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출발

2012년 3월 17일 오전 7시에 양제 구민회관 앞에서 박정덕 동지, 나, 정부영, 김영진이 출발했다. 김은정은 한 시간 가까이 늦을 것 같은데 고속버스로 내려가다가 도중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오늘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높은 산은 오르지 못할 것이고, 계획하기가 수월한 것이 아니라서 그냥 답사를 떠나는 길이었다. 정부영은 전화로 손경수 동지에게 주소를 물어서 길 안내판에 입력시키고 차를 몰았다. 김은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광주 버스표가 매진되어 전주행 버스를 탔단다.

박정덕 동지가 배낭에서 책 한권을 꺼내 주었다. 꽃이 그려 있고 <바람에 꽃잎은 져도> ‘박정덕 저’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첫 장을 넘겼다. 글도 잘 못 쓰고 큰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흔적을 남기고 싶어 글을 썼다는 대목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20대 초반에 입산하여 깊은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서 불구된 몸으로 징역을 살고 재혼하여 아들, 딸을 낳아서 키웠지만 말년에 의지할 곳 없는 노파와 함께 봉천동 공영주택에서 살아가고 있고 요즈음은 날마다 노인정에 나가서 붓글씨를 익힌다고 한다. 박정덕 동지의 생애가 떠올라서 아파왔다.

차는 어느덧 논산에 접어들었다. 손경수 동지와 오영애 동지가 큰길가에 나와 있었다. 오영애 동지만 차 안에 들어오고 건강 때문에 함께 못가는 손경수 동지는 딸기 한 상자를 밀어 넣었다. 무정한 차는 동지만 떼어놓고 속력을 냈다. 함께 가면 좋을 것을. 전주에 갔다. 김은정이 먼저 와 있었다. 솔개가 참새를 채 듯 차에 싣고 떠났다. 광주에 갔다. 이복순 동지가 반가워했다. 기세문 동지도 오고. 아직 점심이 이르지만 음식 잘하는 식당이 근처에 있는데 먹고 가자고 이복순 동지가 이끌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곧 떠났다.

유치지구

유치지구에 들어갔다. 첩첩산중이었다. 산이 높지 않지만 겹산에 사방으로 능선이 뻗어 있었다. 장흥군, 나주군, 해남군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유치지구는 바닥이 넓어서 적들이 공세를 취해도 7개 면이 짜고 함께 들어와야지 제각기 들어오면 이리저리 빠져서 말짱 헛일이라고 들었다. 소부대가 유격전을 하기에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임진조국전쟁 당시에 의병이 싸웠고 갑오농민전쟁 시기에 농민군이 싸웠으며 이조 말엽에 의병이 싸운 곳이다. 애국집안의 후손인 정길상 선생이 있었으면 이 지역 유적지에 가서 설명을 듣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애국의 혼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인데 외국에 나가 있어서 아쉬웠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함께 살았던 윤기남 동지가 떠올랐다. 86세라 살아 있을 나이인데 암으로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전쟁 전부터 1954년까지 유치지구 사령관으로 있었던 윤기남 동지가 함께 왔으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안개가 상봉을 가려버린 화학산에 윤기남 동지의 모습이 어려 왔다. 차는 고개를 넘어서 내려갔다. 오영애 동지가 차를 세웠다.

500여 명이 살해당한 화학산 전투

“여기 같은데 전에 없던 저수지가 생겨서 그런지 헷갈리네요. 아닌 것도 같고요. 제가 1951년 3월 공세 때 여기서 발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쫓겨서 이곳에 왔는데요. 능선에 있던 군인들이 집중사격을 했습니다. 총알이 비 오듯 날아왔어요. 순간 엎드렸어요. 어찌나 무섭던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몇 분은 이곳에서 희생당하고 많은 분들이 오른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뒤처진 우리 몇 사람은 왼쪽으로 이 산을 돌아나갔어요. 먼저 간 동지들은 다 죽고 우리만 살아남았습니다.”

열여섯 어린 시절에 빨치산 활동을 했던 유치지구. 동지들이 돌아가시고 자신이 부상당한 곳을 61년 만에 찾아온 오영애 동지는 그 옛날이 떠오르는 듯 눈가에 이슬이 맺혀 왔다.

“3월 공세 때 군경이 얼마나 동원되었는지는 모릅니다만 아무튼 수천 명의 무력이 유치지구를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왔습니다.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이 화학산에 몰아넣고 살해했습니다. 4-500명의 동지들이 희생되었답니다.”

오영애 동지가 설명을 마치자 우리는 묵념을 올렸다. 화학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학산 상봉에 올라가면 좋을 것을.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났다.

의무과 트

오영애 동지가 위생병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던 골짜기로 차를 몰았다. 화학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오영애 동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상한데. 층층에 다랑논이 있고 내도 폭이 이보다는 넓은 것 같아요.”

기억과 현실이 다른 듯 위아래를 다니며 살펴보았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어찌 60년 전 그대로 있을 것인가.

“아! 비자나무가 있네요. 여기가 맞아요. 위 골짜기에 의무과 트가 있었어요. 우리는 사업 나갈 때마다 저 비자나무 밑으로 다녔어요. 화학산에서 부상당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총에 맞은 나를 오십대 아저씨가 업고 위험지구를 빠져나갔습니다. 낮에는 숨고 밤으로만 멀리 돌아서 3일 만에 이곳으로 왔어요. 나는 부상당한 그날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밥도 못 먹고 지쳐 있는데도 늘어진 나를 업고 치료할 수 있도록 의무과 트까지 업어다 주신 성도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가 이따금 눈물이 나게 회상됩니다. 아저씨는 세상에 안 계시겠지요. 나는 다행히 경상이라 언니들의 지극한 간호로 10여 일 만에 완치되었습니다. 밥도 하고 후방사업을 도우면서 언니들로부터 환자 치료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의무과 소속 간호원으로 잡힐 때까지 일했습니다. 1951년 여름에 의무과 트에만 30여 명의 열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미국놈들이 세균을 뿌려서 수많은 동지들과 인민들이 죽어갔어요. 마파싱은 지하선을 통해서 입수했고 증류수를 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큰 용기에 물을 종일 끓여서 그 물로 증류수를 대신했습니다.”

여성 빨치산 이복순 동지와 박정덕 동지는 앉아서 듣고, 어둠발이 골짜기에 드리웠다. 대담을 마친 김영진은 주위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는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조선반도 남단에 있는 유치지구는 외래침략군이 조국을 유린할 때마다 애국 인민의 거점으로 적들과 최후 결전을 전개한 곳이다. 선열들이 묻혀있고 애국의 얼을 대대로 이어가는 곳. 유치지구를 뒤로 하고 차는 광주로 달렸다. 이복순 동지의 집에 갔다. 정성껏 차린 저녁을 먹고 차분하게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싶었지만 내일 일정 때문에 곧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오영애 동지의 이력

나와 영진은 오영애 동지와 대담을 했다.

“오영애 동지의 경력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제 고향은 전남 남해군 계곡면 법곡리고요. 아버님은 오용기, 어머님은 현남순, 1935년 4월 29일이 생일입니다. 오형제 중 장녀로 태어났어요. 학교는 집안 형편으로 얼마 다니지 못했습니다. 소학교 4년 중퇴를 했어요. 1950년 우리 고향이 해방된 후 9월에 계곡면 면 여맹에 나가서 일을 도왔습니다. 10월 말에 유치지구에 입산했고 후방부 보급과에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열병에 걸렸는데 용케도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낮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51년 3월 화학산 공세 때 부상을 당했구요. 4월에 유치지구 의무과 소속 간호사로 9월까지 활동하다가 10월 1일에 지리산으로 떠났어요. 지리산에 가서도 도의무과에 배치되어 간호사로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12월 공세 때 12월 15일 수도사단 군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2월 18일에 광주수용소로 수송되었어요. 1952년 7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7년형을 받았습니다. 광주 감옥에서 대전 감옥을 거쳐 전주 감옥으로 갔습니다. 전주에서 2년을 살고 경북 안동 감옥으로 갔어요. 1959년 1월 말에 안동 감옥에서 만기 출소를 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컸습니다. 수준 높은 선배 동지들, 언니들로부터 이론 학습은 물론 국어, 수학, 역사, 지리 등 여러 과목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소학교도 못 나온 저에게 감옥은 학교요, 제 인생의 기초를 구축한 도장이었습니다. 출소 후 고향에 갔다가 4월에 서울로 갔지요. 만기가 엇비슷한 언니들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지의 도움으로 제품공장 시다로 들어갔어요. 그 후 보세공장 등 밑바닥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언니의 소개로 대전 감옥에서 얼마 전에 출소한 손경수 님을 만나게 되었고 1964년에 동지와 결혼을 했습니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시집보내고 논산에서 둘이 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들려주셨네요. 여사(女舍) 생활도 궁금하고 묻고 싶은 내용이 많습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뒤로 미루고 이만 끝냅시다.”

우리는 대담을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정부영은 고단했던 것인지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었다. 나도 곧 잠에 떨어졌다.

오영애 동지의 고향,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 오영애 동지가 어머니 묘소에 참배하고 고향 옛집을 둘러보다. [사진제공-임방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일찍 일어난 여동지들이 식사준비를 끝낸 후였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정부영은 여동지들이 얼씬도 못하게 혼자 설거지를 하면서 출발 준비를 하시라고 다그쳤다. 집 밖에 나갈 때는 여성들이 얼굴을 다듬고 머리빗질도 하고 남자보다 일이 많나 보다. 뒤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아파트 출입문에 나타났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점검을 했다.

오늘은 오영애 동지의 고향을 거쳐서 백운산에 가기로 했다. 정부영은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를 안내판에 입력시키고 떠났다. 가다가 정부영은 배를 수북이 쌓아놓은 상점 앞에 차를 세워놓고 배 한 상자 사과 몇 알에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왔다. 해남은 광주에서 꽤 먼 거리였다. 열시 반경에 계곡면 법곡리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십여 채의 작은 마을인데 안으로 큰 집 여러 채가 대밭 속에 숨어 있었다. 1950년에는 60호가 넘는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오영애 동지는 말도 없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모퉁이를 돌자 吳氏 문중의 묘가 나타났다. 오영애 동지가 서 있는 상석 위에 정부영이 과일을 놓고 술을 따랐다. 오영애 동지의 어머님 묘라고 했다. 우리는 절을 올렸다. 1949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사신 어머님. 피투성이가 된 남편 시신을 땅에 묻고 큰 딸을 감옥에 두고 어린 것들을 키우신 어머님. 직접 당해보지 않고 그 큰 고통을 누군들 헤아릴 수 있으랴.

“아버님 묘는 어디 있습니까?”

“아버님은 시신까지도 선산에 못 오시고 정상 밑에 계십니다. 멀어서 못 갑니다.”

오영애 동지의 목이 메었다. 우리는 돌아 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어려서 살던 집에 가보자고 오영애 동지가 앞장섰다. 대밭 속으로 뚫린 고샅길과 수백 년 되어 보이는 돌담을 지나서 올라가자 큰 기와집이 보였다.

“계십니까? 계세요?”

토방에 고무신이 보이는데 사람이 없었다.

“여기가 제가 살던 곳인데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집입니다.”

“아버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 할아버님은 한학자로 당신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문만 가르쳤답니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아버님은 몰래 댕기를 잘라버리고 학교에 입학하셨고 워낙 완강하셔서 할아버님이 허락하셨대요. 소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실력을 쌓았으며 교원양성소를 나와서 소학교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해방 후 아버님은 일찍 우리 전선에 투신하셨고요. 여러 날 만에 집에, 그것도 밤으로만 왔다 가셨습니다. 1949년 정월에 아버님은 놈들의 매복에 걸려서 총을 맞고 돌아가셨어요. 당시에 아버님은 지구당위원장으로 지하사업을 하셨답니다. 세상이 엄혹한 때라 몇 분이 밤에 시신을 지게로 옮겨다가 안장하셨어요. 아버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제가 어렸을 때라 자세히 모릅니다.”

오영애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떠났다.

전남 빨치산 사령관 김선우 동지와 백운산

▲ 이복순 선생이 백운산 밑에서 김선우 동지를 회상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사진제공-임방규]

차는 백운산으로 달렸다. 가다가 점심을 먹고 백운산 한재에 도착한 시간이 3시 30분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자 수목장을 한 정운찬 동지와 손영심 동지가 묻혀 있는 잣나무를 찾았다. 정운찬 동지의 석관은 곧 찾았는데 손영심 동지의 석관은 주위의 나무 밑마다 헤쳐 보았으나 끝내 못 찾고 말았다. 우리는 정운찬 동지가 묻혀 있는 곳에서 묵념을 올렸다. 기세문 동지가, “저 골짜기 좀 위에서 김선우 동지가 1954년 4월에 격전 끝에 전사하셨답니다. 기왕이면 거기에 가서 동지들을 추모할 것인데 아쉽네요.” 하지 않는가.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내려가서 골짜기를 타고 그곳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이복순 동지에게 “동지는 김선우 동지로부터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김선우 동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복순 동지는 김선우 동지가 전사한 곳, 백운산 골짜기와 상봉을 바라보며 아픔이 북받치는 듯 눈가에 눈물이 고여 왔다. 백운산이 김선우 동지인 양 산을 바라보던 이복순 동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남 동지들은 하나같이 김선우 동지는 당성이 강하고 역량이 있고 작풍이 훌륭한 당 간부요, 군사간부(도당 부위원장 및 도 유격대 사령관)로 존경했습니다. 동지들이 지금도 만나면 화제에서 김선우 동지가 제외되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윤기남 동지와 저들의 기록에 나와 있는 전사하신 장소와 시신이 묻혀 있는 묘를 찾기 위해서 백운산에 여러 번 왔습니다. 저들의 기록에 트가 발견되자 안에서 최후까지 항전했고, 트 안에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모두 수준 높은 책이었답니다. 국방군 지휘관은 김선우 동지의 시신을 백운산 상봉에 옮겨다가 고이 묻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기어이 김선우 동지가 전사하신 트 위치와 백운산 상봉에 김선우 동지의 묘를 찾았습니다. 몇 년 전에 김선우 동지의 유골을 수습하여 선산에 이장했어요.”

이복순 동지가 말을 마쳤다. 저런! 김선우 동지의 묘가 백운산 상봉에 그대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정서가 스쳐갔다. 기세문 동지와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치했다.

우리는 고개를 넘어갔다. 비포장 도로 표면 위에 돌이 박혀 있어서 힘들게 내려갔다. 산자락에 구례읍이 보였다. 버스정류장에 가자 정부영이 광주행 버스표 두 장을 끊고 어느새 준비했는지 나주배 꾸러미를 하나씩 들려드렸다. 정부영의 자상하고 따뜻한 정에 떠나는 두 동지와 보내는 동지들이 좋아했다. 광주행 버스가 떠나자 우리 차는 서울로 달렸다. 날이 어두워졌다. 임실군 오류역을 지날 때 기차 습격 장면이 어제 일인 양 선하게 스쳐갔다. 논산에 가서 오영애 동지를 내려드렸다. 휴게소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서울에 10시경에 도착했다. 동지들과 헤어져서 3호선에 몸을 부린 나는 2차 전남전적지 답사를 돌아보았다. 500여 명이 살해당한 화학산 오영애 동지의 어머님 묘, 김선우 동지가 최후를 마친 백운산이 떠올라서 아파왔다. 이복순 동지, 오영애 동지, 박정덕 동지의 지원으로 경비에 여유가 있었으며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의 노고 등 흐뭇한 정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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