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역사 인물에 대한 추모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기념관 설립을 목표로 하여 필자가 설립한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의 입장에서도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할복 자결을 부정하는 여러 세력, 특히 (사)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와 경주이씨 문중, 그리고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친일 토왜가 있으므로,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입장과는 달리 나의 행보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준 열사의 죽엄을 둘러싸고 어느 것이 진실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6년에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할 때 이준 열사의 자결을 언급하고 있는 일본제국 외교관의 보고 문서를 찾아냈고, 그 자결의 가능성과 정황을 제시한 바 있다.

이준 열사와 관련한 여러 문건과 정황을 검토하여 보면, 심지어 이준 열사의 순국을 왜곡하고자 내세운 위조문건 「이상설 일기초」에서 조차 ‘자정(自靖)’이라고 쓰고 있는데, ‘자정’이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한때 알려졌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기념석 상에서 자정한 것이 아니므로, 일제에 동조하여 병사로 몰고 나가며 순국 자정 자체를 부정하는 몇몇 후인들의 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이준 열사의 활동과 순국 자정을 과대 포장하지 않는다. 독립운동의 모든 것을 한 인물이 주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독립운동을 크게 했던 분이든 작게 했던 분이든 변함없는 민족 지조로서 한 길을 걸었다면 모두 같은 독립운동가로 본다.

그러므로 필자는 특정 독립운동가의 자료만 수집하지 않았다. 여러 독립운동가의 자료가 시중에 나오면, 자금이 되는 한 최대한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지난 40여 년간 여러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탐색하면서 독립운동의 전모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현재까지 지속하여 오는 한반도 지배 수법도 간파하게 되었다.

필자는 특정 독립운동가나 지사들의 활동을 과대 포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특정 독립운동가의 과대 포장은 오히려 그 특정 독립운동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또한 특정 독립운동가의 과대 포장은 그 동지들을 폄하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이제 좀 제대로 하자. 나는 이준 열사 만큼 이상설 이위종 헐버트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분들을 기린다는 다른 분들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1. 헤이그 특사 신임장에 관한 필자 견해의 재 정리

일본제국의 외교부와 총독부 소속의 관리들이 밀정들의 보고를 취합한 보고서나 보고문이 상당수 남아있다. 그 문건을 통하여 우리는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연구할 수 있다.

헐버트 박사에 대해서도 일제는 긍정적인 문건과 부정적인 문건을 동시에 남겨 놓았다. 헐버트 박사를 관찰하는 자에 의하여 요해(了解)된대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문건에서는 중요한 사실을 결정적으로 시사하여 준다.

필자는 지난 회에서 헤이그 신임장 문제를 다루었다. 몇 분의 독자로부터 그에 대한 반응이 나왔다. 일부 오해가 있어 이를 다시 밝혀 정리하며, 아울러 내친 김에 이번 회에서는 지한파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박사에 대한 면을 추가로 살펴보고자 한다.

① 필자가 거듭 말하지만, 신임장에 ‘대황제’란 필적과 어압은 고종황제의 친필이다. 신임장 내용에도 고종황제의 의중이 들어가 있지만, 국새는 민간에서 그려 넣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필자의 논점을 확대 해석하여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실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나, 그 파견 과정에서 우유부단한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② 필자가 존경하는 호머 비 헐버트 박사를 언급한 것에 대하여 일부에서 오해하는 것 같다. 필자가 헐버트 박사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신임장을 고종 황제에게 받아서 이회영에게 전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언급한 것이다.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특사 신임장을 궁에서 반출한 것과는 무관하였다”라고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서 수정하면 될 일이다.

③ 필자는 1982년경 KBS에서 주최하고 한국방송사업단에서 주관한 한말유물자료전의 출품 섭외를 위하여 이종찬(李鍾贊, 1936년~생존, 당시 국회의원) 씨와 소통한 적은 있으나 그와 대면한 기억은 없다. 다만 필자는 이종찬씨보다는 그의 숙부 이규창(李圭昌, 1913년~2005년)씨를 1990년대 초까지 10여 년 간 여러 차례 만나 소통한 바는 있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손자로서 이종찬씨와 이종걸(李鍾杰, 1957~생존)씨를 존중한다. 따라서 지난 회 연재에서 헤이그 특사 신임장을 둘러싼 문제의 껄끄러움이 이제는 해소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2. 호머 비 헐버트 박사에 대한 추모 견해

필자는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한 몇 분의 선교사를 높이 평가한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헐버트, 게일, 배델 등등‥‥‥,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고, 헐버트와 게일은 한국 문화 연구는 깊은 수준이었다. 또한 배델은 언론인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필자는 2022년에 『국혼의 재발견』을 통일뉴스에 34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다. 그 글을 연재하며 최남선이나 최동 등 일부 기독교인이 동천사관을 주장하는 것을 크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조선에 왔던 개신교의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환인 환웅 단군을 유일신으로 인식한 선각자가 있었음을 미처 다루지 않고 서둘러 연재를 마무리하였다. 바로 헐버트 박사와 게일 목사를 말한다. 내가 모은 여러 자료를 검토해보면 헐버트 박사는 탁월한 한국문화비평가이다.

그리고 헐버트 박사는 고종황제의 외교 특사로서 특별하게 큰 역할을 하였다. 요즘 표현으로는 고종황제의 로비스트(Lobbyist)였던 셈이다. 냉철히 판단할 때 미국인으로서의 직업적인 지한파(知韓派) 로비스트이다.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헐버트 박사만큼 대한제국을 잘 알고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대변할 외국인이 달리 없었다는 점이다. 헐버트 박사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헐버트 박사의 특사 신임장, 1906년 6월 22일자. ‘황제어새’를 뉘어서 타자(打字)한 영문 위에다 찍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물을 확인하며 검토하고 싶다. 영문 타자 위에 국새를 찍었는가? 국새를 찍은 위에 영문 타자를 하였는가? 필자의 판단에는 영문 부분은 위 신임장의 한문 부분에 눕혀져서 붙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한문 신임장을 번역 타자하여 만든 신임장은 이 신임장이 유일한 것 같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헐버트 박사의 특사 신임장, 1906년 6월 22일자. ‘황제어새’를 뉘어서 타자(打字)한 영문 위에다 찍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물을 확인하며 검토하고 싶다. 영문 타자 위에 국새를 찍었는가? 국새를 찍은 위에 영문 타자를 하였는가? 필자의 판단에는 영문 부분은 위 신임장의 한문 부분에 눕혀져서 붙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한문 신임장을 번역 타자하여 만든 신임장은 이 신임장이 유일한 것 같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헐버트 박사, 1949년 7월, 인천항에 도착하여 하선하였을 때 찍은 기념 사진. 이준 열사는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 자정(自靖)하였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순국하였다. 고종황제가 헤이그로 보낸 특사로서 귀환한 것은 헐버트 한 사람 뿐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헐버트 박사, 1949년 7월, 인천항에 도착하여 하선하였을 때 찍은 기념 사진. 이준 열사는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 자정(自靖)하였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순국하였다. 고종황제가 헤이그로 보낸 특사로서 귀환한 것은 헐버트 한 사람 뿐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사실 필자가 보기에는 헐버트 박사도 1907년에는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참가할 신임장을 고종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그 한 해 전인 1906년 8월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고종은 1906년 6월 22일 자로 헐버트에게 특사 신임장을 주었는데, 그것이 남아있어 헤이그 특사증으로 주장되고 있다. 물론 이 신임장은 제대로 만들어진 신임장이다.

그러나 한국이 초청된 사실을 안 일본이 1906년 8월로 예정된 회의를 연기하도록 조정하여 한국의 초청을 무효로 하였다. 따라서 헐버트가 헤이그에 나타난 1907년 7월 10일 자로부터 1년 전에 만들어진 신임장이므로 그 효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헐버트가 헤이그에 체류하지 않고 헤이그를 떠난 것은 그 이유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이 올 것을 예상하기나 하였듯이 1907년 4월 20일 자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이회영 이준 이시영 등이 한양의 민간에서 만들었다.

필자는 헐버트 박사의 헤이그에서의 특사 활동은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헤이그에서의 헐버트 박사 행적을 탐색하여 오지는 않았다. 지난 회 연재 이후, 헐버트 박사의 행적에 대하여 탐색해 본 결과 몇 건이 자료가 조사된다, 그 문건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3. 일본이 본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에 간 이유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로 간 이유가 석연치 않음이 확인된다. 1907년 7월 12일 오후 5시 50분에 동경에서 발신하여 오후 12시 00분(자정)에 경성의 이등박문에게 도착한 ‘내전 제142호(來電第一四二號)’를 아래에 소개한다.

“來電第一四二號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五時五○分 東京發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一二時○○分 京城着
外務大臣
伊藤 統監

No. 142
The following telegram received from 都筑 55. Hulbert came here 七月十日 ostensibly in order to deny rumour that he is pulling strings of the Coreans, alleging Coreans are capable of such intrigues of attacking the Japanese Government (?) at the instance of Stead. He spoke at the club-house in the evening, pratically endorced what the Coreans said other night. He has asserted that he would leave (?) the Hague, last night. Among other things which he mentioned to his acquaintances, he was very strongly against the Pagoda affair.
Hayashi”

본문 번역:
“伊藤 統監
제142호
다음 전문은 都筑으로부터 받은 제55호임. 헐버트는 7월 10일 표면상은 한국인들에 대한 자신의 배후 조종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 그는 그들이 스테드의 권고로 일본정부를 공격하는 음모를 꾸밀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 그는 저녁에 클럽회관에서 이야기하면서 전날 밤 한국인들이 말한 내용을 사실상 시인하였음. 그는 어젯밤 헤이그(海牙)를 떠날 것이라고 확언했음. 그가 친지들에게 한 또 다른 이야기 중, 그는 파고다 사건에 매우 강력히 반대하였음.|하야시”

제2회 평화회의 일본준비위원장 쓰즈키 게이로쿠(都筑 馨六, 1861~1923).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서 1907년 4월에 헤이그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헤이그밀사를 대응하였으며, 이듬해 그 공로로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제2회 평화회의 일본준비위원장 쓰즈키 게이로쿠(都筑 馨六, 1861~1923).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서 1907년 4월에 헤이그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헤이그밀사를 대응하였으며, 이듬해 그 공로로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전문에 등장하는 쓰즈키(都筑)는 제2회 평화회의 일본준비위원장 쓰즈키 게이로쿠(都筑 馨六, 1861~1923)를 말한다. 그는 외교관이자 정치가로서 1907년 4월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위원으로 파견되어 헤이그밀사사건 대응을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그 공로로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위의 전문에서 보듯이 헤이그의 대응 책임자 쓰즈키는 헐버트 박사가 7월 10일 헤이그에 온 이유는 “한국인들에 대한 자신의 배후 조종설을 부인하기 위해”서 라고 변명한다는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또한 한국특사 세 사람(특사)이 “일본정부를 공격하는 음모를 꾸밀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정보 보고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헐버트가 연설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공식적인 연설을 한 적이 없다. 이른 바 공고사는 이위종이 연설한 것이며, 그 자리에 헐버트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7월 12일 자 ‘내전 제142호’에 앞서, 7월 4일 오후 1시 30분에 동경에서 발신하고, 같은 날 오후 4시 50분에 경성에 도착한 ‘내전 제124호’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파리 행적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데, 이 전문에서도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 지원이 소극적임이 나타나 있다.

 

“來電第一二四號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一時三○分 東京發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四時五○分 京城着
外務大臣
伊藤 統監
都筑大使來電第三十四號
Papers report Hulbert arrived at Paris by Trans-Siberian. He denies the rumor of having been secretly sent by Corean Emperor to plead in Hague against Japanese usurpation, but he instigates that European countries will one day repent Present indifference to Corean affairs as the Japanese is going to monopolize all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to the exclusion of both westerners and natives.
Hayashi”

본문 번역 :
“伊藤 統監
都筑 大使의 전문 제34호임.
신문보도에 의하면 헐버트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하여 파리에 도착했다고 함. 그는 헤이그(海牙)에서 일본의 강탈에 대해 탄원하기 위해 한국 황제가 밀파하였다는 풍문을 부인하고 있음.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이 서양인들과 토착민들을 배제한 채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독점할 것이므로, 유럽 국가들은 언젠가는 한국 사태에 대한 현재의 무관심을 후회할 것이라고 충동하고 있음.
하야시”

‘내전 제124호’를 분석하여 보면,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海牙)에서 일본의 강탈에 대해 탄원하기 위해 한국 황제가 밀파하였다는 풍문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인들이 서양인들과 토착민들을 배제한 채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독점할 것이므로, 유럽 국가들은 언젠가는 한국 사태에 대한 현재의 무관심을 후회할 것”이라고 충동질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헐버트 박사가 대한제국에서 일본을 배제하고 유럽 각국이 이익을 얻자는 주장일 수도 있으며, 헐버트 박사의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주장이므로 우리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나, “한국 사태에 대한 무관심을 후회할 것”이라는 헐버트의 관점은 일본제국이 나치 히틀러와 연합하였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킴으로서 현실화 되었다.

4. 일본이 본 헤이그 특사 경비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1907년 5월 19일 오후 0시 30문에 발신한 ‘왕전 제31호(往電第三一號)’에 의하면,

“往電第三一號
明治四十年五月十九日 午後零時三○分 發
伊藤 統監
林 外務大臣
韓帝ノ外國ニ向テ運動セラルゝ陰謀ハ昨年以來常ニ絶ヘサル所ニシテ專ラ露佛ニ信賴シ獨立ヲ回復セントノ企劃ナリ兩國總領事ハ帝室ヨリ交涉アル每ニ之ヲ本國政府ニ電報シ本國政府ノ訓令ニ依リ之ヲ排シ或ハ之ヲ容ルゝモノタル證跡顯然タリ曩ニ李容翊ヲ介シ交涉シタル時ニモ佛國ハ之ヲ排シ露領事ハ之ヲ容レタルノ事蹟アリ此節平和會議ノ起ルニ至リテ米人「ハルバルト」ニ巨額ノ金員ヲ附與シ派出スルコトニ相成リタルニ就キテモ露佛領事ニ依賴シ本國政府ノ幹旋ヲ求メタリ佛國領事ハ其愚策タルヲ告ケテ之ヲ排セリ是レ其ノ本國ノ訓示ニ基クモノナリ露國ハ之ヲ容レタルニ疑ナシ故ニ「ハルバルト」ハ專ラ露國ニ依リ目的ヲ達セント謀リ凡テノ資料ヲ蒐集シ之ヲ齎シ旣ニ敦賀·浦塩ヲ經テ西比利亞鐵道ニテ歐洲ニ向ヘリ皇帝ノ金策其他ノ計劃明暸ナルハ佛國總領事ノ本官ニ密告スル所ニシテ亦他ノ外國筋ヨリモ同一ノ密報ニ接セリ現佛領事ハ「プランソン」ト交誼親密ナラサルヲ以テ協議セシモノニハアラス然レトモ佛政府ハ確カニ同情ヲ表セサレトモ露政府ハ甚タ怪シト認ムル旨ヲモ附言セリ如此情態ナルニヨリ此際露佛トモ未タ協商ノ纏ラサル頗ル遺憾ナリ特ニ佛國ノ方丈ニテモ平和會議前結了セハ頗ル好都合ナラン殊ニ佛國トノ協商ハ單純ナレハ佛國外相最後ノ提案ヲ容ルゝモ却テ得策ナラント思考ス此事ハ頗ル機密ニ屬スレトモ內閣及元老中ニテモ承知セラレンコトヲ希望ス”

본문 번역:
“伊藤 統監
林 外務大臣
한국 황제가 외국에게 운동한다는 음모는 작년 이후 항상 계속되고 있는 바인데, 전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의지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계책을 하고 있음. 양국의 총영사는 황실로부터 교섭이 있을 때마다 이 사실을 본국정부에 전보하여 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이 일을 거부하거나 혹은 이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증적이 현저함. 전에 이용익(李容翊)을 개입시켜 교섭했을 때에도 프랑스(佛國)는 이를 거부하였으나 러시아영사는 이 요청을 받아들인 형적이 있음. 이때 평화회의가 개최되면서 미국인 헐버트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불하여 파견하게 되었을 때에도 러시아와 프랑스영사에게 의뢰하여 본국정부의 알선을 요구하였음. 프랑스영사는 그것이 졸렬한 계책이라는 것을 고하며 이를 거부한 것이며, 이것은 그 본국의 훈시에 입각한 것임. 러시아는 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헐버트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계획 하에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이것을 지참하고 이미 돈하(敦賀), 블라디보스토크(浦鹽)를 거쳐서 시베리아철도로 유럽으로 향하였음. 황제의 자금 대책 및 기타 계획을 명료하게 알게 된 것은 프랑스총영사가 본관에게 밀고한 바인데, 또 다른 외국통에서도 동일한 밀보를 접수하였음. 현 프랑스영사는 프란손과의 교의가 친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협의가 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정부는 확실히 동정을 표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정부는 매우 괴이하다고 인정하였다는 뜻도 덧붙이고 있음. 이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러시아 및 프랑스와도 아직까지 협약을 끝맺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 특히 프랑스만이라도 평화회의 전에 친밀해진다면 매우 좋은 형세가 될 것임. 더구나 프랑스와의 협상은 단순하므로 프랑스 외상의 최후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좋은 계책이 될 것으로 사료됨. 이 일은 매우 기밀에 속하는 것이지만 내각과 원로들에게도 알려주시기를 희망함.”

즉,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 정보를 당시 프랑스총영사가 밀고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외국통(외국인 누구?)에서도 동일한 밀보를 접수하였다고 한 것이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와 을사늑약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됨으로 인하여 대한제국과 프랑스의 국교는 끊겼다. 이후 대한제국에서의 프랑스공사관은 국가 대 국가로 주요 외교업무를 상대하는 공사관이 아닌, 정치성이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관으로 존속하였다. 

이를 보면 1907년 당시의 프랑스총영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밀고한 것이다. 그런데 1909년 10월 4일 경시총감 若林賚藏이 발신하고 일본 외무부장 鍋島桂次郞이 수신한 ‘경지(警秘) 제3096호의 1’ 보고 전문에 의하면 “프랑스총영사 페랑(ベラン, 베랑?)과 부인은 지난 2일 오전 9시 南大門 출발열차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佛國總領事「ベラン」同夫人ハ去二日午前九時南大門發列車ニテ歸國ノ途ニ就ケリ)”라는 보고가 나온다. 페랑, 또는 베랑이 밀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떻든 일본의 여러 정보 보고서에는 헐버트 박사가 무일푼으로 조선에 들어와 20년간 수십만 원의 재산을 모은 것(‘機密統發第五一號’, 1907년 5월 9일)으로 나온다. 심지어 헤이그 특사로 떠나면서 고종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 거액의 자금은 아마도 고종황제가 이준 열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지불하지 못한 그 20만 원의 경비를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실제로 고종황제가 헐버트에게 특사단의 경비를 준 것을 ‘왕전 제31호’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언급하고 있다.

5.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 최후의 로비스트

고종황제는 너무나도 국제법이라든가 국제 관계에 무지하였으면서도 헐버트 박사 한 사람에게만 매달렸다. 고종황제가 헐버트 박사를 통하여 추진한 모든 외교 행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이었던 것인가?

그런데 헐버트 박사가 특사로 발탁된 뒷이야기가 있다. 고종황제는 처음에는 언더우드에게 특사로 나서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을사늑약(1905년)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것으로 인하여 대세가 기운 것을 잘 알고 있던 언더우드는 고종황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다시 헐버트 박사에게 특사를 제안하자 헐버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해방되고 4년 후,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된 헐버트 박사는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 말은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쓰여 있다.

그런데 지금이나 당시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에서는 구국영웅, 손꼽히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 묻힐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로운 장소이다. 이곳의 무덤들은 영국의 왕족들도 쉽게 묻힐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애당초 미국 태생의 헐버트는 여기에 묻힐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말을 서구적 언어 시각에서 판단하면, 헐버트 박사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고 볼 수는 있다.

나는 헐버트 박사의 여러 저서 및 자료, 즉 『The History of Korea』, 『사민필지』 한문본, 『The Passing of Korea』 등등 5종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를 상당히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있는 의혹도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나는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을 위하여 직업적으로 나선 지한파(知韓派) 로비스트였다는 것으로 평가한다. 나는 이준 열사뿐만 아니라 이상설 이위종 등등 그 동지들의 자료도 수집하고 있다. 동지들을 함께 조명한다는 목적에서 헐버트 박사 자료도 수집한 것이다. 그들 전체를 사실(Fact)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시각에서 조명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헐버트 박사에 대한 우리 민족사관의 관점에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 헐버트는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에 입국하여 대한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기독교의 시각에서 탐색한 탁월한 연구가였다. 또한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 띄어쓰기의 확산에 간여하였다. 그러나 한글 띄어쓰기의 창안자는 주시경이나 헐버트가 아니다.

- 헐버트 박사는 고종황제의 외교 특사였지만 세 특사의 신임장 입수와는 무관하다. 헐버트 박사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참석 위임장은 1906년 6월 22일자에 발행된 것이고, 그는 1907년에는 상당액의 특사 경비도 받았다.

-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 대표단보다 2주 정도 늦은 7월 10일 도착하였고, 세 특사를 만나지도 않고 곧 바로 헤이그를 떠났다. 즉 헐버트 박사는 의외로 헤이그에서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 일제의 보고 문건에 의하면 헐버트 박사는 1909년에 한양으로 다시 들어와 재산을 처분하였다. 당시 일본은 그의 행적을 세세히 추적 감시하였고, 일제의 조선 강점 기간에도 그는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헐버트 박사는 1907년 이전에는 상당히 대한제국의 독립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906년에 유럽과 미국을 다녀 온 이후에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체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헐버트 박사는 1907년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에서의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조선 독립의 음성을 높이며 조선의 편이 되어 주었다.

필자는 이러한 헐버트 박사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한다. 그렇다고 그를 우리 역사의 주역으로 미화만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분명 헐버트 박사는 독립운동에 간여한 공적이 크다. 그렇다고 정작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소극적이었던 그가 만국평화회의에서 모든 것을 다한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헐버트 박사를 선양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헤이그에서 20세의 청년 특사 이위종의 역할이 컷음도 이제는 재조명하여야 한다.

필자가 이 12회 원고를 탈고하던 중에 이종찬 씨가 광복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보도(26일)되었다. 이종찬 씨는 헤이그 특사 파견에 큰 역할을 하였던 탁월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데, 그는 자신의 조부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와 경주이씨 문중의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우월감을 갖고 있다는 지적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우월감을 극복하여야 광복회장으로서 성공할 것이다. 필자는 그가 성공한 광복회장이 되기를 축원한다. 회원 간의 논공행상의 대립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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