이 한 채도 없었다. 쌍치 인민들은 불타버린 집 방장 위에 나무를 세워서 묶고 이엉을 두르고는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각 마을마다 보초가 서 있고 군경이 나타나면 징을 치거나 연기를 피웠다. 적정신호가 있으면 보따리를 걸머지고 우리가 있는 산으로 올라왔다. 움막에 불을 지르면 재를 쓸어버리고 그 위에 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쌍치 돌고개전투’
 

   
▲ 순창 쌍치 돌고개에는 경찰이 구축했던 보루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소재지 들머리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돌고개 중턱에 차를 세웠다. 과히 높지 않은 산이라 모두 올라갔다. 도중에서 이성근 동지와 걷기 불편한 이영, 조순덕 어머니가 떨어졌다. 전파송신시설을 돌고개 위에 설치하기 전에는 사람 왕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등산할 만한 산도 아니고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라고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로 쌓았던 보루대가 허물어졌지만 아랫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돌고개를 해방시키고 8만석을 수확하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나온 후, 그러니까 20년 전에 돌고개에 왔을 때보다는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어느 지역보다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돌고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일 넓은 보루대 안에 자리를 잡고 돌고개 전투 전모를 설명했다.

“이곳에 본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 옆으로 보루대를 둘씩 돌고개에 다섯 개의 보루대를 저들이 인민들을 동원하여 돌로 견고하게 구축했습니다. 1951년 8월로 기억됩니다. 그 해 봄이 되자 식량이 아주 어려운 때인데 쌍치 농민들은 씨앗을 어디에 간수했던 것인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습니다. 못자리를 꾸리고 씨나락을 뿌렸습니다. 해방구 농민들은 움막 안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빨치산들도 거들고요. 논에 벼를 심고 벼가 무럭무럭 자라서 모개가 나오고 뜸이 들 무렵 경찰들이 보루대를 구축했습니다. 전북도 경찰국에서 200여 명, 전남도 경찰국에서 200여 명을 포함 400여 명의 경찰을 돌고개에 배치했습니다. 명목은 빨치산 보급을 차단한다는 구실이지만 다 익은 가을 곡식을 제 놈들이 약탈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루대 밑으로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전호를 파놓고 보루대와 보루대 사이를 유사시에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깊이 파 놓고요. 여기서 저 아래 내까지 물을 길어 나를 수 있도록 갈짓자로 파 놓았습니다. 보루대 위에서 총을 쏘면 토끼 한 마리도 올라올 수 없도록 돌고개를 요새화했습니다. 여기서 경찰이 주둔하고 있으면 쌍치 일원의 농민들이 추수를 할 수 있겠어요? 총을 쏘는데, 못하지요. 돌고개가 쌍치 복판에 있지 않아요. 곡식을 놈들에게 다 뺏기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심히 걱정하다가 농민들은 농민대회를 소집했습니다. 대회에서 호소문을 채택했대요. 농민대표 두 분이 가마골에 있던 우리 연대부에 찾아왔습니다. 연대 지도간부들은 호소문을 읽고 아무리 공격하기 어렵고 희생이 있을지라도 돌고개를 탈환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연대 전원을 소집했어요. 농민 대표가 연대원 앞에서 호소문을 낭독했습니다.
 
‘우리 아들 딸들은 빨치산에 나가고 늙은이와 아이들만 남았는데 가을 곡식을 저 놈들에게 다 빼앗기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407연대 동무들이 돌고개 경찰들을 축출해 주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곳은 407연대 말고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대충 그런 내용인데 글이 어찌나 절절하던지 대원들 모두가 울먹였습니다. 얼마 후에 정찰을 하고 작전계획을 세워서 일차 돌고개 습격을 했는데 원체 견고한 진지라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부대가 아닙니다. 며칠 후에 2차 습격을 계획했어요. 돌고개 해방과 1차 작전 때 희생된 동지들의 복수전까지 겸한 투쟁이기 때문에 궐기대회를 갖고 당세포회의를 통해서 돌격조를 조직했습니다. 동무들 모두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차기습 또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열병에서 회복기에 있었던 나는 토방으로 나가서 가마골로 돌아오는 부대를 마중했는데 경상자 십여 명은 걷고 7,8명의 중환자는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죽은 숫자는 모릅니다. 한 동지는 총탄이 옆구리를 뚫고 나가서 들것에 창자가 삐져나왔데요. 참 비참했습니다. 창자가 삐져나온 동지는 용케도 총탄이 창자를 뚫지 않아서 꿰맸는데 얼마 후에 완치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영광으로 9.28 복수투쟁에 나갔다가 박격포 유탄에 엄정기 연대장이 돌아가시고 참모장 최일관 동지가 연대장이 되고 번개병단 외팔이 참모장이 우리 연대 참모장으로 오셨습니다. 전번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계동 마을 앞에서 군용열차를 습격하여 총탄 수십만 발과 박격포탄을 몽땅 노획했습니다. 대승을 거둔 우리부대는 4,5일 후에 3차 쌍치탈환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시에 우리 부대는 여분산과 벌똥산 밑에 있었어요. 1951년 10월 20일인가, 밤에 연대 전체 동지들이 출정식을 가졌으며 전투적 구호와 혁명가요를 힘차게 부르면서 거점을 떠났습니다. 돌고개에 가서 새벽에 기습했어요. 동지들의 희생이 없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대뿐 아니라 408연대 전남 노령병단 정읍, 순창, 임실 유격대가 총동원되었어요. 광주에서 쌍치로 오는 도로와 정읍, 순창, 임실에서 오는 도로를 탱크나 지원부대를 실은 트럭이 통과할 수 없도록 길을 깊이 파놓고 무력을 배치했습니다. 또한 물길 아래 내 건너편에 개인호를 파고 한 개 분대를 매복시켰습니다. 물 뜨러 내려오면 일제히 묘준사격을 했습니다. 물 뜨러 내려오겠어요? 다 죽는데. 물길을 완전히 봉쇄했어요. 주공을 담당한 우리는 11시경에 박격포 서너 발을 고지로 발사했습니다. 우리도 포를 가지고 있다고 시위한 것이지요. 오후에도 몇 발 쏘고 어두워지자 돌고개 주위의 고지와 각 능선에 쌍치 인민들이 봉화를 올렸습니다. 독안에 든 쥐처럼 공포에 떨도록 한 것이지요. 초저녁에, 한밤중에, 새벽에 기습을 했습니다. 잠을 못 자게 신경전을 한 것이지요. 다음날에도 제 자리를 지키면서 주로 아지프로를 했습니다.
 
“총성 한 발이 들려오지 않는다.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와도 우리 부대가 도중에 길을 파놓고 매복하고 있기 때문에 전투를 하다 보면 해지기 전에 이곳에 못 온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가? 상급자들은 사지에 있는 여러분을 구출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 손들고 나오라.”
 
대충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또 기습을 했습니다. 2~3시경에 총공세를 들이댈 계획이었습니다. 밥 못 먹고 물 못 마시고 포위망 속에서 잠도 못 잤기에 사기가 더할 수 없이 추락하는 적을 단번에 격파할 작전이었습니다. 농민들 2,000여 명이 흰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죽창을 들고 돌격부대의 뒤를 바짝 따랐습니다. 전호 가까이 가서 일제사격을 들이대고
 
“돌격! 돌격!”
 
빨치산과 인민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함성은 쌍치 천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적들은 이제 죽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전호에 들어가자 텅 비어 있었습니다. 모두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농민들은 빨치산을 안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어떤 농민은 울어버렸습니다. 비록 1,2차전에서 동지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1951년 가을에 쌍치 농민과 빨치산은 팔만 석을 수확했답니다. 인민과 함께 싸운 돌고개 작전은 우리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빛나게 장식할 것입니다. 갑오농민전쟁이나 의병투쟁도 당시의 지배층들은 역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네 군데 보루대가 있던 곳을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내려왔다. 전투가 치열했던 제2고지며, 박격포가 위치하고 있던 곳, 장맛비에 흩어져 있던 여인의 뼈와 치마저고리가 엊그제 일인 양 선하게 떠올랐다. 쌍치 인민들의 희생과 고통을 어찌 이곳에다 적을 수 있으랴.
 
우리는 가마골로 향했다. 가마골은 위쪽 전남지역에 전남 유격대가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고 용소 아래쪽은 전북지역으로 46사단 지휘부와 407연대가 1951년 여름 한때를 보낸 곳이다. 먼저 용소에 갔다. 영산강 발원지라고 쓰여 있었다. 이영 어머니는 고향이면서도 못 와본 가마골에 이제야 왔다고 좋아하셨다. 길 옆에 큰 비석이 있는데 가마골의 위치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면서 빨치산 활동의 일부를 소개한 곳에 노령병단 김병억 사령관 산하에 기포병단, 카츄샤병단, 번개병단이 가마골에 있었고 1951년 8월의 격전에서 국방군 8사단 소속 군인 445명이 사망했으며, 800명의 부상자를 냈다는 대목이 있다. 노령병단은 전남소속이고, 기포병단과 카츄샤병단, 번개병단은 전북도 기동부대다. 전남 노령병단 사령관이 전북부대를 산하부대로 지휘통솔 했다는 내용은 잘못된 대목이다.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시정해야 한다. 그리고 가마골에 1951년에 기포병단은 있었지만 카츄샤병단과 번개병단은 없었다. 김병억 노령병단 사령관은 장성중학교 출신으로 1948년에 입산하여 19세 때 노령지구 빨치산 사령관을 역임했고, 1950년 전쟁 후에도 노령병단 사령관으로 전술에 능한 젊은 군사간부로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으며 최후 또한 비트가 발견되어 총격전 끝에 영예롭게 전사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사형선고 받고 광주형무소 이가사에 있을 때 김병억 동지의 친형님과 함께 살았다.

 ‘머슴 살은 46사단장 백암 동지’
 
우리는 전북 46사단 사단본부가 있었던 곳과 407연대 본부가 있었던 곳을 답사하기 위해서 골짜기를 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사령부 아래 초소는 비가 오면 은신할 수 있는 바위 밑이 있었는데 바위가 내려앉아서 흔적이 없었다. 취사하던 곳도 평평했는데 빗물에 패여서 골이 깊어졌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실감이 갔다.

사령부 트 또한 약간 평평한 곳에 나무가 서 있지만 돌을 쌓은 흔적이 있어서 겨우 찾았다. 5,6년 전에 왔을 때는 너댓 개의 트 자리가 확연했는데 이번에 가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407연대 지휘부 트도 없어져 버리고 후방부 트만이 알아보게 남아 있었다. 1951년 8.15 경축대회를 가졌던 꽤나 넓은 곳은 예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쌍치 농민대표가 호소문을 낭독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위에 앉아서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1951년 8.15 경축행사를 이 숲속에서 가졌습니다. 연대 전원이 모였습니다. 이 앞에 주석단도 만들고 나무로 엉성하게나마 연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나는 열 맨 앞에 있었어요. 46사단 사단장 백암 동지가 축사를 종이에 써가지고 와서 낭독하데요. 읽다가 막혔어요. 연단 뒤에 있던 비서가 축사 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틔워 주데요. 두 번 세 번 막히자 용지를 내려놓고 ‘빨치산은 무엇보다도 개를 많이 잡아야 합니다.’ 자기 식대로 축사를 마쳤습니다. 그게 더 좋았습니다. 동지들이야 학교 문 앞에도 안 가보았고 남의 집 머슴살이에 삼판을 하고 살아온 분이 글을 읽다가 막혔다고 해서 달리 생각할리 없지만 본인은 연대원들 앞에서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무척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날 이후 매일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들고 음독을 하데요. 그로부터 3개월 후, 11월 7일 소련혁명 기념행사를 여분산 밑에서 가졌는데 원고를 막힘 없이 읽었습니다. 동무들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1954년에 체포된 동지로부터 들은 내용입니다. 도당위원장 방준표 동지는 만일에 자신이 전사할 경우 도당의 중책을 맡을 후임자를 생각했고 적임자로 백암 동지를 지목했던 것 같습니다. 백암 동지는 출신과 사상성이 좋고 지휘와 실천력이 탁월한데 단 하나 이론 수준이 낮은 게 결함이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대학 철학교수와 도당학교 강사를 붙여 주었으며 먹고 공부만 하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백암 동지는 방준표 동지가 전사하신 후에 전북도당을 책임지고 사업하시다가 1955년 말에 쌍치 어느 마을 비트에 있다가 경찰이 트 부근에서 노루를 보고 총을 쏘았는데 비트가 발견된 줄 알고 튀다가 적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백암 동지는 혁명시기에 혁명에 뛰어들어서 자신을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발전한 전형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까지 백암 동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마골을 끝으로 전적지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떠났다. 관광철이라 차가 막혀서 10시가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모두가 수고했다. 다음 일정을 잡고 헤어져서 전철에 몸을 실었는데 나이 탓인지 좀 피로했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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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04-02 12:06:57
소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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