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남북서신교환

=답장은 없으련만=

 

시우 김병욱 형에게

                  김수영

김형! 형과 헤어진지도 인제 십년이 넘소이다.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형 역시 많이 변하였을 것 같소. 어떻게 변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시를 쓰고 있을까? 시를 쓰고 있다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마야코브스키」같은 전투적인 작품을 쓰고 있을까? 「파스테르나크」 같은 저항적인 것을 쓰고 있을까? 아주 전혀 시를 안 쓰고 있을까?(사진=필자)


“시정신 접근시키세”

우린 다시 태어나 약속 작열

 
또 형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을 읽어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아직도 딱지가 덜떨어졌다고 할까? 말하자면 「부르조아」적이라고 꾸짖을까? 아무래도 칭찬은 들을 것 같지 않소.

그래도 지난 십년동안 나 자신이 생각해도 용하다고 생각할 이만큼 나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나 자신만은 지켜왔고, 지금 역시 그렇소. 그러니까 작품의 호악은 고사하고 우선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왔다는 것만으로써 나는 형의 후한 점수를 받을 것 같은데 어떠할지?

여기서는 그동안 이북의 작품이라곤 한편도 구경할 수 없는 형편이니, 나는 그쪽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할 자격이 없소.

다만 소련의 작품은(「파스테르나크」의 것을 제외하고) 그동안 외국잡지를 통해서 소설을 두 편 가량 읽은 것이 있고 「폴란드」 시인의 시를 4~5편, 중공 시인의 시를 한편 읽은 것이 있는데(요만한 지식을 가지고 그쪽 사정을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밖에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쓴 논평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때) 소련에서는 중공이나 이북에 비해서 비판적인 작품을 용납할 수 있는 「컴퍼스」가 그 전보다 좀 넓어진 것 같은 게 사실인 것 같소. 무엇보다도 「에렌버어그」가 「레닌」상을 받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 같소.

우리는 이북에도 하루바삐 그만한 여유가 생기기를 정말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소. 형은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에 대한 여유가 다소나마 생겨야지 통일의 기회도 그만큼 열려질 것 같은 감이 드오.

형! 나는 형이 지금 얼마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나의 머릿속에 있는 형은 누구보다도 시를 잘 알고 있는 형이요.

나는 아직까지도 「시를 안다는 것」보다도 더 큰 재산을 모르오.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요.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라면 「통일」 같은 것도 아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요.

사실 4⋅19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요.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주독립」 그것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 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니다...

「사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 이남은 「사월」을 계기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하고 있소.

이북은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작열」의 사실만을 알아 가지고는 부족하오. 반드시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은 안 되오.

나는 이북의 정치에도 장점이 몇몇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통일을 할 수는 없소. 비록 통일이 된다할지라도 그 후 여전히 불편한 점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요.

「사월」이후에 나는 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소. 늘 반성하고 있는 일이지만 한층 더 심각하게 반성해 보았소. 「통일」이 되어도 시같은 것이 필요할까하는 문제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소. 우리는 좀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도 통일이 되어야겠소. 정신상의 자주독립을 이룩한 후에 시가 어떤 시가 될는지 나는 확실히는 예측할 수 없소.

그러나 아마 그것은 세계적인 시가 될 것이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시가 될 것이요.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힘차고, 좀 더 신경질적이 아니고, 좀 더 인생의 중추에 가깝고, 좀 더 생의 희열에 가득찬 시다운 시가 될 것이요. 그리고 시인아닌 시인이 훨씬 줄어지고 시인다운 시인이 더 많이 나올 것이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통일 이후의 것을 예측하기보다는 통일까지의 일이 더 다급하오. 우리는 우선 피차간의 격의와 공포감 같은 것을 없애고 이북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관념과 이남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관념을 접근시켜 봅시다.

그래서 형들이 십여년 동안을 두고 생각하고 실천해 온 그것과 6.25전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각자의 여과작용을 했는지 어느 정도의 변동이 생겼는지 이야기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소.

그러나 형! 내가 형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자체부터가 벌써 어쩌면 현실에 뒤떨어진 증거인지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의 젊은 학생들은 바로 시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고 그들이 실천하는 시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보다도 암만해도 먼저 앞서 갈 것 같소.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처럼 뒤따라가는 영광을 느껴본 일도 또 없을 것이요.

나는 「큐바」를 부러워하지 않소. 비록 사월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도 「큐바」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큐바」에는 「카스트로」가 한사람 있지만 이남에는 이천명에 가까운 더 젊고 강력한 「카스트로」가 있기 때문이요.

그들은 어느 시기에 가서는 이북이 십시간 노동을 할 때 반드시 십사시간의 노동을 하자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요. 그들이 바로 작열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 김병욱씨 약력

경북 대구출신으로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수료 해방 후 국학대학, 연대 등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다. 일본시지 「회계」 동인, 귀국 후는 박인환⋅김경린⋅임호권⋅김수영 등과 함께 「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 6.25 당시 월북했다.

(사진) 왼편부터 임호권, 박인환, 동부인 이정숙, 김병욱의 제씨, 이 사진은 6.25 직전 박씨 결혼식(덕수궁)에서 찍은 것인데, 이중 임, 김 양씨는 월북하고 박씨는 고인이 되었다.

38선이 걷힐 날에 ①

38선이 걷힐 날에 ① [민족일보 이미지]
38선이 걷힐 날에 ① [민족일보 이미지]

38線이 걷힐 날에 ①


紙上 南北書信交換

=答狀은 없으련만=

 

詩友 金秉旭 兄에게

                  金洙暎

金兄! 兄과 헤어진지도 인제 십년이 넘소이다. 십년이면 山川도 변한다는데 형 역시 많이 변하였을 것 같소. 어떻게 변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詩를 쓰고 있을까? 詩를 쓰고 있다면 어떤 詩를 쓰고 있을까? 「마야코브스키」같은 전투적인 작품을 쓰고 있을까? 「파스테르나크」 같은 저항적인 것을 쓰고 있을까? 아주 전혀 詩를 안 쓰고 있을까?(寫眞=筆者)

“詩精神 接近시키세”

우린 다시 태어나 약속 灼熱

 
또 兄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을 읽어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아직도 딱지가 덜떨어졌다고 할까? 말하자면 「부르조아」적이라고 꾸짖을까? 아무래도 칭찬은 들을 것 같지 않소.

그래도 지난 十년동안 나 자신이 생각해도 용하다고 생각할 이만큼 나는 現實에 굴복하지 않고 나 자신만은 지켜왔고, 지금 역시 그렇소. 그러니까 作品의 好惡은 고사하고 우선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왔다는 것만으로써 나는 兄의 후한 점수를 받을 것 같은데 어떠할지?

여기서는 그동안 以北의 作品이라곤 한편도 구경할 수 없는 형편이니, 나는 그쪽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할 자격이 없소.

다만 소련의 作品은(「파스테르나크」의 것을 제외하고) 그동안 外國雜誌를 통해서 소설을 두편 가량 읽은 것이 있고 「폴란드」 詩人의 詩를 四, 五편, 中共 詩人의 詩를 한편 읽은 것이 있는데(요만한 知識을 가지고 그쪽 사정을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밖에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쓴 論評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때) 소련에서는 中共이나 以北에 비해서 비판적인 작품을 용납할 수 있는 「컴퍼스」가 그 전보다 좀 넓어진 것 같은 게 사실인 것 같소. 무엇보다도 「에렌버어그」가 「레닌」賞을 받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 같소.

우리는 以北에도 하루바삐 그만한 餘裕가 생기기를 정말 진심으로 祈願하고 있소. 兄은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에 대한 여유가 다소나마 생겨야지 통일의 機會도 그만큼 열려질 것 같은 감이 드오.

兄! 나는 兄이 지금 얼마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나의 머릿속에 있는 兄은 누구보다도 詩를 잘 알고 있는 兄이요.

나는 아직까지도 「詩를 안다는 것」보다도 더 큰 財産을 모르오. 詩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요. 그렇지 않소?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라면 「통일」 같은 것도 아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요.

사실 四⋅一九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偉大性을 모를 것이요.

그때는 정말 「南」도 「北」도 없고 「美國」도 「蘇聯」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自主獨立」 그것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 몸에는 티끌만한 虛僞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主張」입디다. 「自由」입니다...

「四月」의 財産은 이러한 것이었소. 以南은 「四月」을 契機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灼熱하고 있소.

以北은 이 「灼熱」을 느껴야 하오. 「灼熱」의 事實만을 알아 가지고는 부족하오. 반드시 이 「灼熱」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은 안 되오.

나는 以北의 政治에도 長點이 몇몇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통일을 할 수는 없소. 비록 통일이 된다할지라도 그 후 여전히 불편한 점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요.

「四月」以後에 나는 詩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소. 늘 반성하고 있는 일이지만 한층 더 심각하게 반성해 보았소. 「통일」이 되어도 詩같은 것이 필요할까하는 문제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소. 우리는 좀 더 좋은 詩를쓰기 위해서도 통일이 되어야겠소. 精神上의 自主獨立을 이룩한 후에 詩가 어떤 詩가 될는지 나는 확실히는 豫測할 수 없소.

그러나 아마 그것은 世界的인 詩가 될 것이고, 世界平和와 人類의 福祉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詩가 될 것이요.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힘차고, 좀 더 神經質的이 아니고, 좀 더 人生의 中樞에 가깝고, 좀 더 生의 喜悅에 가득찬 詩다운 詩가 될 것이요. 그리고 詩人아닌 詩人이 훨씬 줄어지고 詩人다운 詩人이 더 많이 나올 것이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통일 以後의 것을 예측하기보다는 統一까지의 일이 더 다급하오. 우리는 우선 피차간의 隔意와 恐怖感같은 것을 없애고 以北이 生覺하는 詩에 대한 觀念과 以南이 생각하는 詩에 대한 觀念을 접근시켜 봅시다.

그래서 兄들이 十여년 동안을 두고 생각하고 실천해 온 그것과 六⋅二五전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각자의 濾過作用을 했는지 어느 정도의 변동이 생겼는지 이야기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소.

그러나 兄! 내가 兄에게 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자체부터가 벌써 어쩌면 現實에 뒤떨어진 증거인지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의 젊은 학생들은 바로 詩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요하고 그들이 실천하는 詩가 우리가 논의하는 詩보다도 암만해도 먼저 앞서 갈 것 같소.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처럼 뒤따라가는 榮光을 느껴본 일도 또 없을 것이요.

나는 「큐바」를 부러워하지 않소. 비록 四월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도 「큐바」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큐바」에는 「카스트로」가 한사람 있지만 以南에는 二千名에 가까운 더 젊고 强力한 「카스트로」가 있기 때문이요.

그들은 어느 時期에 가서는 以北이 十시간 노동을 할 때 반드시 十四시간의 노동을 하자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요. 그들이 바로 灼熱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 金秉旭씨 略歷

慶北 大邱출신으로 日本大學 社會學科를 修了 해방 후 國學大學, 延大 등에서 敎鞭을 잡은 바 있다. 日本詩誌 「回季」 동인, 歸國後는 朴寅煥⋅金璟麟⋅林虎權⋅金洙暎 等과 함께 「모더니즘」 詩운동을 展開, 六⋅二五 당시 越北했다.

(사진) 왼편부터 林虎權, 朴寅煥, 同夫人 李丁淑, 金秉旭의 諸씨, 이 사진은 六⋅二五 直前 朴씨 結婚式(德壽宮)에서 찍은 것인데, 이중 林, 金 兩씨는 越北하고 朴씨는 故人이 되었다.

[민족일보] 1961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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