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여행, 첫 위기를 만나다

▲ 소깔로 광장. 광장 중앙에는 대형 멕시코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즈텍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 위에 이 광장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의 원형을 건설했다. [사진-임영태]

6월 10일 5시 30분(현지 시간), 멕시코 공항에 도착했다. 아, 피곤하다. 비행시간만 대략 16시간 이상 걸렸다. 비행기 갈아타고 대기하고 인천공항을 출발하고, 그렇게 보면 꼬박 24시간 이상을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냈다. 50대의 우리도 힘든데 70대의 교수님은 오죽하랴! 결국 탈이 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멕시코시티로 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따로 떨어져 않았고, 이 대표와 교수님은 함께 앉았다. 비행장 도착 직전 시차조절에 부담을 느낀 교수님은 잠을 청하기 위해 수면제를 드셨는데 그게 문제의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을 무렵에는 거의 비몽사몽의 상태였다. 우리는 초조했다. 입국 수속은 다행히 까다롭지 않았다. 그러나 입국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교수님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셨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계속 이런 상태면 어떡하지? 여행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1차 위기였다.

공항대합실에서 원장님을 기다렸다. 원장님은 먼저 와서 멕시코시티에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공항으로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했던 것. 그런데 기다려도 원장님은 나타나지 않고 시간만 흘렀다. 교수님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초조했다. 가까스로 원장님과 문자 연락이 되었다. 지금 지하철을 타고 비행장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는 답신이 왔다.

멕시코시티 치안이 나빠 새벽에는 택시를 탈 수 없는 상황. 택시를 잘못 탔다가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할 수 없이 전철을 탔지만, 사람이 너무 많은데다가 갈아타야 했으므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7시 30분경 원장님이 도착했다. 너무 반가웠으나 교수님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 우리가 멕시코와 첫 대면한 멕시코시티 공항 대기실 풍경.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는 입국절차를 마친 뒤 한적한 공항대기실에서 한동안 기다렸다. [사진-임영태]

멕시코와 첫 대면하다

공항 안내소에서 물어 택시를 탔다. 택시는 공항에서 구도심 중심가를 향해 달렸다. 가면서 만나는 승용차 중에는 닛산, 도요다, 혼다, 마쯔다 등 일본제가 많다. 특히 닛산이 많았다. 생각만큼 유럽 자동차 메이커는 잘 안보인다. 중국에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메이커들을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2015년 1~4월 멕시코 전체 자동차 판매의 4분의 1을 닛산이 점하고 있었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끔 기아차가 보인다. 멕시코시티에서는 현대보다는 기아를 더 많이 만났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기아자동차가 현지 공장과 부품공장을 대규모로 짓고 있었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함께 멕시코의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현재 멕시코는 자동차 생산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2014년 멕시코는 320만대를 생산,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0년에는 세계 4위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멕시코는 세계 5위의 자동차 부품 제조국이고, 미국의 제1위 공급국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남미 등의 시장을 생각할 때 멕시코의 자동차 산업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며, 현재 5대 생산국인 한국을 위협할 가장 강력한 경쟁국이다. 하지만 멕시코 국적의 자동차메이커의 경쟁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현대-기아와 같은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멕시코의 자동차 산업이 미국, 유럽, 일본의 세계적인 메이커의 조립차원을 넘어 독자적인 브랜드로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 숙소 2층 테라스에서 찍은 멕시코시티 구시가지 주변 모습. 우리가 첫 대면한 멕시코시티의 풍경 가운데 한 장면이다. [사진-임영태]

처음 만난 멕시코시티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구에 있는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처음으로 미군부대 앞을 지나면서 느꼈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처음 용산 미군부대와 인천 부평의 미군부대 옆을 지나면서 받은 느낌도 비슷하다. 공항에서 구시가로 들어가면서 본 도로변의 건물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야자나무가 중간중간 보이는 외에는 열대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현대식 고층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단층의 바라크 같은 건물들이 쭉 이어졌고, 그다지 밝지 않은 단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그런지 활기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들의 기분상태가 반영되어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택시는 공항 주변을 벗어나자 시내로 들어오는 전용도로를 달렸다. 이미 출근시간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중간 중간 정체되었다. 차선이 그어지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차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자기 차선을 잘 달렸다.

한 시간 가량 달려 원장님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 도착했다. 숙소는 멕시코시티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약간 낡은 가정집 2층이었다. 우리는 도착 뒤 과일(망고)과 빵, 물로 허기를 간단히 채웠다. 망고 맛이 일품이었다. 비로소 멕시코에 온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은 침대에서 쉬도록 했다. 우리는 집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소깔로 광장 주변을 구경했다. 소깔로 광장은 구도심의 중심지이며 출발점이다. 광장 주변에는 대성당과 대통령궁, 시청사, 행정부처들 등의 관공서를 비롯하여 국립궁전, 템플로 마요르 등 볼거리들이 즐비한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그냥 휙 돌아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사진도 몇 장 찍고, 주변 가게들도 돌아보면서.

▲ 처음 원장님이 묵었던 숙소. 우리가 묵게 될 숙소는 이곳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했는데, 이곳보다는 깔끔했다. [사진-임영태]

새 숙소에 자리를 잡다

오전 9시 30분, 집으로 돌아와 보니 교수님은 정신없이 주무시고 계신다. 그 사이 우리는 함께 묶게 될 새 숙소로 짐을 옮겨놓기로 했다. 지금 묵고 있는 곳은 방이 하나밖에 없고 좁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던 것이다. 새 숙소는 그곳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등에 가방을 매고 캐리어 네 개를 끌고 손에 또 다른 짐을 들고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새 숙소에 가보니까 문이 잠겨 있다. 벨을 눌렀더니 어떤 여성이 한 사람 나왔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관리인이 아닐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는 뭐라 뭐라 이야기하더니 문을 닫고 들어간다. 주인의 연락이 있어야 들여보내 줄 수 있다는 의미는 알아들었다. 일단 바깥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주인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되지 않는다. 숙소를 소개해준 홍 목사님과 가까스로 연락이 됐으나 그분도 주인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난감했다. 주인에게 연락해달라 부탁을 한 뒤 기다렸다.

문밖에서 짐을 놓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교수님이 걱정됐다. 이 대표와 나만 거기 남아 있고 원장님은 교수님을 모시러 갔다. 옆집에서 중국계 멕시코인들이 나와서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담배를 피운다. 갑자기 나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도 힐끗힐끗 우리를 쳐다본다. 거리의 구경꾼이 된 우리들의 기분이 착잡하다. 그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빨리 들어가서 짐을 내려놓고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 숙소 주변의 식료품 상점 앞에 경찰차가 서 있다. 대낮인데도 시내 곳곳에 경찰이 쫙 깔려 있었다. 큰 상점과 가게, 은행 같은 곳은 경찰뿐만 아니라 사설경비원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지키고 있어서 불안한 치안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임영태]

얼마간을 그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젊은 멕시칸 친구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아마도 주인의 연락을 받은 관리인인 모양이다. 그가 뭐라고 말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손짓, 몸짓과 짧은 영어로 가까스로 의사가 통했다. ‘이 집에 묵을 사람들이냐?’ ‘그렇다’라고. 그가 문을 열고 우리는 짐을 들고 따라 들어갔다. 1층을 지나 2층을 지나 3층이다. 아, 왜 이렇게 계단 올라가기가 힘들지? 오랜 비행 끝이어서 피곤해서 그런가? 갑자기 멕시코시티가 2천 미터가 넘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높은 곳을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차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3층에 올라가 우리가 묶을 예정인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거 우리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다. 시설이 생각보다 너무 좋다. 조금 전 원장님이 묵고 있던 곳과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났던 것이다. 거의 5성호텔급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방이 두 개, 거실과 주방, 그리고 화장실. 시설이 깨끗하고 잘 정리돼 있다. 그래서 이 대표와 나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곧 모르겠다, 일단 짐을 풀고 보자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둘러보니 평범한 집이다. 벽도 벽돌과 블록으로 만들었고, 위 천장도 철제 빔 위에 공사장 목재를 놓은 다음에 시멘트 슬라브를 쳤다. 잘 지은 집은 아니다. 돈이 들어간 집도 아니다. 그런대로 깨끗한 집이다. 그저 지낼만한 수준 정도이다. 다만 천장이 높고 나름대로 분위기는 있다. 베란다도 양쪽에 있어서 거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마음에 든다. 짐을 풀고 있는 사이 원장과 교수님이 도착했다. 예약 내용을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전달한 다음 젊은 친구는 떠났다.

그러고 나니 11시다. 시장하다. 배고프다. 당장 식사 준비가 필요하다. 멕시코 음식이 입에 맞을지 걱정이다. 교수님이 가져온 누룽지를 끓여먹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다. 그러자면 반찬이 필요하다. 이 대표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장을 보기 위해서는 환전을 해야 한다. 다행이 바로 숙소 주변에 은행이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간 환전을 했다. 환율은 1달러당 14.83페소였다. 우리는 뭔가를 사기 위해 거리를 한참이나 헤맸다.

하지만 야채는 보이지 않는다. 과일도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맥주와 물만 사서 돌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맥주는 단맛이 나는 멕시코식 맥주였다. ‘칵테일 맥주’라고나 할까. 일단 그 걸로라도 요기를 해야 했다. 남은 빵과 맥주, 과일로 간단히 점심을 대신한다. 잠깐 쉬었다. 다행히 교수님 상태가 호전되어 보인다. 아침에 오자마자 푹 잔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간 다행이 아니다. 새벽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여행,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는데 말이다.

▲ 우리가 묵었던 숙소 정면 쪽 테라스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 숙소는 사거리 코너에 위치했는데 어느 방향으로 보는가에 따라 거리 모습이 차이가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면 건물과 거리 모습이 그럴듯해 보인다. [사진-임영태]

멕시코시티를 구경하다

오후 우리는 길거리로 나섰다. 전통시장 구경도 하고 장도 보자는 취지로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시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물건을 파는 시장은 다 보았다. 옷 가게, 패션 몰, 술과 음료, 빵, 전자상가, 책 가게, 음식점 등. 그러나 우리가 찾는 쌀과 야채, 과일을 파는 가게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걸어 다닌다. 길거리 구경도 하면서 사진도 찍고.

목이 마르다. 길거리에서 생과일을 갈아서 주스를 팔고 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흰색 과일주스를 시켰다. 벽에 붙어 있는 이름을 대충 말했다. 주스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와 맛있다. 시원하다. 양도 엄청나다. 값도 싸다. 그런데 이 과일 이름이 무엇인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다. 인터넷을 한참 뒤지니 비슷한 게 나온다. 히까마(Jicama)라고 하는 우리의 무처럼 생긴 채소인데, 연하고 수분이 많아서 과일이나 간식처럼 먹는다고 한다. 이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 느낌은 우리의 마나 야콘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됐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른 과일은 비슷한 게 없다.

▲ 연하고 수분이 많아 과일이나 간식처럼 먹는 우리의 무를 닮은 멕시코의 채소 히까마. 우리가 먹은 과일주스가 이걸로 만든 것이었을까? [사진-임영태]

헤매는 도중 헌책방 거리를 만났다.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 이성형 선생이 쓴 책에서 이 책방 거리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그는 이곳에서 라틴아메리카 관련 서적을 몇 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페인어에는 까막눈인 우리에게는 그냥 진흙일 뿐이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으려고 해도 그런 눈이 있어야지. 새삼 언어의 중요성을 느낀다.

아침에 갔던 소깔로 광장 주변도 다시 걸었다. 국영 전당포와 금은방 거리, 라띠노 아메리카나 타워도 보인다. 대성당도 보이고, 국립 궁전도 보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기도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설명하는 사람이 보인다. 거리에서 멀쩡하게 생긴 젊은 남녀가 군복 같은 제복을 입고 모자를 벗어 돈을 달라고 한다. 국립 궁전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벽화가 있다고 한다. 여행 가이드 책에는 무료입장이 가능하다고 돼 있지만, 막상 그 근처에서 경비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들어갈 수 없단다. 왜일까? 제대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포기한다. 그런데 나중에 인터넷을 뒤지니 모든 여행자들이 이곳을 관람했다. 너무 억울하다. 다음에 간다면(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곳을 구경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 소깔로 광장 주변의 주요 건물들. 국영 전당포와 금은방 거리.  [사진-임영태]

▲ 소깔로 광장 주변의 주요 건물 대성당. [사진-임영태]

▲ 대통령집무실과 몇몇 행정부가 있는 국립궁전. 원래 아스텍 황제 목테수마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코르테스가 자신을 위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사진-임영태]

▲ 소깔로 광장 주변의 공공기관.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 앞에서 본 라틴아메리카 타워. 멕시코는 지리적으로는 북미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라틴권에 속한다. 라틴이라는 말에서 멕시코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다. [사진-임영태]

예술 궁전에서 만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 예술궁전 전경.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 2, 3층에는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임영태]

우리가 한참 동안 헤매다 찾은 곳은 중앙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예술 궁전. 1904년에 이탈리아 건축가 아다모 보아리(Adamo Boari)가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1934년 멕시코 건축가 페데리코 마리스칼(Federico Mariscal)에 의해 완성된 멕시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웅장하고 멋지다.

건물 1층에는 오페라와 발레, 폴끄로레 공연이 열리는 극장이 있고, 3층에는 국립 건축학 박물관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진짜 이유는 2, 3층 복도에 있는 벽화를 보기 위함이다. 우리 역시 그런 목적으로 찾았다.

디에고 리베라와 데이비드 알파로 시퀘이로스, 루삐노 타마요, 호르게 곤잘레스 카마레나 등의 벽화가 복도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은 디에고 리베라의 <인간, 우주의 지배자>(El Hombre, Contraldor del Universo)라는 작품. 이 그림은 원래 뉴욕의 록펠러센터에 걸릴 예정이었으나 그림 속에 레닌과 트로츠키, 마르크스 등 공산주의자들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이의 수정을 요구하자 리베라가 이를 거부해 멕시코에서 가져와 예술 궁전에 걸게 되었다. 그림은 색감, 구도, 전체적인 내용 등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디에고의 그림에 비해 보다 강렬한 색감과 느낌을 전하는 혁명예술, 전위예술의 범주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이런 그림들에서는 멕시코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넘어서 러시아 혁명의 계급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보이는 선전예술보다는 훨씬 더 예술적 성취도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성만큼 뛰어난 예술성과 작품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도 들었다. 그림에 대한 기초소양이 부족한 나로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할 능력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예술궁전에 있던 그림이 주는 강력함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예술궁전은 입장료도 1인당 43페소나 해서 비싼 편이었다. 카메라 촬영비도 30페소나 따로 받았다. 그 비용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한 사람만 돈을 내고 찍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핸드폰으로 찍었다. 거기 있는 안내원들은 알면서 모르면서 적당히 넘어가기도 하고 가끔은 제지도 했다.

예술궁전 1층에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근대 인물 사진전. 멕시코식 ‘옛날 옛적에’라고나 할까? 기념품점에서 프리다 칼로 초상이 들어 있는 작은 기념품을 하나 샀다. 기념품점에는 프리다 칼로 일색이었다. 멕시코 어디를 가나 프리다 칼로가 가장 많이 보였다. 멕시코에서는 프리다 칼로,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 미국에서는 마릴린 먼로가 가장 대중적인 인기 인물이었다. 세 나라의 특징과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보여주는 문화적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그림 <인간, 우주의 지배자>. [사진-임영태]

▲ 예술 궁전에 있는 또 다른 벽화. 데이비드 알파이 시퀘이로스의 그림이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색감이 강렬하고 인체가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강렬한 투쟁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사진-임영태]

▲ 데이비드 알파이 시퀘이로스의 그림.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여러 그림들은 멕시코 혁명을 넘어선 러시아 혁명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임영태]

그런데 프리다 칼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는 마초의 나라인가? 아니면 여성성의 나라인가? 그림으로만 평가한다면 프리다 칼로는 분명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비교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의 여정, 열정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리베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날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500페소짜리 멕시코 화폐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그녀는 모든 문화 상품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옷, 장식품, 기념품 등등 없는 곳이 없다. 그녀는 일반 멕시코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인물이다.

반면, 멕시코 혁명에서 민중세력을 대표하는 판초 비야나 사파타는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혁명의 나라 멕시코에서 지금 민중의 삶과 생활은 어떤 모습인가? 멕시코는 왜 이렇게 되었나?

▲ 500페소 멕시코 화폐의 두 주인공, 리베라와 칼로. [사진-임영태]

우리는 시내를 걷는 동안 길거리 곳곳에서 중무장한 경찰들과 만났다. 마치 서울 거리의 전경들과 그들의 차량을 보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처음 우리는 중무장한 경찰들이 마약 범죄자들과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멕시코에서는 마약범죄조직이 치안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뒤 멕시코 최고의 마약왕 구스만이 감옥을 탈옥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지경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탈출했다. 쇼생크 탈출은 저리가라다.

그러나 멕시코시티 곳곳의 삼엄한 경비, 경찰의 중무장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 멕시코시티 시내 곳곳을 지키고 있는 중무장한 경찰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일까? [사진-임영태]

▲ 마치 서울 거리의 전경 차량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임영태]

여행 첫날의 마무리

예술 궁전 관람 뒤에도 우리는 멕시코시티 구시가지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걸어 다니며 구경했다. 모두들 지칠 무렵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적당한 식당을 발견했다. 멕시코식의 양식을 파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음식은 풍성하고 맛도 좋았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생선(참치) 스테이크, 소고기 스테이크 등을 시켰다. 소고기는 육질이 아주 부드러웠다. 반면, 참치는 의외로 한국산 소고기처럼 육질이 질겼다. 참치도 부위에 따라 육질이 다양하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맥주도 한잔씩 마셨다.

▲ 여행 첫날 멕시코시티의 한 식당에서 먹은 저녁 식사. 이날 우리들의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사진-임영태]

저녁 식사 후 돌아오면서 맥주(하이네켄)를 몇 병 샀다. 숙소 옥상에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술을 마시면서 환담하기에 좋았다. 우리들은 옥상에서 별을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연령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의 대학이야기,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그림 이야기, 멕시코 혁명 이야기, 멕시코인의 삶과 빈부격차, 멕시코의 자연과 지리에 이르기까지 밤늦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멕시코의 밤하늘, 별, 바람 그리고 비행기의 불빛 이야기까지.

이제 겨우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공식적으로는 1박도 안 했음), 여러 날이 지난 듯한 느낌이다. 겨우 출발인데 이미 긴 여정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여행이란 게 그런 것인가?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인데 이미 많은 경험을 하고 본 기분이다.

멕시코시티 구시가 지역은 밤 7시만 되면 모든 사람이 철수하고 인적이 드물다. 가로등만 켜져 있고 차량이 간간이 오간다. 젊은이들이 가끔씩 지나는 게 보일 뿐 거리가 한적하다. 그나마 가까운 라틴 뮤직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무료함을 달래준다. 젊은이들이 춤과 음악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저 멀리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불빛이 간간히 보이고, 하늘에는 별빛이 보인다. 별빛은 아주 밝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보다는 훨씬 잘 보인다. 하지만 달은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도 좋다.

▲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옥상. 멕시코시티에 있는 사흘 동안 우리는 밤마다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감했다. [사진-임영태]

와이파이가 됐다 안됐다 한다. 거기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린다. 오후 11시 30분쯤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의 행적을 간략히 메모한다. 지금은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지만 곧 이 기억들은 희미해질 것이다. 메모를 보면 기억을 살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중의 그 기억은 지금의 이 생각, 기억과 다를 수도 있다. 인간의 기억이란 너무 형편없다.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저서로는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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