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주년이 왔다. 6월 항쟁은 해방과 분단 이후 남측 현대사에서 민중과 시민이 독재와 외세에 항거하고 새로운 체제와 사회의 건설을 부르짖은 4.19혁명, 5.18민중항쟁에 이은 큰 산맥이다. 게다가 6월 항쟁은 곧바로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촉발시켜 ‘노예적 삶’에 놓여있던 노동대중을 ‘인간적으로’ 해방시켰다. 6월 항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군부독재와 계급모순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정상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군부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전두환 정권과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세력과의 긴장이 최고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이어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6월10일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규모에서 시위가 시작돼 이른바 6월 항쟁에 도화선이 되었다. 20일 동안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대나 응원자가 모두 한 몸, 한 마음이었다. 마침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군부독재정권은 6.29선언으로 백기를 들었다. 국민이 만들어 낸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지금 20년 전의 그 감격을 되새기고 기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9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돼 전국 각지에서 ‘민주주의 시민축제’가 열린다. 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6월 항쟁과 관련된 첫 공식적인 기념식이 열린다. 아울러 낮 12시에는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국진보연대(준) 등 시민사회단체 주도로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범국민 대행진’이 펼쳐진다. 언론들도 야단이다. TV와 신문지상에는 며칠 전부터 6월 항쟁의 의미와 감격을 방영하며 그날의 주인공들을 찾고 있다.

마땅히 이러한 감격을 되새김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6월 항쟁이 빛바랜 사진처럼 한갓 추억거리로 사라져 가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젊은 세대들이 6월 항쟁을 잘 모른다는 설문조사가 나와서 그럴까? 며칠 전 서울 주요 4개 대학 학생들에게 조사한 결과, 6월 항쟁을 알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44%에 그쳤고, 더욱이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모두 6월 항쟁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의 비율은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6월 항쟁의 의미가 후세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고 망각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이자 불찰이다.

이는 6월 항쟁의 정신이 퇴색되거나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국민들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와 “호헌철폐 직선제로” 두 가지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직선제’다. 직선제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가치다. 억압과 탄압의 시대 때 국민들은 일단 최소한의 가치를 요구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주의 문제에 이어 필경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뒤따를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온 국민들의 투쟁의 과실을 딴 건 정치인들이었다. 1노3김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정치적 합의를 했다. 거기서 국민들의 요구가 잠시 멈췄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성립이다.

그런데 87년 체제에는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인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민주정부가 아닌 군부정부가 연장됨으로서 87년 체제 이후가 불확실하거나 지연되었다. 6월 항쟁 이후 곧바로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지만 87년 체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온존시킨 채 북한을 적대시하고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있다. 6월 항쟁의 정신인 민주화는 오늘날 분단으로 인한 민족통일 과업과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양극화 해소와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20년이 지난 지금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면서도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은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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