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10일,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외침이 가득했던 시울 시청광장과 남대문, 명동 일대는 20년이 지난 2007년 6월10일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이날 ‘87년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민간조직위원회’가 주최한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범국민 대행진’에서 500여명의 참가자들은 서울 시청광장을 출발해 남대문을 거쳐 명동성당 앞까지 오늘날 ‘6월 항쟁’이 안겨주는 의미와 과제들을 곱씹으며 행진했다.
이들은 이날 발표한 ‘87년 6월 항쟁 20주년에 즈음한 시민사회단체 공동선언문’을 통해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으며 우리는 민주화의 성과가 위협받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며,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20년을 맞는 6월 항쟁의 의미가 ‘화석’화 된 ‘기념행사’로 그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선언문은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이 시각에도 독재와 수구 망령이 되살아나 활개치고 있다”며 “지난 날 국정을 농락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자들이 다시금 권좌를 넘보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 “한미FTA 협상 개시와 체결 과정에서 국민대중의 참여와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집회.시위의 자유가 원천 부정되고 서울 상경을 위한 출발까지 원천 봉쇄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한미FTA 반대광고까지 금지되는 헌법 파괴적인 상황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광훈 한국진보연대(준) 공동준비위원장은 “당시 40대 초반에 칼빈소총과 M16을 들쳐메고 투쟁했던 생각이 난다”고 회고하면서 “오늘 이 자리는 기념이 아니고 새로운 파시즘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과거 전두환 정권이 총과 군대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짓밟았다면, 이제는 미국의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싸인펜’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정 공동준비위원장은 “(한미FTA) 국회심의가 남아있다. 민중의 힘으로 용납해서는 안된다”면서 “제2의 6.10항쟁의 축제를 벌이자. 통일된 세상, 농사만 지으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이승호 의장은 이날 대행진의 종착지인 명동성당 앞에서 시국연설을 통해 “오늘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오늘 우리는 6월 항쟁을 완수하자고 얘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615공동선언을 외치고 있는 지금, 100만, 200만이 모여서 제2의 6월 항쟁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이어 “오늘날 민주세력의 분열로 인해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재집권의 야욕을 꿈꾸고 있다”면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진보세력, 민주세력, 환경세력 등 모두가 단결하는 것이다”고 진보진영의 단결을 강조했다.
전국 1천여개의 시민단체가 망라된 민간조직위원회는 이날 선언을 통해 “각계각층, 지역부문에서 진보와 개혁, 평화와 상생을 위해 노력해 왔던 우리들은 오늘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으며, 다시금 정의와 역사가 부르는 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고 밝혔다.
시청에서 명동까지, 87년 당시 격전지 현장 재현 눈길 

이날 참가자들은 안전모를 쓴 노동자, ‘몸빼’를 입은 노점상, ‘애국신도단결하여 폭력정권 끝장내자' 플랜카드를 앞세운 교인 등 당시 참가자들의 모습을 재현했고, 사무금융연맹, 공동연맹, 전교조,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 등 당시의 ‘넥타이 부대’들이 20년만에 다시 뭉쳤다.
특히,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아래 6월 항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줬던 고명진 기자(현 뉴시스통신사 사진영상국장)가 촬영한 ‘아! 나의조국’이란 사진을 재현하며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달리고,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을 뿌리기도 해 많은 눈길을 끌었다.
7,80년대 운동가들의 모임인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 송세언 사무총장은 “그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며 피가 끓는다”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0년전의 ‘격전지’를 다시 걸으며 만감이 교차했다는 송 사무총장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는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고 들떠있던 감정을 추스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특히 양극화 문제는 고쳐야 되는 것이고 통일도 진전되기는 했지만, 아직 냉전적 사고가 많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6월 항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은 대행진의 재현광경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노점상을 하는 한 시민은 “당시에 노동자였는데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다”며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기자를 물리치면서도 “그때 함께 했던 ‘민주투사’들이 지금은 잘 됐다”며 “그때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민주주의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87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는 또 다른 시민은 행진대열이 명동 일대를 지나가자 87년 당시 명동 일대에서의 ‘숨막혔던 투쟁’의 기억을 떠 올리면서도, “과거에 비해서 많은 민주주의가 실현됐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운운하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며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 주장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진보연대(준) 황순원 민주민권국장은 이날 대행진에 대해서 "6.10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흐뭇한 일이지만,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며 "정부의 기념식과 달리 6월 항쟁과 관련한 1천여개의 민간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6월 항쟁을 '계승'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6월 항쟁의 오늘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1천여개의 단체들이 함께 한 공동선언문을 통해 미래를 열어나가는 자리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민간조직위의 특징은 6월항쟁의 두 축인 시민사회와 민중진영이 오랫만에 함께 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전국 445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민가협과 민변,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인권위 등 전국 37개 단체로 구성된 '인권단체연석회의' 및 민주노총과 전농, 전빈련, 민주노동당 등 '민중진영'을 대표하는 대중조직과 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진보연대(준)'이 조직위에 망라 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