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테오티우아칸 유적의 중심 달의 피라미드.  [사진-임영태]

아침 식사는 한국식으로

6월 11일 새벽 3시, 잠이 깼다. 볼 일을 본 뒤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본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낮에는 강렬한 햇볕과 매연 때문에 공기가 좋지 않다. 하지만 아침 기온은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하다. 밤에도 마찬가지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날씨는 그랬다. 아마도 이곳이 고원지대여서 그런 모양이다. 불현듯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적으로 살고 싶다는 착각도 해본다.

새벽 텅 빈 거리를 순찰차가 지나간다. 숙소 바로 앞 사거리를 2인조 순찰 경찰이 지나간다. 그러나 주변을 지나는 행인은 아무도 없다. 나는 한동안 바깥 모습을 그렇게 감상했다.
새벽 4시, 갑자기 숙소 앞에 거리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베란다로 나가 밖을 보았다. 청소차가 움직이고 있다. 역시, 어디서나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 청소부구나, 하고 생각 한다.

4시 30분, 침대에 누웠다. 잠깐 잠이 들었다. 6시,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교수님이 한국에서 챙겨온 누룽지를 끓였다. 반찬은 고추장과 통조림김치, 그리고 어제 저녁 식당에서 먹다 남아 싸온 음식까지 놓였다. 이걸로 부족한 사람은 과일과 빵도 곁들여 먹는다.

▲ 아침 식사. [사진-임영태]

9시 우버택시를 타고 메트로(지하철) 3호선 종점역으로 이동했다. 교수님이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연결된 홍 목사님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그 분은 멕시코시티의 한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50대 후반의 교수였는데, 우리는 오늘 그의 안내로 테오티우아칸의 유적을 관람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17세에 부모님을 따라 파라구아이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헨티나에서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40년 이상 중남미에서 생활했고 쿠바에서도 7년간이나 목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며 현지 생활과 문화에도 익숙했다.

택시기사, 우리를 긴장시키다

우리가 약속한 시간은 10시. 하지만 우리는 10시 30분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건 순전히 택시 기사의 잘못 때문이었다. 멕시코는 치안이 나빠 대낮에도 아무 택시나 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안전하다고 알려진 우버택시를 탔지만 그렇게 됐다. 집 앞에 도착한 택시의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자 그는 잘 안다는 태도로 자신 있게 출발했다.

▲ 멕시코시티 아침 출근길의 택시들. 우리는 일반택시보다 안전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우버택시를 탔다. 우리가 탄 차량은 폭스바겐인데, 보기와는 달리 새 차는 아니었다. [사진-임영태]

택시는 대로를 한 30분간 신나게 달렸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좌회전, 우회전, 유턴을 반복하더니 좁은 이면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빈민가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낡은 집들이 즐비한 동네의 이면 도로로 접어들었던 것.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고, 동네 담벼락 곳곳에 낙서가 돼 있었다. 아마도 얼마간의 음담이나 욕설, 또는 똥개, 얼레리 꼴레리 따위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집들은 허름하고 낡았다. 사람들은 아직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산동네도 보였다. 거의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네를 지나자 공장지대가 나타났다. 1980년대 구로공단이나 부평공단, 주안공단과 주변 주택가를 지나가는 그런 느낌이다. 그 때 택시가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산동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상했다. 내 감각으로는 고가도로를 타야 맞을 것 같았다. 택시는 다시 포장도 안 된 길로 나아갔다. 이거 뭐지? 이 산동네를 가로질러 넘어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접어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 택시가 멈춰 섰다. 순간 차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혹시 이거?

▲ 우리를 태운 택시는 포장도 안 된 도로를 따라 산동네 빈민가로 향했다. 그러다가 멈춰 서서 목적지를 재차 확인한 뒤 다시 방향을 되돌렸다. [사진-임영태]

그때 택시 기사가 스마트폰으로 지도 검색을 다시 한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목적지를 다시 묻는다. 왜 목적지가 안 나오지? 왜 이런 길로 접어들었지? 이런 얼굴 표정이다. 우리가 어찌 아나 이 사람아! 우리들은 다시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스페인어와 영어, 몸짓과 손짓이 오고갔다. 우리들은 목적지를 다시 친절하게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전한다. 메트로 3호선 종점 버스터미널이라고? 아, 오케이. 기사가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한다.

택시가 다시 출발한다. 그는 아까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고 있다. 기사는 명백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실수일까? 아니면 요금을 올리기 위한 농간질인가? 우리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항의 한마디도 안 했다. 기사도 변명을 안 하고 침묵한다. 뭐라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나 기계 잘못이라는 둥 변명 비슷한 거라도 할 만한데 전혀 안 한다. 택시를 여러 번 탔지만 이 기사처럼 말이 없었던 사람은 없었다. 젊은 친구로 얼굴이 멀쩡해 보여서 농간을 부릴 위인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사람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말도 안 통하고 의사소통도 안 되는 마당에 얼굴만 보고서 어찌 그 사람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시외버스를 타고 테오티우아칸으로

어찌됐던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메트로 3호선 종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한참을 헤맸다. 지하철이라고 해서 우리 지하철을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건 지하철인지 변두리 낡은 지하창고 기둥인지 구분이 안 간다. 주위가 너무 지저분하고 간판도 전혀 없다. 6번 출구라고 약속을 했는데, 6번인지 7번인지 1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밖에서는 아무런 표시가 없으니 말이다. 이미 지하철을 타본 경험이 있는 원장님 말씀으로는 안에 들어가야 출구 번호를 알 수 있단다. 그 때문에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도 우리는 한 10분간은 헤맸다. 그야말로 도로를 무단행단하며 이리 저리 길을 건너 다녔다. 그렇게 해서 겨우 홍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 3번 메트로 종점에 있는 버스터미널 부근. 버스터미널이라기보다는 노선버스들이 서는 버스정류장 정도. 보통 여행객들이 인터넷에 올린 5번 메트로 종점에 있는 그 버스터미널과는 영 딴판이다. 타는 버스도 차이가 크다. [사진-임영태]

우리는 너무 반가워 탄성을 질렀다. 혹시 못 만날까봐 걱정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 목사님은 동행이 있었다. 영국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였다. 박사논문 자료수집과 취재를 위해 온두라스에 거주 중인 후배라고 한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덩치가 매우 큰 거구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온두라스에서는 대낮에도 혼자 다니기 힘들 정도로 치안이 험악하다고 말한다. 멕시코는 거기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이거 참, 중남미 치안이 엉망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기분이 그랬다. 우리는 멕시코시티 치안이 나빠 저녁에는 남자 두 사람이 짝을 이뤄서도 밖에 나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해서 외출을 삼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늦은 이유를 설명했더니 홍 목사님 왈, ‘우보택시의 경우, 서비스가 나쁘다고 항의하면 택시비를 돌려받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기사는 택시비를 한 푼도 못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 약한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 기사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애써 선의를 가져본다. 한편, 그 덕분에 우리는 멕시코시티 빈민가도 구경하고 잘 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됐지 뭐, 하는 기분이다.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터미널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깨끗한 버스터미널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버스 정류장 수준이다. 터미널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외로 나가는 버스들이 서면 알아서 타는 곳이었다. 우리가 본 여행서에는 메트로 5호선 종점에서 유적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설명이 돼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3호선 종점. 5호선 종점과는 여러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버스도 별로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1980년대 도시 근교로 나갈 때 탔던 시외버스 수준이었다. 그래도 버스에 오르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기분이 좋았다.

버스는 멕시코시티 외곽도로를 따라서 한동안 달렸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대도시 주변의 거대한 주거지와 산업단지들이 나타났다. 산업공단도 보고, 빈민가 산동네도 보았다. 도시 외곽으로 빠지면서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곳곳에 블록으로 짓다만 집들이 방치된 채 있었다. 외곽 변두리를 지나자 시골마을과 자연풍경이 나타났다. 꾸불꾸불 시골길을 달리다가 다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탔다. 그리고 다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지형이 달라졌다. 저 멀리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아마도 유적지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런 길을 한 20분쯤 달렸을까? 테오티우아칸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멕시코 시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북북동쪽에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승용차를 탔다면 훨씬 시간이 적게 걸렸을 것이다.

▲ 외곽도로를 타고 가면서 만난 멕시코시티 산동네 모습. [사진-임영태]

▲ 멕시코시티에서 테오티우아칸 가는 길(구글맵; http://thruguide.tistory.com/211). [사진-임영태]

주차장은 넓은 대지 바닥에 붉은 색은 작은 자갈돌들이 깔려 있을 뿐, 그냥 자연 그대로다. 유적지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입장료는 1인당 59페소(1페소는 대략 80원 정도, 한국돈 4800원 가량으로 싼 편). 내국인 학생과 교사, 교수 등 교육관련 기관 종사자는 모두 무료다. 홍 목사님은 교수 신분증을 제시하고 무료로 입장했다.

▲ 주차장 모습. [사진-임영태]

이 거대한 축조물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유적지에 들어서니 처음 포장 안 된 자갈길이 나오고 곧 기념품 판매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바로 유적지가 시작된다.

유적지는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 왕궁 터, 수많은 제단 등이 죽은자(死者)의 거리(전쟁 등으로 잡은 포로나 제단에 바칠 제물을 끌고 달의 피라미드까지 끌고 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피라미드의 규모에 놀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압도당한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대한 피라미드(이곳에 있는 태양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피라미드라고 함)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경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걸 만들 때 그들에게는 도르레도, 철기구나 장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만들었을까? 기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이걸 만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렇게 거대한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이 어떻게 한 순간 몰락하고 말았을까? 그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테오티우아칸 도시를 발굴하고 새롭게 건설한 아즈텍 문명도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점이다.

테오티우아칸 유적의 규모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유적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비록 정교함과 예술성에서는 많은 부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문양이나 재규어, 뱀 등의 형상이나 그림이 정교하거나 예술적 품격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런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축기술과 수학적 능력 등이 상당했을 것이다. 유적지 안내팻말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돼 있어서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역이 넓고 동선이 길어서 꼼꼼히 읽을 시간이 없다. 더욱이 땡볕이 내리쬐고 있어서 장시간 관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 유적지 평면도. [사진-임영태]

▲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지도(http://thruguide.tistory.com211) [사진-임영태]

▲ 테오티우아칸의 유적들. 유적지의 규모나 유적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고대 유물, 유적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진-임영태]

▲ 유적지 개요도. [사진-임영태]

▲ 유적지 설명 팻말. 스페인어와 영어로 돼 있다. [사진-임영태]

전성기 중남미에서 가장 큰 고대 도시 형성

테오티우아칸은 ‘신들이 탄생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멕시코의 고대 도시다. 기원 전 200년경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기원 후 100년경 피라미드와 같은 큰 유적들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700경에는 도시가 파괴되었고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왜?​ 아직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테오티우아칸은 남북(실제로는 북북동향)으로 길게 난 ‘죽은자의 거리’를 축으로 발달된 고대 도시다. 이 죽은자의 거리는 길이가 약 2.5킬로미터에 이르고 폭이 약 40~90미터네 이르는 큰 도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대칭적으로 도시가 발달되었던 것.

기원전 4세기경 5,000여명이 거주했으며, 번성기 때는 인구가 10만~20만 명 수준으로 당시 중남미 지역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고 한다. 테오티우아칸은 이런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 형식의 주거지로 몇 개 층을 지닌 주택을 지었다고 한다.​

700년경 도시가 기능을 상실한 후 1,300년경 아즈텍인들이 이 도시를 발견하기 전까지 폐허로 남아있었다. 멕시코 북쪽지역에서 내려온 아즈텍인들이 이 도시를 발견하여 다시 번성시켰으며 스페인에 점령당하기까지 약 200여년 동안 번창했다. 그러나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세웠던 아즈텍인들도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이곳도 파멸되고 말았다.
이 도시에는 커다란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죽은자의 거리 북쪽 끝에 달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달의 피라미드 앞에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이 주변에 소규모 피라미드가 몇 개 있으며 그 옆에 왕궁터가 있다. 한편 도로의 중간 부분 오른쪽 위치에 이 도시에서 제일 큰 구축물인 태양의 피라미드가 위치하고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가 제일 크지만 중심은 달의 피라미드이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면의 길이가 각각 225미터, 220미터, 높이는 65미터에 이른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의 피라미드라고 한다. 달의 피라미드는 각각의 면이 130미터, 156미터이고 높이는 43미터이다.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이곳이 중심이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금지된 이후에는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유적지 발굴을 통해 이 피라미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62년 멕시코 정부에 의해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 이곳은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멕시코시티 동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이곳의 해발고도는 약 2,300미터로 2,240미터의 멕시코시티와 비슷하다 한다.

▲ 태양의 피라미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피라미드. 이곳 정상에 서면 주위의 모든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진-임영태]

▲ 가까이서 본 태양의 피라미드. [사진-임영태]

▲ 달의 피라미드까지 곧게 뻗은 죽은자의 거리. 이 대로를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걸었을까? [사진-임영태]

▲ 달의 피라미드.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크기는 작지만 이 도시의 중심은 여기였다. [사진-임영태]

▲ 다른 각도에서 본 달의 피라미드. [사진-임영태]

▲ 태양 피라미드 앞의 기념품노점상들. [사진-임영태]

▲ 기념품 노점상 물건들. [사진-임영태]

▲ 단체로 여행온 사람들이 한 유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임영태]

▲ 테오티우아칸의 수호신 뱀의 형상. [사진-임영태]

▲ 유적지 들어가는 입구의 선인장이 눈에 띤다. [사진-임영태]

▲ 유적지에서 만난 불개미떼. 독성이 세다고 한다. [사진-임영태]

▲ 이런 유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사진-임영태]

▲ 테오티우아칸의 또다른 수호신 퓨마 형상. 그곳에서는 퓨마 울음소리를 내는 악기도 팔고 있었다.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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