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통일맞이 나들이 - 하나를 위하여' 대표)

최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북미관계는 종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 통일정세가 무척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통일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지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기행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큰 통일기행은 상호 자유로운 방문일 것이지만 아직은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기에 일단 남쪽 땅에서 통일기행으로 가장 많이 찾는 파주 일대의 민통선-DMZ 권역을 이번 기행지로 선택하였다.

출발지로는 이러한 통일환경 조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2000년 6.15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김대중도서관>을 선택하였고, 이렇게 시작되는 통일기행은 자유로를 이용하여 통일동산과 임진각을 둘러보고 민통선 내부로 들어가 도라산역, 제3땅굴, 캠프보니파스 등 여러 장소들을 보며 그 의미와 현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또 유엔사 관할지역인 남측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판문점과 대성동마을을 둘러본다. 그리고 민통선을 빠져 나오면서는 통일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돌아오며 적군묘지, 장준하 묘, 보광사 구 비전향장기수 묘역 등을 살펴보며 돌아오는 것으로 기획하였다.

아직까지 분단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이곳 민통선-DMZ 일대에서 최근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통일의 역사를 직접 몸으로 느끼며 남아있는 분단의 흔적들을 지우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필자 주

필자는 이번 통일기행을 떠나며 그 출발지로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www.kdjlibrary.org)을 삼았다. 이는 우리 통일의 역사에 있어서 6.15 공동선언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남북 양 정상이 합의한 내용을 이번 통일기행의 사상적 지표로 삼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아침 일찍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을 찾았다.

▲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 전대통령 자택 옆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 좌측 건물이 김대중 전대통령 자택이다. [사진 - 유영호]

물론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 통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의미 있는 남북간 합의는 6.15 공동선언보다 남북의 첫 번째 합의였던 7.4 공동성명(1972)이라고 생각한다. 7.4 공동성명에는 우리가 원하는 통일의 목적과 방법이 명쾌하게 밝혀져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가 "한 발짝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가도 날만 개면 이 민족의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앞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7.4 공동성명"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7.4 공동성명서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이 통일의 이념적 지표로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7.4 공동성명 중에서)

이러한 조국통일 3대원칙은 그 뒤 남북이 합의하는 모든 정치.군사적 합의서에서 그 사상적 지표로 항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 남북간의 합의는 비록 7.4 공동성명서에서 합의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원문 그대로 옮기지는 않을 지라도 모든 합의서의 근저에 그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서문이 그러하며 또 지난 2000년에 있었던 6.15 공동선언 1항이 그러하다. 물론 최근 있었던 제2차 남북공동선언문에도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7.4 공동성명을 상징할 만한 물리적 장소가 없는 터인지라 이번 통일기행에 있어서 필자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근저에 깔고 합의된 6.15 공동선언을 택하였다.

또한 6.15 공동선언은 그 이전의 합의서들과는 달리 최초로 남북 양 정상 각각의 국호와 직명이 명기된 합의문으로 그야말로 남북 최고지도자 사이의 합의서이기 때문이다. 7.4 공동성명은 서명주체에 국호나 직명이 모두 배제된 채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라고만 쓰여있을 뿐이며, 한편 1991년 남북합의서는 국호와 직명 등이 모두 명기되어 있지만 서명 주체로 남측은 국무총리, 북측은 정무원 총리였을 뿐 최고 지도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문이 전시되고 있는 김대중도서관을 이번 기행의 출발지로 삶은 것이다.

또한 이 도서관 옆은 6.15 공동선언의 남측 주체였던 김대중 전대통령의 자택이 함께 있어 통일기행 출발지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곳 김대중도서관은 2003년 1월 김대중 전대통령이 건물과 사료 등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면서 국민들 속에서 대중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이다. 따라서 일반 여타의 대학도서관과 크게 차이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서관이란 이름 앞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붙게 되어 도서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아직도 일반인들은 어렵고 뭔가 권위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또 그 위치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자택과 붙어 있어서 그곳에는 항시적으로 경찰들이 경호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은 퇴임 후 7년간 경호실에서 경호를 하고, 그 이후는 경찰로 경호업무가 이관된다. 따라서 현재 김대중 전대통령 저택을 경호하고 있는 경찰관들은 청와대 경호실 소속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몇몇 이유로 일반인들은 왠지 쉽게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곳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으로 우리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견학장소로 지리적 접근성에 있어서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 김대중도서관 로비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것처럼 김 전대통령의 웃는 모습과 그 옆에는 전자 방명록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의 사진과 남겨진 글들이 저장되어 김대중도서관 홈페이지에 기록되어진다. [사진 - 유영호]

도서관의 구성은 1층은 '상설전시실'로 노벨평화상과 6.15 공동선언문 그리고 옥중서신 등 세계평화와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특별전시실'로 세계 각국 정상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전시되어있고 또 사료실이 함께하고 있다. 한편 지하 1층은 '도서전시실'로 김대중 전대통령의 소장도서가 전시되어 있고 그 곳에서 간단히 서적을 읽어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이렇게 총 3개 층이 전시실로 꾸며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3층에는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4층은 도서관 사무실과 김대중 전대통령의 비서실이 함께 있다. 마지막으로 맨 위층인 5층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연구실이다. 언론에서 현역 정치인들이 김 전대통령을 찾아가 면담했다는 것은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김대중 도서관 1층 전시장. 사진 속의 왼쪽 전시물은 이희호 여사 소장품이며, 뒤편에 보이는 옷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청주교도소에서 입었던 수의이다. [사진 - 유영호]
▲ 2층 특별전시실에는 김 전대통령이 세계각국 정상들과의 만남에서 받았던 선물 및 의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유영호]
김대중도서관은 최초에는 연구중심의 도서관으로써의 기능에 맞게 설계되었으나 책을 보는 도서관으로써의 의미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찾아와 김대중 전대통령의 세계평화와 민주화를 향한 삶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2006년 리모델링하여 도서관으로써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박물관 컨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전에 서적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던 것에서 서적 이외의 소장품들이 더 많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은 1978(주체67)년에 개관하였으며, 2006년 6월 현재 약 27만여 점으로 제1전람관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온 164개국의 54,389점, 제2전람관에는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온 179개국의 220,356점의 기념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전시물건을 다 보자면 1달이 걸린다고 한다.

특징적인 것은 사진 속에 보여지는 전람관의 모습은 우리의 전통건축물인 한옥으로 되어 있지만 나무는 단 하나도 사용되지 않고 돌로 만들어져 있다. 또 겉에서 보여지는 것은 전람관의 입구에 불과하며 200여 개의 전시실은 모두 지하에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쟁과 분단으로 빗어진 건축법이니 그 기이한 건축양식에 놀라우면서도 왠지 씁쓸했다. 이러한 전람관의 모습에 대하여 로스엔젤레스 타임지(2005.11.25)는 "요새화된 전시장"이라고 보도하였다.

필자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전시실들을 둘러보았다. 전시실 입구에서 편안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김전대통령의 모습이 편하게 느껴졌고, 전시물의 첫 번째 위치한 것은 다름 아닌 노벨평화상과 메달이었다.

권위적이고 격식있게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장과 달리 풍경화가 그려져 있는 노벨평화상장에 신선함을 느껴보았으며, 김대중 전대통령이 민주화투쟁 시절 감옥에서 보낸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진 옥중편지를 가까이서 드려다 보며 당시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김 전대통령의 열정을 느껴보았다. 한 달에 단 한번밖에 그것도 가족에게만 편지를 쓸 수 있었는데, 봉함편지라는 정해진 공간 속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작성하였고, 가장 많은 량의 편지는 약 14,000자 분량이 들어간 것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전달된 김 전대통령의 글들은 처음 1983년 일본에서 책으로 발간되었고 그 뒤 우리나라(1984), 미국(1987), 스웨덴(1999)등 여러 나라에서 발간되었다.

▲ 2000년 12월 수상한 노벨평화상과 메달. [사진 - 유영호]

▲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하는 하는 동안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보낸 29통의 편지를 묶은 '옥중서신'과 당시 미국에서 구명운동에 사용되었던 스티커이다. [사진 - 유영호]

그리고 이번 통일기행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전시물인 2000년 6.15 공동선언문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다시 한번 합의문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특히 남측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그 해석에 있어서 편차가 존재하는 두 개의 조항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먼저 1항은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연계된 문제일 것이다. 당시 미국정부의 한반도통일에 관한 기본 입장은 '평화'이며, 다른 말로 하면 남북 양국론에 의한 분단의 평화적 관리이다. 즉 북과의 관계정상화 대신 남측에서 미군의 철수 불가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워싱턴은 제1차 정상회담 직전에 웬디 셔먼과 찰스 카드먼을 서울로 보내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였고 주한미군 문제는 남북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남측 역시 이와 같은 입장으로 주한미군의 문제를 한미방위조약에 의한 한미간의 문제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북은 주한미군 문제를 정전협정의 연장선상에서 북미간의 적대적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한미군은 이러한 상반된 관계를 동전의 양면처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조정 없이 남북이 진정한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원칙적인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이란 우리의 민족적 과업이다. 그리고 민족적 과업이란 오랜 세월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왔음을 복원하는 것이다. 즉 완전한 '국민국가'로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완전한 성취는 단지 민족의 외형적 결합에만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로서의 제일의 요소인 '자주권'을 갖는 것이다. 그러한 완전한 국민국가로의 형성의 주체는 마땅히 국가구성원들인 '우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 '열린 자주'니 '개방형 자주'니 수식어를 동반하며 어떻게든 주한미군의 지위를 인정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한 자세이다.

다음으로 2항은 많은 해석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이 연방제를 선호하고 남이 국가연합제를 선호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연방제와 국가연합제의 대립으로 열띤 논쟁 후 북은 '이것으로 회담이 끝났다. 더 이상 회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은 다시 돌아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제시했으며 이로써 6.15 공동선언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남측은 여기서 무엇을 조정했던 것일까? 남측의 통일방안에서 흔히 1단계로 거론되는 국가연합 단계는 상호 교차승인한다는 양국론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현실론이란 장점도 있지만 끊임없이 ‘Two Korea’노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2항의 합의문을 유심히 보면 연합제 앞에 '국가'라는 단어가 배제되었으며 연방제와 연방제의 공통성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이란 전제 조건과 "통일을 지향"한다는 목표점 사이에 존재한다. 즉 Two Korea로 나아갈 위험성을 앞뒤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묘하게 구성된 6.15 공동선언문이기에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로 남과 북이 각각 나누어 갖은 6.15 공동선언문은 그 내용은 같지만 형태(?)는 서로 다르다. '남북'이란 표현이 북측 선언문에는 '북남'으로 표기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명 주체가 표기되어 있는 위치도 각각 소유하고 있는 선언문에 서로의 서명 주체가 각각 먼저 나오게 되어 있다. 뭐 이 정도의 차이야 우리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선언문의 필체도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정확한 필체명을 필자는 모르지만 일반인이 볼 때 북측의 선언문은 붓글씨체로 쓰여져 있으며, 남측의 선언문은 명조체로 쓰여져 있다. 이처럼 분단은 흔적은 이런 작은 것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언문의 내용은 서로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랜 세월을 헤어져 살아왔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로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문제라는 것이다.

▲ 남북이 각각 보관하고 있는 공동선언문은 사진 속에 보여지는 것처럼 '남북(북남)'이란 용어, 필체, 서명 순서가 서로 다르다. [사진 - 유영호]
그럼 이제 이러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운명의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역동적으로 분단이 지워지고 통일이 열리는 곳. 파주로 통일맞이 나들이를 떠나보도록 하자.

<One Korea와 Two Koreas에 대한 단상>

앞서 6.15 공동선언문을 보며 1항의 자주조항에서 언급된 "우리 민족끼리"라는 문구를 생각하며 우리가 통일을 이야기할 때 유의 깊게 보아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One Korea와 Two Koreas'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깊게 알아보는 것이 이번 통일기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할 것 같아 따로 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 떠나도록 하자.

그 방법으로 남측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갖고 있는 2국론(Two Koreas)적 요소에 대한 분석을 택하였다.

분단국으로서 아직도 완전한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근대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현재 활발하게 통일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시기 역사발전의 단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외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정책이 다르고, 대내적으로는 통일 정책에서 있어서 1국론(One Korea)과 2국론(Two Koreas)의 대립을 보이게 된다.

현재 급속하고도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북핵문제는 북미간 종전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면, 다음 쟁점은 존재의 방식, 즉 하나(One)와 둘(Two)의 문제로 옮겨가는 것이 필연적 수순일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 앞서 우리는 먼저 통일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쟁점의 하나가 남과 북, 둘의 관계를 현재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 3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북을 바라보는 시각

근거

입장

북을 이적단체로 보는 시각

국가보안법, 헌법 3조(영토조항)

남쪽은 유일합법정부이며, 북은 불법 강점한 반국가단체로 인식

두 개의 국가로 보는 시각

박정희의 6.23선언(1973)부터 노태우의 유엔동시가입(1991) 등에서 제기된 시각(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대체로 이에 동조하고 있음)

남북을 각각 별개의 국가로 보는 입장

하나의 국가로 보는 시각

7.4공동성명(1972), 남북기본합의서(1991), 6.15공동선언(2000) 등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인 특수 관계”


첫째, 이적단체로 보는 시각으로 국가보안법의 규정이 이에 해당된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 영토조항을 근거로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측을 불법 강점한 반국가단체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서 북을 바라보면 모든 남북대화와 협상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고, 북은 오직 와해, 척결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세력이 약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런 방식의 논리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 두개의 국가(Two Koreas)로 보는 시각 즉 1973년 박정희 정권의 6.23선언(남북 교차승인과 UN 동시가입)에서부터 시작되어 노태우 정권의 UN 동시가입(1991) 과정 등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각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현 정부의 통일인식도 대체로 이런 관점에 있다.

셋째, 하나의 국가(One Korea)로 보는 시각으로 이는 7.4 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하여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6.15 공동선언에 근거한다. 남북기본합의서 규정을 인용한다면 남북 사이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인 특수 관계"로 보는 입장이다.

위에서 크게 나누어본 현재 남과 북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지난 국가보안법 개폐논쟁에서 보여지듯이 남측 주류 제도권사회에서는 첫째와 둘째 시각, 즉 반국가단체냐 서로 다른 국가냐의 문제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쪽 내부의 현실과는 달리 남과 북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세 번째 입장 즉 1국론이 등장하고 또 대부분의 합의가 이러한 세 번째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보면 남의 주류 제도권 사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남북관계에 관한 논쟁은 다분히 내부용이거나 허구적이며 정략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북에 대하여 이적 단체니 내지는 다른 주권 국가니 남쪽 내 서로 정파간에 대립되다가도 북과의 협상에서는 항상 세 번째 입장에서 합의하고 돌아오는 것이 정치권의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현상이다. 이러한 주류 제도권 사회의 이중적인 언행은 남쪽 주류사회의 낙후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미국은 1국론과 2국론의 차이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다. 이것이 1973년 6.23선언과 또 최근의 변화된 정세 속에서 페리보고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냉전의 유물이며 정략적 의미만 존재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론을 제외하고 나머지 관점인 1국론과 2국론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쟁점으로 이어진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국론과 2국론은 역사인식을 달리한다.
즉 1국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누어진 것이므로 현재의 분단을 하루 빨리 끝내고 통일하는 것이 과제이다. 따라서 이 시각에서는 분열의 원인을 분석.해결하고 또 남북 분단의 법적 질서인 정전협정의 제거가 중요한 관심 대상일 것이다. 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미국의 개입 근거를 제거한 뒤 남북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중요하게 된다. 즉 진행순서로 보면 '북미 사이의 평화협정-남북 사이의 통일협상'이 기본을 이루게 될 것이다.

반면 2국론의 시각에서는 양국은 본래 하나의 민족이었을지라도 서로 다른 체제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추인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두 개의 국가를 이루되 어느 쪽이 우세하냐를 기준으로 다른 한쪽이 우세한 체제에 흡수되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는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 등 계량적 이유로 통일보다는 남과 북의 평화공존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며 따라서 북미평화협정 보다 남북평화협정이 앞서는 것이다. 또 이러한 상황이기에 남쪽에서의 미국의 지위는 미지수이며 통일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단지 통일은 북의 체제를 남과 유사하게 바꾸어 나가고 흡수 가능할 경우에 논의대상이 되는 것이다.

둘째, 1국론과 2국론으로 대변되는 연방제와 연합제에서 외세 즉 미국의 지위에 대한 차이이다. 1국론과 2국론 양자 모두 남과 북 서로의 사상, 제도, 이념의 차이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것의 외세에 대한 관점인데 이것이 남과 북의 통일정책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이며 이로 인해 결정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국론이 주장하는 국가연합이란 그야말로 남북간 국가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며 통일보다는 교류와 평화를 강조한다. 현 단계에서 이러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징표가 되는 것은, 북미간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협정'을 남북이 국가 대 국가의 새로운 평화조약(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측 주한미군에 대한 북측의 발언과 개입은 정전협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적으로 불법행위가 된다.

반면 One Korea나 남북연방은 제도, 사상, 이념의 차이를 폭 넓게 인정하지만, 국가주권의 차원에서 남과 북은 어디까지나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남북이 아닌 외세는 타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남북이 '하나'라는 개념에서는 '하나가 아닌 주한미군'의 지위와 위상에서 어떠한 변동을 필연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One Korea를 표현하는 개념이 통일이며, 여기서 평화는 통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평화문제에 대해 남북 사이의 공동선언이나 조치는 있을 수 있지만,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통일문제는 민족을 바라보는 개념에 따라서 그 방법론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고 또 그러한 방법론의 차이 이면에는 감상적 차원의 통일논의를 뛰어 넘는 현실의 엄연한 힘의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상적 근거에는 단일민족으로써 통일의 주체 세력인 남과 북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민족, 민족주의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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