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8월의 근현대사적지는 <통감관저 터>(서울 중구 퇴계로 26가길 6)입니다. <통감관저 터>는 경술국치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왕이 주인인 나라가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바뀌는 극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

“남산에 갔다 왔어!”

지난 2020년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남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새삼 환기시키는 구실을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이래 이어져 온 남산의 중정(중앙정보부)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듣던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지금이야 “남산에 갔다 왔어!”라고 하면 남산 타워 등에 놀러 갔다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1970, 80년대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이곳에 잡혀갔다 가까스로 구속을 면하고 석방된 사람조차도 중정이나 안기부라는 구체적인 말은 입에 올리지도 못한 채 “남산에 갔다 왔어!”라는 은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당한 고초를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남산은 한국 현대사에서 인권탄압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중정·안기부만 있었던 곳은 아니다. 그 훨씬 이전인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라는 일제의 강력한 식민통치기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당시의 남산지도. '총독관저'라고 씌어있는 붉은색 표시부분이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였다. [사진-필자 제공]
1919년 3.1운동당시의 남산지도. '총독관저'라고 씌어있는 붉은색 표시부분이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였다. [사진-필자 제공]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사진-필자 제공]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사진-필자 제공]

일제는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남산 자락에 한국통감부 건물을 신축하여 육조거리의 ‘대한제국 외부청사’에 있던 한국통감부를 이전하였다. 지금은 한창 신축 공사 중에 있는 옛 애니메이션센터 건물 일대이다.

한국통감부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조선총독부로 바뀌었다. 조선총동부는 1921년 9월 의열단원 김익상(1895-1941)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1926년 경복궁 자리로 옮겨갈 때까지 남산에 계속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남산에는 일제 강권통치의 상징인 조선헌병대 사령부와 경무총감부도 있었다. 지금의 남산한옥마을 자리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혁명 여걸’ 김마리아(1892-1944) 등이 끌려가 고초를 겪은 곳도 남산의 경무총감부였다. 한국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핵심기구 노릇을 했던 조선신궁, 경성신사, 경성호국신사, 노기신사, 박문사 등도 모두 남산 자락에 있었다.

통감관저 터, 경술국치의 현장

남산에는 한국통감부와 함께 통감관저도 있었다. 통감관저는 통감부가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통감관저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경술국치 100주년인 2010년 8월 29일에 즈음하여 세운 ‘통감관저 터’ 표석이 있다.

통감관저터 [사진-필자 제공]
통감관저터 [사진-필자 제공]
통감관저 [사진-필자 제공]
통감관저 [사진-필자 제공]

‘통감과저 터’ 표석 전면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경술국치일을 8월 29일로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는 8월 22일에 ‘강제병합’ 조약이 조인되었다는 대목에서 순간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8월 29일은 ‘한일병합조약’이 반포된 날이고, 조인된 날은 그로부터 일주일 전인 8월 22일이었다.

당시 한국통감으로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당일(8월 22)의 일기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22일 갬(晴)

오늘 아침 오전 10시 궁상(宮相) 및 시종원경(侍從院卿)을 불러 협약(協約)을 그만둘 수 없음과 더불어 궁중(宮中)의 취급방법을 충고했다. 양인(兩人)은 승낙하고 갔다. (중략) 오후 4시 한국합병(韓國合倂)의 조약(條約)을 통감저(統監邸)에서 조인하고 종결했다. 열석한 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과 나였다. 또 오는 29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는 대의(大意)를 통지해 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처럼 용이(容易)하게 조인을 끝냈다. 가가(呵呵).

명색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 체결인데, 그 장소가 제3의 장소도 아니고 한국통감부 같은 공적인 장소도 아닌 통감관저였다는 사실이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비루한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데라우치가 “합병문제는 이처럼 용이하게 조인을 끝냈다.”고 한 후 호쾌하게 웃는 ‘가가(呵呵)’로 마무리한 이날의 일기는 끝내 식민지로 전락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국민의 분노를 자극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봉기군을 분쇄하고, 1894~95년의 제1차 의병전쟁과 1907년의 제2차 의병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안중근(1879-1910)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저격되는 일까지 당하면서도 마침내 대한제국을 손에 넣었으니 이 일을 마무리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기쁨이 어떠했을지 이 일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데라우치의 일기와 순종실록 등을 종합해보면 경국치 당일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데라우치는 경술국치 당일 오전 10시에 황실을 대표하는 궁상(궁내부대신) 민병석(1858-1940)과 시종원경 윤덕영(1873-1940)을 통감관저로 불러 ‘한일병합조약’의 불가피성을 설명했고, 민병석과 윤덕영은 이를 이해하고 승낙했다. 이들이 창덕궁으로 돌아간 직후 국무대신(國務大臣)과 황족(皇族) 대표자,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회동(會同)하여 열린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구체적인 논의과정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를 수용하기로 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했다.

이어 전권위원 이완용(1858-1926)은 법부대신 조중응(1860-1919)을 대동하고 남산 통감관저로 가서 오후 4시에 일본측 전권위원인 데라우치와 더불어 ‘한일병합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시정기념관으로 바뀐 직후 경술국치의 현장은 '합병조인실'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940.11.22매일신보) [사진-필자 제공]
'시정기념관으로 바뀐 직후 경술국치의 현장은 '합병조인실'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940.11.22매일신보) [사진-필자 제공]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황실과 매국 관료들의 추잡함은 분노를 더 자극한다.

총 8개 조로 구성된 조약문 중 한국 황제의 ‘통치권 양여’와 일본국 황제의 ‘병합 승낙’을 담은 제1조와 제2조,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은 제8조를 제외하면 5개 조항이 남는다.

그 중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고 되어 있는 제3조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고 한 제4조는 황실과 황족의 안녕에 대한 보장을 담고 있다.

이어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고 한 제5조와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고 한 제7조는 대한제국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매국 관료들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껏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고 한 제6조 만이 일반 백성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일본어에 능숙한 비서 이인직(1862-1916)을 내세워 오직 황실과 매국관료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의 필사적인 노력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완용 무리에게 대한제국 백성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쓴 바로 그 인물이 이완용의 비서로 ‘한일병합조약’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인직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일병합조약’이 조인 일주일 후에야 반포된 이유는?

‘한일병합조약’이 8월 22일 조인 직후 곧바로 반포하지 않은 이유는 사전 정지작업을 비롯한 추가대책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통감부 경무총감부 령(統監府警務總監部令)으로 정치와 관련된 집합, 야외 집합을 일체 금하는 금지령이 반포되었다.

일제는 4일이면 정지작업이 충분하다고 봤는지 처음에는 8월 26일에 공포하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다음날인 27일이 순종황제즉위기념일인 점을 감안하여 반포일을 29일로 최종 확정했다.

순종은 조약이 조인된 직후부터 민병석과 이완용에게 ‘특별한 승서(陞敍)와 함께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을 하사’하는 등 대대적인 훈장 수여와 승서를 단행했다. 이러한 순종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서훈·승서 잔치’는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 당일까지 계속되었다.

망국의 군주로서 이왕 망하는 마당에 인심이라도 화끈하게 써보자는 심산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챙길 건 최대한 챙겨보자는 심보에 휩싸인 이완용 등 매국 관료들의 망국 군주 압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탓이었을까.

이미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나라와 민중의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황실과 매국 관료의 미래를 보장받았으면서도 대한제국 치하에서 자신의 잇속을 마지막까지 챙긴 이들의 행태는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추잡함 그 자체였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던 날 병풍 뒤쪽에 앉아 있던 16세의 순정효황후(1894-1966)가 국새를 치마 속에 감춘 채 내주지 않고 버텼다는 이야기가 세간에 널리 퍼진 것도 순종과 그 신하들의 한심한 행태에 분노를 느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경술국치의 현장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중 한 부분으로 조성된 '대진의 눈'. [사진-필자 제공]
경술국치의 현장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중 한 부분으로 조성된 '대진의 눈'. [사진-필자 제공]

‘한일병합조약’은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이미 무효임을 확인’했지만

1965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한국 정부는 1910년 8월 22일의 ‘한일병합조약’이나 1905년의 을사조약 등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고 형식적인 요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어 ‘체결 당시부터 이미 무효’였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 정부는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이후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였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4월 발효됨에 따라 ‘이미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일간의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명백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지 못한 채 이견을 봉합하고 서둘러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1917년의 <대동단결 선언>
–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우리 국민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

1917년 7월, 한 무리의 유력한 독립운동가들은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대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한다.

조소앙(1887-1958)이 기초한 이 선언은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신석우, 박용만, 한진교 등 14명의 명의로 중국 상하이에서 발표되었다.

<대동단결 선언>은 1911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에 의해 정부수립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이래 여러 흐름을 집약하여 독립운동가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면서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해외 독립운동가의 회의 소집을 제안하고 있었다.

특히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민주권론에 기초하여 임시정부수립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선언이었다.

융희(隆熙)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 순간도 정식(停息)이 없다. 우리(吾人)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이고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발생의 때이다. 구한국 최종의 1일은 즉 신한국 최초의 1일이니 무슨 이유로 아한(我韓)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인(韓人)의 한(韓)이고 비한인(非韓人)의 한(韓)이 아니다. 한국인(韓人間)의 주권수수(主權授受)는 역사 불문법의 국헌이고, 비한인(非韓人)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로 한국민성(韓國民性)의 절대 불허하는 바이다. 때문에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는 즉 우리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이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한 대통(大統)을 상속할 의무가 있다. 고로 2천만의 생령(生靈)과 삼천리의 구강(舊彊)과 사천의 주권은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어서 상속할 터이니 우리 동지는 이에 대하여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한 것이다.

선언문은 비한인인 일본 천황에 주권 양여를 선언한 ‘한일병합조약’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근거를 우리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줄곧 비한인에게 주권을 양여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한인 간의 주권 수수를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선언문은 이를 근거로 1910년 경술년에 있었던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를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라고 해석하였다. 우리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국민주권론을 제창하고 나선 것이다.

<대동단결 선언>은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라고 하여 경술국치의 치욕을 국민주권론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비전 제시로 승화시켜냈다는 점도 목할 만한 대목이다.

<대동단결 선언>은 1918년 상반기까지는 ‘단체의 대표와 덕망 있는 개인이 참여하는 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결정하자는 구체적 제안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동단결 선언>의 제안은 1년 후에 벌어진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그해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하야시콘스케동상과 거꾸로세운조형물 [사진-필자 제공]
하야시콘스케동상과 거꾸로세운조형물 [사진-필자 제공]

통감관저 터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나

통감관저는 통감부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된 장소였다. 1936년 이 건물 앞에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을 때 통감관저도 총독관저로 바뀌었다. 1939년까지 29년간 총독관저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관저가 새로 들어선 후 1940년부터는 조선총독부의 시정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

시정기념관에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보배로운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고,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2층 침실은 ‘합병조인실’이라는 이름이 붙어 역대 통감과 총독의 흉상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통감관저 건물은 언제 사라졌을까? 해방 직후 <민족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통감관저 건물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이곳에 중정이 들어섰을 때도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구한말 때 조선통감의 관저이기도 했던 건물을 근대식으로 고쳐 지은 이곳은 한마디로 말해서 ‘안개 속에 파묻힌 기관’”, “고목이 우거진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간판 없는 이 건물”로 중정이 사용하고 있는 통감관저 건물을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통감관저 건물은 중정이 들어선 이후 안기부가 도곡동으로 이사하기 전 그 사이 어느 시점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은밀한 기관에서 사용하던 중 사라지다보니 사실 통감관저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한동안 그 위치조차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05년 7월 이순우(현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가 과거 기록을 추적하여 그 위치를 다시 확인하였다.

해방 이후 파괴되어 사라졌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도 건물 앞 은행나무 근처 잔디밭에 묻혀 있다가 이순우에 의해 2006년에 발굴되었다. 그 동상 잔해 중 3점의 기단부 판석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앞뒤와 위아래가 뒤바뀐 미술작품으로 되살아났다. 그 욕스러움을 기리겠다는 의지를 반영하여 광복 70주년이 되는 2015년에 만든 작품이다.

지금 <통감관저 터> 자리에는 2016년 8월 29일에 맞춰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들어서 있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적 존재의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굴욕과 치욕의 역사를 깊이 되새기자는 뜻이 담겨 있다.

<기억의 터>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는 문구가 새겨진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새겨져 있는 ‘세상의 배꼽’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이 9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통감관저 터>는 구글 지도(https://goo.gl/maps/Wc8PZ91AKfqMJZuy6)와 카카오(http://kko.to/cW1CLz_sI3), 네이버 지도(https://naver.me/5CzgZtW2)에서 <남산일본공사관>, <기억의 터>와 병기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여 들어가 리뷰를 달아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 함께 힘 모아 주십시오. 후기를 작성해주신 분 가운데 3명을 선정하여 ‘1킬로커피’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이 캠페인은 1kgcoffee.co.kr가 후원합니다./ 필자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