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민족의 영원한 지표였다.

... 위대한 유지는 겨레 가슴속에 길이 간직...

“차라리 38선을 베고 죽으리라”

▲ 편집자주=지금 우리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 해 있다. 정국의 불안과 사회의 혼란⋅불안정은 거의 극에 달해 있다. 통일만이 살길이라는 젊은 청년학생들의 울부짖음이 겨레의 귓전을 울린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잃어버린 거성... 위대한 영도력과 애국심을 가지고 구국광정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작고한 지도자들...을 애타게 추모하는 념 간절하다. 혹은 흉탄에 혹은 불의의 병액으로 민족의 거성을 잃어버린 우리는 지금 그들을 추념하는 가운데 새로운 민족의 앞길을 찾아야 한다. 본지는 이에 「잃어버린 거성을 추모한다」는 란을 통해 그 모습과 족적을 되새겨 보려한다. 집필자는 생전에 거성을 모셨거나 가장 가깝게 일했던 분임을 적기해 둔다.

「만일 삼팔선을 해결하지 못하는 날 나는 차라리 삼팔선을 베고 죽으리라!」

 1948년 4월 19일 오후 2시 선생이 경교장을 떠나면서 남기신 말씀이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경교장을 에워싸고 선생의 북상을 만류하였지만, 선생은 이를 굳이 뿌리치고 칠십 노구를 이끌고 삼팔선 너머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남북협상의 길을 떠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삼팔선이 없어지지 않는 한 국가의 독립도 민족의 번영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길을 떠나는 것은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99마리의 양떼를 버리고 가는 심정이다」라고 솔직히 고백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이번 걸음이야말로 역사적 거보였던 것이다. 누가 이를 부인할 수 있으랴.

그러나 자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남한의 독재자와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선생의 차거를 마치 역적도모나 한 듯이 가혹히 비난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선생의 가슴에 총까지 터뜨렸던 것이 아닌가.

북한 공산독재자들은 선생의 불타는 애국정열을 기화로 자가선전에 역이용하였던 것이다. 평양에서 열리었던 남북협상은 그들이 급조된 정당 사회단체를 추조남발하여 수많은 적색거수기를 내세워 「옳소! 옳소!」 박수소리와 함께 일방에 의하여 일사천리격으로 강행되었던 것이다.

아- 선생의 기대와는 너무도 어긋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남북통일에 대한 신념은 초지일관 굽히지 않았다.

선생은 민족상잔의 6⋅25때 같은 유혈의 참극이 올 것을 예견하시고 이것을 방지코자 군정수립을 반대하고 민족자립평화통일을 민족 앞에 외치고 국제연합에 호소하였다가 1949년 6월 26일 0시 30분 이승만 졸도 안두희의 사발의 총성과 더불어 슬프다. 거성이 낙타된 것이다. 그때 성공의 축배를 드는 악당이 있는가 하면 온 겨레의 통곡소리 지축을 흔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약관 18세 때부터 오로지 국가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유번영을 위하여 몸과 뜻을 바쳤던 것이다. 검은 머리로 내 땅이 아닌 해외에 나가서 일생을 보내고 흰털을 머리에 얹고 해방된 내 땅 김포공항에 내릴 적에 「쌍수용종루불건」이 그 모습 그대로 였다. 어찌 뜻하였으리요. 36년 동안 왜적이 짓밟다 내버린 조국강토에는 국경 아닌 국경이 가로막혔고 그립고 사랑하던 동족은 적이 아닌 적이 되어 선생의 가슴에 총탄의 선물을 올렸던 것이다.

아 - 이 겨레의 슬픔이여! 이 나라의 불행이여! 선생은 가셨다. 선생은 영원히 가셨다. 그러나 선생의 위대한 유지, 이 나라 이 민족 가슴속에 깊이깊이 못질해 놓은 것이다.

지금 국제정세는 바야흐로 조국의 통일을 재촉하고 삼천만 대중은 선생의 유지 그대로 통일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북진통일론자 이미 그 자취를 감추었고 북한의 남침자불원한 장래에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앞에 무자비한 심판을 받으리라. 조국의 통일은 오로지 선생의 노선으로...


김학규

잃어버린 거성을 추모한다 (1)

잃어버린 거성을 추모한다 (1) [민족일보 이미지]
잃어버린 거성을 추모한다 (1) [민족일보 이미지]

잃어버린 巨星을 追慕한다 (1)

 

白凡 金九

 

民族의 永遠한 指標였다.

... 偉大한 遺志는 겨레 가슴속에 길이 간직...

“차라리 38線을 베고 죽으리라”

▲ 編輯者註=지금 우리나라는 累卵의 危機에 處 해 있다. 政局의 不安과 社會의 混亂⋅不安定은 거의 極에 達해 있다. 統一만이 살길이라는 젊은 靑年學生들의 울부짖음이 겨레의 귓전을 울린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잃어버린 巨星... 偉大한 領導力과 愛國心을 가지고 救國匡正의 大業을 이룩할 수 있었던 作故한 指導者들...을 애타게 追慕하는 念 懇切하다. 或은 兇彈에 或은 不意의 病액으로 民族의 巨星을 잃어버린 우리는 지금 그들을 追念하는 가운데 새로운 民族의 앞길을 찾아야 한다. 本紙는 이에 「잃어버린 巨星을 追慕한다」는 欄을 通해 그 모습과 足跡을 되새겨 보려한다. 執筆者는 生前에 巨星을 모셨거나 가장 가깝게 일했던 분임을 摘記해 둔다.

「萬一 三八線을 解決하지 못하는 날 나는 차라리 三八線을 베고 죽으리라!」

一九四八年 四月 十九日 午後 二時 先生이 京橋莊을 떠나면서 남기신 말씀이었다. 數많은 靑年들이 京橋莊을 에워싸고 先生의 北上을 挽留하였지만, 先生은 이를 굳이 뿌리치고 七十老軀를 이끌고 三八線 너머 北쪽 하늘을 바라보며 南北協商의 길을 떠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三八線이 없어지지 않는 한 國家의 獨立도 民族의 繁榮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只今 이 길을 떠나는 것은 마치 牧者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羊을 찾기 爲하여 九十九마리의 羊떼를 버리고 가는 心情이다」라고 率直이 告白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이번 걸음이야말로 歷史的 巨步였던 것이다. 누가 이를 否認할 수 있으랴. 

그러나 自家政權慾에 눈이 어두운 南韓의 獨裁者와 親日民族反逆者들은 先生의 此擧를 마치 逆賊圖謀나 한 듯이 苛酷히 非難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先生의 가슴에 銃까지 터뜨렸던 것이 아닌가.

北韓共産獨裁者들은 先生의 불타는 愛國情熱을 奇貨로 自家宣傳에 逆利用하였던 것이다. 平壤에서 열리었던 南北協商은 그들이 急造된 政黨 社會團體를 追造濫發하여 數많은 赤色擧手機를 내세워 「옳소! 옳소!」 拍手소리와 함께 一方에 依하여 一瀉千里格으로 强行되었던 것이다.

아- 先生의 期待와는 너무도 어긋난 것이었다. 그러나 先生의 南北統一에 對한 信念은 初志一貫 굽히지 않았다.

先生은 民族相殘의 六⋅二五때 같은 流血의 慘劇이 올 것을 豫見하시고 이것을 防止코자 軍政樹立을 反對하고 民族自立平和統一을 民族앞에 외치고 國際聯合에 呼訴하였다가 一九四九年 六月 二十六日 零時 三十分 李承晩 卒徒 安斗熙의 四發의 銃聲과 더불어 슬프다. 巨星이 落他된 것이다. 그때 成功의 祝盃를 드는 惡黨이 있는가 하면 온겨레의 痛哭소리 地軸을 흔들었던 것이다. 

先生은 若冠 十八歲때부터 오로지 國家의 自主獨立과 民族의 自由繁榮을 爲하여 몸과 뜻을 바쳤던 것이다. 검은 머리로 내 땅이 아닌 海外에 나가서 一生을 보내고 흰털을 머리에 얹고 解放된 내 땅 金浦空港에 내릴 적에 「雙手龍鐘淚不乾」이 그 모습 그대로 였다. 어찌 뜻하였으리요. 三十六年동안 倭敵이 짓밟다 내버린 祖國疆土에는 國境아닌 國境이 가로막혔고 그립고 사랑하던 同族은 敵이 아닌 敵이 되어 先生의 가슴에 銃彈의 膳物을 올렸던 것이다.

아 - 이 겨레의 슬픔이여! 이 나라의 不幸이여! 先生은 가셨다. 先生은 永遠히 가셨다. 그러나 先生의 偉大한 遺志, 이 나라 이 民族 가슴속에 깊이깊이 못질해 놓은 것이다. 

只今 國際情勢는 바야흐로 祖國의 統一을 재촉하고 三千萬 大衆은 先生의 遺志 그대로 統一의 行進을 하고 있는 것이다.

南韓의 北進統一論者 이미 그 자취를 감추었고 北韓의 南侵者不遠한 將來에 平和를 사랑하는 民族앞에 無慈悲한 審判을 받으리라. 祖國의 統一은 오로지 先生의 路線으로...
 

金學奎

[민족일보] 1961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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