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그림. 반프랑스 독립전쟁을 이끈 멕시코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베티토 후아레스의 모습이 부각돼 있다. [사진-임영태]

멕시코의 영광과 굴욕

찬란한 고대문명을 가진 멕시코와 현재의 멕시코를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착잡했다. 멕시코의 학생들이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흔히 중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소개할 때, ‘광대한 영토, 거대한 인구, 유장한 역사, 빛나는 문화’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곤 한다. 만일 멕시코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미국에게 영토를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멕시코인도 중국인이 붙이는 이런 수식어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근대 이전 지금의 멕시코와 같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국가는 아니었다. 지금의 멕시코 영토에는 수많은 인디오 종족들이 독립적으로 또는 연결되면서 각각의 문명과 문화를 이루며 수천 년 동안 지내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16세기 초반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인이 되었다. 어쨌든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영토는 지금의 2배도 더 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누에바(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콜로라도를 미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만약 그들이 그 땅들을 지켜내고 멕시코라는 근대국가로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면 멕시코는 미국과 더불어 북미를 양분하며 강대국으로 부상했을까?

▲ 1848년 이전의 멕시코-미국 국경선과 현재의 국경선. [사진-임영태]

 

▲ 붉게 표시된 지역. 알라모 전투, 텍사스 전쟁 등 미국과의 전쟁으로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기거나 헐값에 넘긴 영토는 현재 멕시코 영토보다 더 넓다. [사진-임영태]

하지만 그건 가정에 불과할 뿐, 실제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됐다. 멕시코는 19세기 초중반 북부지역 영토를 빼앗긴 뒤 미국 옆에서 기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지냈다. 그러나 멕시코는 20세기 초반 혁명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았고, 이후 미국과 서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 100년 뒤 지금 멕시코는 또다시 미국의 강한 경제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멕시코의 혁명 이념과 정신을 망각한 통치자들에 의해 혁명의 대의가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세기 후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함께 멕시코 경제는 신자유주의체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 내부적으로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고, 공권력과 범죄 집단의 결탁, 부패스캔들 등으로 사회 정치적 불안정까지 겪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 이후 외형적으로 멕시코의 경제규모는 확대되었지만 실제 멕시코 민중의 삶은 더 나빠졌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심란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주요 목적은 박물관 관람이다. 나는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 흐르듯 설렁설렁 박물관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3시간 가까이 걸렸다. 관람이 대충 끝나고 기념품 판매점 앞에서 영문판 도록을 2권 샀다. 한 권은 인류학 박물관 유물 도록이고, 한 권은 멕시코 전역의 주요 유적지 및 유적 도록이다.

언제 어떻게 읽을지, 읽기나 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도록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구입했다. 2권의 도록 값으로 800페소 상당의 돈을 지불했다. 6만원이 넘는 돈이다. 책값은 우리보다 싸지 않다. 책값이 비싸다고 이야기했더니 판매원이 다른 물가는 싸지만 책값은 비싸다고 말해준다. 정말 그렇다.

▲ 멕시카(테노치티늘란)관에서 인류학박물관 정문을 바라보고 찍은 장면.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 정문 모습.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 앞에서는 노점상이 기념품과 먹을거리를 팔고 있다. [사진-임영태]

 

▲ 인류학박물관 바깥 공원에서는 예인들이 곡예를 펴고 있다.[사진-임영태]

독립 후 멕시코의 수난의 역사

우리는 멕시코 인류학박물관을 나온 뒤 어디로 갈 것인가 고민했다. 잠시 의논 끝에 혁명기념관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은 차풀테펙 공원에는 인류학박물관 말고도 구경할 게 더 있었다. 스페인의 정복에서부터 멕시코 혁명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를 설명해주는 ‘국립역사박물관’과 막시밀리안 황제의 거주지였던 차풀테펙 성이 그것이다.

1810년 9월 15일, 이달고 신부가 이끄는 민중봉기로 시작된 멕시코의 독립투쟁은 1821년 9월 27일 스페인 군대가 철수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지만 독립 후 멕시코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860년대까지 멕시코는 3번의 외침을 겪었으며, 미국에 북부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 사이 통치자가 계속 바뀌면서 정치적 혼란도 이어졌다.

무엇보다 독립 뒤 첫 걸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앞장섰던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황제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 하지만 이투르비데는 1823년 산타 안나에게 축출되고 만다. 산타 안나는 1829년 탐피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쳐 국민적 영웅이 됐으며 1933년에는 스스로 대통령에 오른다.

그런데 산타 안나가 통치하던 시기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에 패배하면서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1853년에는 매각이라는 이름으로 1천만 달러에 뉴멕시코와 애리조나를 미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최악의 통치자가 된 산타 안나는 결국 1855년 권좌에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861년 인디오 원주민 출신의 베니토 후아레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1862년 프랑스가 주도하는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64년에는 오스트리아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앉히고 멕시코를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뒤 미국이 본격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미국은 1866년 해군을 동원하며 프랑스를 압박했고, 프랑스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의 군대도 후아레스가 이끄는 멕시코 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1867년 2차 독립전쟁의 영웅 후아레스가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는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멕시코를 새롭게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1872년 혁명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고, 멕시코의 수난도 계속된다.

그러니까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1864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멕시코 황제 노릇을 한 인물이다. 그는 황제로 있는 동안 차풀테펙 성을 유럽풍으로 치장해 황궁으로 사용했다. 막시밀리안의 몰락 후 차풀테펙 성은 한동안 군사기지가 됐다가 나중에는 대통령 거주지가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국립역사박물관이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독립하면서 그 운명이 바뀌었다.

국립역사박물관은 1941년 차풀테펙 성으로 옮겼고, 새 단장을 거쳐 1944년부터 문을 열었다. 차풀테펙 성의 국립역사박물관에는 스페인 정복기부터 멕시코 혁명기까지의 멕시코 사회·문화와 관련된 의복과 기록문서, 깃발, 보석류, 무기 등 15만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들도 상당수 걸려 있다.

▲ 인류학박물관을 알리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놓여 있다.[사진-임영태]

 

▲ 박물관을 나와서 본 차풀테펙 공원 모습. [사진-임영태]

 

▲ 차풀테펙 성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Chapultepec Castle; http://www.mexicovacationtravels.com/)

 

▲ 차풀테펙 성 내부 모습 [출처-위키백과 영문판]

 

▲ 반프랑스 독립투쟁을 이끌고 있는 후아레스. [사진-임영태]

봐야 할 것을 놓치다

차풀테펙 성과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장식품과 물건, 자료들도 볼만한 가치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의 경치가 죽인다는데 우리는 그걸 못 봤다. 화려한 유럽풍의 황궁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그림 같은 건물과 풍경, 그리고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멕시코시티 전경 등. 혁명기념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앞선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그런 계산을 하지 못했던 것. 특히 일정표를 작성한 나의 사전학습 부족이 여실이 드러난 부분. 아무튼 시간이 모자라서 이곳에서 관람을 더 한다면 혁명기념관은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실착이었다. 우리의 여행객의 눈을 즐겁게 해줄 구경거리는 혁명기념관이 아니라 국립역사박물관과 차풀테펙 성에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눈의 즐거움보다 정신적 충만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 물질보다 정신이 더 중요할 경우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끝난 일이니. 혹 다음에 멕시코에 가는 분들은 이런 실수 하지 마시기를. 사실 우리는 이것만이 아니라 멕시코에서 봐야 할 다른 것들도 몇 가지 놓쳤다. 소깔로 광장 주변에 위치한 대통령궁(국립궁전)과 ‘템플로 마요르’(‘위대한 신전’이란 뜻을 지닌 유적지)를 보지 못한 것도 그 중 하나. 국립궁전에는 멕시코의 장대한 역사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의 역작, 벽화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곳까지 가서 그걸 못 보다니….

또 템플로 마요르는 14~15세기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신전의 흔적이 있는 곳. 스페인 정복자들은 전쟁과 태양의 신, 비와 다산의 신을 모시는 2개의 신전이 있던 자리를 파괴하고 그 신전의 돌로 자신의 건물을 지었다. 지금의 도시 지하에 묻혀 있던 신전의 하단 부분만 겨우 발굴된 상태라고 한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테노치티틀란의 중심 신전을 파괴하고, 호수를 메운 다음 그 위에 지금의 소깔로 광장을 중심으로 멕시코시티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

아즈텍인들이 건설한 테노치티틀란은 처음 텍스코코 호수 가운데 섬에서 시작되었다. 테노치티틀란은 인구가 늘어나자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호수에 인공섬을 만들어 식량을 재배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텍스코코 호수와 그 주변에는 습지의 표면의 두꺼운 수초를 잘라 양탄자처럼 쌓아 만든 떠 있는 섬에 호수 바닥의 진흙을 북돋워 만든 찌난빠라는 농지가 많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농법은 비옥한 진흙과 풍부한 물이 얻을 수 있어 매우 수확량이 높았고, 아즈텍의 국력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오면서 이 모든 것들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땅속에 고스란히 묻혀버렸다. 정복자들은 호수를 메우고 신전을 파괴하고 중앙광장(소깔로)을 세우고, 그 주변에 총독관저(지금의 국립궁전)와 대성당, 그리고 정복자들이 사는 거주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멕시코시티는 정복자들에 의해 원주민의 문명과 문화를 파괴한 바탕 위에서 유럽식으로 새롭게 탄생한 도시인 것이다. 과연 이걸 창조적 파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 국립궁전 안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http://www.delange.org/PresPalace2/PresPalace2.htm)

 

▲ 벽화를 확대한 것. 

 

▲ 템플로마요르(위키백과 영문판)httpsen.wikipedia.orgwikiTemplo_Mayor

 

▲ 템플로마요르 유적(httpwww.expedia.co.krTemplo-Mayor-Mexico-City.d501757.Place-To-Visit). [사진-임영태]

 

▲ 파괴되기 전 테노치티틀란의 모습. [사진-임영태]

 

▲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는 스페인군. [사진-임영태]

 

▲ 박물관에 그려져 있는 테노치티틀란 모습. [사진-임영태]


택시기사에게 눈뜨고 당하다

인류학박물관을 나와 혁명기념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박물관 정문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탔는데 그게 잘못일 줄이야. 기사는 뭔지 모르지만 목에 신분증 비슷한 것을 걸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택시도 깨끗했다. 택시를 탈 때는 반드시 요금 흥정을 먼저 하고 타라는 이야기를 멕시코 여행기에서 많이 읽었다. 하지만 미터기를 사용하는 중심가 택시는 괜찮다는 말도 있어서 그냥 탔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미터기가 돌지 않았다. 우리가 미터기를 켜고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미터기를 바로 켰다.

그런데 그 미터기가 이상했다. 켜자마자 쉼없이 계속 숫자가 올라갔던 것. 너무 빨리 돌아가서 불안했다. 게다가 기사는 혁명박물관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가면서 헤맨다. 그러면서 자꾸만 딴 소리를 해댄다. 멀리 떨어져 있는 관광명소를 거론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 노’를 연발하며 혁명박물관으로 가자고 말했다. 도착할 시간이 됐건만 아직 깜깜이다. 기사에게 다시 묻는 순간, 저기가 혁명박물관이라며 지나친다. 우리는 다급하게 소리친다. ‘저기, 저기’로 가자고. 그렇게 해서 혁명박물관이 바라보이는 주변 도로가에 택시는 멈췄다.

그런데 문제는 택시 요금. 무려 184페소나 나왔다. 우리 돈으로 14,000원이 넘는 돈이다. 이거 완전 사기다. 많아야 40~50페소 정도면 충분한 거리인데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잠깐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액수를 다 지불하고 말았다. 멀건 대낮에 우리는 눈 뜨고 당하고 말았다. 기사가 ‘자기는 관광업에 종사하는 택시여서 요금이 비싸다’고 우기는 데야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멕시코에서 경찰을 불러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 오히려 성가시기만 할 뿐이다.

나중에 홍 목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거 다 가짜라고 말한다. 목에 걸고 있던 건 신분증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갖고 다니는 가짜 증명서라는 것. 말로만 듣던 택시 사기를 우리가 백주대낮에 눈 뜨고 당하다니,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택시를 탈 때는 반드시 미리 흥정하고 탈 것, 아니면 우버 택시 같은 믿을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하든지. 이런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우리는 혁명기념관으로 향했다.

▲ 멕시코시티에 택시는 많지만 믿고 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한다고 들었지만 결국 우리는 눈뜨고 당하고 말았다. [사진-임영태]

 

▲ 멕시코 혁명기념관 모습. 위가 황동 돔으로 된 특이한 구조여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띤다.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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