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기존에 알려진 역사 사료를 잘못 이해하고 억지를 쓰며 사실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변조하거나 위조한 것은 아니지만, 침소봉대하여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제멋대로 해석하는 행위이다. 이는 사료의 왜곡에 해당한다.

지난 주 5월 24일 서대문 상해임시정부기념관에서 보훈처장을 비롯한 나철, 이회영, 헐버트 등등 일곱 분의 추서를 상향 보훈(報勳) 하기 위하여 각 기념사업회 임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번에 훈격 상향 주장이 제기된 일곱 분의 독립유공자는 김상옥(1962년 대통령장), 나철(1962년 독립장), 박상진(1963년 독립장), 이상룡(1962년 독립장), 이회영(1962년 독립장), 최재형(1962년 독립장), 헐버트(1950년 독립장) 등이다(가나다순).

이 자리에서 (사)헐버트기념사업회의 회장은 “세 특사는 헤이그 특사증을 받지 못했고, 받은 특사는 헐버트 박사라고 주장하였다”라고 한다. 이 발언은 고종황제가 대황제라고 쓰고 어압을 하여 내린 백지 위임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읽힌다.

이에 필자는 헐버트 박사의 특사장이라고 기념사업회가 주장하는 1906년 위임장을 상세히 읽어 보았고, 그 결과 필자는 의외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제11회와 제12회 연재에서 언급한 헐버트 박사에 대한 일부 관점을 이번 글에서 바로잡는다.

1906년 헐버트 위임장의 전문(全文)

1906년 6월 22일 자로 되어있는 헐버트 위임장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朕大韓皇帝陛下以紇法另定特別委員委任以 (첫째 행 19자)
我韓皇帝室與政府所關一切事爲而使之前往英法 (둘째 행 21자)
德俄墺義比淸等各國也須持此賫送親書確呈于以上各 (셋째 행 23자)
國皇帝大統領大君主陛下且以現今我韓帝國諸般若難事 (넷째 행 24자)
狀之未盡扵親書中者一一仰陳于以上各國政府而 (다섯째 행 21자)
亦將此事件前往荷蘭國海牙府要請萬國公判 (여섯째 행 19자)
所之公正辨理欽遵施行者
大韓開國五百十五年六月二十二日
一千九百六年六月二十二日
在漢城”
(영어 번역문, 皇帝御璽)

1906년 헐버트 위임장의 의미

독자분들은 위 위임장을 잘 읽어 보시라. 위 위임장은, 대한황제가 헐버트를 특별위원으로 위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태리, 벨기에, 청국 등 아홉 나라(네덜란드 포함)에 친서를 전하라고 위임해 준 것이며, 네덜란드의 만국공판소(萬國公判所)에서 공정한 판결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 되어 있다.

이 위임장이 어떻게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증이란 말인가? 결국 고종황제는 헐버트 박사를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면 지난 회에서 언급한 대로 파리와 헤이그에서 헐버트가 특사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한 발언은 당연한 발언이 된다.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특사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특사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즉 헐버트 박사는 제4의 특사도, 제대로 된 특사증을 받은 유일한 특사도 아니었고, 그가 제4의 특사라는 과대 포장한 주장은 친미주의자들이 국내에서 친미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주장임이 이제 확인되는 셈이다.

물론 필자도 친미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만년 영주권자이지만, 부모와 형제는 모두 미국 시민권자다. 원래 친미주의자는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봄으로써 미국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자유롭게 한다. 확인된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다.

은폐도 과장도 없이 말하자면, 헐버트 박사는 애당초 헤이그 특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1906년 위임장을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증이라는 기념사업회의 홍보 앞에 사학계의 그 누구도 실물을 검토하지 않고 넘어 온 것이다. 역사적 진실의 파악에는 이토록 실물의 검토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이토 히로부미는 헐버트 박사가 고종으로부터 특사 경비를 받았다고 일본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는가?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헐버트 박사는 중요하고도 단순한 심부름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도 헤이그에서도 세 특사를 만난 적이 없다. 고종황제가 약속한 특사 경비의 배달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추정하는 대로 헐버트는 뉴욕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을 만났던 것이 아닐까? 만약 배달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면, 그제야 고종으로부터 받은 헤이그의 세 특사 경비 일부를 이상설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1907년에 고종이 이준 열사에게 약속한 돈이 대한제국 돈 20만 원이었다. 지금 돈으로는 얼마나 될까? 현재의 화폐 가치로는 미화 200만 달러 정도는 되지 않을까? 만약 세 특사가 제때 특사 자금을 전달받아서 그 돈을 헤이그의 외교가에 뿌렸다면 세 특사의 본 회의 참석은 가능하였을까?

1906년 특사 위임장의 문제

제12회 연재에서, 1906년 신임장에 대한 사진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헐버트 박사의 특사 신임장, 1906년 6월 22일자. ‘황제어새’를 뉘어서 타자(打字)한 영문 위에다 찍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물을 확인하며 검토하고 싶다. 영문 타자 위에 국새를 찍었는가? 국새를 찍은 위에 영문 타자를 하였는가? 필자의 판단에는 영문 부분은 위 신임장의 한문 부분에 눕혀져서 붙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한문 신임장을 번역 타자하여 만든 신임장은 이 신임장이 유일한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시 환기하는 이유는 1906년 헐버트 신임장이 가진 문제점을 다시 언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신임장의 가장 큰 문제는 ‘황제어새(皇帝御璽)를 눕혀 찍었다는 것이다. 국 공문서에서 국새(國璽)를 그렇게 찍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필자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물을 확인하며 검토하고 싶다”라고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1906년 신임장이 진품이라면 이 신임장은 아래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문 부분을 잘라서 한문의 왼쪽에 붙여 보았다. 이래야 정상적인 위임장이다.

 영문 부분을 잘라서 한문의 왼쪽에 붙여 보았다. 이래야 정상적인 위임장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영문 부분을 잘라서 한문의 왼쪽에 붙여 보았다. 이래야 정상적인 위임장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만약 기존의 공개된 사진대로 위임장 실물에서 영문이 한문의 밑에 붙어 있다면, ’황제어새‘를 잘 못 찍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공개된 사진에서처럼 영문이 한문의 밑에 붙어 있다면 이 1906년 위임장에 찍힌 국새는 민간에서 만든 위인(僞印)으로 찍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제12회 연재의 이 사진 설명의 끝부분에서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한문 신임장을 번역 타자하여 만든 신임장은 이 신임장이 유일한 것 같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이 부분은 아래와 같이 수정하고자 한다. “한문 신임장을 번역 타자하여 만든 신임장은 이 신임장 외에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헐버트가 고종황제가 아홉 나라에 보낸 신임장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태리, 벨기에, 청국, 네덜란드의 국공립 문서고에 보관되고 있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전달 여부를 확인한 바 없다. 미국에서처럼 헐버트 박사의 특사 업무가 위의 아홉 나라에서도 실효가 없었던 것일까? 결국 고종황제의 특사 파견은 돈만 뜯긴 빛 좋은 개살구였는가? 참담할 노릇이다.

1906년 특사증의 또 다른 의문점은 한 행에 글자를 꽉 채워 쓴 여섯 개의 행자수가 19자부터 24자로 그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보통 행자 수는 거의 맞추어서 쓴다. 각 줄의 행자 수가 달라도 1~2자 정도이지, 1906년 위임장에서처럼 5자씩이나 차이가 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1907년 특사 위임장을 재조명한다

필자는 1907년 세 특사의 위임장이 민간에서 만들어졌음을 밝히며, ‘대황제’라는 글씨와 어압(御押)은 고종황제의 자필로 언급하였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에서 고종황제의 어압이 들어가 있는 문건은 모두 세 건이 있다. 가장 먼저 것은 광서8년(1882) 6월에 무용위 이선재(李璿載)에게 내린 [전령(傳令)]이다. 1882년 (음력) 6월 9일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는데, 이 [전령]은 임오군란의 수습과 관련이 있다. 보통 전령은 국왕이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창졸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국새로 어보도 찾아 찍을 겨를이 없이 고종(高宗)이 어압을 가로로 약 13.5cm의 크기로 상당히 크게 그려서 내린 것이다. 고종은 1852년생이니, 1882년의 이 어압은 만 30세 때의 어압이다. 현재 남아있는 어압 가운데 밝혀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전의 것으로 보인다. 본 1882년 [전령] 본문과 이업은 그 필획(筆劃)이 다름을 보아, 본문은 고종의 필체가 아니다.

고종황제가 만 53세이던 광무 9년(1905)에 권태익(權泰益)에게 내린 7월 11일 자의 [칙명(勅命)]. [사진 제공 - 이양재]
고종황제가 만 53세이던 광무 9년(1905)에 권태익(權泰益)에게 내린 7월 11일 자의 [칙명(勅命)].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어압이 들어간 두 건의 어압은 고종황제가 만 53세이던 광무 9년(1905)에 권태익(權泰益)에게 내린 두 건이다. 이 가운데 7월 11일 자의 [칙명(勅命)] 한 건을 소개한다. 여기의 어압은 그 흔적을 보면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크기가 가로로 약 3.5cm이다. 이러한 [칙명]은 황제의 윤허(允許)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직접 쓸 필요가 없이 어압과 [대원수보(大元帥寶)]를 찍는다.

1905년 7월 11일 자에 권태익에게 내인 [칙명]에 찍힌 어압과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모두 특사로 기록한 1907년 4월 20일 자 [특사 위임장]에 그려진 어압은 고종이 만 55세에 그린 것으로서 두 어압의 시차는 2년이 좀 못 된다. 필적의 감정에서 중요한 것은, “필적은 물론이고 사인이나 수결, 어압은 시기마다 조금씩 변하며, 붓으로 쓴 글자는 그 크기에 따라 필체도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라는 점이다.

아래에 사진으로 대비한 1905년의 어압과 1907년의 어압은, 그 크기가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07년 어압은 비밀리에 백지에 그린 것이다. 국새를 찾아 찍을 겨를도 없이 몰래 만든 것이니, 급박한 특사 밀파 정황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필치가 매끄럽지 못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제는 필자의 판단을 존중하길 바랍니다

헤이그 세 특사의 위임장에 대한 의문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필자이다. 이제 16년 만에 필자의 주장에 대한 호응이 이번에 새로 광복회장으로 선출된 이종찬 씨로부터 나왔다. 이종찬 씨에게 제언한다. 처음으로 필자가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인정한 위임장이 민간에서 급조되었지만, 어압은 고종황제의 것이라는 판단도 이제는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48년간 우리 고서와 고문서를 수집하고 연구한 애서운동가이다. 진위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민감하다. 이러한 필자에 의하여 이번에 헐버트 박사를 과대 포장한 일면이 드러났다. 헐버트 박사는 애초에 헤이그 특사로 임명받지 못했다. 그것은 고종황제가 고용된 대한제국의 로비스트로서 헐버트 박사의 의중과 행실을 1907년에는 이미 간파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대한제국의 그 누구도, 또한 일제 강점시기의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도 직업적으로 고용된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친일파는 생계형 친일파가 있을지언정,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생계형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다. 거의 모두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렇듯 고용된 로비스트와 독립운동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의 애국자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그는 대한제국에 고용된 직업적인 로비스트로서의 특사였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헐버트 박사를 활용할 때마다 응분의 보상을 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헐버트 박사의 탁월한 기독교 신학적 관점을 존중한다. 그러나 필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특사만이 헤이그 특사라는 사실이다. 헤이그에서 보낸 일본의 정보 보고 전문(電文)에는 ‘헐버트 박사는 스스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니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특사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꺼낸 1906년 6월 22일자 위임장 어디에도 헤이그에서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 언급은 없다. 헐버트 박사에 대한 상훈을 상향 조정할 목적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다시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5월 24일(수요일) 회의에서 세 특사를 깎아내리지만 않았어도 필자는 헐버트 박사의 1906년 특사 위임장을 상세히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의 국민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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