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본 연재의 제12회에서는, 1907년 7월 일본총영사관이 헤이그에서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전문에 드러난 ‘헐버트 박사의 헤이그 특사와 무관하다’는 발언에 대하여 다루었고, 제13회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1906년 위임장을 검토하여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 특사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필자가 규명한 사실에 대한 파장이 있는 것 같다. 몇 분의 독자는 헐버트 박사에 관하여 근래에 과대평가한 면들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기에, 이를 요약 정리한다.

1. 헐버트 박사는 한글 띄어쓰기의 창안과 전혀 관련이 없다.

필자는 [통일뉴스]에 연재한 ‘국혼의 재발견’ 제8회 “우리 글 『세종어제훈민정음』과 『신지비사』”의 ‘아. 추기(追記) : 한글 띄어쓰기의 시작’에서 한글 띄어쓰기의 창안은 헐버트 박사와 무관함을 밝혔고, 우리 한글의 띄어쓰기는 궁에서 시도되었음을 밝혔다. 이를 아래에 인용한다. [참조 기사]

“(중략) ‥‥‥ 최근 한때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서는 “한글 띄어쓰기는 호머 비 헐버트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중에 현대 형식의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1877년에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목사가 쓴 조선어 교재인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로 확인된다. 존 로스의 『Corean Primer』 이전에 서양에서 나온 조선어 문법서는 리델 신부의 『한불문전(GRAMMAIRE COREENNE)』이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1881년에야 요꼬하마에서 초판본이 나왔다. 따라서 헐버트도 존 로스의 『Corean Primer』를 통하여 조선어를 배웠을 것이고, 당연히 존 로스의 띄어쓰기를 보았을 것이다.

(중략) ‥‥‥ 대두법은 1778년경에 홍낙춘(洪樂春)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풍산홍시셰계』 궁체본(宮體本)과 1802년 중하(仲夏, 음력 5월)에 궁체(宮體)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국됴고ᄉᆞ(국조고사)』에서는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식으로 발전하는데, 이를 보면 띄어쓰기는 19세기 초에 궁중의 여성들 사이에서 대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1882년에 존 로스 목사에 의하여 번역된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조선식 띄어쓰기도 『풍산홍시셰계』 궁체본과 『국됴고ᄉᆞ(국조고사)』 궁체본 수준의 초보적인 띄어쓰기이다. 한편 1895년 중동(仲冬, 음력 11월)에 학부에서 발행한 『소학독본(小學讀本)』에는 방점(傍點)을 찍어 띄어쓰기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물론 조선시대 전 기간 여러 종의 한글 고서에서 한글 띄어쓰기 이상의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필자는 이상의 관점에서 띄어쓰기가 외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적어도 정조조(正祖朝)부터는 간헐적으로 시도되어 왔다고 정리한다. 이후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로 한글을 배운 대한제국 시기의 선교사들이 1893년 5월에 조선어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치하며 그 위원들이 조선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일반 대중들을 위하여 띄어쓰기를 사용하였고 이후 띄어쓰기는 우리의 한글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확산하였다. 물론 헐버트 박사는 조선어 성서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지도 않았다.”

즉 한글 띄어쓰기의 필요성이 조선의 궁중과 궁중 관련 인물들 사이에서 부각되었으며, 이를 존 로스 목사가 처음으로 받아들였고, 1893년에 조직된 ‘상임성서실행위원회’의 ‘성경번역자회’ 소속의 번역자들이 그 확산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영어와는 전혀 달리 우리의 현대 띄어쓰기는 명사나 동사 및 형용사에 조사(助詞)가 붙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 한글의 띄어쓰기는 영어의 띄어쓰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 동안 필자는 헐버트 박사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헐버트 박사가 한글 띄어쓰기의 확산에 기여하였다며 헐버트 박사에 대한 과대평가를 다소 묵인했으나, 이제 그 평가를 바로 잡으려 한다.

즉 “헐버트 박사는 한글 띄어쓰기의 창안자도 원조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힌다. 참고로 1889년에 헐버트가 편저한 『사민필지』에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헐버트 박사가 2014년 한글날에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은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침소봉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고종황제는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헐버트 박사를 특사로 파견하지 않았다

제13회 연재에서 검토한 헐버트 박사의 1906년 특사증은 일본을 헤이그의 만국재판소(萬國裁判所)에 제소하기 위한 위임장이지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증이 아니다. [참조 기사]

제12회 연재에서 언급하였듯이 헐버트 박사가 파리와 헤이그에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나타난 대한제국의 세 특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힌 것은 자신도 특사가 아니라는 언급이다. [참조 기사]

즉 헐버트 박사는 고종황제가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 사실이 없었다. 따라서 헐버트 박사의 헤이그 행적이 소극적이었던 원인이 규명된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직업적인 로비스트로서 3차에 걸쳐 특사 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1907년은 특사가 아니었으므로 이제는 그가 2차에 걸쳐 특사 활동을 한 것으로 정정하여야 한다.

고종황제가 1905년 헐버트 박사를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루스벨트는 헐버트와의 만남을 피했고 친서는 전달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제13회 연재에서 언급한 9개국에 보내는 친서와 만국재판소에 제소하는 위임장을 받았으나, 이 특사 업무 역시 제대로 처리하지를 못하였다. 거듭 실패한 로비스트였다.

만약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것이 사실이라면, 헐버트 박사의 헤이그에서의 행적은 특사의 임무의 방기한 것이 된다. 따라서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특사는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헐버트 박사를 변호하는 길이다. 다시금 명확히 언급하자면,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 특사가 아니었다.

3. 헐버트 박사의 실체는 침소봉대되었다

헐버트 박사가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재 입국한 것은 1893년 10월 14일이다. 당시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 왔다”라고 한다.

이는 그가 마치 대한제국의 근대 인쇄술의 개척자인 듯한 언급이다. 더군다나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 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라고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일의 공적을 헐버트 박사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헐버트 영웅 만들기식의 평가이다. 실제로 ‘텬로력뎡’(천로역정)의 변역과 출판에 심혈을 기울인 분은 대한제국의 초대 YMCA 회장이었던 게일(Gale, James Scarth, 1863~1937) 목사이다. 언더우드라든가 게일, 베델 등등을 조명하면 할수록 헐버트 박사를 침소봉대한 흔적은 속속 드러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 대한제국 시기의 개신교 선교사 및 목사들은 우리 역사의 주역이 아니다. 그들은 조역마저 아니다. 엑스트라(Extra, 단역)일 뿐이다. 그 단역을 주역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라는 선전 문구를 만든 것이 아닐까? 헐버트 박사를 너무 높이 띄워 놓으면 결국에 그 명성이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헐버트 박사를 과소평가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모든 것을 그가 했다는 식으로 그를 띄워 놓는다면 결국에 가서 사실이 밝혀지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쓰는 배경도 역시 그를 “허구가 보이도록 높이 띄워 놓으며, 그의 동지들을 폄훼한데” 있는 것 아니겠는가?

헐버트 박사와 게일 목사는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에 와 있던 탁월한 문화비평가였지만, 게일 목사와 달리 헐버트 박사는 정치 지향적인 선교사였다. 교육 지향적이었던 언더우드나 선교 지향적이었던 아펜셀러나 게일, 계몽 및 언론 지향적이었던 영국인 베델과는 다르다.

헐버트 박사가 정치 지향적인 인물이었듯이 현재 그를 띄우는 사람들도 정치 지향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친미주의가 아니라 숭미주의(崇美主義)가 아닐까? 필자는 우리가 “미국과 친할 필요는 있지만, 미국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특히 미국의 양식적인 인사들과는 친할 필요가 있지만, 미국의 정치적인 국가주의자들을 숭상할 필요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대한제국 시기의 헐버트 박사는 고종황제의 숭상을 받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던 고종황제에게 고용된 실패한 로비스트였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실체를 똑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그를 독립영웅으로까지 만들려는 것은 미국을 숭배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행위가 아닐까? 독자들의 판단을 바란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보자.

4. 헐버트 박사의 재입국과 출국

[헌기(憲機)제2256호], 통감부, 1909년 11월 24일.  “헌기 제2256호, 미국인 헐버트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풍설이 있다. 이번 귀국길에 오른 것은 처자(妻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기실은 태황제의 밀사운동으로 그 요건은 이토(伊藤) 공을 한국인이 암살했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서 미리 일본이 포부인 연방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를 반대하고 방위의 길을 강구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종(侍從) 오일영(吳一泳)은 3,000圓(혹은 800圓이라고도 말함)의 여비를 태황제로부터 11월 3일 하사받고 즉시 헐버트에게 지급하여 5일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헌기(憲機)제2256호], 통감부, 1909년 11월 24일.  “헌기 제2256호, 미국인 헐버트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풍설이 있다. 이번 귀국길에 오른 것은 처자(妻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기실은 태황제의 밀사운동으로 그 요건은 이토(伊藤) 공을 한국인이 암살했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서 미리 일본이 포부인 연방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를 반대하고 방위의 길을 강구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종(侍從) 오일영(吳一泳)은 3,000圓(혹은 800圓이라고도 말함)의 여비를 태황제로부터 11월 3일 하사받고 즉시 헐버트에게 지급하여 5일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統監府文書 6권 > 一. 憲兵隊機密報告』, (649) [미국인 헐버트의 來韓 목적과 그 행동에 관한 보고]라는 헌기(憲機)제1703호 문건(1909년 9월 2일)에 의하면 미국인 헐버트는 8월 31일 밤에 입경하였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입경 목적은,

“1. 渡韓의 목적은 同人 소유 토지를 일본인 某(畑彌右衛門)가 매수하게 되어 이미 계약 완료가 된 모양이지만 그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므로 이의 소송을 위해서 온 것이다. 이외에 한국인 사이에서 토지매매 1~2건이 말썽 중인 것이 있다. 이것도 이 기회에 처분한다고 말하고 있다.

위 일본인 某에 관한 건에 대해서는 오늘(3일) 미국영사의 손을 거쳐서 統監府에 출원할 결심이라고 한다.

2. 입경 후의 행동은 그저께 밤에 도착하여 南大門 밖 외국병원 의사 허스트의 집에서 1박하고, 지난 2일부터 貞洞에 사는 미국인 선교사 벙커(房巨, 培栽學校 校長) 집에 숙박하고 있다. 체재는 약 1개월 예정인 것 같다.

3. 同人이 지인 등에게 스스로 말한 바에 따르면 일본 관헌은 자기의 행동을 매우 오해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언제든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시찰 중이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헐버트 박사가 지인 등에게 스스로 말한바, “일본 관헌은 자기의 행동을 매우 오해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언제든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 판단에는 여기서 말하는 일본 관헌의 오해란 그가 헤이그 특사의 배후라는 오해로 보인다. 헐버트 박사 본인 스스로는 자신이 헤이그 특사의 배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시 밝혀왔다.

당시 헐버트 박사의 국내 입국 후 활동은 9월 14일자 헌기(憲機)제1766호 (676) [미국인 헐버트의 행동에 관한 追報]에서는 아래와 같이 상세히 나온다.

“위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주의 중이다. 9월 12일에는 鍾路靑年會에서 종교에 관해 연설을 했지만 정치와는 관련되지 않았고 동일은 同人 외에 한국인 5명도 함께 연설하고 청중은 약 300명으로 내외국 선교사 약 30명이 있었다. 또한 이달 6일 이래의 행동을 열기하면 다음과 같다.

9월 6일 辰市 辯護士, 鍾路靑年會, 理事廳, 南大門 밖 濟衆病院, 西部 貞洞 외국인 클럽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9월 7일 미국영사관, 외국인 클럽, 濟衆病院에 들리고 후에 팔레스호텔에서 외국인 6~7명과 만찬을 함께 했다.
9월 8일 鍾路靑年會, 社稷洞 한국인 목사 高 某, 濟衆病院, 외국인 클럽에 들렀다.
9월 9일 南部 壯洞 영국인의 집, 鍾路靑年會, 東大門 내 미국인의 집을 방문하고 東大門 밖 淸涼里와 洪陵 유원지를 유람하고 또 외국인 클럽으로 가서 同院 내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다.
9월 10일 西部 水閣橋洞 앞 參將 嚴俊源, 南大門 밖 吳基永·吳聖根, 미국인 선교사 게일, 외국인 클럽, 中部 寺洞 閔泳瓚의 집을 방문했다.
또한 그날 밤에는 尹致昊·閔泳瓚 2명은 헐버트와 벙커의 집을 방문하고, 헐버트·鄭在寬(同人은 약 10년 전 渡美하여 이번에 헐버트와 함께 귀국했음)과 함께 4명이 同道 吳聖根을 방문했다.
이 한국인과의 회합은 무엇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사료되지만 아직 진상을 알지 못한다.
9월 11일 외국인 클럽에서의 외국인 운동회에 출석 후 西部 社稷洞 미국인 선교사를 방문했다.
9월 12일 청년회에서 연설한 외에 외국인 클럽에 갔다.”

이토록 일본은 헐버트의 1909년 국내 재입국 시의 행적을 일거수일투족 면밀하게 감시하였다. 1909년 당시의 헌기(憲機) 제2135호(11월 8일 자 보고)에 의하면 헐버트 박사는 11월 5일 다시 인천에서 대련으로 향한 형적이 있었는데 지난 7일 오후 8시 35분 여순발(旅順發) 다음의 전보가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헐버트는 오늘 아침 대련에 도착하였음. 저녁때 해로(海路)로 상해를 향했는데 그가 선중의 이야기로는 하얼빈을 거쳐 동청철도에 의하여 뉴욕에 간다고 말하고 있었음. 또 선중의 동행자를 조사했지만 불명이고 별로 의심스러운 행위를 보지 못했음.’”

그는 11월 7일 저녁때 대련에서 상해로 간 것이다. 아마도 11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 상해에서 고종의 비자금을 유치하고 있던 독일계 은행을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11월 11일 헐버트는 런던으로 갈 예정으로 기선(汽船) 西京丸을 타고 또다시 대련으로 간다. 그리고 15일에는 봉천에서 오후 3시에는 할빈에서 목격되며 오후 5시에 런던을 향해 할빈을 떠났다.

당시 헐버트 박사는 1909년 8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66일간 조선에 체류하였다. 그가 대한제국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재산 정리에 있었고, 그리고 헤이그 특사의 배후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언급하였듯이 무일푼으로 조선에 온 헐버트 박사는 재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에 다시 입국할 정도로 갑부가 되어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사후(10월 26일) 9일 만에 서둘러 조선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통감부의 헌기(憲機)제2256호에 의거하면,
“미국인 헐버트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풍설이 있다. 이번 귀국길에 오른 것은 처자(妻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기실은 태황제의 밀사운동으로 그 요건은 이토(伊藤) 공을 한국인이 암살했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서 미리 일본이 포부인 연방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를 반대하고 방위의 길을 강구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종(侍從) 오일영(吳一泳)은 3,000圓(혹은 800圓이라고도 말함)의 여비를 태황제로부터 11월 3일 하사받고 즉시 헐버트에게 지급하여 5일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 풍설에 나오는 헐버트 박사의 귀국 목적은 현실성이 없이 허황된 것이다. 그러나 태황제(고종황제)로부터 당시 한화 3000엔 정도의 여비를 시종 오일영을 통하여 하사받은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요즘 돈으로 3만 달러 쯤 될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종황제는 헐버트 박사에게 단단히 잡힌 호구(虎口)였던 것 같다. 고종황제의 우매함은 기가 막힌 일 아닌가?

5. 맺음말

이후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을 떠난 40년 후인 1949년 7월에야 대한민국으로 입국하여 8월 5일에 서울에서 사망한다.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단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단 한 방의 총을 쏘지도 않았다. 그의 외교적 활동은 대한제국의 국고(國庫)만을 축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러한 그를 대한민국의 독립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대한제국의 치부형(致富形) 로비스트를 우리나라의 독립 영웅으로 상훈을 승격한다면, 한국이 독립운동가도 없고 미국의 속국이란 사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한 후, 첫 상훈 업무가 이런 덜 떨어진 일이라면 국가보훈부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국가보훈부는 더 이상 나라의 영예를 팔아먹지 마라.

차제에 필자는 지금의 국가보훈부는 해방 이후의 순국선열에 그 업무를 한정하고, 해방 이전의 순국선열을 위해서는 별도의 기구 ‘독립투쟁부(가칭)’를 독립적으로 만들 것을 강력하게 제안한다.

아울러 독립운동가의 포상 혜택을 손자까지 한정하지 말고, 포상받은 날로부터 최소 1백년으로 하한선을 정하라. 그렇게 한다면 정치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해방 이전에 좌우(左右)가 시도한 독립운동의 모든 투쟁은 제대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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