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기본 남북 간 정신은 91년 체결된 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기본합의에는 한반도 핵에 관련된 부분이 들어가 있다.”

26일 통일부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면한 남북과제에 있어 우리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남북관계에 있어서의 기본적 정신을 우리가 정리해야 한다”며 뜬금없이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꺼내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날 통일부의 업무보고 내용이나 공개된 이 대통령의 모두발언 어디에도 눈을 씻고 봐도 6.15공동선언 정신이나 10.4선언 정신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회피가 아니고서야 있기 어려운 일이다.

하긴 “핵을 이고 우리가 통일하기가 힘들고 본격적 경제협력하기 힘들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진 대통령에게 당면한 북핵문제 해결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6.15공동선언은 한가한 말장난이요, ‘실용성과 생산성’도 없는 그야말로 선언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10.4선언에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명기돼 있지만 이를 언급하는 순간 북과 합의한 방대한 약속을 이행해야 할 책무가 주어지니 이 또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간의 대북 화해협력정책과 선을 긋고 싶은 이명박 대통령이 꺼내들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현 여권과 뿌리를 같이하는 노태우 정권 시절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 정신’ 밖에 없는 셈이다.

실제로 이날 업무보고에서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새로운 출발에 앞서 저희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먼저 ‘죄’를 자복했고, 이 대통령은 “우리 통일부 모든 간부들이 이제까지 해오던 그런 방식의 협상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고 나무랐다.

대통령이 뜬금없이 꺼내든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이 남북관계의 기본정신에 있어서 차별화의 상징이라면 나들섬 구상은 남북 경협에 있어서의 설익은 차별화의 상징처럼 보인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은 “개선의 여지가 많긴 하지만” 마지못해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10.4선언에서 합의한 개성공단 2단계 개발이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조선협력단지 건설, 철도.도로 개보수 등 굵직한 경협사업들은 모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북 당국간 합의를 남측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잉크도 마르기 전에 일방적으로 내팽개치는 것도 상식 밖이지만 그 빈 자리를 설익은 나들섬 구상으로 채워넣은 것은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통일부가 올해 추진할 12대 과제의 하나로 당당히 제시한 나들섬 구상은 북측과 협의된 바도 없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대운하와 같이 문제점 투성이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부는 조직을 축소 재편한 와중에도 이미 ‘나들섬 추진기획단’을 신설해 이 사업 추진을 기정사실화 한 바 있다.

기본합의서 정신과 나들섬 구상 외에도 이명박 정부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북한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도 기존 정권들과는 적극적 차별화를 선언하고 나섰고 대북 협상 방식에 있어서도 ‘국민의 비판’을 명분삼아 ‘실용과 생산성’이라는 사실상의 상호주의를 들고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남북 간에 있어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 사랑하듯이 북한 주민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진정한 한 민족으로서 북이 빠른 시간내 경제자립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대통령의 이같은 바람이 ‘진정성’을 가진 것이라면 벽장 속에 잠자던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꺼내들기 전에 6.15공동선언 정신과 10.4선언 이행 의지부터 먼저 밝히는 것이 진실된 태도일 것이다. 이명박 호의 대북 정책이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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