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KAL858기 사건 연구자)


▲ 지난 11월 29일 KAL858기 사건 22주기 추모제에서 신성국 신부가 미 CIA와 국무부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둘째, 수색과 관련된 내용이다.

87년 12월 7일자 문서에 따르면, 당시 최광수 외무부장관은 수색팀을 방콕과 랑군으로부터 철수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문서에는, 현지 대사관이 물론 수색을 계속 하겠지만, 외무부가 더 길고 폭넓은 수색을 준비해야 했다(MOFA HAD TO PREPARE FOR A LONGER AND WIDER SEARCH)고 기록되어 있다(E14, 1-2쪽).

87년 12월 16일자 문서는 버마 남쪽 해역에서 발견된 구명보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릴리 대사는, 당시 소병용 외무부 아주국장이 수색을 위해 미측에 PC-3 해상초계기를 더 보내달라고 했던 요청을 철회(WITHDRAW HIS REQUEST FOR ANOTHER PC-3 FLIGHT)했다고 적고 있다(E28, 2쪽). 소 국장에 따르면 구명보트가 KAL858기의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그 구명보트가 실제 대한항공기의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한편, 87년 12월 8일자 문서는 최광수 장관이 미국에 수색과 관련해 해군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미국은 준비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버마 당국의 협조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버마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은 이 수색의 민감성(SENSITIVITY)을 지적한다. 당시 최광수 장관이 언론에 “미국이 인공위성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우리를 도와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알렸는데 미국은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E17). 이와 관련해 당시 릴리 대사는 한국 언론이 “미국 인공위성”이 수색에 이용되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고 적고 있다(E19).

만약 미국이 잔해분석을 했었다면?

88년 1월 7일자 문서에 따르면, 미대사관은 수거된 잔해와 관련해 대한항공사 관리들에게 연락을 한다. 이 관리들은 아주 적은 양(MINIMAL AMOUNT)의 잔해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분석에 만족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릴리 대사는, 대한항공사나 한국정부 관리들 모두(NEITHER KAL NOR ROK OFFICIALS) 잔해분석과 관련된 도움의 필요성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E32, 1쪽).

그런데 당시 미국은 일찍부터 분석작업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87년 12월 7일자 문서에서 국무부는, 잔해가 발견될 경우 우리는 기술팀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WE ARE PREPARED TO SEND A TECH TEAM)고 말한다(E15, 2쪽). 87년 12월 19일자 문서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몇몇 잔해들이 발견된 것과 관련, 미국은 조사팀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가지 상황 아래여서였는데, 한국의 요청(REQUEST)이 있는 동시에 사고원인을 검증할 만한 충분한 잔해(ENOUGH DEBRIS AVAILABLE TO MAKE A REASONALBLE EXAMINATION)가 있을 경우였다(E29, 1-2쪽).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잔해분석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곧, 한국의 요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거된 잔해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만약 미국이 구명보트를 포함한 잔해분석에 참여했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셋째, 증거 부분이다.

87년 12월 2일자 문서에 따르면, 최광수 장관은 릴리 대사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평양이 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한다(FIRMLY CONVINCED)”고 말했다(E2, 2쪽). 아울러 당시 야당 지도자들 역시 대사관쪽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북쪽이 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릴리 대사는 지금까지 본 증거로는 아직 평양의 개입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THE EVIDENCE WE HAVE SEEN NOT YET PERMIT FIRM CONCLUSIONS)고 판단했다(E2, 3쪽).

하지만 점점 많은 수의 남쪽 사람들이 북쪽의 개입에 대해 확신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87년 12월 3일자 문서 역시 릴리 대사가 신중한 판단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곧, 북쪽 개입에 대한 정황증거가 쌓여가지만 용의자들의 신원과 그들의 평양 및 대한항공기 사건과의 관련성은 대체로 추측의 정도(LARGELY CONJECTURAL)라는 것이다(E6, 2쪽).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위로편지에 북쪽과 관련된 직접적인 표현이 들어가지 않았던 듯싶다. 편지에는 ‘테러리스트들(TERRORISTS)’이라고만 되어 있다(E8, 2). 87년 12월 4일자 문서에 따르면 최광수 장관은, 한국정부는 북쪽이 이 사건의 뒤에 있음을 아주 강하게(VERY STRONGLY)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까지 증거가 결정적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E11, 2쪽). 결국 당장은 한국정부가 북쪽을 이 사건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87년 12월 12일을 기준으로, 국무부는 아직 사실을 모른다(STILL DO NOT KNOW FACTS)고 판단했다. 88년 1월 11일자 문서는, 증거의 신빙성과 관련해 신두병 외무부 미주국장과의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논의에서 미국은 증거가 지금 당장은 확실한 성명을 낼 만큼 충분하지 않다(WE HAD NOT HAD THE EVIDENCE LONG ENOUGH TO MAKE ANY UNEQUIVOCAL STATEMENTS)고 지적했다고 한다(E42, 3쪽).

물론 이후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 등의 과정을 거치며 증거가 결정적(CONCLUSIVE) 또는 압도적(OVERWHELMING)이라고 하게 된다(E61, 9쪽). 이러한 변화는 올해 7월에 발견된 국무부 문서 2건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한편 88년 1월 15일자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이 북쪽 책임에 관한 증거(참고로 이날 안기부 수사발표가 있었다)에 대해 확고하게 긍정적인(FIRMLY POSITIVE) 성명을 내줄 것을 바랐다(E42, 1쪽).

넷째, 사건에 대한 한국의 대응정도이다.

88년 1월 8일자 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과 정호용 국방부장관이 솔라즈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설사 북쪽의 책임이 증명되더라도 군사적인 보복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NO THOUGHT IS BEING GIVEN)고 했다 한다(E33, 6쪽). 이에 대해 미국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 달 전쯤 릴리 대사는 북에 대한 남의 태도가 극적으로 악화될(DRAMATIC HARDENING) 것이라고 예상했었다(E2, 3쪽). 사실 미대사관 관계자는 당시 송한호 통일부 국장에게 북쪽에 랑군 폭파사건 형식의 사과(A RANGOON-STYLE APOLOGY)를 요청할 것인지에 대해 물은 적도 있다(E7, 2쪽). 이 질문에 송 국장은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이에 비해 전역한 군관리들의 경우 보복(RETALIATION)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박수길 외무부차관보가 릴리 대사에게 사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이다(E11). 미국 역시 87년 12월 3일자 문서에서, 보복을 포함해 한국이 극단적으로 강경한 입장(EXTREMELY TOUGH POSITION)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E3, 1쪽).

그래서일까. 릴리 대사는 87년 12월 4일자 문서에서 한국이 북쪽을 비교적 부드럽게 다루는 것에 놀랐다(SURPRISED AT ITS RELATIVELY SOFT HANDLING)고 적고 있다(E11, 2쪽).

김현희 사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다섯째, 이후 사건의 수습과정으로 주로 김현희 재판 및 사면에 관한 내용이다.

88년 11월 21일자 문서에 따르면, 미대사관은 김현희 검찰조사를 앞둔 시점의 언론보도를 보고 한국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분위기를 떠보려고 풍선(TRIAL BALLOON TO GUAGE PUBLIC OPNION)을 띄운 것이라고 평가한다(E62, 2쪽). 이와 관련, 대사관은 당시 광주 및 5공화국 청문회로 인해 국내에서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곤란이 더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적고 있다. 88년 12월 3일자 문서에서 릴리 대사는, 김현희가 자백을 했고 뉘우치고 있으며, 한국정부에 전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에 집행유예 내지 사면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E63, 3쪽).

결국 검찰은 김현희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이와 관련해 미대사관은, 사형은 한국정부의 희생자들에 대한 고려, 그리고 항공범죄 국제협약에 관한 존중을 반영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김현희를 처벌하는 것보다 북쪽 당국의 유죄를 증명(PROVING THE DPRK GUILT)하려는 데 더 신경을 써왔다고 평가했다(E67, 3쪽).

그리고 김현희가 사면을 받자 당시 워싱턴포스트 서울특파원이 미대사관쪽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정치담당 관계자에게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E69, 2쪽). 대사관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사면에 대해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국무부가 지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당시 주한미대사는 도널드 그레그다). 이어지는 다음 부분은,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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