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2011.12.10. 5시에 마장역에서 김영승 동지, 나, 정부영, 김영진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고 기다리는 데도 김은정이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빠질 수 없는 회의가 길어지고 있다고 서너 번 연락이 왔다. 정부영은 영등포로 차를 몰았다. 8시가 훨씬 지나서야 김은정을 태우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복순 동지로부터 기세문 선생이 집에 와 계시는데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전화가 왔다.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출발했다고 말하고 은정이가 깰까 봐 곧 끊었다. 김영승 동지가 박동기 선생이 민박집에 온다는데 그 차로 두 분을 모시고 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시간과 기름 값을 절약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승 동지는 이복순 동지와 박동기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장성을 지나 담양을 거쳐서 곧바로 백아산 골짜기로 접어 들어갔다. 좁은 길로 구불구불 감돌아 민박집에 갔다. 열두시가 넘어서였다. 이복순 동지, 기세문 동지, 박동기 선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복순 동지는 보따리를 풀어서 닭튀김을 내놓고 막걸리 한잔씩 돌리면서 정담을 나누다가 내일 일정 때문에 곧 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민박집 어머니

 다음날 일곱 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민박집 봉고차에 타고 솔피재에 갔다. 김영승 동지가 설명했다.

 “이 재 너머는 곡성군이고, 이쪽은 화순군입니다. 백아산에서 백운산,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구요. 우리 동지들이 참 많이 다닌 길이에요.”

 이복순 동지가 입을 열었다.

 “1950년 9.28. 후에 내가 이곳으로 입산했는데 당시에는 골짜기마다 집들이 있었어요. 솔피재 이쪽 저쪽에 각 기관 동무들 투쟁인민 수백 명이 있었지요. 그 해 겨울 놈들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습니다. 전방 방어선이 무너지고 우리 모두가 백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골짜기에 들어온 적들이 집집마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 후로는 불탄 집터에 움막을 짓고 살았어요.”

 말을 마친 이복순 동지는 옛일이 떠오르는 듯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김영승 동지, 기세문 동지, 정부영, 김영진은 산을 오르고 우리는 차로 되돌아 내려왔다. 운전하던 민박집 주인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자기 집터라고 알려주었다. 이복순 동지는 집주인 어머니와 잘 아는 사이란다.

 “30여 년 만에 찾아 온 나를 ‘아이고, 이게 누구여? 복순이 아닌가베.’ 금방 알아보며 끌어안았습니다. 살아있으면 올 것인데 복순이는 산에서 죽은 것이라고,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여겼던 내가 나타나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습니다. 그 후로 1년에 한두 번씩 올 때마다 이 사람 어머니는 산나물도 주고 콩, 팥 등 밭곡식을 두어 됫박씩 싸서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몇 년 전에 떠나셨어요. 인정이 많고 순박한 우리나라 여성의 전형이었습니다.”

 어느덧 차가 뜰 안에 들어갔다.

 처녀 빨치산 이복순

 우리는 따뜻한 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복순 동지, 살아온 경위를 간략하게 들려주시지요.”

 “나야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어요. 고향은 전남 보성군 희천면 회동리고요. 아버지는 이동조, 어머니는 변대아, 두 분은 7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넷째로 1930년 11월 15일에 태어났습니다. 오빠 이남현은 일제 때 반일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번은 오빠와 둘이 시골 길을 걸어가는데 오빠가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글도 가르쳐주고 낙후한 일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일본이 강해지자 이조 왕조를 무너뜨리고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고 있다. 애국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나라를 찾기 위해서 일제와 싸우고 있다. 특히 백두산에서 김일성 장군의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서 매번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독립이 된다.’ 나는 오빠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가르치는 대로 국사는 일본 국사요, 국어는 일본어로 알고 있었거든요. 오빠는 ‘지금 들려준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놈들의 귀에 들어가면 오빠와 너는 감옥으로 간다. 알겠지?’ 말이 번져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고, 나 또한 입을 다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언니들에게 오빠가 독립군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었더니 다 못 들었대요. 내가 공부도 잘하고 미더웠던지 나에게만 들려주었어요. 오빠는 형제 중에서도 나를 제일 사랑했어요. 나는 해방 전 1945년 봄에 광주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해방 후에 오빠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는 민주학생동맹에 가입했어요. 학습도 하고 삐라도 붙이고 다녔습니다. 1946년 11월 3일 학생 시위대에 미군이 발포하여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굴다리에서 체포되었어요. 한동안 유치장 생활을 했습니다. 1947년에서 1949년까지 학생위원장으로 있었구요. 학교 측에서는 나를 위험분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1949년 가을에 모교인 보성군 희천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6.25를 맞이했습니다. 남현 오빠는 전남도당 연락부장으로 계시다가 광주 감옥에서 학살당하셨어요. 전쟁 전 전남도당 위원장 김선우 동지와 오빠는 친한 친구 사이라 자연히 나도 알게 되었구요. 보성이 해방되자 나는 광주 전남도당에 김선우 동지를 찾아갔습니다. 무척 반가워 하셨어요. 나를 도당 당증과에 배치하데요. 9.28 후퇴 시에 도당 동지들과 함께 무등산으로 해서 백아산에 입산했습니다. 산에 있을 때도 도당 소속 비서로 있다가 백아산을 거쳐서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전남에서는 의무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서 의과 대학을 신설했는데 김제정 동지가 학장으로 계셨고 학생은 20여 명이 있었습니다. 나도 의대학생으로 공부하다가 1952년 2월에 체포되었어요. 군 법정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1959년 12월 25일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조기동과 결혼해서 아들 둘, 딸 둘을 낳아서 다 여의었네요.”

 이복순 동지의 한 생애를 어찌 다 이곳에 쓸 것인가. 오후 세시쯤 정부영으로부터 유원지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소총으로 미군비행기를 떨어뜨리다

 김은정이 차를 몰고 민박집을 떠났다. 정부영은 눈이 쌓여 있어서 백아산 상봉에 못 오르고 기세문 동지와 먼저 내려왔단다. 차 안에서 3,40분 기다리는데 영승 동지와 영진이 왔다. 상봉에서 김영승 선생으로부터 부대 배치며 여러 전투, 마당바위 낭떠러지에 놈들이 동무들을 떨어뜨려서 학살한 만행과 밥을 해먹던 약수터 등 많은 이야기를 듣고 빼어난 백아산을 카메라에 담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 하늘바위 밑에 갔다. 차에서 내린 김영승 동지는 입을 열었다.

 “저 평평한 곳에 미군 비행기가 떨어졌답니다. 여기서 꽤 떨어져 있는 곡성 매봉 고지에서 위이종 동지가 기총 사격을 하며 훑고 다니는 적기를 몸을 드러내놓고 유인했답니다. 미군 비행사는 위이종 동지를 발견한 듯 기총 사격을 하며 맞바로 하강하는데 동지는 적기를 올려다보면서 소총을 갈겼대요. 용케도 그 총알이 미군 비행사를 뚫어버린 것인지, 갑자기 미군기는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다가 저곳에서 박살이 났습니다. 동지들은 만세를 부르며 내려와서 기관포 6문에 실탄 등 군수품을 지고 백아산으로 올라 갔구요. 그날 밤 사령부와 무장부대는 물론 주변의 기관 동지들 투쟁 인민들이 모여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걸판지게 오락회를 가졌답니다. 남조선 빨치산 투쟁에서 비행기를 잡은 것은 처음이고 전남밖에 없습니다.”

 영승 동지의 말 속에 자랑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다. 그 놈의 미군 비행기에 얼마나 당했던가.

 전남 도사령부가 있던 갈갱이 부락

▲ 이복순 선생이 전남도당 사령부가 있었던 옛집 마루에 앉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도사령부가 있던 갈갱이 부락에 갔다. 화순군 북면 노치리 옛 집은 타버리고 새로 지은 집들이지만 작고 십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립문도 없었다. 영승 동지는 어느 집 뜰 안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았다. 노인이 나왔다. 서로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뒤따라온 이복순 동지는 아이 때부터 아는 사이란다. 전남도사령부가 이 집에 있었는데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부사령관 연락병 김규환 별명 똘똘이가 자신의 오발로 절명해서 동무들이 마을 위쪽에 묻었는데 지금까지 노인이 보살피고 있단다.

 우리는 소년병의 묘를 찾아갔다. 고목 밑에 묘가 있는데 묘하게도 고목 뿌리가 굽어서 묘를 안고 있었다. 정부영은 과일을 놓고 잔에 소주를 따랐다. 우리는 절을 했다. 어찌 소년병 한 사람에게 올리는 절일 것인가? 백아산에서 전사한 동지들을 추모하는 절이었다. 눈이 펑펑 내렸다. 옛날의 해방구에서 퍼붓는 눈을 맞으며 내려왔다. 빨치산 같아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이복순 동지를 따라서 어느 집 뜰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복순 동지는 주인 없는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설명을 했다.

▲ 김영승 선생이 백아산 상봉에서 치열했던 이 지역 투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 사령부가 아까 그 사람 집에 있다가 이 집으로 옮겨 왔습니다. 지금은 집이 몇 채 안됩니다만 그 당시에는 큰 부락이었어요. 그 중에서도 이 집이 제일 컸구요. 위아래에 집 두 채가 있었습니다. 나는 여맹 일도 도와주었지만 해방구라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수준에 맞게 가르쳤습니다. 마을 여성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앞에 공터가 있잖아요. 전남도당 선전부와 출판부가 함께 있던 집턴데요. 내가 사 놓았습니다. 아담하게 집을 지어놓고 이따금씩 동지들과 함께 와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쉬었다 가려고 마음먹은 것이 무릎 관절로 걸음을 잘 못 걷고, 나이 먹어서 이젠 틀린 것 같습니다.”

 지난날의 여성 빨치산, 팔십이 넘은 이복순 동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찬데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카메라를 맞추고 있던 김영진은 복순 동지가 말을 마치자 공터로 뛰어갔다. 이곳 저곳 구석진 곳까지 찍고 동구 밖에 나가서 마을 전체를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갈갱이 마을을 뒤로 하고 떠났다. 최공식 동지에게 전화로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알렸다. 동지들과 함께 한 동안 인민의 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행복했던 빨치산 해방구를 둘러보고 가는 이복순 동지는 처녀 시절로 돌아간 듯 노래를 불렀다. 나이답지 않게 목소리가 고왔다. 한 곡 더 들려달라는 부탁에 스스럼없이 또 노래를 불렀다. 절창이었다. 이야기도 하고 시간은 느낄 탓인가 금세 법성포를 지난 차가 마을로 접어들자 마중 나온 최공식 동지가 손을 흔들었다. 동지를 차에 싣고 홍농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최공식 동지의 집에 왔다. 혼자 사는 집인데 깨끗했다. 우리가 온다고 낮에 사온 횟감을 푸짐하게 내놓았다. 막걸리 잔을 돌리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상을 치우고 대담을 했다.

 최공식 동지

 “최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시지요.” 정부영이가 입을 열자 최공식 동지는,

 “나야 징역만 살았지 한 일이 없어요. 고향은 전남 영광군 홍농읍 칠곡리구, 아버님은 최영흥, 어머님은 황판덕 이신데 6남매 중 둘째로 1925년 9월 27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홍농에도 4년제 보통학교가 있었어요. 1938년 봄에 4년을 마치고 법성포 보통학교에 가서 1940년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 아이들은 태반이 학교에 못 갔어요. 공부는 어지간히 했습니다만 중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친구 소개로 대전구옥 오복점 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주판을 놓고 구구단을 하기 때문에 점원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어요. 1944년 10월 아버님의 부름에 고향으로 내려올 때까지 착실하게 일했습니다. 돈도 좀 저축하구요. 그 해 11월에 장가 가서 농사짓고 살았어요.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 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가르치지 못했거든요. 8.15 해방 후 치안대에서 활동했습니다. 1947년 10월 이후에 선이 끊어졌어요. 1950년 7월 23일 홍농 경찰이 도망가면서 면 청년들을 차에 싣고 갔습니다. 영광과 장성 사이에 있는 태평산에서 세 명이 도주했어요. 면에 갔더니 면 인민위원회 토지개혁부서에 배치하데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젊기 때문에 인민군대 의용군에 지원했습니다. 나주 훈련소에서 열병에 걸려 부득이하게 고향으로 왔습니다. 치료 중에 9.28을 맞이했구요. 몸이 회복되자 홍농 유격대에서 활동했어요. 1951년 3월 13일에 경찰이 홍농에 들어왔고 그 날 유격대가 해산되었습니다. 나는 친척의 주선으로 면서기로 일했는데 그 해 8월에 홍농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가공리 일대의 자수자 30여 명을 학살했어요. 그 자가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자 반동들이 보복으로 자수자들을 조사했습니다. 나를 반동 숙청에 억지로 연관시켜서 영광경찰서로 넘겼고 조서 작성 후에 광주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1951년 12월 재판에서 구형 사형에 언도 무기를 받았는데 이명준 동지의 권유로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1952년 3월에 인천형무소로 갔다가 52년 9월에 대전형무소로 왔구요. 1960년 장면 정권 때 20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68년 목포형무소로 갔다가 69년 3월에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특별사에서 1971년 10월 1일에 출소했습니다. 1977년 전향을 안 했기 때문에 감호처분을 받고 재구금되었으며 천하의 악법 사회안전법이 철폐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서 1989년 9월 6일에 출소했습니다. 줄곧 이 집에서 살았어요. 나야 감옥에서나 사회에서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나이 88인데 돌아보면 흐뭇합니다. 나는 온전히 동지들의 품에서 동지들과 함께 바른 길을 걸었거든요. 조국의 미래도 밝지 않습니까?”

 최공식 동지의 말이 끝나자 나는 정부영에게 겸손하게 말씀했지만 대가 바르고 성실하고 정이 많아서 동지들로부터 각별히 존경을 받는 선생이라고 가만히 들려주었다.

 기세문 동지

 “다음은 기세문 선생님 차례입니다. 최 선생님은 좀 길었어요. 약력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정부영이 입을 열자,

 “그럽시다. 나는 1934년 1월 20일 광주시 광산군 임곡동 성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47년에 임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에 광주사범 병설 중학교를 졸업, 1953년에 광주사범학교(지금의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53년에서 1956년까지 교직생활을 했구요. 1956년에 친구들과 조국평화통일동지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평화통일 선언문, 우리 민족의 살길 등을 써서 광주시내에 뿌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남쪽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시절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젊은 열정으로 겁 없이 활동했어요. 1956년 8월에 저들에게 체포되어 2년 형을 받고 비전향 동지들이 계시던 특별사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1958년에 만기출소 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서 <씨 뿌리는 학원>이란 간판을 걸고 야학을 운영했어요. 4.19 때 광주에서 투쟁에 참여했고 1961년 2월에 민족자주통일중앙회 대의원으로 있었습니다. 1968년에 통일혁명당 조직원으로 활동했구요. 1971년에 체포되어 호남지역책 대리라고 서울지법에서 사형을 언도하데요. 대법에서 15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1986년에 비전향으로 만기 출소했습니다. 그 해에 자연건강원 생수단식원을 개설했지요. 1990년에 민자통 중앙회의 공동의장, 광주 전남의장으로 활동했고, 1995년에 빨치산 유치지구 사령관 윤기남 선생 장례식 집행 관계로 구속되었고 2000년에 백운산 전적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 해에 광주전남 양심수후원회 회장, 출소 장기수 후원회 ‘통일의 집’ 대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고문, 광주전남의장대행을 했어요. 내가 쓴 책은 <산골의 노래>, 어린이 시집 <사랑과 규율의 가정교육>, 중역 <길은 밤의 횃불>, 넌픽션 <꽃 안 핀 봄>, 옥중 시집 <자연의 힘으로 병이 낫는다>, <세계의 단식 건강법> 편역, <과도기의 론저 - 우리 민족의 살 길>과 옥중시집 <어머니 조국>은 출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기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나의 요청에 기세문 동지는 가슴에 묻고 있는 자식이 떠오르는 듯,

 “그 애가 조선대의대 4학년 때 5.18 항쟁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했거든요. 어느 날 무등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몇 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아플 것인가? 기혁은 5.18묘역에 있다.

 기세문 동지의 말이 끝나자 우리는 곧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하고 우리는 떠났다. 홍농 초입에 있는 식당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최공식 동지는 오늘이 일요일인 것을 미처 몰랐다고 했다. 밥집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법성포로 갔다. 작은 포구로 조기를 엮어서 줄줄이 늘어놓은 가게는 열어놓았는데 밥집은 닫혀 있었다. 물어서 딱 한 곳 밥집을 찾아갔다.

 “바닷가에 왔으니까 해물탕을 먹어야지.”

 정부영이 조기탕을 시켰다. 아침을 잘 먹고 곧 법성포를 떠났다.

 피에 젖은 용천사 골짜기

 김영승 동지가 앞자리에서 안내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골짜기 좁은 길로 들어갔다. 용천사가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 영승 동지가 주위를 가리키며 “여기는 참 원한이 쌓인 곳입니다. 1951년 3월 놈들의 대공세 때 불갑산에서 우리 동지들, 유가족, 투쟁 인민들 2천여 명이 살해당했는데 이곳에서만 450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증인들에 의하면 온통 시체로 뒤덮였다고 하데요. 나는 용케도 그날 빠져 나갔습니다. 누님은 다리에 총을 맞구요. 박승민 동지도 이틀 후인가 이곳에 왔는데 마치 빨래를 널어놓은 듯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었대요. 달이 밝은 밤인데 그 처참한 광경에 울었대요.”

 언젠가 박승민 동지로부터 들은 내용이 떠올라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9.28 후퇴 후에 영광, 함평 이 지역 인민들을 집단 학살했습니다. 인민 학살에 대한 복수 투쟁으로 1951년 9월 28일에 전북 407연대가 영광읍과 불갑산 주변의 몇 개 면 소재지를 들이쳤습니다. 해방은 못 시켰지만 놈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김영승 동지는 이 절도 그 때 놈들이 불 질렀어요. 다 타버린 절터 위에 새로 지은 집들입니다. 김영승 동지와 나, 정부영, 김영진은 산에 오르고 최공식 동지, 이복순 동지, 기세문 동지, 김은정은 세 시간 이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바닷가를 둘러본다고 했다. 절에서 3-400미터 올라가자 철모, 나무로 만들어서 칠한 소총, 물통, 고무신짝 등이 바위에 걸려 있었다. 큰 바위 전면에 총탄 자국이 벌집처럼 패여 있었다. 한 눈에 격전지였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영승 동지는,

 “나주로 빠져나간 무장부대 30여 명은 참모장 동지의 인솔 하에 이곳에 와서 불갑산 탈환 작전을 수행하다가 거의 전원이 전사한 곳입니다.”

 김영승 동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는 바위의 총 자국을 만져보면서 동지들을 추모했다. 그곳을 뒤돌아보며 떠났다. 꽤 가파른 곳으로 숨차게 올라갔다.

 소총과 석전으로 적을 매번 물리친 천연의 요새

 산상에서 김영승 동지가 설명을 했다.

 “불갑산으로 입산한 분들은 3,000여 명이 넘는데 무장은 고작 5-60정에 불과했습니다. 이 능선은 양 측면이 급경사라 마치도 성벽처럼 방어하기는 좋고 적의 공격은 어려운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무장부대는 능선을 따라서 배치되었고 지휘부는 중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러 번 전투가 치열했어요. 동무들은 적을 접근시켜 놓고 묘준 사격에 큰 돌을 굴려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밑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51년 3월에는 무력이나 수적인 면에서 우리 무장보다 몇 십 배나 되는 적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 부대가 인민들 때문에 먼저 철수하지 못하고 목숨을 내놓고 싸웠습니다만 많이 전사하고 남은 동무들이 당과 기관동지들을 호위하고 나주로, 유치지구로 빠져나갔습니다.”

 김영승 동지는 당시의 처절했던 정경이 떠오르는 듯 얼굴이 찌그러졌다. 우리는 불갑산 빨치산이 수없이 다닌 능선으로 십리쯤 걸은 것 같다.

 학살지 1

 앞서 가던 영승 동지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2010년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유골 154구와 유품 수백 점을 발굴했어요. 나도 발굴 작업에 참가했고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놓았지만 예산 관계로 중단했습니다. 주로 아이들의 뼈와 여성들의 뼈가 많았어요.”

 학살자들은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구덩이에 넣어놓고 살해했는가? 놈들의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기록에 남기고 돌에 새겨서 영원히 후대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묵념을 올리고 떠났다. 오른쪽에 용천사 옆 인민의 시신이 널려 있었던 골짜기가 내려다 보였다. 부글부글 끓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정부영이 김영승 동지에게 불갑산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시라고 한마디 했다.

 “많을 텐데 무장부대에 있지 않아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구만. 시신 발굴 작업을 하면서 유가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학살지에서 엄마는 죽고 아기가 강보에 쌓인 채 살아 있었대요. 불갑산을 빠져나가던 동무들이 아기를 안고 가다가 불갑산 골짜기 첫 번째 부락 어느 집에 맡겼는데 부락 인민들이 돌아가면서 키웠답니다. 어려서 성을 모르는 아이로 불렸답니다. 지금 서울에 산다는데 아직 못 찾았어요. 그 날 적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여성 동무들이 치마폭에 돌을 싸안고 호수에 몸을 던졌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장씨 성을 가진 장성 동지로부터 들은 내용이 떠올라서 나도 한마디 했다. 어느덧 광한리 마을에 이르렀다. 김영승 동지가 입을 열었다.

 “저 밑에까지 모두 해방구였어요. 이 마을에 함평 군당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12시에 적군 1,500여 명이 들어오고 있으니 산으로 이동하라는 지휘부 지시가 왔고, 2시에는 적군 1,500명이 아니라 2,000명이 오고 있다. 빨리 불갑산을 빠져나가라는 지시문을 가지고 내가 이곳에 왔습니다. 대밭 아랫집에 군당이 있었어요. 그때까지 오락회를 하고 있데요. 술 한 잔씩 걸치고요. 나는 네포를 전달하고 나왔는데 동지들은 굼뜨게 움직이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거의 다 희생되었답니다.”

 구름이 잔득 끼여 있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픔은 쌓여만 갔다.

 학살지 2

 우리는 두 번째 발굴 작업을 했던 곳으로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가시밭길이었다. 인민들이 줄줄이 묶여서 걸어갔던 그 길로 30여 분 올라가자 평평한 곳에 땅을 파헤친 장소가 나왔다.

 “이곳에서 유골 5,6구와 유물 수백 점이 나왔습니다. 학살당한 수백 명이 이미 흙으로 변했대요. 호를 따라서 까만 흙이 나왔습니다.”

 김영승 동지가 설명을 했다. 우리는 구덩이 안에 들어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김영진은 훗날 장소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위를 카메라에 담았다. 인민들, 아기들까지 구덩이에 처넣고 학살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묵념을 올렸다. ‘천하에 악독한 놈들’ 되돌아 내려오면서도 말을 잃었다. 정부영이 은정이에게 오라고 연락을 했다. 큰 길에 나와서 우리는 차에 타고 식당에 갔다. 오도치 이 마을도 그 때 놈들이 불을 질러서 한 채도 없이 다 탔는데 그 후에 지은 집들이라고 영승 동지가 설명을 했다. 폐교 한쪽을 개조한 식당인데 산나물 등 음식이 깔끔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떠났다.
 
 학살지 3 해보면 산내리 입구

 재를 넘어서 차가 오른쪽 공터로 들어갔다.

 “여기도 무고한 인민을 놈들이 학살한 곳입니다. 땅을 파서 구덩이에 몰아넣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평지에서 기관총으로 학살하고 시신을 쌓아 놓고 휘발유를 부어서 태워버린 곳입니다. 몇 년 전까지 잡초만 우거져 있었는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골짜기 건너 능선에도 100명이 넘게 살해당한 학살지가 있습니다. 요 밑에 저수지가 있는데요. 6.25 당시에 놈들이 우리 동지들을 수장했답니다.”

 아!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피에 젖은 불갑산!

 “당시에는 산내리 이 골짜기가 해방구였어요. 지방 인민, 투쟁 인민, 면암면당, 해보면당, 장성 3개 면당이 있었고 불갑지구당 연락 분트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을 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각 면당에 생산유격대가 있었는데 총은 고작 3,4정뿐이고요, 못 쓰게 된 총신을 잘라서 개머리판을 만들고 못 토막을 중간에 고정시킨 고무줄을 달아놓은 총이 2-30 정이 있었어요. 총알을 총신에 박고 고무줄을 힘껏 당겼다가 놓으면 못 토막이 뇌관을 때려서 총알이 나가는데 멀리는 못가도 총알이라 맞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총을 쏘고는 철사를 거꾸로 넣어서 탄피를 빼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지만 2-30명이 함께 쏘면 기관총처럼 총성과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놈들이 왔다가도 총성에 겁을 먹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어요.”

 김영승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떠났다. 위로 문장면 소재지에서 기세문 동지와 이복순 동지가 광주행 버스를 타고 떠났다. 우리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일요일인데 차가 막히지 않아서 8시 전에 서울에 도착했다. 김영승 동지,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이 수고했다. 집에 와서도 불갑산에서 커진 응어리와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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