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9월의 근현대사적지는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비>(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 6번지)입니다.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비>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추모비입니다. 동시에 한·일간 화해와 진정한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공간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비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비>는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에 있다. 1923년의 간토대지진 당시 아라카와(荒川) 강변에서 학살당한 한국·조선인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추도비이다.

아라카와 강변 조선인 학살 현장에서 시민모임 독립 회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호센카) 이사(시민모임 독립 제공)
아라카와 강변 조선인 학살 현장에서 시민모임 독립 회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호센카) 이사(시민모임 독립 제공)

추도비 앞면에는 큰 글씨로 추모의 뜻을 담아 ‘悼(도)’라고 씌어 있고, 그 옆에 ‘關東大震災時 韓國·朝鮮人殉難者 追悼之碑(관동대진재시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지비’라고 새겨져 있다. 추도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일본어로 씌어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경찰·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동경의 서민 주거지에서도 식민지하에서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슴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

2009년 9월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

그룹 봉선화  


앞면의 추도비 이름에 등장하는 순난자(殉難者)는 ‘국가나 사회가 위난(危難)에 처하여 의로이 목숨을 바친 사람’을 뜻한다. 뒷면에 새겨져 있는 ‘살해당했다’, ‘희생자’ 등의 표현과 어감이 달라 더 낯설게 다가온다.

이 추도비는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인 그룹 봉선화(호센카)가 2009년에 세웠다. 원래는 학살 현장인 아라카와 강변 다리 밑에 세우려고 했는데, 국가의 허가를 받지 못해 강변에서 가까운 선술집을 인수하여 세웠다고 한다. 옛 선술집 건물은 추도 모임인 봉선화(호센카)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사무실 안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증거 사진과 관련 서적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한다.

간토대지진한국-조선인순난자추도비(시민모임 독립 제공)
간토대지진한국-조선인순난자추도비(시민모임 독립 제공)

‘봉선화’는 1982년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벌였지만, 유해는 발굴하지 못했다. 현장에 매장됐던 유해가 사건 발생 두 달 후인 1923년 11월에 이미 경찰에 의해 3대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인 1983년이었다. 1923년 당시의 언론보도 기사를 뒤늦게 찾아낸 것이다. 당시 함께 죽은 일본인 노동운동가 유해 반환을 요구하는 노조단체와 유족의 압박으로 논란이 일자 자칫 대량 학살의 현장이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가 이를 은폐하고자 학살당한 조선인 유해를 몰래 빼돌렸던 것이다.

간토대지진의 현장이기도 한 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군마현, 지바현 등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추모비가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쓰카초공원에 있는 <간토대진재 조선인희생자 추도비>를 비롯하여 20여 개 정도 세워져 있다. 해마다 9월이 되면 일본인과 재일동포가 함께 참여하는 크고 작은 추모제가 개최되고 있는데, 올해는 100주년을 맞이하여 더 뜻 깊은 추모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이 수도권인 간토 지방을 강타했다. 간토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 지진으로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 등 간토 지방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지진이 일어난 시간이 마침 점심때라 불을 사용하고 있는 집이 많았던 탓에 쉽게 대화재로 이어졌다. 도쿄는 약 44%, 요코하마는 약 80%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았다. 파괴된 가옥 수가 약 29만3천 동, 사망자·행방불명자가 무려 10만5천 명, 총 피해액이 당시 일본 정부 예산의 3.4배에 달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간토대지진의 참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는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증폭된 대중의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유언비어 유포를 주도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했다’, ‘조선인 2천 명이 총칼을 들고 동경으로 향하고 있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간토대지진 직후 걷잡을 수 없이 퍼지게 된 배경에는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편견과 차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다음날인 2일 “불령스러운 움직임으로부터 이재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를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갔다. 9월 3일 오전에는 일본 내무부 경보국(경찰국)이 ‘조선인이 각지에 방화를 하고 있으니 엄밀히 단속하라’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각 지방에 내보내고 있었다. 지방정부는 지방정부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사이타마현에서는 2일 밤 내무부장 명의로 산하 군청에 「불령선인(不逞鮮人) 폭동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마을의 “재향군인·소방단·청년단 등이 협력하여 경계를 맡고,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우 기사 게재 금지 조치가 602건, 차압 조치가 18회에 달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역할이 있었기에 일본의 군대와 경찰, 자경단은 조선인은 물론 중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까지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쉽게 저지를 수 있었다. 결국 학살당한 조선인은 무려 6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고, 7백여 명의 중국인과 수십 명의 일본 사회주의자도 함께 학살당하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자 했다. 세계적십자사가 일본의 대지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하려고 하자 학살당한 조선인 등을 1차 매장한 장소에서 유골을 파낸 다음 다른 곳에 몰래 묻거나 화장하여 강이나 바다에 버리기까지 했다.

사실 일제의 조선인 학살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군 학살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909년의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한 의병 학살, 1919년 3·1운동 당시 벌어진 제암리 등지에서 벌어진 여러 학살 사건, 1920년 간도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패배에 따른 보복으로 벌인 경신참변 등도 대표적인 일제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었다.

일제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동학농민혁명군에 대해 벌인 집단 학살 이래 계속된 학살 사건의 연장에서 벌어진 우리 민족에 대한 또 하나의 대량 학살 사건이었던 것이다.

조선인 학살 호도 위해 조작한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 사건’

일제는 군대와 경찰, 자경대를 동원하여 6천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9월 3일부터는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한인을 보호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요주의 한인들에 대한 검속을 시작했다. 이때 6,380여 명의 ‘불령선인’이 연행되었다. 이때 연행된 검속자는  계엄 상황에서 운 좋게 살해되지 않은 전시 포로인 양 취급되었다.

영화 '박열' 포스터 [사진-김학규 제공]
영화 '박열' 포스터 [사진-김학규 제공]

검속된 조선인 중에는 박열(1902~1974)도 있었다.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와 동지 최규종과 홍진유 같은 불령사 회원들도 연이어 연행되었다. 불령사는 박열을 비롯하여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이 참여하여 1923년 4월에 결성된 조직이었다.

10월 20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은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진재 중의 혼란을 틈타 제도(帝都) 대관의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 비밀결사’로 규정하여 16명 전원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10월 16일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직후부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학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일제의 치밀한 계획 속에 박열 부부의 대역사건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2017년에 개봉된 영화 <박열> 덕에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1923년 10월에 있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다는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다는 이 사건은 당시부터 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사실 박열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간토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본인을 비롯한 불령사 회원 전원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 단계에서 무산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단지 혐의만으로 사건을 확대시켜 ‘대역사건’으로 조작한 일제의 의도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외국의 여론과 한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박열과 불령사에 의한 조직적 폭동 계획’으로 몰고 가려던 일제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문제가 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 폭탄 투척 계획은 박열과 김중한 두 사람의 논의 수준에 그쳤을 뿐,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박열도 폭탄 유입 계획이 불령사와 무관하다는 점을 조사 과정에서부터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다. 결국 일제는 홍진유 등 대부분의 불령사 회원들을 예심 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모두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박열사건’을 빌미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했던 일제의 조작은 실패하고 말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전대미문의 조작된 대역사건으로 기소되었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오히려 일본 천황 폭살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고,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일본 천황제의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하는 재판 전술을 구사하여 일제를 당혹케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로 감형되었던 박열은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의문사라는 충격을 겪으면서도 22년 2개월의 세월을 감옥에서 견뎌냈고, 해방된 지 2개월 후인 1945년 10월에 마침내 석방되었다.

한·일 양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문화제 100년의 통곡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김학규 제공]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문화제 100년의 통곡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김학규 제공]
간토학살100주기추도문화제 100년의 통곡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8월 28일 스페이스 살림 다목적홀). 영상 속 일본 시민단체 합창단과 참여자들이 함께  간토학살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한일간의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인간의 노래를 합장하고 있다.. [사진-김학규 제공]
간토학살100주기추도문화제 100년의 통곡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8월 28일 스페이스 살림 다목적홀). 영상 속 일본 시민단체 합창단과 참여자들이 함께  간토학살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한일간의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인간의 노래를 합장하고 있다.. [사진-김학규 제공]

최근 일본의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당시 횡행했던 유언비어가 일본 사회에서 되살아나 혐한 발언(Hate Speech)으로 고스란히 표출되고 있다. 일본의 우익단체 인사들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부정한다든지, 당시 살포된 유언비어가 사실이었다는 왜곡된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렇듯 지금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혐한 발언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근거가 되었던 유언비어가 그 근원이다. 비록 현재의 혐한 발언이 1923년 당시의 유언비어와 같이 조선인 집단 학살로 귀결되지는 않겠지만, 무형의 흉기가 되어 재일한국인과 한국인에 대한 민족 차별을 노골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관동대지진 당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는 한·일 양 민족 간의 전정한 화해와 평화를 방해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혐한 발언의 근원인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속에서 당시에 횡행했던 유언비어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일본 국민과 공유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과는커녕 그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제라도 진상조사를 통해 학살의 진상을 밝혀야 함에도 이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희망하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일 시민사회단체의 공동 노력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한·일 양 민족이 과거사를 직시할 때 진정한 화해의 길이 열리고 평화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공통 인식에 기반하여 양국 시민사회단체가 맞잡은 연대의 손은 결국 한·일 양 정부를 움직이게 할 정도로 단단해질 것이다.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9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순난자 추도비>는 구글(https://goo.gl/maps/nYVW8CTspvPiQUKa9)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클릭하여 들어가 리뷰를 달아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 함께 힘 모아 주십시오. /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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