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통일맞이 나들이 - 하나를 위하여' 대표)


다시 만들어진 <자유의 다리>

임진각 공원에 온 관광객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가는 곳은 <자유의 다리>이다.
이곳 자유의 다리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포로교환이 이루어져 이곳을 통하여 국군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넘어 온 곳이라고 관광객들에게 설명되어 있다.

다리의 끝은 철조망으로 막아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있고 이 철조망에 통일의 염원을 담은 여러 글귀가 남겨져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다리 아래에는 한반도 모양으로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통일염원을 키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포로교환에 관한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포로가 교환된 곳은 이곳 자유의 다리가 아니라 판문점이었기 때문이다(정전협정 3조 55항). 당시 국군포로를 인수한 것은 이승만 정부가 아니라 유엔사였으며,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계속적인 북진통일을 외쳤기 때문에 정전협정의 당사자로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가 유엔사에게 국군포로를 인수한 곳은 판문점에서 멀리 떨어진 경의선 철교가 지나가는 임진강 위 이 곳이었는데, 경의선 철교 역시 폭격으로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급조된 나무다리를 통하여 포로들은 건너왔다. 따라서 우리의 국군포로를 넘겨받은 것은 전쟁의 반대편인 북으로부터가 아니라 같은 아군으로 활동한 유엔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국군포로를 유엔사로부터 받기 위해 급조한 다리는 그 후 장마와 홍수 등으로 유실되었다.

이후 경의선 철교를 자유의 다리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지자 그 옆에 새로운 목교를 건설하여 관광상품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 지금의 자유의 다리로 소개되고 있는 이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유의 다리는 당시 포로들이 유엔사에 의하여 한국군에 인계되었던 자유의 다리가 아닌 것이다.

아래의 지난 전쟁 당시의 것과 현재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쟁 당시 사진을 보면 자유의 다리는 경의선 철교 옆을 따라 교각의 반정도 높이로 임시 가설되어 있었다. 지금 경의선 철교 높이로 되어 있는 것도 맞지 않고 대각선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도 맞지 않다.

▲ 1953년 7월 유엔사로부터 국군포로를 인계받은 자유의 다리.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경의선 철교의 우측에 나란한 모양으로 급조한 목조다리가 본래의 자유의 다리이다.-위 사진은 현재 임진각 지하에 전시되어 있는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촬영한 것임. [사진 - 유영호]
▲ 현재 임진각공원에서 자유의 다리(중간부분 좌우로 늘어선 목교)로 안내되고 있는 것으로 안보관광 상품으로 본래 자유의 다리와 다른 위치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 - 유영호]
그럼 이제 그 동안 공산군에 의하여 잡혀있던 국군포로가 우리에게 인계된 장소처럼 알려졌던 자유의 다리에 대한 실체적 정보는 이 정도로 하고, 이 곳 자유의 다리에 서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국전쟁을 3년이나 끌게 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을 발생시키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던 포로교환문제에 대한 정확한 학습이다.

포로교환,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참전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며,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로교환을 위한 전쟁의 장기화

전쟁 발발 후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초기 1년을 지나고 나서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진지전으로 전환되며 1951년 7월 10일부터 정전협상이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전회담이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7월 26일 협상 의제에 합의를 하고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정전감시기구 등 서로의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큰 무리 없이 논의가 진행되어 갔다.

하지만 포로교환문제에서 쌍방이 대립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정전회담 총 24개월 17일 동안 포로교환문제 때문에 18개월 11일간 전쟁을 더한 꼴이 되었다. 이로써 포로문제 해결을 위하여 포로를 더 발생시키는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전회담은 가히 포로교환을 위한 회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내전적 성격과 이념적 대립이 혼합되어 발생한 매우 독특한 한국전쟁만의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한국전쟁의 특수성에 비추어 이를 이용하려 했던 미국의 포로정책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평화의 발명품'이라 칭송받으며 1949년 국제적으로 합의한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118조)고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국제협약에 따라 남북이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였으면 전쟁은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그래서 정전회담이 재개되었을 당시에도 포로교환에 관한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51년 12월 18일 쌍방이 포로명부를 교환하면서부터 포로교환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유엔사가 제공한 포로명단은 132,474명이었고 북이 제공한 포로명단에는 11,559명이었다.

이러한 포로명단에 대하여 서로 예상된 포로의 수보다 적다며 상호 비방.대립하였고, 사라진 포로를 직접 상대방의 포로수용소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미국은 제네바협정에서 규정한 전체포로 맞교환방식을 거부하고 1:1 맞교환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북에 대한 압박용으로 감춰둔 포로를 내놓으라는 것이고, 만일 군인의 수가 모자란다면 북이 납치한 민간인들로 그 수를 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교환되고 남는 북의 포로들에 대한 처리방법이 없었으며, 제네바협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들을 남쪽 법으로 처벌할 수도 없고, 또 이들 포로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식량문제도 그렇고 결국 포로 교환 사상 초유의 제안이기는 하였지만 결국 미국은 1:1 맞교환 방식을 철회한다.

한편 1951년 7월초 미국의 심리전 책임자인 맥클루어 장군은 포로에 대한 신분조사를 통하여 중국군 중 장개석의 국부군에서 강제 징용된 병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어 대만으로 돌아가도록 하자는 제안을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한다.

이렇게 하면 중국본토로 강제송환되지 않는데 자신감을 가지고 더 많은 중국군의 투항이 발생하여 적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내전적 요소로 인하여 남북심리전에서 적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에는 미군 지휘부에 의해 보류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의 포로교환은 제네바협정을 위반하는 것이기에 공산측의 역선전에 말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시 미군의 적극적인 공세로 포로문제는 법적 근거보다 인도주의를 강조하도록 세계여론을 돌림으로써 유엔사는 멕클루어 장군의 제안인 자발적 포로교환을 제시하고, 포로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들을 감독기관이 면접하자는 제의한다(1952.1.2).

이것은 포로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결정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제네바 협정 제7조에 근거하지만 제118조에는 위배되는 것이다. 그 결과 협상을 수 개월간 표류되고 미국은 춘계공세니 추계공세니 하면서 더 큰 타격을 입혀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데 골몰한다. 이로써 정전협상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당시 예상되는 송환거부 포로가 인민군은 8천 여명 수준인데 반해, 중국군은 무려 배에 가까운 1만4천7백 여명으로 북측은 강력 반대하였다.

하지만 전쟁은 지속되고 양측 모두 마냥 포로교환 문제에 묶여 있을 수 없었으며, 당시의 정세는 정전타결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952년 11월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고, 12월 3일 제7차 유엔총회는 인도가 제안한 포로송환에 관한 결의안(4개 중립국으로 구성된 송환위원회를 조직하여 포로를 120일간 그 위원회에서 설득하여 가고 싶은 곳으로 송환되게끔 하자는 것)을 압도적 다수결로 통과시키며 정전을 압박하였다.

또한 이듬해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뒤를 말렌코프가 이으며 미소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라 북의 제안으로 1953년 4월 6일 정전회담이 재개되며, 4일 뒤 상병포로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6월 8일 본국송환 거부 포로에 대한 처리를 합의하여 포로교환문제를 일단락짓게 됨으로써 정전회담은 최종타결 쪽으로 정리되어갔던 것이다.

이승만의 정전반대와 한미동맹

하지만 정전회담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은 계속적인 북진전쟁을 주장하며 정전회담을 반대했던 이승만 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1953년 5월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좀더 종속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한 쿠데타 작전인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eady)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포기한 상황에서 미국은 이승만 전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하여 그의 방미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전대통령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1953년 6월 18일 미국에 사전예고 없이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만다.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eady)>

작전에 의한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불복종하고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미군에 충성하는 지휘관들로 대체할 것.
ⓑ이반한 한국군 부대, 사령부 및 한국정부 사이의 교신망을 두절시킬 것.
ⓒ민간과 군대의 교신망을 장악할 것.
ⓓ유엔사령부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할 것.
ⓔ유엔사령부에 의한 군사정부수립을 선포할 것.

이에 미국은 정전회담을 파탄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하여 6월 25일 국무차관보 로버트슨을 대통령특사로 파견하였고, 결국 7월 11일 미국이 제시한 다음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승만도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위한 교섭 개시한다.
② 장기간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③ 휴전협정체결 후에 개최될 한국의 정치적 통일에 대하여 90일간 아무런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 미국은 그 회의로부터 탈퇴한다.
④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약속.

이처럼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정전회담은 포로교환 문제로 더욱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게 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후 한미관계의 종속적인 정치.군사적 관계를 잉태시킨 것이다.

당시 양국이 합의한 사항 가운데 당장 제3항은 정전협정 이후 벌어지는 평화협정으로의 길을 부정적으로 만들게 하였으며, 제4항은 정전협정 그 자체에도 위반되는 것이었다. 이는 병력증강 없이 교체만을 허용하고, 군사장비는 낡은 장비를 동일한 장비로 교체하는 것만 허용하며, 새로운 장비의 유입을 금지하고, 외부로부터의 병력증강도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정전회담 제2의제에 위반되는 것으로 애당초 미국은 정전협정을 준수할 의사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불안정성과 평화협정의 필요성

정전협정에 있어서 이미 수행된 조치들(예:포로교환)은 지금에 있어 생명력이 없는 것이고, 전체 5조 63항으로 되어있는 정전협정은 평화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방안들이지만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어 현재 전혀 작동하지 않는 조항이다(외부로부터의 무기반입을 금지한 13항 ⓓ.ⓖ, 군사정전위원회에 관한 19~35항,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정치협상에 관한 60항, 정전협정의 수정에 관한 부칙 61항 등). 또 정전협정이 무력화되는 과정은 쌍방합의(61항)라기 보다는 한쪽의 일방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반도 분단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체제나 제도'는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실정이다. 제도적 보장이 없는 불안정성, 이것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첫 번째 기본 성격이다. 이처럼 우리의 분단이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힘은 어떤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힘의 대치' 때문이다. 이처럼 제도적 장치에 의한 정전체제가 아닌 힘의 대치에 의한 정전체제가 1990년대 이후 북핵 위기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정전체제를 이제는 평화체제로 변경시킴으로써 분단의 역사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일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화체제가 자칫 통일로 향하는 것이 아닌 평화스러운 분단체제로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포로교환이 3년간 벌어진 한국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조금은 깊게 나름대로 자료를 뒤져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렇지 않고는 이 자유의 다리는 그저 포로교환이라는 단순한 사실로만 남아있을 뿐 더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어쩌면 3년간 수백만 명이 희생되며 치러졌던 한국전쟁은 포로교환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구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발길을 이제는 임진강 건너 민통선 안쪽으로 옮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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