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태(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

<디워>논쟁에서 주목하고자 한 점과 <화려한 휴가>논쟁을 촉발시키려는 이유

<통일뉴스> 조성주 기획위원이 필자의 지난 글 "20대여, <디워> 대신 <화려한 휴가>로 논쟁하자"에 대한 <통일뉴스>에 기고한 반론 “20대여, <화려한 휴가>를 논쟁하자구요?”를 읽고 답변한다.

조 위원은 필자의 지난 글에서 <디워>논쟁의 여러 측면 중 중점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듯하다. 필자는 조 위원이 언급했던 심형래 개인에 대한 고난을 이겨낸 과정이 젊은 네티즌들에게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지적이나 또는 영화자체의 내러티브 등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디워>논쟁에서 촉발된 -설사 심형래 개인이 의도적으로 애국주의를 이용했는지 상관없이- 인터넷 상에서 벌어진 <디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갖고 있는 평론가들에 대한 애국감성코드와 결합된 인신공격, 과잉집단반응이라는 황우석 사태에서 빚어졌던 유사한 마녀사냥의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고자 했다.

젊은 세대 네티즌들의 댓글수준을 통한 의견표출도 어쨌거나 공론장에서의 참여에너지로서 주목한다면 이를 인신공격의 일회성 배설로 끝낼 게 아니라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하고, 사회적 함의마저 풍부한 <화려한 휴가>를 통해서 20대의 보수화에 대한 각성의 단초를 마련코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글에서 강조했듯이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문제의식과 각성효과가 멎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 위원이 강조했던 이랜드 사태나 KTX 투쟁은 물론 한미FTA 등의 당대의 사회현안까지 관심을 촉발할 수 있는 토대 다지기를 의도했다.

특히나 “이들의 5.18에 대한 개개인들의 기억, 역사(history)들의 겹침과 공명의 순간순간에 5.18 기억의 원형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이러한 공명은 최소한 광주항쟁을 '사태'로 시민을 '폭도'로 기사화하고서는 지금까지도 한마디의 반성 없이 유력한 보수신문의 고위직을 유지하고 있는 몰역사적인 '그들'에 대한 대항마로서의 연대를 마련 할 수 있다.”는 언급을 다시 읽는다면, 이러한 역사인식은 <화려한 휴가>를 현재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과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과 이를 토대로 현재의 파국을 헤쳐 나가자는 의미에서 내 의도는 충분히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분명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화려한 휴가>를 통한 논쟁촉발의 의도를 조 위원은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과거의 기억을 다루고 있을 뿐 바로 지금 20대의 삶과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그렇다면 그 20대에게 80년 5월 광주는 무엇인가? 그리고 <화려한 휴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그들이 <화려한 휴가>를 논쟁해야 하는가?”는 식의 회의주의적 반응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이러한 회의적 질문에 이어 조 위원은 386정치인들이 <화려한 휴가>를 젊은 세대와 함께 본 정치적 의도의 정치성을 지적하고, 왜 96년 연대항쟁은 영화화 하지 않는 가하고 뜬금없이 묻는다.

필자의 지난 글은 젊은 세대를 향해있다. 뒤에서 상술하지만 386정치인들이 영화를 갖고서 그 어떤 정치적 쇼를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물론 이들의 정치적 의도는 문제적이지만- 앞으로 사회 주축이 될 젊은 세대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 논의에서 갑자기 왜 386을 끌어다 쓰는가?

그리고 지난 글에서 나는 영화매체가 젊은 세대의 코드에 부합되는 면이 많은 만큼 제도교육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영화매체가 보완할 수 있다고 긍정한 바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5.18에 대한 일부 역사성의 탈각과 오락성의 부각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96년 연대항쟁을 다룬 가칭 <화려한 진압>은 왜 만들지 못하느냐는 조 위원의 반문은 이러한 영화산업의 특성과 필자의 영화를 통한 각성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한 마치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 당혹스럽다.

20대의 보수화? 근본적인 문제는 20대의 무지화!

다음으로 조 위원은 우석훈의 근간 <88만원 세대>의 논지를 바탕으로 필자의 20대 보수화에 대한 판단의 엉성함을 지적한다. 바로 88만원 세대의 보수화를 비판하기에는 그들은 “연간 천만원에 달하는 대학등록금과 이를 대기 위해 3-4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서도 청년실업 100만의 시대에 힘들어하는 그런 상황”이라는 거다.

진보/보수로 가를 것 없이 5.18을 8.15로 헷갈려 하는 20대의 실상은 보수언론, 대학, 기업을 통한 親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담론 유포에 쩔어있는 그야말로 백지에다 보수의 무늬만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사실 ‘보수’라고 단정 짓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러니까 20대의 보수화가 문제가 아니라 -연동된 것이지만- 20대의 무지화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이는 조 위원이 말하듯이 “지금의 20대가 보수화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20대의 모습은 진보/보수 등의 개념으로 단순히 양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에는 필자도 동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뒤이어 “거기에는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만들어온 천민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한 지독한 사대주의가 주는 영향과 또한 그것을 극복해오면서 형성된 건강한 시민의식, 젊은 세대로서의 도전성, 신선함 등이 뒤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의 20대가 깊고 깊은 절망 속에서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는 조 위원의 지적은 20대의 근본적 무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 위원의 주장이 그들의 각성과 행동촉구를 기각시키는 보호막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

군부독재시절 보다 어렵다는 88만원 세대지만..

소장경제학자 홍기빈은 사석에서 현재의 진보를 일군 것은 강단이 아니라 강단 밖의 가난하면서도 치열하게 먹고 살아가기 바쁜 생활인들과 강단 밖 지식인들이라고 일간한 적이 있다. 결국 사회과학논문의 기층 민중으로 기술되는 수동적 객체가 아닌 바로 그 자신이 능동적 주체가 되어서 진보를 일구어야 한다는 의미일 테다. 이 말은 88만원 세대에게도 유효하다.

20대는 본인들이 88만원 세대로 공고하게 만들어줄 FTA의 국내경제구조변환이 씨스테믹 리스크(systemic risk)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20대들에게 닥친 당장의 생존조건이 힘들다며 조 위원처럼 보호막을 쳐서는 결코 이들은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현재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해당사자인 88만원 세대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한미FTA에 대해서 냉랭하며, 순응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나무와 숲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인식에 무식하다는 말만큼이나 적확한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 2월 한 신문지면에서 필자는 외교통상부 통상본부 관료와 한미 FTA의 중요한 쟁점사항 중 하나였던 투자자-국가소송제를 두고서 수차례 논쟁을 펼쳤었다. 그 논쟁은 통상법이나 경제학은 일자무식인 고작 1982년생 26살 풋내기가 -그러니까 “연간 천만원에 달하는 대학등록금과 이를 대기 위해 3-4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서도 청년실업 100만의 시대에 힘들어하는 그런 상황”이라고 지적한 조 위원이 말한 바로 그 88만원 세대가- ‘알바’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쓴 허술한 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정부의 FTA체결논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확인한 사례였다.

그런데 당시 논쟁을 하면서 통상법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도 아닌 학부생이 -자세한 통계치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전국에 몇 만 명은 되는 인원 중에- 단 50명 정도만 가담했더라면 젊은 세대에게 한미FTA와 투자자-국가소송제의 실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했었다. 논쟁 이후 일개 88만원 세대 젊은이에게 투자자-국가소송제 관련 원고청탁과 라디오 인터뷰까지 섭외가 들어온 것을 상기하면 ‘고작’ 50명이 주도하는 의제설정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먹고 사는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 스스로가 매듭을 풀고, 난국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지난해 한미FTA를 비판하는 중요한 서적으로 우석훈과 홍기빈의 저작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이 막대한 연구자금을 지원받는 국책연구소와 통상관료들의 논리를 공박했던 점은 결국 사회진보는 강단 밖에서 고단하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 이러한 기획이 직접적인 신자유주의 광풍을 맞을 88만원 세대의 몫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러니까 88만원 세대는 정작 이러한 저작을 쓰지는 못 할망정 이들 소장학자들의 책을 읽고서 한미 FTA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키우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냐는 말이다. 점입가경으로 시장주의자들이 펴낸 리더십, 생존법 등의 서적들이 이들 88만원 세대의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를 차지하는 한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무식하다’는 인신공격 발언의 진의

홍세화가 지적한 ‘한국의 대학생은 무식하다’는 단순히 파토스가 넘치는 단정이 아니다. 전국의 대학교를 강연하면서 20대의 보수화와 무지화에 대한 피부에 닿는 상황판단에 따른 욕먹을 것을 각오한 발언이다. 그런데 ‘윗세대’ 홍세화에 대해서 <디워>논쟁에서 나타난 열정적인 인터넷 세대인 20대로부터 어떠한 반론도 못 들었다. 아니 좀 더 비꼬틀면 홍세화라는 이름 세 글자를 알고 있는 20대는 얼마나 될지부터가 의문이다.

지난 글과 이번 글까지 무식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 둔감한 20대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극하여 20대 내부로 부터의 논쟁촉발을 노린 전략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래가지고서는 민주화 이후 90년대 <창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것을 멋으로 알던 당시의 얼치기 대학생 수준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20대 내부의 내파(內波)가 없는 이상, 이번 조성주 기획위원과 같은 ‘윗세대’의 논쟁관여는 제한적인 활성화에 그칠 뿐이다. 이 글 또한 또 다른 20대의 보수화를 지적하는 그저 그런 탁상공론에 합류하든가.

재차 20대에게 묻는다. 88만원 세대를 싸잡아 무식하다고 일반화하려는 필자와 같은 20대도 있다. 또 다른 20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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