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

= 통한의 비원이 당파성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

민족통일의욕의 사회심리학적 기초

어느 때인가 분단된 서독의 삼대신문의 하나인 「디⋅벨트」지의 기자가 판문점을 시찰하고 난 뒤 휴전선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이라고 지적한 것은 양단된 독일의 경계선에 대한 간접적인 항의였기도 하겠지마는 우리들로서 생각해 보면 해 볼수록 우리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이 경계선이다. 

역사적으로 힘에 의해서 한 민족이나 국토를 부자연스럽게 갈라 놓은 일은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으로는 민주주의라는 인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가 없을 때의 일이었으리라고 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마는 2차대전 후 세계의 정치수준이 민주주의 「레벨」에서 행해진다는 이때 우리들 자신이 양단을 원한다면 별문제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분단선이 엄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까지는 국제적 수준에서는 실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사회학박사 황성모

 

먼저 갖어야 할 공동체적 감정

자력해결의 길 모색

외세의존은 민족간의 간격을 넓힌다

 

따라서 여기서 지나친 「국제정세에 의한 한국문제의 결정」이라는 태도에서 볼 때에는 「옳은 일이기는 하나 현실이 그리 되지는 않는다」라고 하며 어디까지나 자발적, 자연적 감정의 표시인 「통일의욕」을 세계정세를 모르는 천진난만한 것으로 가볍게 취급하려는 태도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당파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들의 의욕은 언제나 당파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은폐되지 않으면 왜곡 혹은 이용되기 마련이기에, 그 결과는 언제나 해결 한계를 넘는 복잡성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들은 무선입관과 소박감으로써 문제에 대하고자한다. 그리고 문제가 양단된 조국통일이 될 때에는 그것이 타율적으로 된 것인 만큼 더군다나 우리들로서는 본연적 태도로써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통일의욕이라는 것은 이익관계로 이루어진 정치적 입장 이전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인줄 안다. 

따라서 현실면에서 보면 사대주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통일문제에 있어서 일어나는 여러 논쟁은 우리들의 자연적 민족통합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될 것이고 또 이러한 논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바와 같이 국제수준에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시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을 우리들은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은 그 소청 「국제수준」과 관련을 가질 수 있는 여건 즉, 정부기구내에서의 책임 지위 혹은 정당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구태여 통일문제에 관해서 일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사는 말하자면 백성의 감정이요. 백성의 감정이기 때문에 솔직하고도 그만큼 근본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세에 의한 해결」에 문제의 초점을 돌리거나 「시기부적당설」을 들고 나옴으로써 오히려 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인 민족통합의욕의 기본형태를 애매하게 하며 그 결과로서는 구체적 단서 파악의 시기를 연장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현적 이유(정치적 이유)와 잠재적 욕구(민족적 감정) 사이에는 간격이 생길 것은 분명하다.

이 「간격」은 남이나 북이 외국의존의 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슬픈 일은 이와 같은 「자명한 것으로서의 간격」이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적 타율성 은 남북을 막론하고 서로가 이 간격을 의식적으로 조직적으로 확대시켜 가는데 그 기능이 있다. 그리고 만약에 남북의 정치적 조직체의 존재이유가 오로지 이러한 기능수행에만 있다면 사태는 거이 절망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들은 절망의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이 절망상태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계기는 이때에 있어서는 정치적 이해관계 이전의 상태에 발견되는 경우가 흔히 많다. 민족통일의 감정이 기본적으로는 공동체감을 기초로 해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문제는 원래의 공동체의 심리적 형태는 어떠한 요소에서 구성되어 나오는가를 보는데 있을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우리들은 「정치가」가 보는 바와는 다른 「원래의 심정」의 형태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적 통일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는 소인에게 뚜렷한 것이 아니지마는 우리들 백성에게는 이 말이 적어도 민족통일에 있어서 「원래의 심정」이 참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째 민족의 통일은 다양한 것이 혹은 상극적인 것이 단일체로서 행동하는 상태를 말하며, 둘째로는 이와 같은 행동에는 언제나 장애요소가 작용해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의 실제적 의미(통일)를 가져야 하고, 셋째로는 이 실제적 의미는 장애⋅공박⋅공격에서(주로 국제적 면에서의) 부터의 방?를 나타나게 되고, 넷째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적 감정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와같은 공동체감은 반드시 실용적 목적에 대한 것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이익연합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내적결합을 의미하며 동족을 서로 분열시켰던 하극에 다리를 놓는 조결의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심정의 과정없이 (정치적)이익을 위한 동포애적  표현-「비참한 북한동포해방을 위한 북진통일」이라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남한동포를 위한 전기⋅쌀의 운송제안」등 - 만으로써는 통합의 심리적 기반은 생길 수가 없다. 

더군다나 정부수반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곧 반국가적 행위로서 취급될 때 이때는 개인 즉 국가(때로는 민족)이라는 방정식이 성립되지마는 새 정부가 서게 됨으로써 국가였던 개인이 반민주분자가 되면 이때는 정부 자체가 가지는 민족적 기반이라는 것이 의심 당하게 되고 따라서 정부의 이익조직체성이 민심의 심리구조에 자리 잡게 된다.

민족통일을 위한 심리적 단결의 위기는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민심에게는 정부는 이제는 하나의 커다란 이익기업체로서 인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와 정당이나 협동체같은 것은 일정한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이요. 두개의 정당이 서로 결합할 때는 반드시 공통한 이익이라는 것이 전제가 된다. 이때의 결합은 따라서 순전히 즉 물성에 입각한다. 상극의 양정부가 근거를 해야 할 (민족)공동체적 결합이란 각기 정부가 가지는 즉 물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개의 대립은 뚜렷하다. 즉 이익적 결합과 공동체적 결합의 대립은 물과 기름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현명한 민족들은 -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당파적 이익보다 민족공동체의 이익이 궁극적으로는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한 민족들은 - 이 두 개의 결합을 하나에로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구라파의 제국가의 통합은 순전한 합목적 의식에 의한 통합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 상호간에 존재하는 편파성을 서로 지양할 수 있고, 따라서 구라파의 자살을 의미하는 전쟁을 방지할 수 있고, 반면에 구라파 제 민족은 서로가 사회적 간격을 없애게 함으로 말미암아 「국민적」 차원을 넘어서 성립할 수 있는 공통적인 공동사회적 성격구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두가지의 결합은 각기 그 본질에 따라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라파 제 국민의 시도는 그들이 근세사에 있어서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이것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에로 결정되었다.)를 겪어서 일어나는 결과 즉 이익결합만이 인간결합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게끔 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놀라운 사실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특히 높은 차원에로의 삶)을 위한 탄력성에는 경의가 간다.

우리 민족은 민족심리의 구조로서의 합리주의를 겪지 못한 채 일시로 개인과 사회관계의 합리적 조정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이해라는 숙제를 받은 채 아직 해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양단으로 말미암아 서로 생각이 다른 해답 보조자가 각기의 입장에서 해답을 돕고 있다. 그 속에서 해답이 나온다 해도 그것은 실력에서 나온 해답이 아님은 뻔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해답은 가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남은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들은 이익적 결합의 상태에 돌아간다기 보다 선진민족들이 겪어 온 - 과정에 따라 - 우선 공동체적 결합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이익적 결합의 진의를 알게 될 것이며 그 후에 민주주의 문제의 자력해결의 길이 생기지 않을까. 민족통일의 사회심리학적 기초는 바로 이 출발점의 포착에 있을 것이다.


(필자=서울대학 강사)

논단/ 한국의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

논단/ 한국의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 [민족일보 이미지]
논단/ 한국의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 [민족일보 이미지]

論壇/ 韓國의 休戰線은  世界에서 가장 無意味한 境界線

= 統韓의 悲願이 黨派性에 依해 隱蔽되거나 歪曲되어서는 안된다 =

民族統一意慾의 社會心理學的 基礎

 

어느 때인가 分斷된 西獨의 三大新聞의 하나인 「디⋅벨트」紙의 記者가 板門店을 視察하고 난 뒤 休戰線을 가리켜 「世界에서 가장 無意味한 境界線」이라고 指摘한 것은 兩斷된 獨逸의 境界線에 대한 間接的인 抗議였기도 하겠지마는 우리들로서 生覺해 보면 해 볼수록 우리들의 意思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이 境界線이다. 

歷史的으로 힘에 依해서 한 民族이나 國土를 不自然스럽게 갈라 놓은 일은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우리 生覺으로는 民主主義라는 人民의 意思를 反映하는 政治가 없을 때의 일이었으리라고 할 때 그것을 理解할 수 있지마는 二次大戰 後 世界의 政治水準이 民主主義 「레벨」에서 行해진다는 이때 우리들 自身이 兩斷을 願한다면 別問題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에도 如前히 分斷線이 儼存한다는 것은 民主主義라는 것이 아직까지는 國際的 水準에서는 實行되고 있지 않다는 證據가 아닐까?

社會學博士 黃性模

 

먼저 갖어야 할 共同體的 感情

自力解決의 길 摸索

外勢依存은 民族間의 間隔을 넓힌다

 

따라서 여기서 지나친 「國際情勢에 依한 韓國問題의 決定」이라는 態度에서 볼 때에는 「옳은 일이기는 하나 現實이 그리 되지는 않는다」라고 하며 어디까지나 自發的, 自然的 感情의 表示인 「統一意慾」을 世界情勢를 모르는 天眞爛漫한 것으로 가볍게 取扱하려는 態度는 問題를 더 複雜하게 만드는 結果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政治的 黨派性을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들의 意慾은 언제나 黨派性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依하여 은폐되지 않으면 歪曲 或은 利用되기 마련이기에, 그 結果는 언제나 解決限界를 넘는 複雜性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들은 無先入觀과 素朴感으로써 問題에 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問題가 兩斷된 祖國統一이될 때에는 그것이 他律的으로 된 것인 만큼 더군다나 우리들로서는 本然的 態度로써 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統一意慾이라는 것은 利益關係로 이루어진 政治的 立場以前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歷史的으로 事大主義가 强한 나라인줄 안다. 

따라서 現實面에서 보면 事大主義가 强하면 强할수록 統一問題에 있어서 일어나는 여러 論爭은 우리들의 自然的 民族統合의 感情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될 것이고 또 이러한 論爭은 우리 民族의 運命을 決定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바와 같이 國際水準에 있어서 「民主主義」라는 것이 實施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을 우리들은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은 그 所請 「國際水準」과 關聯을 가질 수 있는 與件 卽, 政府機構內에서의 責任 地位 或은 政黨의 背景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여기서 구태여 統一問題에 관해서 一言하는 것은 우리의 意思는 말하자면 百姓의 感情이요. 百姓의 感情이기 때문에 率直하고도 그만큼 根本的인 點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國際情勢에 依한 解決」에 問題의 焦點을 돌리거나 「時期不適當設」을 들고 나옴으로써 오히려 意識的으로 「自然發生的」인 民族統合意慾의 基本形態를 애매하게 하며 그 結果로서는 具體的 端緖 把握의 時機를 延長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顯現的 理由(政治的 理由)와 潛在的 欲求(民族的 感情) 사이에는 間隔이 生길 것은 分明하다.

이 「間隔」은 南이나 北이 外國依存의 度가 强하면 强할수록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은 自明한 일이다. 슬픈 일은 이와 같은 「自明한 것으로서의 間隔」이 自明한 것으로 認識되게 끔 되어 있다는 事實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政治的 他律性 은 南北을 莫論하고 서로가 이 間隔을 意識的으로 組織的으로 擴大시켜가는데 그 機能이 있다. 그리고 萬若에 南北의 政治的 組織體의 存在理由가 오로지 이러한 機能遂行에만 있다면 事態는 거이 絶望的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들은 絶望의 狀態를 언제까지 維持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이 絶望狀態에 새로운 變化를 주는 契機는 이때에 있어서는 政治的 利害關係 以前의 狀態에 發見되는 경우가 흔히 많다. 民族統一의 感情이 基本的으로는 共同體感을 基礎로 해서 나오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問題는 元來의 共同體의 心理的 形態는 어떠한 要素에서 構成되어 나오는가를 보는데 있을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우리들은 「政治家」가 보는 바와는 다른 「元來의 心情」의 形態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民主主義的 統一이라는 말이 政治的으로는 어떠한 意味를 가지는가는 小人에게 뚜렸한 것이 아니지마는 우리들 百姓에게는 이 말이 적어도 民族統一에 있어서 「元來의 心情」이 參照가 된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첫째 民族의 統一은 多樣한 것이 或은 相剋的인 것이 單一體로서 行動하는 狀態를 말하며, 둘째로는 이와 같은 行動에는 언제나 障碍要素가 作用해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의 實際的 意味(統一)를 가져야 하고, 셋째로는 이 實際的 意味는 障碍⋅攻駁⋅攻擊에서(主로 國際的 面에서의) 부터의 防?를 나타나게 되고, 넷째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共同體的 感情을 體得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와 같은 共同體感은 반드시 實用的 目的에 對한 것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利益聯合을 爲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內的結合을 意味하며 同族을 서로 分裂시켰던 하隙에 다리를 놓는 組結의 狀態를 말한다.

이와 같은 心情의 過程없이 (政治的)利益을 爲한 同胞愛的  表現-「悲慘한 北韓同胞解放을 爲한 北進統一」이라든지 大韓民國 政府의 立場을 困難하게 하기 爲한 「南韓同胞를 爲한 電氣⋅쌀의 運送提案」 등 - 만으로써는 統合의 心理的 基盤은 生길 수가 없다.

더군다나 政府首班이나 政府를 批判하는 것이 곧 反國家的 行爲로서 取扱될 때 이때는 個人 卽 國家(때로는 民族)이라는 方程式이 成立되지마는 새 政府가 서게 됨으로써 國家였던 個人이 反民主分子가 되면 이때는 政府 自體가 가지는 民族的 基盤이라는 것이 疑心 當하게되고 따라서 政府의 利益組織體性이 民心의 心理構造에 자리 잡게 된다.

民族統一을 爲한 心理的 團結의 危機는 바로 이 瞬間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民心에게는 政府는 이제는 하나의 커다란 利益企業體로서 認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會社와 政黨이나 協同體같은 것은 一定한 利益을 위해서 結合하는 것이요. 두個의 政黨이 서로 結合할 때는 반드시 共通한 利益이라는 것이 前提가 된다. 이때의 結合은 따라서 純全히 卽 物性에 立脚한다. 

相克의 兩政府가 根據를 해야 할 (民族)共同體的 結合이란 各其 政府가 가지는 卽 物性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個의 對立은 뚜렷하다. 卽 利益的 結合과 共同體的 結合의 對立은 물과 기름과의 關係를 나타낸다.

그러나 賢明한 民族들은 -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黨派的 利益보다 民族共同體의 利益이 窮極的으로는 더 크다는 것을 認識한 民族들은 - 이 두 개의 結合을 하나에로 結合시켰다. 例를 들면 歐羅巴의 諸國家의 統合은 純全한 合目的 意識에 依한 統合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國家相互間에 存在하는 偏派性을 서로 止揚할 수 있고, 따라서 歐羅巴의 自殺을 意味하는 戰爭을 防止할 수 있고, 反面에 歐羅巴 諸民族은 서로가 社會的 間隔을 없애게 함으로 말미암아 「國民的」 次元을 넘어서 成立할 수 있는 共通的인 共同社會的 性格構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이었다. 勿論 이 두가지의 結合은 各其 그 本質에 따라 同一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歐羅巴 諸國民의 試圖는 그들이 近世史에 있어서의 理性主義, 合理主義 (이것은 根本的으로 個人主義에로 結晶되었다.)를 겪어서 일어나는 結果 卽 利益結合만이 人間結合의 元型이라고 生覺하게끔된 사람들에 依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生覺해 볼 때, 놀라운 事實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特히 높은 次元에로의 삶)을 爲한 彈力性에는 敬意가 간다.

우리 民族은 民族心理의 構造로서의 合理主義를 겪지 못한 채 一時로 個人과 社會 關係의 合理的 調整을 內容으로 하는 民主主義의 理解라는 宿題를 받은 채 아직 解答을 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兩斷으로 말미암아 서로 生覺이 다른 解答 補助者가 各其의 立場에서 解答을 돕고 있다.

그 속에서 解答이 나온다 해도 그것은 實力에서 나온 解答이 아님은 뻔하다. 民主主義에 對한 解答은 可望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남은 問題는 무엇이냐? 우리들은 利益的 結合의 狀態에 돌아간다기 보다 先進民族들이 겪어 온 - 過程에 따라 - 우선 共同體的 結合에서부터 始作해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利益的 結合의 眞意를 알게 될 것이며 그 後에 民主主義 問題의 自力解決의 길이 生기지 않을까. 民族統一의 社會心理學的 基礎는 바로 이 出發點의 포착에 있을 것이다.

 

(筆者=서울大學 講師)

[민족일보] 1961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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