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 학살지

▲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 양민학살지를 방문하여 유족으로부터 학살 현황을 직접 듣다. [사진제공-임방규]

2010년 10월 2일 9시에 용산역 철도웨딩홀 앞에서 김동섭 동지, 장윤규 동지, 송세영 동지와 나,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7명이 차에 탔다.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다. 비가 오려나, 누런 벼가 들을 덮고 있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가을로 접어든 자연을 감상하다가 깜빡 졸은 것 같은데 벌써 차가 대전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은 쉽게 찾았다. 그곳에 있던 어느 분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박성관 대전유족회 총무란다. 골령골을 방문한 대학생들에게 산내면 학살의 전모를 설명해주고 방금 학생들을 실은 차가 떠났다고 했다. 반가웠다.

“가족 중에 어느 분이 이곳에서 학살당했습니까?” 하고 묻자,

“아버지가 살해당했습니다.”

‘아버지!’ 아기 때 아버지를 잃고 60년을 얼마나 고생스럽게 살았을까.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돌비석이 있는데 여러 군데를 돌로 쪼아 놓았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무고한 사람을 수천 명이나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석까지 훼손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유족회 총무로부터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다.

“1950년 7월 1일부터 10여 일간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주로 여순군인 봉기 및 제주 4.3사건 관련자 1,800여 명과 대전 일대의 보도연맹원 4,000-5,000여 명이 이곳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이 집 옆에서 저 위쪽으로, 길 건너 산기슭으로, 이 일대 어느 곳이나 한자쯤 파면 유골이 나옵니다. 발굴 작업을 하다가 재정문제로 중단했습니다. 파낸 유골은 충북대에 보관하고 있구요. 유족인 우리들이 유골이나마 한 곳에 안치하고 위령비를 세워야 하는데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이명박정부는 재정지원은 물론 관심조차 없어요. 그렇다고 유족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요. 그 많은 유족들이 유족회 활동에 나오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몹시 두려워하고 있어요. 대전유족회 회원은 80여 명인데 월례회의에 나오는 유족은 40여 명에 불과합니다.”

답답했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의 비석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동지들이 묻혀 있는 골령골 골짜기를 돌아보며 떠났다. 대전유족회 총무의 안내를 받아 가오리 변전소로 갔다. 변전소 시설물을 철거하고 있었다. 변전소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나보다. 송세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골령골 학살 1주년이 되는 1951년 7월 5일에 충남빨치산 공병부대가 백두산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에 와서 변전소를 폭파했답니다. 대전 일원을 암흑세계로 만들어 버렸대요. 같은 시각에 산내면 지서도 습격하여 파괴했답니다.”

명지골 해방구

▲ 이치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대승 전적비.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점심을 먹고 떠났다. 금산군 진산면과 완주군 운주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이치재(배치재)를 넘어서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대아저수지에 갔다. 일제시대에 쌓았다는 제방 규모가 꽤나 컸다.

대아정에서 바라본 대아저수지는 물이 벙벙하고 산들이 싸안고 있어서 마치도 그릇에 담아놓은 물인 듯하다. 산 또한 특이한 모습이었다. 첩첩한 산인데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산마다 따로 자리잡고 있었다. 병력이 산을 타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가파른 산이라 이동이 지극히 어렵고 골짜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그런데 1950년 10월 중순에 국방군 백골부대가 멋도 모르고 동상면 뒷산에 올라왔다가 골짜기로 내려온 것을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 부대가 들이쳐서 박살을 냈고 그 후로는 경찰이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장윤규 동지가 설명을 하면서 저수지 오른쪽 산 너머에 완주군당이 있었고 가운데 보이는 산 너머가 동상면이라고 했다. 오리가 몇 마리 물 위에 떠 있고 주변의 아름다움에 잠깐 머물렀다가 떠났다.

둑 아래 다리 옆에서 전북도 농민회 서정길 회장을 만났다. 반가웠다. 완주가 고향이라서 아버지들이 싸운 지역을 함께 돌아보자고 제의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내 고향의 역사적인 지역을 돌면서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어볼 수 있겠느냐고 좋아했다. 비가 왔다. 산천마을 앞에서 차가 멈췄다. 장윤규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 대하저수지에서 장윤규 선생님이 완주군당 근거지와 전북 북부지도부 명지골 해방구 설명을 하다. [사진제공-임방규]

“입산 초기에 북부지구 후방부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병원도 있었구요. 환자들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추곡 수매 사업을 통해서 확보한 식량을 저 골짜기 여기저기에 저장했습니다. 용현 부락에서 도정을 했답니다.”

차는 명지목으로 가고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전에 왔을 때는 낡은 집 서너 채가 있었는데 눈에 띄지 않아서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명지목은 1951년 가을까지 전북도당 북부지도부의 거점으로 해방구입니다. 북부 지도부 호위 임무를 내가 있던 번개병단이 맡았구요.”

위쪽에 600고지가 있다. 가보니 저들이 세워 놓은 전승비에 군경 276명 전사, 빨치산 사살 2,287명, 생포 1,02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해방구 인민들을 사살하고 생포했겠지만 빨치산의 희생이 적지 않았을 격전지, 수많은 인민이 죽고 빨치산이 죽은 곳이다. 차는 골짜기로 나있는 포장도로를 따라서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 산들이 중턱 아래로만 보이고 비에 가려서 위쪽은 볼 수가 없었다. 재에서 서정길 회장과 작별하고 우리는 금산으로 넘어갔다.

두 여성 빨치산

차 안에서 은정이가,

“여성빨치산에 대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라고 요청하자 장윤규 동지가 입을 열었다.

“광주여고인지, 전남여고에 다니던 성정옥, 지서옥 두 여학생이 의용군에 지원해서 우리 부대에 배속되었어요. 함께 입산했습니다. 두 여학생은 병원에 위생병으로 있었구요. 환자를 간호할 때나 일상생활에서 동지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동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얼굴 못지않게 마음이 참 고왔습니다. 최후도 적의 포위망 속에서 두 여인은 서로를 안고 수류탄으로 자폭했답니다. 청춘도 목숨까지도 조국에 바친 동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내가 못할지도 모릅니다. 광주여고나 전남여고에 가서 학적부를 찾아보고 정옥이와 서옥이가 최후를 영예롭게 한 몸 조국에 바쳤노라고 형제들에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특히 무장부대 내의 여성들은 남동무와 함께 보초서고 밥하고 학습하고 함께 총 들고 싸웠습니다.”

장윤규 동지의 약력

말을 마친 장윤규 동지는 함께 싸웠던 동무들이 떠오르는 듯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는 금산에 가서 저녁을 먹고 5키로 남짓한 거리에 있는 민박집에 찾아들었다. 짐을 풀고 김영진은 받침대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전기선을 꽂느라고 부산했다. 정부영이가,

“장 선생님은 북에서 김일성대학에 다니셨고 인민군으로 나오셨는데 당시에 학생들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리고 어째서 후퇴 시에 북으로 가지 않고 남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셨는지, 전북 북부지역 약사하고 조직 구성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하자, 장윤규 동지는 입을 열었다.

▲ 장윤규 선생님. [사진제공-임방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일성대학 학생 전원이 지원서를 썼습니다. 그로부터 2,3일이 지났을까, 우리는 군관학교에 갔습니다. 20여 일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군사학과 정치학을 배우며 고된 훈련을 했습니다. 단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전선에 배치된 학생은 많지 않았습니다. 후에 들었습니다만 나머지 학생들은 천막 안에서 공부하구요, 서울대학 교수로 계셨던 이승기 박사가 비날론을 개발하셨고 일본에 있을 때 비날론 관련 논문을 쓰셨으며 전쟁 때 북으로 가셨습니다. 비날론뿐 아니라 과학계통에 탁월했던 이승기 박사는 원자력 계통 또한 주축이 되어 후배를 양성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리학 계통의 도상록 선생은 서울대 교수로 계시다가 1948년에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수학물리 학부장으로 수많은 후배를 양성했습니다. 임극제 선생은 김일성대학 공학부 학장이었습니다. 일제 때 경성제대 교수였으며 수학의 천재였습니다. 이공계통에 이와 같은 스승이 있었기에 기초과학이 튼튼하게 구축될 수 있었습니다. 이남의 대학생들은 미팅이다, 무어다 해서 공부를 열심히 안하는 것 같은데요. 내 아들도 대학에 다닐 때 공부를 별로 안합데다. 그 당시에 이북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참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대학생 80-90프로가 기숙사 생활을 했고 80프로가 국비생이었어요. 5점 만점에 전 과목 5점이면 장학금을 더 받고요, 최우등생은 학교 정문에 사진이 걸렸어요. 한 반에 20명 중 3,4명이 전 과목 5점을 받았습니다. 입학 초기에는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었습니다. 공부해야지, 노동해야지 무척 어려웠어요. 1948년에 들어서면서 하루 세끼 밥을 먹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은 전국 농민들이 쌀을 모아서 1948년에 4층 건물로 신축했습니다.

1951년 3월에 금산군 남이면 600고지에서 금산유격대 일부와 카츄사병단 일부 병력이 결합하여 호랑이병단을 결성하였습니다. 카츄사병단, 찌스트리병단, 호랑이병단은 완주군 진안군 금산군 무주군을 활동지역으로 투쟁하면서 운장산과 덕유산을 연결 짓는 루트 확보가 주 임무였습니다. 각 시군 유격대는 개별 단위로 활동했구요. 문화선전부에서 신문 주간지를 발행했습니다. 동상면 일대의 닥나무로 한지를 생산하여 신문지로 사용하구요. 또 예술단을 운용했습니다. 부대 오락회와 기념일에 연극을 조직했습니다. 1951년 5.1절과 8.15에 명지목 논밭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재미있는 연극을 했는데 동지들이 춤추던 모습만 떠오를 뿐 내용은 기억이 안 나네요. 공화국 중앙예술단 단원인 김호경 동무가 각본을 쓰고 때로는 출연하고 연출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후방부가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초기 후방부장은 박길재 동지인데 해방구에서 추곡을 수매하며 식량을 확보하는데 주력했구요. 부대 아지트를 건설하고 병원도 운영했습니다. 병원장은 평양의과대학 졸업생으로 김일성대학 1기생이고 당시 3학년생이었던 손석규 군의관과 2학년생 의사 3명과 간호병들이 환자 치료를 했습니다. 1951년 여름에 미군의 세균전으로 많은 열병환자들이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병기 수리를 하고 수류탄을 제조했는데 성능이 좋았습니다. 전북 북부에 무력은 완주군이 무장 20여 정, 익산군 무장이 50여 정, 장수무력이 250여 정, 572부대가 250여 정이 있었어요. 소규모 전투는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외부에 알려질 만한 큰 전투는 없었습니다. 나는 고향이 함경북도 경성이고 김일성대학 3학년 때 전선에 나왔으며 입산하여 호랑이병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 경찰 기습을 받고 가슴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완치된 후 전북 북부사령부 작전참모로 있었으며, 사단 편성 후에 45사단 작전참모로 있다가 1951년 12월 공세 때 체포되었습니다.

전에 부상당한 이야기를 좀 하지요. 1951년 늦은 봄에 적의 공세로 지칠 대로 지친 우리 부대는 대양리 골짜기에서 밥을 해먹고 자다가 기습을 당했습니다. 김수남 동지도 말했지만 대원들이 피로해도 고지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때 부상당한 나를 동지들이 업고 가다가 너무 급해서 바위틈에 숨겨 놓고 나뭇가지로 가려 놓고는 튀었습니다. 경찰 수색대 두 사람이 5미터 앞까지 왔어요. 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동료를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살았답니다. 김창근 동지(일명 김정근. 생존해 있음)도 공세 때 쫓기다가 모포 한 장을 덥고 어새로 위를 덮어 놓았는데 수색대가 지나가면서 밖으로 드러난 발 위에 총 끝으로 풀을 덮어주고 갔답니다. 내가 본인한테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휘젓고 간 후에 거점에 가보면 탄알이 꽉 찬 탄띠를 나무에 걸어놓거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고 간 적이 드물게 있었습니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6개 도당회의 후에 군사개편이 있었는데 충북은 68사단, 전북북부는 45사단으로 편성하고 45사단 사단장에 황학수(황의지, 적에게 투항), 참모장 길병래(자수하여 보아라부대 토벌대장으로 있었음), 내가 작전참모로 있었습니다. 45사단이 망가진 후에 남은 병력으로 복수연대를 조직했다고 들었습니다.”

밤이 깊었다. 자리를 잡고 잤다. 10월 3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민박집을 떠나 금산에 가서 아침을 먹고 안성읍 덕곡리에 갔다. 장윤규 동지가 설명했다.

“이곳을 덕곡리 골이라고도 하는데요. 저 뒷산에 전북북부 지도부가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10일경입니다. 이 안성을 공격했습니다. 포 몇 발을 쏘자 저들은 저항 없이 달아났습니다. 안성을 해방시켰지요. 이곳에서 한 일주일 동안 합법적으로 주둔하고 있다가 떠났습니다. 아마도 저들이 서울을 빼앗기고 밀리고 있을 때라 안성을 손쉽게 먹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주로 갔다. 장윤규 동지는 건강에 무리도 되고 아주머님이 앓고 있어서 먼저 서울로 떠났다. 나이도 많고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것을 동지들과 함께 전적지를 돌아보지 못하고 혼자 떠나는 것이 못내 서운한 듯 고속버스 안에서 연신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장수면 계북면으로 갔다. 재를 넘기 전에 김동섭 동지가 차를 세웠다.

솔재 매복 투쟁과 계북면 해방

“여기가 분명한 것 같은데 많이 달라졌네요.” 김동섭 동지는 매복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하고 한동안 두리번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 만에 찾아온 곳이 아닌가?

▲ 솔재 매복 투쟁과 전북 계북면 투쟁에 대해 김동섭 선생님이 설명하다. [사진제공-임방규]

“좀 더 가 봅시다. 내리막길이 나오거든요. 수십 대의 차량에 국방군을 싣고 올라오는 것을 때렸습니다. 여기가 맞습니다. 우리가 장안산 골짜기에 있다가 정보를 입수하고 이 양쪽에 무력을 매복시켰어요. 선두 차량을 재 위에 올려놓고 일시에 불을 뿜었습니다. 노획한 무기만 100여 정이 넘었어요. 여기서 노획한 무기와 장비로 전원이 국방군으로 변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로 화랑 13연대가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후에 들었습니다.” 매복하기에 좋고 일단 급습을 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당시를 상상하면서 떠났다. 얼마 안 가서 계북면 면 소재지가 나왔다. 차를 세웠다. 면사무소 건물 옆에 충혼비가 서 있었다. 이 지역에서 전투가 치열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김동섭 동지가 입을 열었다.

“솔재에서 승리한 동무들은 계북면마저 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날 밤 푹 자고 다음 날 아침에 국방군으로 변장한 동무들이 큰길을 따라서 유유히 계북면으로 내려갔습니다. 마을 밖 초소에서 보초와 주고받다가 지서를 들이쳤습니다. 겁에 질린 경찰들은 변변히 저항도 못한 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계북면을 해방시키고 한동안 쉬었다가 낮에 저기 보이는 장안산 골짜기로 들어갔어요. 우리 아닌 무장부대가 있었으면 국방군으로 오인하고 틀림없이 총을 쏘았을 것입니다.”

차가 계북면을 떠났다. 명덕마을 앞에서 차가 섰다. 송세영 동지가 입을 열었다.

양팔민공화국기가 휘날리다

“이곳을 명덕 분지라고 합니다. 1951년 여름에 남부군이 내려와서 일주일 동안 해방시켰으며 학교에 인민공화국기를 달아 놓고 정치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태가 쓴 책 󰡔남부군󰡕에도 나옵니다.”

차가 명덕마을을 떠났다. 재 위에 이르자 김동섭 동지가 설명을 했다.

“굽이굽이 감돌아서 60령재를 넘어가던 국방군을 우리 부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했는데 적의 병력이 원체 많데요. 퇴각했던 국방군이 대오를 수습해 가지고 진격해 왔습니다. 희생이 없도록 우리는 후퇴했습니다. 작전에서 저들이 얼마나 죽고 부상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재 남쪽으로 가서 지형을 둘러보았다. 차가 출발했다. 첩첩산중인데 포장도로라 거침없이 달렸다. 버남면 미처 못가서 댐이 있고 댐 모퉁이에 큼직한 충혼비가 눈길을 끌었다. 차를 세웠다. 비석 삼면에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대충 세어보니 300명이 넘었다. 저들이 세워 놓은 비를 통해서도 이 지역에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갔다.

한동안 쉬었다가 떠났다. 차는 남원을 향해서 달려갔다. 두 번 간 곳인데 갈라지는 지점을 놓치고 춘향터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에 시간이 좀 있어서 부대가 잠복했던 곳을 찾으려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허사였다. 집이 들어서 있고 큰 나무들이 꽉 차 있어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산기슭으로 나있던 똘은 폭이 약간 넓어졌을 뿐 옛날 그대로여서 위치가 분명한데 아쉽게도 잠복했던 곳은 찾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 없어진 것이다. 나무를 베고 땅을 골라서 밭을 만들어놓고 집이 들어앉아 있었다.

나는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까러 외팔이 참모장의 인솔 하에 범 같은 동무들 22명이 중기를 짊어지고 이곳에 왔다가 수색대가 오는 바람에 대낮에 저 아래 똘 둑을 타고 태연하게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떠났다. 옛날에는 뚝방길이 좁았는데 길을 넓혀서 차가 다닐 수 있었다. 빨치산이 대낮에 걸었던 길을 차를 타고 갔다.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덕평마을 앞으로 수월마을을 지나서 인화마을에 갔다. 전에는 소학교가 언덕 좌측에 있었는데 우측으로 옮겨 놓았고 지금은 폐교라고 했다. 마을 앞의 노송은 예나 다름없이 청청했다. 반가웠다. 노송 밑에서 대원들을 휴식시켜 놓고 서도역을 치자고 말씀하시던 참모장 동지가 어제 일인 양 선하게 떠올랐다.

탁월한 군사간부 외팔이 참모장. 1,2차 기차 습격 장소에 가다

“외팔이 참모장은 대단한 군사지휘관입니다. 보통 사람은 22명의 빨치산 소부대를 인솔하고 대낮에 적구에서 기차역을 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머리에 그런 작전이 떠오를 수가 없어요. 국방군 중위로 변장하고 자동총을 든 용감한 두 동무를 데리고 석양에 보졸 지서에 가서 계엄하의 엄중한 시기에 기합이 빠져 있다고 100명이 넘는 경찰 전원을 뜰에 엎드려놓고 두 동무가 장탄을 하면서 ‘우리는 빨치산이다! 움직이면 쏜다’고 엄포를 놓고는 총 세 발을 쏘았습니다. 부근에 있던 동무들이 총성을 듣고 지서에 와서 총과 탄알을 몽땅 짊어지고 갔답니다. 남원 유격대 소대장 김달용 동지로부터 들었습니다. 기차를 다섯 번이나 까고 쌍치 해방작전, 상운암 해방작전을 지휘했으며 대공세 때에도 외팔이 참모장이 인솔한 3대대는 희생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적구 깊숙이 돌아다니며 야간열차를 까고 적의 군수창고를 날려버렸으며 적의 지휘처를 습격했답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유격부대 지휘관입니다. 작풍이 좋고 고향은 평양 인민군 총위입니다. 산에서 2중 영웅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 1차 기차 습격 전적지에서 임방규 선생님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사진제공-임방규]

60년 전에 노송들이 늘어뜨린 긴 가지 아래 외팔이 참모장이 작전계획을 말씀하신 바로 그 장소에서 나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자랑스럽게 설명을 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기차를 주어먹은 장소에 갔다. 지금은 철길이 위쪽에 새로 나 있다. 옛 철길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우리 부대가 서도역을 치기 위해 두 조로 나누어서 철길 쪽으로 나오는데 50m 타 간격으로 철로에서 망보고 있던 철도경찰 두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도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 뛰, 뛰 기적소리가 가깝게 들려왔어요. 기차가 오는데 나타난 빨치산을 보고 그들은 기차를 향해서 기를 흔들며 위험 신호를 하고 달아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약간 당황했지만 철로를 넘어야 했습니다. 동무들은 총알처럼 달려서 철길을 막 넘었는데 기차가 여기에 서 버렸어요. “기차가 섰다. 돌격! 돌격!” 참모장 동지의 명령에 돌아서서 총 두세 발 씩 쏘고는 돌격을 했습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차 안의 경찰이나 승객들은 어쩔 줄 모르데요. 모두 풍악산에 데리고 가서 정치사업을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자동차를 까러 갔다가 자동차는 못 까고 돌아오는 길에 예상치도 못한 기차를 여기서 주어먹었네요. 마침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온 젊은이가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여기서 차로 오 분 거리에 계동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또 빨치산이 기차를 전복시켰대요. 저 위에 집이 있었는데요. 주막집이었어요. 이조시대에 아랫녘 사람들이 한양 갈 때 술 한 잔씩 마시고 쉬어가던 주막이었는데 허물어졌어요.”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우리는 계동 마을에 갔다. 마을 입구에 계동마을이라고 새겨 놓은 돌비석이 서 있었다. 차를 세워 놓고 철로 밑으로 난 수로를 확인하고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오수로 떠났다. 터미널 옆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찬이 상에 그득해서 세어보니 열세 가지에 다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여관에 들어갔다. 큰 방을 얻어서 짐을 풀어 놓고 자리를 잡았다. 정부영이 김동섭 동지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했다. 촬영준비를 마친 김영진은 예술인답게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김동섭 동지를 바라보았다. 김은진은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 놓고 모두가 조용했다. 김동섭 동지가 입을 열었다.

김동섭 동지의 약력

▲ 김동섭 선생님. [사진제공-임방규]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하바로프스크에서 1926년에 태어났습니다.”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말에 더욱 호기심이 가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다가 돌아가시고 아버님, 어머님이 소련으로 가셨답니다. 소련 땅에서 15년을 살았으며 아버님이 특수임무를 맡고 만주로 1930년에 나오셨습니다. 다섯 살 때 아버님 등에 업혀서 국경선을 넘었대요. 1932년에 화룡사변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군의 항일인민혁명군이 화통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본 놈들은 비행기로 폭격을 하고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김석원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우리 민족을 괴롭혔습니다. 그자를 모두 무서워했습니다. 나는 만주사변이 나서 이리저리 피난 다니느라고 학교에 못가고 서당에 좀 다녔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서 학습시간에 조금씩 배웠습니다. 8.15 해방 후 46년 4월에 중국지원군에 입대했어요. 그 당시에는 군복이란 게 없었습니다. 광목에 까만 물을 들여서 옷을 해 입고 보따리를 들고 다녔습니다. 일제의 38식 총을 메고 일제 수류탄을 가지고 다니면서 싸웠습니다. 47년에 신경해방작전 등 큰 전투에 여러 번 참가했습니다. 만주로 밀렸던 중국해방군이 47년 가을부터 계속 반격했습니다. 48년 9월에 만리장성을 넘었어요. 그때 중국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북경은 부자기가 20만 대군을 데리고 투항했기 때문에 귀중한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고 수월하게 해방시켰습니다. 49년에 양자강을 도하했고 양자강 도하작전에서 우리 조선의용군이 선봉에서 죽기도 했지만 큰 공을 세웠습니다. 1950년 3월에 강서성 남창에서 조국으로 오는 열차를 탔습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종군해방작전 메달, 모택동 수첩, 조선인민해방군 기념사진을 받았습니다. 대엿새 동안 기차를 타고 그립던 고국땅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양자강 물고기를 먹고 디스토마에 걸려 있어서 주울온천 휴양지로 갔습니다. 휴양 중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선에 나가겠다고 하자 피를 토하는 상태라 의사가 말렸으나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보내주었습니다. 평양 사령부에 찾아갔는데 12연대는 찾을 수가 없다고 18연대를 찾아가라고 해서 같이 왔던 10명과 함께 그날부터 걸어서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9월에 함안에서 부대를 만났으나 곧 후퇴를 했습니다. 화개장터로 남원을 거쳐서 장수군 산서면 어느 골짜기에 갔는데 당 일꾼 등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의용군에 나갔다 온 동무들도 여러 명이 있었구요. 나는 거짓으로 중국에서 온 간부라고, 후퇴는 때가 늦었으니까 함께 남에서 유격전을 하자고 설득했습니다. 며칠 동안에 151명이 모였어요. 얼마 후에 후퇴하는 동무들을 설득하여 300여 명이 되었습니다. 계북면 매복작전 계북지서 해방작전에서 노획한 무기로 무장 250여 명의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번안면 전투 장안산 전투에서 성과를 올리구요. 도에서 도 유격대로 인준을 받았습니다. 250명을 9개 중대로 나누어서 장수군 각 면에 배치했습니다. 1951년 8월 15일에 위훈장을 받았으며 우리 부대는 백두산 호랑이부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초기 장수군당 위원장은 김재일인데 공세 때 사라졌고 박태원 후임으로 온 김동열이도 후에 자수했습니다. 군당 조직부장 조용술은 고향이 함흥입니다. 팔로군 출신의 중대장 김창각 동무가 있었구요. 일년 반 동안 장안산 성수산 운장산을 비롯하여 장수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했습니다. 1951년 12월 대공세 때 12명이 지리산으로 소환되어 가다가 저들의 포위망에 걸려들었고 전투하다가 10명이 전사하고 두 사람이 잡혔습니다.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쳤으며 사형을 받고 있다가 무기로 확정되었습니다. 1960년 4.19 후에 20년으로 감형이 되었고 감옥에서 21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렸네요.”

나는 자세하게 써 놓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생략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10월 4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계동으로 달려갔다. 강용기 동지로부터 들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서 계동부락 동남쪽 산 중턱에 지휘부가 있었을 것 같고 철로 양쪽에 무력을 배치하고 지뢰수는 철길 밑으로 난 수로 안에 숨어서 참모장 동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신호가 있자 지뢰수는 밖으로 나왔고 두 번째 신호에 잽싸게 철길에 올라가서 2개의 지뢰 고리에 끈을 연결시키고 끈을 늘어뜨리며 돌아왔을 것이다. 세 번째 신호에 줄을 당기고 또 당겼을 것이다. 천둥 같은 폭음과 동시에 기차가 허공에 떴다가 넘어지고 매복부대는 일제 사격을 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화물칸마다 열어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무들, 몇 동무가 화물차에 올라가 탄알을 닥치는 대로 던지고 포로의 등에, 농민들의 등에, 동무들의 등에 한 짐씩 무겁게 지고 풍악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는 듯 뇌리에 스쳐갔다.

논에 나온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는 못보고 여기서 산 사람들로부터 기차를 폭파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했다. 남쪽 유격전에서 총과 총탄을 가장 많이 노획한 투쟁이었다. 용케도 7사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서 여러 화물칸에 총탄과 포탄을 가득히 싣고 남원으로 가는 열차를 이곳에서 깐 것이다. 참모장 동지가 계획했고, 직접 투쟁을 지휘하셨다. 간략하게 설명하고 떠났다. 오수에 사는 한일석 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동지가 받았다.

“어디여?”

“오수여.”

“보구 싶어. 아침이나 함께 합시다.”

“그려. 바로 갈게.”

터미널 앞에서 우리는 끌어안고 반가워했다. 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을 때 식당으로 오고 갈 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회포를 다 못 풀고 함께 차에 탔다. 일석 동지를 마을 앞에 내려놓고 가려는데 자꾸만 집으로 들어가잔다. 아내를 부르더니 인사를 시켰다. 아내 자랑을 했다.

“이 사람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다녔는데, 글재주가 있는가봐. 이번에 등단했구만.”

농사를 지으면서 60대에 독학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과정을 마치고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니 자랑할 만하다. 장한 아주머니께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아주머니의 글이 게재된 책 한권을 받아들고 아쉽게 작별을 했다. 비가 쏟아졌다. 차는 오류역에서 멈췄다. 비옷을 입고 차에서 내렸다. 2차 기차습격을 한 곳이다. 지휘부가 있던 빗속에 희미한 앞산, 부대배치를 한 두 곳, 지뢰수의 위치를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기차 전복 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곡성경찰서 경사가 지금 살아 있을까?’ 우리는 계월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70대 농민을 노인정 앞에서 만났다.

“오류리 기차습격 사건을 아십니까?”

“예. 어데서 왔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난감했다.

“해방 후 좌익활동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동학 농민군이나 의병들을 그 당시 관리나 권세 있는 사람들이 역적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들은 애국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양을 반대하고 일본을 반대한다는 척양척왜의 깃발을 꽂고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좌익들도 미국을 반대해서 싸웠습니다. 미군이 우리나라 군대 아니지요. 외세지요. 동서양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자기 나라에 침입한 외세와 싸운 분들을 애국자라고 합니다. 반드시 그 분들이 역사에 애국자로 기록될 것입니다.”

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때 좋은 분들이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저 아래 논에서 나락을 베다가 기차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팔이 참모장이 돌아가신 북당골

좋은 일 많이 하시라고, 건강하시라고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성수면 소재지를 지나서 삼봉리를 바라보며 오봉리로 꺾어 들어갔다. 1950년 후퇴 후에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이다. ‘아바이는 어느 곳에 묻혀 있는지.’

▲ 외팔이 참모장이 돌아가신 곳 (북당골). [사진제공-임방규]

차는 북당골을 향해서 구불구불 감돌아갔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곳인데 지나쳐 버렸다. 다시 내려와서 대판리로 가는 길목에 차를 세웠다. 보는 것이 달라지면 조금은 떨떨한 법이다. 나무가 울창할 때 두 번 와본 곳이다. 눈앞에 나무를 다 베어버린 속살을 드러낸 산이었다. 길가에 바위를 표적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골짜기를 타고 갔다. 15~6미터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4~5미터 올라가면 평평한 곳이 나온다.

감옥에 있을 때 외팔이 참모장이 성수산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여러 번 성수에 와서 수소문을 했다. 오봉리의 윤재만 씨가 그 당시 성수지서에서 의용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윤재만 씨를 찾아갔다. 외팔이 참모장은 중상을 입고 트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는데 부근에 시신을 묻은 묘가 있다고 자수자가 제보를 해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경찰들이 그 자를 앞세우고 북당골로 갈 때 같이 갔단다. 묘를 파보니까 시신은 모포 여러 장에 싸여 있고 오른 손이 없어서 외팔이 참모장임을 확인했고, 시신은 성수에 가져와서 냇가에 놓아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참모장이 돌아가신 곳에 가보자고 하자, 지금은 나뭇잎이 무성해서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잎이 지거든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그 해 12월 초순에 갔다. 8순 노인이 산을 잘 탔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가파른 산이라 트나 묘를 쓸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 먼저 올라가던 재만 씨가 다 왔다고 했다. 뒤따라 올라갔다. 예상외로 널찍한 곳이다. 저기가 트 자리고, 여기가 묘 자리입니다. 가운데에 큰 나무가 서 있고 널찍하게 푹 꺼져 있었다. 한 눈에 트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묘 자리도 꺼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까 나무 없는 산에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많이 깎아 놓았다. 아직은 흔적이 좀 남아 있지만 몇 해 못 갈 것 같다. 김영진은 바닥과 주위를 두루두루 카메라에 담았다. 경건하게 묵념을 하고 우리는 대판리에 가서 토종닭을 시켰다. 삼만원짜리 두 마리면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닭을 잡아서 삶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점심을 토종닭에 백숙까지 아주 잘 먹었다.

우리는 올라오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성수리로 해서 성수산 수양림에 갔다. 비가 오고 시간적으로 상봉에 오를 수 없어서 돈 내고 들어갈 것은 없고 입구에서 사진이나 찍자고 했다. 큰 산마다 방어와 퇴로에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 방어에 유리하면 퇴로가 불리하고 퇴로가 좋으면 방어하기가 어렵다. 성수산은 팔공산과 삼각산에 무력을 배치해 놓고 대병력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면 치명적인 희생을 낼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세 골짜기가 있고 가운데 능선은 도중에서 끊기지만 가파른 능선이 상봉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으로 전자에 속한다. 그래서 유격부대가 거점으로 활용하지 않고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회문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동할 때 2,3일씩 머물다가 간 곳이다.

여기서 대공세 때 1952년 1월 전후에 우리 연대 2대대와 6대대가 녹아나고 충남 빨치산 68사단이 녹아났다. 수백 명의 동무들이 전사하신 곳이다.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동지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이다. 아! 성수산. 차는 빗속을 뚫고 서울로 달렸다. 차를 타는 것도 피곤한 것인지 자꾸만 졸음이 왔다, 김영진이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꼬박 3일 동안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정부영은 말이 없다. 덩치만큼이나 듬직한 일꾼이다. 삼각지에서 수고했다고, 참 수고 많았다고 악수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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