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7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몽양 여운형선생 서거지>(서울 혜화동 로터리)입니다. 7월의 근현대사적지 캠페인은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도 함께 합니다. / 필자주

혜화동 로터리,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은 '여운형 활동 터'라는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정류장이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서울시가 유명 독립운동가의 활동 터 근처 버스정류장을 정비할 때 14곳 중 한 곳으로 포함된 덕분이다.

여운형 선생 서거지 [사진-필자 제공]
여운형 선생 서거지 [사진-필자 제공]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 곳도 '여운형 활동 터' 버스정류장 바로 옆이다. 여운형 서거 70주기를 맞은 2017년에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고향인 양평군과 서거지가 있는 서울 종로구가 공동으로 건립한 표석이다. 바로 이곳이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선생이 서거한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뉘면 쓰러질 것이요 합하면 일어서리라"

이곳은 1947년 7월 19일 오후 13시 15분에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시던 몽양 여운형(1885-1947) 선생께서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러지신 애통한 역사의 현장이다.  

표석에 새겨진 문구 중에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졌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여운형 암살이 단독범이었다고?

여운형 선생 사진 [사진-필자제공]
여운형 선생 사진 [사진-필자제공]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숙소로 쓰고 있던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서 국수로 점식식사를 마친 후, 리무진을 타고 길을 나섰다. 여운형은 계동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후 서울운동장에 갈 참이었다.

그날 서울운동장에서는 한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기념한 영국과의 친선 축구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던 여운형은 당시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 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도 함께 맡고 있었다.

그런데 여운형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진입하기 직전,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 나와 여운형의 차를 가로막았다. 여운형이 탄 차는 서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차에 달려든 괴한은 여운형을 향해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개인 경호원 박성복이 권총을 빼들고 달아나는 괴한을 쫓아가는 사이, 비서 고경흠은 운전수 홍순태와 함께 여운형을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하지만 세 발 중 가슴과 어깨에 맞은 두 발의 총알이 복부와 심장을 관통한 탓에 달리던 차 안에서 바로 절명하고 말았다.

사건 현장에서 이상한 일도 있었다. 박성복이 파출소 옆길로 달아나는 괴한을 쫓아가다가 파출소에서 뒤늦게 나온 경찰에 범인으로 몰려 시간이 지체되면서 진짜 범인을 놓치고 만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부관이었던 버치 중위는 여운형이 암살된 이틀 후 작성한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남겼다. 

보고서에는 "암살자는 암살의 장소로 경찰 지소의 앞을 선택했다"면서 "이것은 경찰의 개입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암살자들이 경찰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찰들은 여운형의 친구들을 체포하는 데에만 성공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는 여운형의 경호원 박성복을 조사한 이후에는 "경찰행정을 바꾸지 않는 한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박태균의 버치보고서, (21)여운형의 죽음과 친일경찰>, 경향신문, 2018. 8. 19.)

수사에 나선 경찰은 사건 발생 닷새 후인 7월 24일 범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하였다. 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평양 출신으로 월남한 열아홉 살의 미성년자 한지근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수사를 책임지고 있던 수도경찰청(청장 장택상)은 공범과 배후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신동운을 공범으로 함께 송청했지만, 수사 검사 조재천은 한지근의 단독 범행으로 쉽게 결론내리고 신동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재판에서 한지근은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개성소년형무소에 있던 한지근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이달의 근현대사적지 포스터 [사진-필자제공]
이달의 근현대사적지 포스터 [사진-필자제공]

여운형의 죽음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좌절을 상징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자동(1929-2022)은 자신의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2018, 푸른역사)에서 여운형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몽양은 독립운동경력도 경력이거니와 준수한 용모와 탁월한 웅변술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당대의 인걸이었다. 여러 정파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힌 해방 공간에서 남-북, 좌-우, 찬탁-반탁 세력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람은 몽양뿐이었다. 몽양의 죽음으로 분단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여운형은 중국 망명 시절 1919년에는 신한청년당을 매개로 한 3·1운동의 기획자 구실을 했고, 그해 11월에는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라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하여 자신을 초청했던 하라 내각을 붕괴시키고 일본 정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을 감내해야 했던 여운형은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을 맞이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차 미소공위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여운형. 가운데가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1946.05) [사진-필자제공]
1차 미소공위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여운형. 가운데가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1946.05) [사진-필자제공]

여운형의 해방 이후 행적은 그의 더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의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5년 이내의 신탁통치' 등을 담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나온 이후에는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의 선봉에 서서 헌신한 인물이 여운형이었다.

1945년 우파 성향의 잡지 《선구(先驅)》 12월호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이 이승만(21%)과 김구(18%)를 제치고 33%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이 대중의 신망과 기대 역시 얼마나 높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 여운형이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지고 말았으니 김자동의 말대로 "몽양의 죽음으로 분단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막아보고자 북행을 결행했던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의 마지막 노력마저 무산되면서 여운형이 그렇게 막고자 했던 한반도의 분단은 끝내 현실화되었고, 우리 민족에게는 불과 2년 후에 찾아올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27년 만에 나타난 4명의 공범과 또 다른 공범 신동운

1974년 2월 5일 김흥성·김영성·김훈·유용호 등 4명이 <일요신문>에 자신들이 27년 전에 벌어진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이라고 밝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범인으로 잡힌 한지근이 단독 범행이라고 한 진술은 "각본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후 자진 출두하여 검찰의 조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여운형은 송진우, 박헌영 등과 함께 처단해야 할 대표적인 민족 분열분자였다면서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강변했다.

자신들은 1945년 12월 30일에 벌어졌던 송진우 암살 사건을 지휘했던 한현우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한현우의 '애국운동'에 크게 감화 받은 것이 여운형 암살에 나선 계기였다는 주장도 했다. 아울러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고, 평양 출신이 아닌 평북 영변 출신으로 나이도 미성년자가 아니라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폭로했다.

이들은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없고 자신들이 전부라면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자 나섰다고 했다. 하지만 범행에 사용된 45구경 권총을 백색 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염동진(1909-?, 본명 염응택)으로부터 받았고, 역시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의 양근환(1894-1950)으로부터 일본 99식 권총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혔다.

아울러 이들은 염동진과 양근환은 물론 김영철(1892-1969)로부터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암시를 받았다는 말도 남겼다. 이는 배후를 부인하면서도 사실상 배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세 사람 중 일제의 밀정 노릇까지 했던 염동진은 그렇다쳐도 양근환과 김영철의 이름은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여운형 장례식(서울운동장) [사진-필자제공]
여운형 장례식(서울운동장) [사진-필자제공]

양근환은 1921년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척살하고 12년간 옥살이를 했던 인물이었고, 김영철은 1920년 광복군총영장 오동진의 명령을 받아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남대문역·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할 거사를 준비하던 중 아서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한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중에는 국수주의에 빠져 테러에 의존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근환과 김영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단독범으로 지목된 한지근이 체포된 저동의 ㈜유풍기업 2층 살림방에는 다른 공범도 함께 있었지만, 경찰이 한지근만을 체포해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의 지시로 한지근을 체포한 강력계 주임 박경림의 진술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폭로였다. 박경림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신동운이 "일당은 세 명이나 한 명만 데려가라고 했기 때문에 한지근만을 연행했다"고 진술했다.

암살 사건의 배후에 경찰이 있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지근이 체포되기 전 범인들과 경찰의 사전 조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대목이었다.

경찰에 한지근이 있던 유풍기업 2층을 안내했던 신동운은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 관계를 풀 열쇠를 쥔 인물이었다. 1974년, 그는 4명의 공범이 검찰에 출두하여 진술하고 검찰이 자신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자 부담을 느꼈는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신동운은 송진우 암살 사건 재판정에서 만난 김흥성(한현우의 공범인 김인성의 형)과 한현우의 집에서 만난 이필형, 김훈, 유용호 등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들에게 김영철, 양근환 등을 소개한 인물이었다.

특히 한지근과 동향 사람인 김영철은 "민족분열주의자는 좌우를 막론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암살 사건의 공범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할 권총을 양근환과 염동진으로부터 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이도 김영철이었다.

신동운은 사건 발생 후 자신과 김영철이 수사과장 노덕술과 합의하여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만들었다고 진술하여 경찰과 사전조율이 있었다는 점도 사실로 확인해줬다. 하지만 "나 이상의 배후는 없다"고 하여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운형 묘소 [사진-필자제공]
여운형 묘소 [사진-필자제공]

몽양 여운형, 이제는 분단극복의 상징 인물로

여운형의 장례식은 사건 발생 보름만인 8월 3일 오전 여덟 시에 광화문 근로인민당 당사 앞 광장에서 열렸다.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꾸려진 장의위원회가 주도한 여운형의 장례식은 해방 후 치러진 최초의 인민장이기도 했다. 여운형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수유리 여운형의 묘가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91년 남북여성토론회에 북측 대표로 참석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묘소를 참배했을 때였다.

딸이 44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장면이었지만, 합의에 없던 김일성의 조화가 등장하면서 벌어진 남북 양측의 옥신각신은 분단된 한반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적 장면이었다.

이제 얼마 후일지 알 수 없으나, 남과 북이 함께 여운형의 묘에서 전쟁이 아닌 남북 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을 다짐하는 행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열 수만 있다면, 76년 전 혜화동 로터리에서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에 쓰려졌던 여운형 선생도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7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는 구글 지도(https://google/maps/XVVY5tYxJkbeainr5) 와 네이버 지도 (https://naver.me/5fjQqvhb) 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여 들어가 리뷰를 달아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 함께 힘 모아 주십시오. 후기를 작성해주신 분 가운데 3명을 선정하여 '1킬로커피'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이 캠페인은 1kgcoffee.co.kr가 후원합니다./ 필자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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