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0년 전의 이 때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마침내 총탄이 빗발쳤다. 피로서 피를 청산하자는 의지를 다지며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교성대(敎成隊)의 분노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이 청산리독립전쟁의 서막이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200여 명을 살상하였다. 반면 독립군은 1명의 사상자가 전부였다.

이후 26일 새벽까지 청산리 삼도구(三道溝)와 이도구(二道溝)에서 연속된 10여 차례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것을 통틀어 청산리독립전쟁이라 칭한다. 이 중 ‘백운평전투’·‘천수평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 등은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다. 또한 ‘어랑촌전투’·‘천보산전투’ 등은 대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연합부대가 공동으로 수행한 전투였으며, ‘완루구전투’와 ‘고동하곡전투’는 홍범도연합부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였다.

일본의 정예군 이즈미 지대(支隊) 5,000명과 벌인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적게 잡아도 1,200여명이 죽었다. 그리고 200여명의 부상자도 발생한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자 130여명, 부상자 220명으로 집계되었다.

독립군의 승전 이유로는, 잘 훈련된 전투력이 우선 꼽힌다. 특히 대한군정서의 교성대는 사관연성소 제1기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정예독립군이었다. 또 하나는 무기(武器)의 구비다. 당시 대한군정서는 독립군부대들 중에서 무장(武裝)이 가장 잘 갖추어진 부대였다. 대한군정서의 치밀한 경신조직(警信組織)도 빼놓을 수 없다. 대종교 네트워크를 통한 통신과 경사(警査)의 원활한 실행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면 군교일치(軍敎一致)를 지향했던 대한군정서의 정신적 일체감이다.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은 군정서의 군영(軍營) 안에 대종교 동도본사(東道本司)를 병설했다. 독립군의 의기와 대종교의 상무정신을 하나로 엮은 군교일치의 실천이었다. 서일이 청산리독립전쟁 직후 임시정부에 보고한 승전의 이유 첫 항목에,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軍人精神)’을 꼽았던 것도 그 이유다.

대한군정서의 연성대장 이범석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시 만주 교포의 많은 수가 대종교도였고 대종교의 확장은 곧 독립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 또한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는 증언과 함께, 독립군들이 대종교의 신앙에 뭉쳐서 파벌이나 사리잡념이 없이 광명정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만들어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돼지와 소를 잡아 제천보본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는 말도 한다. 전래 신교(神敎)의 전통인 군사제천(軍事祭天)의 실행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그가 청산리독립전쟁을 앞두고 읊었다는 「기전사가(祈戰死歌)」의 말미에 “한배님 저희들 이후에라도 / 천만대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 /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은, 대종교적 맹세를 통한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대한군정서의 정신적 불씨는 1911년에 성립된 중광단(重光團)에 그 기원을 둔다. ‘중광(重光)’이라는 명칭은 1909년 대종교의 ‘중광(다시 일으킴, 부활)’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철이 대종교 중광의 명분으로 내세운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國亡道存]’는 구호와 연결되는 가치다.

주목되는 것은 중광단 명칭의 종교적 배경뿐만이 아니다. 그 지도층을 위시한 구성원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를 계승한 대한군정서의 주요 인물들 역시 모두 대종교인들이다. 총재부의 주축인 서일·현천묵·김규식·윤창현·윤정현 등이나, 사령부의 핵심인 김좌진·조성환·양현·박영희·서청·이장녕·채규오·나중소·임도준·강훈·계화·정신·채신석·최익항·이범석·김훈·남진호·주견룡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특히 대한군정서의 정신적 기둥인 백포(白圃) 서일의 상징성은 남달랐다. “나처럼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다행스럽게도 홍암신형(弘巖神兄, 나철-인용자 주)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음에 감격”한 인물이 서일이다. 그는 역학(易學)과 현대학문에 통달한 문인이자 천문(天文)과 인시(人時)를 꿰뚫은 무인이었다.

대한군정서 구성원 모두에게 그는 스승이자 선생이었다. 대종교의 교리에도 천부적 자질을 드러낸 그는, 계화·정신·이홍래·고평 등 군정서 간부들을 거느리고 대종교 교리 연구와 편찬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스승인 나철의 삼일철학(三一哲學)을 계승하여 한국철학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도 그다.

서일의 당호(堂號)가 삼혜당(三兮堂)이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 역시 스승 나철의 당호인 일지당(一之堂)의 뜻을 계승하여 완성하겠다는 의지였다. 즉 대종교의 교리 분삼합일 회삼귀일(分三合一 會三歸一)의 철학적 의미를 계산한 명명(命名)이었다. 그의 군교일치가 나철의 국망도존(國亡道存)의 정신적 구현임을 드러내 준다.

100년이 흘러도 10월 바람이 불면 청산리 그곳엔 이미 눈이 덮인다. 눈덮힌 이 골 저 골에 뿌려졌을 항일투사들의 피가 흙으로 범벅된 지도 꼭 100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흘린 피의 의미를 아는 이 얼마나 될까. 백운평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이범석이 교성대원들에게 내뱉은 다음의 일성이 뇌리에 박힌다.

“청산리 산맥은 장백산의 주맥이요 우리 조상의 발상지이다.…(중략)…만약 우리의 혈관 속에 아직도 단군의 피가 말라붙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한 몸을 희생의 제단에 올려놓고 3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다.”(『우둥불』)

그래, 말라붙지 않은 단군의 피를 흩뿌려보자는 것. 이것이 청산[靑山里]에 피 흘린 진정한 뜻일 듯하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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