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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2)
임방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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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7  11: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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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첫 전투
 

   
▲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를 함께한 김영진, 임방규, 고 안신옥, 변숙현, 박소연, 박봉자, 유영쇠, 김은정(왼쪽부터). [사진제공-임방규]

2011년 3월 12일 8시에 양재에서 출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잠실에서 10시에 변숙현 동지, 안신옥 동지, 나, 박봉자 선생, 박소연 작가,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8명이 한 차에 타고 떠났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늘에 구름도 없이 완연한 봄날이었다. 토요일이라 차가 막히는데 우리 차는 전용도로로 시원스럽게 달렸다.

유영쇠 동지가 기다리고 있는 익산 박길한 동지의 집에 한 시에 도착했다. 서로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바로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갈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점심을 잘 먹었다. 밥값을 박길한 동지가 지불했다. 박길한 동지는 몸이 불편해서 떨어지고 유영쇠 동지만 태우고 떠났다. 김제군 봉남면 면소재지 뜰 안에 차를 세웠다. 유영쇠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면사무소나 지서는 새로 지었지만 옛날에 있던 그 장소네요. 김제 군당이 입산한 이후 첫 전투를 한 곳입니다. 참모장 장현태 동지가 지서 담 위에 올라갔다가 총에 맞아 전사한 곳이에요. 20세에 부대를 지휘한 탁월한 군사간부를 잃고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동지의 어머니는 우리가 찾아 갈 때마다 자식처럼 반가워 하셨습니다. 여기가 전번에 돌아가신 윤성남 동지의 고향이기도 하고 솔밭 너머가 내 고향입니다. 김제 유격대는 대외적으로 알려질 만한 큰 투쟁은 없었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교란작전을 했구요, 주로 당을 무력으로 보위하고 당 사업을 보장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김제 군당 아지트와 아주머니
 
우리는 차를 타고 유영쇠 동지의 고향 대봉리로 갔다. 마을 앞에 차를 세웠다. 유영쇠 동지는,
 
“저기 대밭집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저 집에 비트를 파놓고 때로는 군당이 있었고 지방 사업을 하던 나의 근거지였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두 아들과 살아가던 어머님이 가정적으로 우리와 특별한 연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 우리를 보호하는 데 위험을 무릅쓰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마을 여맹위원장 덕순 동무와 의논하여 매사를 결정했으며 마을의 청춘남녀를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지도했습니다. 식량은 물론 한번은 돼지를 잡아서 조금 팔고 우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겨울에 춥다고 장에 가서 명주 베를 끊어다가 솜을 넣고 군당위원장 동지와 내 옷을 지어주었습니다. 1953년 도당에 갔는데 익산시당을 조직하여 파견할 계획이니까 동무가 사업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라는 과업을 주데요. 익산시당 트를 마련하려면 보통으로 믿는 사람은 안 됩니다. 어느 날 익산으로 집을 옮겨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군말 한마디 없이 집 팔고 논밭을 팔아서 익산으로 이사 갔습니다. 그 집에 이리시당 트를 마련하여 돌각담 동지와 순창군당 조직부장 이던  최형국 동지가 시당 사업을 했습니다만 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루는 돌각담 동지로부터 위험을 알리는 네포가 왔는데 내가 죽을지라도 이 집만은 중앙당에 알려달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익산에 갔는데 쌀독을 털어서 주시데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수소문해서 어머니를 만나보았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여러 해 전에 좋은 세상 못보고 돌아가셨네요.”

설명을 마치고 유영쇠 동지는 옛 추억에 잠기는 듯 대밭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같은 애국인민들이 조선 땅 곳곳에 얼마나 많았던가.

 처녀 여맹위원장 김덕순
 
“이 마을에 김덕순이란 처녀 여맹위원장이 있었는데 담대하고 지혜롭게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마디로 처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에서 주는 과업을 철저히 수행했을 뿐 아니라 일시적으로 선이 끊어진 기간에도 스스로 알아서 일을 창조적으로 대담하게 전개했습니다. 예를 들면 계 조직을 해서 젊은 남녀들을 계에 들어오게 하고 쌀을 거두어서 떡 해먹는다고 소문을 내고는 떡을 조금 해서 부모님께 갖다드리고 남은 쌀을 간수했다가 주었습니다. 장에 가서 신발을 사온다던가, 산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비장해 두었다가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밤에 청년들을 데리고 이웃마을 부잣집 논에 가서 벼를 베어다가 가리를 쳐놓고 얼마 후에 타작을 해서 쌀 여러 가마니를 당에 보내주었습니다. 덕순 동무는 열성이 대단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조직에 묶고 조직을 운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젊은이들을 거의 다 조직원으로 공작했습니다. 못 배워서 그렇지, 통 큰 여장부 덕순 동무를 김제군당에서 군 여맹위원장으로 발탁했습니다. 덕순 동무의 정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교양 사업을 내가 담당했는데 노동신문을 갖다 주어도 이해를 못하데요. 그래서 별지에 해설을 써서 보내주었습니다. 언젠가 사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보석으로 풀려 나왔는데, 감옥도 별것이 아니더라 무슨 일이 터지면 전부 내가 책임지겠다고 조직원들을 격려했으며 놈들은 덕순 동무를 매장시키기 위해서 유영쇠의 애를 뱄다는 둥 터무니없는 모략을 했습니다만 그런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내가 체포되던 1954년까지 자기 사업에 충실했습니다. 이 마을이 민주화되었던 바탕은 해방 후에 마련되었습니다. 일제 때 나는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 못가고 야학에 다니면서 우리글을 배웠습니다. 해방이 되자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은 우리글을 모르고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학당에서 나는 가르치고 친구들은 배우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참 열심히 가르쳤네요. 처녀반, 아버지반, 어머니반, 아이들반으로 나누어서 가르쳤습니다. 나를 이 마을에서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요. 내가 입산 후에 이곳에 근거지를 구축한 것도 야학당 시절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민의 신뢰가 두터웠기에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이 마을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데 이만 하고 갑시다.”
 
유영쇠 동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촉했다.

 냉굴(폐광 금굴) 군당위원장외 5명의 영예로운 최후
 

   
▲ 금굴 앞에서 고 유영쇠 선생이 당시상황을 설명하다. [사진제공-임방규]
   
▲ 금굴 입구. [사진제공-임방규]

차는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산길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이리저리 감돌아서 얼마를 달렸을까 길 끝이 나왔다. 옛날에 금을 캐던 금굴인데 폐광으로 입구를 막아놓았다.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캄캄할 뿐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영쇠 동지가 설명을 했다.
 
“이 굴은 내부가 마치 개미굴처럼 사방팔방으로 뚫려서 멋모르고 들어갔다가는 길을 못 찾고 만답니다. 우리 동지들이 굴 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굴의 내부 구조를 잘 아는 지난날의 광부 동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 굴에 기관 동지들이 있었고 무장 부대도 있었으며 김제 군당위원장 동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동지였던 면 대한청년단 단장을 통해서 채광허가를 받아놓고 광부는 다 아랫마을 당원이었습니다. 그 동지들이 쌀과 찬, 땔나무를 갖다 주어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면 대한청년단 단장이 전 대한청년단 단장을 포섭하여 공세나 수색대가 나갈 때는 미리 전 단장에게 알려서 피신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2년 1월 말인가, 2월 초에 사고가 났답니다. 놈들은 굴 앞에 고춧대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굴 안에 있던 김제 군당위원장, 박봉수 군 여맹위원장, 이보옥 호위병, 서윤환 광산노동자, 김달준 면 조직선전원, 당증 과장 전원이 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폭했답니다. 이 굴에서 최후를 영예롭게 장식했습니다.”
 
설명을 마친 유영쇠 동지의 눈에 언뜻 눈물이 스쳐갔다. 유영쇠 동지는 그것도 모르고 며칠 후 이곳을 찾았는데 굴 입구에 타다 남은 고춧대가 있고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했다. 동지들의 시신은 저들이 끌어내다가 이 부근에 묻었다는데 못 찾았다고 한다. 우리는 아픈 가슴을 안고 되돌아 나왔다.

 김제군당이 입산한 안덕리
 
차를 몰아서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갔다. 안신옥 동지가 설명을 했다.
 
“후퇴 후 김제군당이 입산한 곳입니다. 산은 낮지만 산이 겹겹으로 에워싼 마을입니다. 지금은 몇 가옥이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꽤나 큰 마을이었습니다. 1,500여 명이 북적댔으니까요. 마을 뒷산에서 전투를 많이 했네요. 1951년 9월에도 우리 부대가 이곳에 왔다가 경찰들과 전투를 했는데 참모장, 정치부 지도원 신형수, 군민청위원장이 전사했습니다. 저 능선에 묻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저들의 손실 또한 컸을 것입니다.”
 우리는 안덕리를 떠났다.

 상운암 입석리
 
가는 도중이라 상운암 입석리 수몰 지구에 들렀다. 가다가 경치가 하도 좋아서 언덕 위에 차를 세웠다. 서쪽 산들은 그늘 속에 있고 운암 저수지와 동쪽 산들은 석양의 품안에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울려서 아름다웠다.
 
“좋다. 참 좋다.”
 
좀체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했다. 입석리는 상운암 소대지로 우리 부대가 해방시킨 곳인데 지금은 물에 잠겨서 없고 망향비만 말없이 서 있었다. 상운암 작전에 대해서는 전번에 발표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했다. 김영진만이 바쁘게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1951년 봄과 여름을 보낸 해방구 참시내 구장리, 만병리 
 

   
▲ 고 안신옥 선생이 해방구였던 구장리, 남병리의 전설과 인민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어둑어둑해서야 정읍군 산외면 참시내에 갔다. 몇 아람 되는 팽나무 여러 주가 마을 안에 있었다.
 
“옛날 그대로네요.”
 
집들은 새로 지어서 변했지만 고목만은 60년이 지났는데도 옛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반가운 듯 안신옥 동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 김제군당이 1950년 12월에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참시내 웃 부락이 구장리이고, 구장리 웃 부락이 만병리인데 전설적인 고장이기도 합니다. 먼 옛날에 9명의 장수가 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는 곳으로 마을 이름을 구장리, 만병리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들 1,000여 명이 있었습니다. 현물세도 받구요. 참신내는 부자들이 있어서 좀 껄끄러웠습니다만 구장리와 만병리 농민들은 우리와 한 식구처럼 지냈습니다. 인민성이 참 좋았어요.”
 
가로등 밑에서 김영진은 안신옥 동지의 설명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냈다. 빨치산이 있었던 해방구라서 더욱 긴장이 되었으리라.

 네 동지의 경력, 안신옥 동지
 
우리는 하루 작업을 마치고 쌍치 종암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피로리 농촌 체험장으로 갔다. 김영진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먼저 안신옥 동지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시지요.”
 
“나는 1930년에 김제군 백산면 학산리에서 아버님 안이목, 어머님 임효순의 사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형님은 50년 전쟁 중에 수원형무소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학교는 고향의 백석국민학교에 다녔구요. 군산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48년 교책으로 있으면서 단선 반대투쟁을 조직 지도했는데 그 사건으로 48년 11월에 검거되었고, 그 해 12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다음 해 1949년 5월에 6명이 월북하기 위해서 의정부까지는 기차를 이용하고요, 산을 타고 북상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에 있다가 1950년 4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김제가 해방된 이후 전북 도당학교 2기생으로 10일간의 단기 강습을 받고 김제군당 조직부 산하 책임지도원으로 배치되어 사업했습니다. 9월 27일에 후퇴 준비를 위해서 죽산면을 책임지고 나가서 150여 명의 입산 지원자를 규합하여 군당에 갔는데 벌써 입산했대요. 금산사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다가 안덕으로 오라고 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평야지에서는 입산자가 많지 않았고 금산면, 금구면에서 많이 왔습니다. 군당은 물론 각 면당이 있었구요. 17개면에서 일시에 캄파니아 투쟁을 한 적이 있는데 3명씩만 잡아도 50명이 넘지 않습니까? 김제군당이 입산 초기에는 칼빈 서너 정에 권총 두 정밖에 없었어요. 적과 싸워서 무기를 노획했습니다. 1951년 초에 김제유격대는 무장 120-130여 정에 비무장까지 합해서 150여 명의 막강한 부대로 성장했습니다. 캄파니아 투쟁 때 나는 고향인 백산면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안기운, 안오길, 나 이렇게 세 명이 들어갔는데 기밀이 누설된 것인지 사람들이 지서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불을 피우고 있데요. 다가가서 보니까 총도 없고, 순찰병과 용감! 승리! 하며 주고받는 군호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초선을 무난히 뚫고 들어갔어요. 김제에서 익산으로 나 있는 도로로 지서에 바짝 접근해서 사제 수류탄을 돌에 찍었는데 오길 동무의 손 안에서 수류탄이 폭발했습니다. 오른손이 날아가 버린 오길 동무는 쓰러지고요. 우리 두 사람은 부상자를 끌고 후퇴했습니다. 총을 갈기면서 위험지대를 벗어났습니다. 오길 동무를 친할아버지 집에 맡겨 놓고 우리는 반동 집에 들어갔습니다. 위급한 때 반동 집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하고 택했는데 그들은 경찰에게 신고를 했습니다. 우리는 방안에서 경찰들이 마을을 포위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네요. 총알이 벽을 뚫고 방안에 들어와서야 뒷문을 차고 대밭으로 튀었습니다. 총을 쏘면서 달려가자 포위하고 있던 놈들이 달아났습니다. 막 마을을 벗어나는데 총이 툭 떨어지데요. 총알이 팔을 뚫고 나갔어요. 따발총을 가지고 있던 안기운 동무는 함께 뛰다가 즉사하고 나만 총을 걸머지고 뛰었습니다. 월정면에 갔을 때가 아마 너댓 시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오는 놈도 없고 나는 마을 뒷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 만병리에 돌아갔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맡겨 놓은 오길 동무는 놈들이 핏자국을 따라가서 사살했고 별도로 나갔던 백산 면당위원장도 그날 밤에 희생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넷이 나갔다가 나만 살았네요. 1951년 9월에 내가 네 번째 참모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만 그 당시는 동무들이 도로 소환되고 전사해서 김제유격대가 유명무실한 때입니다. 1951년 12월 대공세에 마사지고 김제에서 살아남은 동무들이 8,9명에 불과했습니다. 1952년에 남부지도부와 연결이 되어 408연대에 편입했고요, 이영일 동지가 연대장인데 구 빨치산입니다. 408연대는 일개 중대 20여 명씩 2개 중대가 남아 있었는데 선 떨어진 동무들을 규합해서 2개 대대를 만들었습니다. 김제군당 지도하에 수많은 투쟁을 했는데 내가 말한 내용은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영쇠 동지
 
“나는 집이 하도 가난해서 소학교에 못 다녔고 야학방에서 우리글(당시에는 언문이라고 했음)을 좀 배웠습니다. 해방 후에 야학당에서 우리글을 열심히 가르쳤네요. 1948년 가을에 여수 철도국에 있던 마을 친구 최자춘이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가 ‘너는 학교도 못 다녔는데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못 배웠고 그것이 한이 되어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을 모아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으며, 그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고등공민학교 강습소에 다닌다고 하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되고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에 나가서 공부하고 사회실정을 정확히 파악한 토대 위에서 사업을 해야 한다고 하기에 어떻게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리에 나가서 공부하라고 하데요. 1948년에 나는 결심을 하고 이리중학 야간부에 들어갔습니다. 고학으로 학비를 대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어 김제로 전학을 했습니다. 30리를 걸어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졸고 집에 와서는 소를 키워야지 길에서 공부하고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전쟁이 나서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의용군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먼저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난 뒤에 공부를 하자고 해서 의용군에 1기로 지원했습니다. 1기생은 당원 두 사람이 보증을 서야 받아줬습니다. 9.28 후퇴 후에 고향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입산한 동무들과 선이 닿았습니다. 낮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야학당에서 가르쳤던 인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주로 지방사업을 했어요. 김제군 유격대는 주로 당을 보위하고 당 사업을 보장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대공세 후에는 무장부대 전체가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하여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했습니다. 1953년 여름에 회문산 투구봉에서 도 기동부대와 남부 몇 개 군 유격대가 모여 있었는데 경찰들이 달려들어서 전투를 크게 한 번 하고는 1954년까지 큰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변숙현 동지
 

   
▲ 변숙현 선생이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나는 고향이 전남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에서 아버지 변방섭, 어머니 김옥순 사이에 맏딸로 1924년 12월 16일에 태어났어요. 남동생이 있구요. 해방되던 해 1945년 5월 30일에 만주 흑룡강성에서 박태원 동지와 결혼했어요. 그 해 11월에 귀국해서 남편 고향인 전북 순창군 동계면 수정리로 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만주에 있을 때 항일유격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친구들과 우리 진영에서 활동했어요. 거의 나가 있었고 옷 갈아입을 때만 집에 왔네요. 1948년 4월에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순창 대표로 북에 갔습니다. 광동학원을 졸업하고 태백산 빨치산으로 있었대요. 전쟁 때 4년 만에 만났습니다. 남편은 후에 남부군으로 갔다가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확실하게 아는 동지도 없고 내가 안 보아서 그런 것인지 북에 살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47년에 아들을 낳았어요. 9.28 후퇴 후에 네 살 난 아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입산했습니다. 여맹사업을 하다가 52년 2월에 체포되어 사형구형에 20년형을 받았는데 동생이 재심해서 9년 살고 나왔습니다.”
 
결혼 생활은 1년 정도 하셨단다.

 애기동무
 
아버지는 1948년에 놈들에게 끌려갔는데 그 후 소식이 없었어요.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박선애, 박순애 선생님, 오빠와 함께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적들에게 살해당했답니다. 어머니는 합법 때 임실군 여맹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9.28 후에 입산하셨어요. 저도 어머니를 따라갔네요. 1951년 3월에 어머니는 적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고 나만 살아서 임실 선생님들과 회문산으로, 쌍치로, 가마골로 함께 다니다가 51년 가을에 어느 선생님이 임실읍 신안 부락에 데려다 주어서 할아버지한테 갔습니다. 그 때 내 나이가 열두 살이에요. 공부를 하고 싶은데 형편은 안 되지 고민하다가 전주로 갔습니다. 식모살이를 하면서 독학으로 간호사 자격증을 땄어요. 목포 병원에서 10년간 간호사 생활을 했어요. 여동생을 어느 집 양딸로 보냈는데 고생을 얼마나 하는지 동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애들 아빠가 기자생활을 했는데 환자와 간호사로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2003년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애 아빠도 갔어요. 그 당시에 대학에 다니던 딸애가 남부군이란 책을 사다주데요. 그래서 이태, 최태환, 박순애, 박선애 선생들을 만나보고 민중탕제원에 가서 선생님 여러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지금은 두 딸이 다 크고 홀가분해서 평통사 일, 천주교 일, 유족회 일을 하느라고 바쁘네요.“

 국수봉 전투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쌍치를 떠났다. 밤재를 넘어서 안시내에 갔다. 임실 의무과가 한동안 있던 곳이다. 큰 바위 가든에 들려서 주인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차 한 잔 대접을 받고는 곧 떠났다. 물우리 앞에 차를 세웠다.
 
“저 마을에서 우리가 1950년 말과 1951년 초를 보냈습니다. 아침에 냇물에 세수하고 언덕 위 소학교에서 훈련을 했네요. 물우리 뒷산에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고 한 개 중대씩 교대로 나가 있었어요. 능선 너머가 뱀사골이고 거기에 절친했던 문상구 동무가 묻혀 있어요.  우리 소대가 능선 끝 국수봉에 있을 때 일입니다. 1951년 2월 어느 날 날이 밝아오는데 적정이 나타났어요. 총소리가 들려오고 흰 옷 입은 인민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오지, 뒤에서 군인들이 총을 갈기며 추격하는 게 보이데요. 총 맞을까봐 애를 태우고 있는데 인민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곧바로 올라오면 위험하기에 돌아서 올라오라고 고함을 지르는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소나무 뒤에 숨더니 옷 속에 감춰둔 칼빈 총을 꺼내지 않겠어요. 그 순간에 우리는 전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군인들이 인민으로 변장하고 왔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놈들이 우리 지시대로 옆으로 돌아서 올라왔으면 그대로 당했을 것입니다. 수류탄을 까고 연발총으로 갈겨댔으면 총 한발 못 쏘고 우리는 거의 전멸했을 것입니다. 꾀는 잘 냈는데 간댕이가 작아서 우리는 희생없이 사격권 안으로 들어온 놈들에게 묘준사격을 들이댔습니다. 두어 시간 싸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곳에 더욱이 전호 안에서 묘준 사격을 하지, 우리 병력을 파악하지 못한 놈들은 중 경기에 연발총, 단발총을 있는 대로 난사할 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드륵드륵 따발총으로 위협했습니다. 적 지휘관이 전술을 달리하는 듯 일부 병력이 중대본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중대본부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높은 위치를 장악하기 위한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콩 볶듯 총성이 대단했습니다. 중대 연락원이 숨차게 달려오데요. 중대 본부가 후퇴하니까 즉시 철수하라는 중대장 동지의 명령을 전달하고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에 적들이 중간 능선을 장악했어요. 물우리 쪽으로의 후퇴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양면 공격을 받는 우리 소대는 위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유라고는 없었습니다. 일진 1분대, 2분대 후퇴! 2,3분 후에 2진 3분대 후퇴! 나도 두 동무와 총을 갈기다가 맨 뒤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었습니다. 적들이 위에서 내려오지, 후퇴 기미를 눈치챈 적들이 까맣게 올라오지, 대단히 급했습니다. 국수봉 서쪽으로 눈이 쌓여 있었어요. 따발총을 둘러메고 솔가지를 꺾어서 웅덩이 밑에 깔고 힘껏 밀었습니다. 급경사라 총알처럼 미끄러져 갔습니다. 잘못해서 소나무가 양발 사이에 들어오면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서 틈이 없도록 두 발을 꼬았습니다. 무섭게 미끄러져 가던 솔가지 썰매는 나를 섬진강 속으로 박아버렸습니다. 총만 가진 나는 섬진강물에 대각선으로 떠내려갔네요. 다행스럽게도 물이 코에 닿을락 말락 했습니다. 놈들이 국수봉에 올라와서 나를 겨누고 쏘는 듯 여기저기에 총알이 물속에 박혀서 한 자 남짓 물줄기가 솟았습니다. 물이 총탄을 막아 주는 것도 아닌데 상체가 물 밖으로 나오면서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바짓가랑이에 물이 벙벙하게 차 있고 물 밖은 모래밭이라 걸어도 미끄러져서 제자리데요. 발은 팍팍하고 숨이 차서 주저앉았습니다. 점점 내 주위 모래밭에 총알이 박히데요. 더 못 쉬고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물이 빠져서 그런 것인지 한결 낫데요. 발바닥에 땅이 밟히자 속도가 붙데요. 사격권을 벗어나서야 천천히 걸어서 회문산 제1고지(깃대봉)에 올라갔습니다. 여성 중대 여동무들이 상봉을 장악하고 있데요.”

 인민군 대좌 이희남 동지를 구출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우리 소대는 섬진강 가에 복 보초를 두 곳에 세워 놓고 덕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최전방이지요. 강 건너에 놈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새벽에 초소에서 콩 볶듯 총성이 들려왔습니다. 적들이 기습한 것입니다. 동무들이 마을에서 튀어나가는데 나도 1분대, 2분대, 3분대가 들어 있던 세 집을 둘러보고 마을 밖으로 뛰어갔습니다. 회문산 쪽으로 달리는데 날이 채 밝기 전입니다. 길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데요. 이희남 동지였습니다. 인민군 대좌로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발이 아직 아물지 않아서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어 다니던 동지입니다. 덩치가 커서 내가 업고 뛸 수가 없고 적은 진격해오지 큰일났데요. 그런데 마침 20여 미터 옆에서 흰옷 입은 청년이 뛰데요. 동무! 동무! 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휙 돌아보기에 오라고 손짓했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뛰데요. 파방 따발을 갈겼습니다. 우뚝 서데요. 무서웠을 것입니다.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청년이 희남 동지를 업고 가고 나는 돌 뒤에 몸을 숨기고 드르륵 드르륵 따발총을 갈겼습니다. 청년이 오십여 미터 가면 나는 튀어나와서 뛰었습니다. 엄폐물 뒤에 몸을 부리고 또 총을 갈겨댔습니다. 도망가다가 돌아서서 총을 쏘는 적은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는 무사히 솔밭 속 안전지대에 들어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나는 청년에게 있을 수 없는 일, 총을 쏜 사실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깊이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동무가 총을 쏘지 않았으면 그 상황에서 이 군관동지를 구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도리어 흐뭇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능선에 올라가서 투쟁인민들과 함께 불을 피워놓고 휴식하고 있는데 아래 고지에서 동무들이 밀리고 있다고 지원을 요청해서 무장부대원은 모두 그곳을 떠났습니다. 한참 싸우고 있는데 연락원 동무가 아까 휴식하고 있던 능선에 개들이 올라왔으니 철수하라고 알리데요. 우리는 회문산 제1고지 뒤로 이동했습니다. 비무장 성원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데요. 희남 동지가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모르데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따발을 꼬나들고 산 중턱으로 희남 동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아까 휴식하던 장소로 소리 안 나게 접근하는데 임동무, 임동무 하고 부르지 않아요? 1미터 반 정도 아래 눈 덮인 산죽 밑에서 고개를 쳐들고 나를 부르데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말하지 말라고 손으로 입을 막고 작은 능선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적정이 없데요. 나는 돌아 나와서 희남 동지를 끌어올렸습니다. 부축하고 가려는데 동무들이 줄줄이 내려오데요. 그날 밤 비상선에 가면서 전등불이 켜 있는 초가집 몇 채를 보았습니다. 수력발전을 해서 전등을 켜 놓고 전화선도 가설했다고 들었습니다.”
 
조금은 길게 설명하고 그곳을 떠났다.

 섬진강 상류에 걸려 있던 나무다리
 
용골산 아래 지금은 없어지고 옆에 다리를 놓았지만 60년 전에는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나무다리가 섬진강 위에 걸려 있었다. 차를 길가에 세웠다. 변숙현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도무지 모르겠네요. 많이 변했어요. 용골산에 여러 번 왔는데 원통산에도 있었구요. 영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 만에 온 곳이 아닌가. 기억에서 7,80%는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용골산이나 원통산은 옛 그대로여서 딴 곳에 온 듯 착각할 수밖에. 변숙현 동지는,
 
“이 지역에서 여러 달 있었습니다. 인민들과 함께 전사들의 겨울 반코트도 만들고 모자도 만들었네요. 저들의 포위망 속에서 죽을 고비도 넘기구요, 한 번은 원체 급해서 솜을 넣고 누빈 겉옷을 던져버리고 치마저고리에 수건을 쓰고 인민들과 함께 있다가 잡혔는데 한 마을에 산다고 인민들이 감싸주어서 살았어요. 이 지역 인민성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 젊은이가 왔다. 궁금한 듯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옛날에 이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는데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더니,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저 용골산에 아흔 아홉 굴이 있는데 거기에 빨치산들이 있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으며 국민학교 다닐 때 용골산에 올라가서 냄비나 탄피, 부서진 전지를 봤다고 했다. 저기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위치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강 가운데 바위가 있는 그곳에 다리가 있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단다. 옛날에는 참게를 강에서 많이 잡았는데 지금도 잡히느냐고 묻자 참게는 적고 다슬기가 많다고 했다.
 
1951년 말에 몹시 지쳐 있던 부대원들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저 언덕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잠들었다. 참모장 동지가 보초를 서고 이십여 분 잤을까, 눈을 뜨자 옆 동무의 모자 위에 어깨, 따발 탄창 위에 눈이 하얗게 얹어 있었다. 옛 전경이 선하게 떠올랐다.

 기습당한 학정리
 
우리는 재를 넘어서 학정리에 갔다. 1951년 12월 공세 때다.
 
“성수산에서 밤새 걸어서 이곳에 온 우리 연대 2대대와 6대대는 원통산 상봉에 한 개 부대를 올려놓았습니다. 우리 중대는 앞 능선 두 곳에 복 보초를 세워 놓고 잤네요. 지휘부는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요, 다섯 시 쯤 되었을 것입니다. 보초가 깨우데요. 개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을 뒤로 마을을 포위하고 있어요. 잠에 취해 있던 나는 눈을 부비며 보았습니다. 국방군이데요. 다급한 때라 사격명령을 내려지지 않았는데 팡! 팡! 보초가 M1을 쏘았습니다. 총소리에 용수철처럼 일어난 동무들은 마을로 들어가는 놈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대병력이 용골산 쪽에서 넘어왔습니다. 그 쪽은 후방이라 예상을 못했지요. 지휘부 앞뒤에 무력을 배치했을지라도 마을 밖에 보초를 세워 놓아야지, 군사 간부들의 불찰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지휘부가 몽땅 당했을 것입니다. 적의 병력이 워낙 많아서 돌격을 못 치고 솔밭으로 돌아서 원통산에 올라갔습니다. 적들도 우리를 따라서 골짜기로 올라왔습니다. 야간 전투가 벌어졌어요. 지형을 잘 아는 우리는 능선으로 내려와서 골짜기 안의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중기도 한문 노획하구요. 그러나 사령부 성원으로부터 우리 연대 선전부장이 총을 맞고 쓰러졌는데 생사를 모르고, 연대장 동지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총알이 어깨를 관통해서 오른 팔을 못 쓰게 된 선전부장은 수용소에서 보았고, 연대장 최일관 동지는 용골산 비트에 있다가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소식을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위생병 김정자한테 들었다.)”
 
지난날의 가슴 아팠던 사건을 들려주고 학정리를 떠났다. 우리는 내가 잡혔던 상계면 세심리 2구를 지나서 임실 유격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산막을 둘러보고 대판리로 해서 청운면 소재지에 갔다.

 군경이 양민을 학살한 금굴

   
▲ 부흥광산 입구. [사진제공-임방규]
   
▲ 부흥광산 역사를 담은 안내판. [사진제공-임방규]
   
▲ 단체사진. [사진제공-임방규]

정상하 동지가 점심을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정상하 동지와 함께 양민 300여 명을 학살한 금굴에 갔다. 주로 피난민들이 금굴 안에 있다가 놈들에게 당했다고 한다. 굴 입구에 불을 놓아서 질식사했고 살아나온 50여 명은 아래 섬진강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끌고 가서 학살했단다. 학살지 두 곳을 안내한 정상하 동지와 청운면에서 작별하고 우리는 임실군 성수면으로 갔다. 정상하 동지는 아버지가 1953년에 임실군당 위원장으로 산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하셨고 본인은 체포된 후에 돈을 써서 나왔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오봉리, 삼봉리
 
먼저 삼봉리에 갔다. 우리 소대가 있었던 마을 앞 제각은 새로 지었는데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제각 문간방에 사십대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자손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아주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세상이 와도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희망이 있겠소.” 하기에, “내가 낳은 자식만 자식이 아니지요. 우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고 위로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음이 고운 아주머니는 지금 어느 곳에 묻혀 있을까? 제각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동무들의 식사는 삼봉리 인민들이 돌아가면서 해주셨다. 어느 집에서는 닭을 잡고 또 어느 집에서는 내에 나가서 살얼음을 깨고 민물 새우를 떠다가 무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 주셨다. 밥상마다 정성이 그득했던 옛 일들이 떠올라서 흐뭇했다. 삼봉리 리인민위원장 아버님이 계셨는데 한 번은 찹쌀에 팥, 대추, 밤, 말린 감 껍질을 섞어서 시루에 찐 찰밥을 해놓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진정이 담겨 있으면 작은 것일지라도 한 평생 잊혀지지 않나보다. 눈은 삼봉리를 바라보는데 머리는 옛일로 가득했다. 우리는 오봉리에 갔다. 동구 앞에서 차를 세워 놓고 윤재만 선생 댁으로 갔다. 마침 선생이 집에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연대 외팔이 참모장이 돌아가신 곳을 알려준 분이다. 일행을 소개하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내가 빨치산 활동을 했고 이 마을에 있었다고 덮어두었던 내용을 털어 놓자 우리 집 저 방에 지휘부가 있었다고 했다. 나와 몇 차례 만나본 재만 선생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나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이동옥 동무를 묻자 그 때 나가서 소식이 없다고 했다. 부상자를 책임지고 성수산에 떨어졌는데 고향에서 모르고 있으면 전사한 것이다. 동무의 명복을 빌었다. 산 밑에 살았던 큰 애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자 자수해서 집에 있다가 경찰 간부한테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단다. 울타리도 없는 토담집에 자식도 없이 두 부부가 살았던 당시 오십대 어른은 돌아갔을 텐데 묘가 어디에 있는지 묻자 우리가 오봉리에서 떠난 후 얼마 있다가 이사 갔는데 모른단다. 우리가 3개월 동안 주둔하고 있던 오봉리 그리운 사람들은 가고 묘마저 없구나. 아픔을 안고 오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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