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12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민족일보] 사옥 터’(서울 중구 세종대로21길 49)입니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에 창간한 신문입니다. 

하지만 [민족일보]는 5·16 군사정변 직후인 그 해 5월 19일자 지령 9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 당하고 맙니다. 

구속된 발행인 조용수(1930-1961)는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21일 31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민족일보] 사옥 터’를 12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필자주

‘[민족일보] 사옥 터’(서울 중구 세종대로21길 49)에는 1987년부터 오양수산빌딩이 들어서 있다. 오양수산빌딩 입구 바닥에는 이곳이 혁신계 일간지 [민족일보]의 사옥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서울시의 ‘민족일보 터’ 동판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동판에는 ‘혁신계 일간지 민족일보, 창간 석 달 만에 여기서 폐간되고 발행인 조용수는 처형되다’라는 문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민족일보사옥터동판(합본사진) [사진-김학규 제공]
민족일보사옥터동판(합본사진) [사진-김학규 제공]

[민족일보], “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으로 다가오는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에 창간한 혁신계 신문이었다. 

이때 [민족일보]가 내건 사시(社是)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이었다.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겠다는 모토에서 확인되듯이 [민족일보]의 기반과 지향은 기존 보수 언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실제로 [민족일보]는 창간사에서 4·19혁명의 성과를 반영하여 “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은 하나」라는 의식과 그 하나인 민족의 번영된 장래를 저해하는 여하한 세력과도 과감하게 싸울 것”이라고면서 평화통일을 제창하는 등 기성 언론과 대비되는 혁신적 논조를 견지했다. 

[민족일보] 1961.2.13 창간호 창간사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는 언론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갓 탄생한 신문이었음에도 발행 부수가 45,000부에 달했고, 그 중 40,000부가 가판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높아 [경향신문], [동아일보]에 필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일보]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3일 후인 5월 19일 지령 92호를 끝으로 발간이 정지되었고, 5월 27일에는 강제 폐간 당하고 만다. 

창간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5·16 군사정변 주도 세력으로서는 혁신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족일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민족일보]가 민주당의 장면정권 아래에서는 무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장면정권 역시 혁신계의 중립화통일론을 비롯한 평화통일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일보]는 장면정권에게도 눈엣가시였다. 

더군다나 [민족일보]는 장면정부의 데모규제법(「집회 및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과 반공법(「반공 임시 특별법안」) 제정 기도에 맞선 2대 악법 반대운동에도 앞장섰고, 결국 좌절시켰다.

장면정부가 적극 추진하던 ‘한미경제협정’에 대해서는 제2의 을사조약이라며 “장 정권은 미국에의 굴욕적인 태도를 수정하지 못하면 물러나라”는 사설까지 내면서 강하게 반대하는 등 장면정부와도 대립각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창간 준비 단계에서부터 민주당 소속 김준섭 의원이 국회에서 자금출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민족일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던 일, 인쇄 용역 대행을 맡고 있던 서울신문사에 압력을 가하여 서울신문사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도록 만들어 3일간 신문 발행을 못하도록 한 일도 바로 4·19혁명 정신을 외면하는 장면정부의 한계와 문제점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그는 누구인가?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사진-김학규 제공]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사진-김학규 제공]

그렇다면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남 진양(현 진주시) 출신의 조용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태어나 줄곧 국내에 있었는데,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에 편입한 후 1960년에 귀국할 때까지 10년 간 일본에서 재일동포로 산 인물이었다. 

피난 수도 부산의 정치판을 보면서 신물이 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일본으로 건너간 배경 역시 독특하다.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을 인솔하고 왔던 민단의 정동화 감찰위원장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용수는 일본에서 1953년부터 민단에서 활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1959년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진보당 조봉암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당시 대대적으로 진행된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용수가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였다. 사실 조용수는 일본에서도 고국의 현실을 바꿔보고자 한 노력이 잇따라 실패하자 재일동포와 결혼하여 일본에 터를 잡고 눌러 앉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고국의 4·19혁명 소식에 다시 희망을 찾으면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귀국한 조용수는 7·29총선 당시 사회대중당의 공천을 받아 경북 청송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고향인 진양에는 작은아버지 조경규가 현역 국회의원으로 버티고 있던 탓에 문중이 많이 살고 있는 경북 청송을 지역구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때 내건 조용수의 공약은 조용수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완전히 확립하기 위하여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모든 법률을 개정 흑은 폐기할 것’, ‘이승만 정권과 공모하여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철저히 적발하여 몰수할 것’, ‘김구, 여운형, 조봉암 선생의 경우와 같은 정치적 살해사건의 흑막을 밝힐 것’ 등이 그의 주요 공약이었던 것이다. 

4·19혁명의 혁명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읽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민심은 심각하게 분열한 혁신계가 아니라 이승만 정권 시절 제1야당으로 있던 민주당에 몰렸고, 혁신계의 참패와 함께 조용수도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7·29총선에서 혁신계가 얻은 의석은 기껏 사회대중당의 민의원 4석과 참의원 1석, 한국사회당의 민의원 1석이 전부였다.

일본으로 돌아갔던 조용수가 그해 12월 1일 다시 귀국하게 된 것은 대중의 인식 전환을 이끌어낼 혁신계 언론 설립에 대한 구상을 마친 직후였다. 그는 이미 박용구, 정동필, 이희원 등 재일동포 재력가의 자금 지원 약속도 받아낸 상태였다.  

귀국한 조용수는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신문의 취지를 살려 [대중일보]로 신청서까지 제출했는데, 주홍모 서울대 교수 등이 ‘민족의 개혁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다는 신문이니 [민족일보]라는 이름이 타당하다’고 한 제안을 받아들여 제호도 변경했다. 

신문사의 조직을 세우면서 조용수가 혁신계를 대표하여 발행인으로 낙점된 데에는 그가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아 혁신계의 통합에 적합하다는 공감대와 더불어 재일동포 자금 등 자금 동원력이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민족일보사옥입구에서 찍은 창간기념사진.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이 조용수 사장이다. 좌우에 앉아 있는 인물은 독립운동가 출신 문일민(왼족)과 신숙이다. 서 있는 인물 중에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재호, 안재환도 있고, 감사 안신규와 초대 편집장 이종률도 보인다. [사진-김학규 제공]
민족일보사옥입구에서 찍은 창간기념사진.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이 조용수 사장이다. 좌우에 앉아 있는 인물은 독립운동가 출신 문일민(왼족)과 신숙이다. 서 있는 인물 중에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재호, 안재환도 있고, 감사 안신규와 초대 편집장 이종률도 보인다. [사진-김학규 제공]

조용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진짜 이유

- “민족일보 사건은 박정희가 자신의 레드컴플렉스 때문에 저지른 것”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가 5·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체포된 것은 마지막으로 발행된 지령 92호가 나오기 하루 전인 5월 18일이었다. 이때 체포된 [민족일보] 관련자는 조용수 만이 아니었다. 전 편집장 이종률, 당시 편집장 송지영, 감사 안신규 등 간부 9명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이었는데, 이 법은 그 해 6월 22일에야 제정되었기 때문에 반헌법적인 소급입법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민족일보]가 쿠데타 다음날인 5월 17일의 사설에서 “이 군사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않는다. (중략) 우리들은 거듭 내치와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서 더 많은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는 기대를 표명하고 그들에게 내민 손조차 쿠데타 세력은 냉정하게 뿌리쳤던 것이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은 발행인 조용수 만이 아니었다. 편집인 송지영과 감사 안신규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송지영과 안신규는 사형집행 직전 무기로 감형되었고,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31세의 조용수였다. 

이날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적용되어 처형된 인물 중에는 사회당 사건의 최백근도 있었는데, 조용수와 최백근은 3·15 부정선거 사건의 최인규, 4·19 발포 사건의 곽영주, 정치 깡패 임화수 등 ‘잡범’과 함께 처형당하는 수모까지 감내해야 했다.  

조용수에게 적용된 구체적인 혐의는 ‘일본에 있던 간첩 이영근의 지령을 받아 1억 환의 불법 도입 자금으로 안신규 등과 주동이 되어 국내 혁신계정당의 기관지인 민족일보사를 설립하여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수행에 적극 활약해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간첩이라는 이영근은 그 후 아무런 제재도 없이 한국에 여러 차례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1990년 사망 직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까지 추서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조용수가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 당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재판 내용과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는 걸 시사한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겠다고 선언했지만, 남로당 출신이라는 과거 이력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박정희의 사상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한미군 정보장교 출신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쉽게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고, 박정희는 김종필, 황용주 등 주변 인물의 제거마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의 레드 콤플렉스로 고통 받던 박정희는 스스로 ‘결백’을 드러내 미국을 안심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와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을 빨갱이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일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언론인에 대한 사형집행은 일제강점기에도 없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도 특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조용수의 묘 앞에서 진행된 민족일보 발행인 죠용수 59주기 추모제 모습(2015. 12. 20) [사진-김학규 제공]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조용수의 묘 앞에서 진행된 민족일보 발행인 죠용수 59주기 추모제 모습(2015. 12. 20) [사진-김학규 제공]

조용수,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민족일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1992년 대선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이 새로 들어선 김영삼 정부에 진정을 하였고, 김영삼 정부는 검찰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 열람을 허가한 것이다. 

하지만 1961년 당시 혁명재판소에서 판결한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유독 [민족일보] 사건 기록은 사라지고 없었다.

[민족일보] 사건은 1997년 대선에서도 이슈의 하나였다. 당시 유력한 대선후보의 한 명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1961년 당시 [민족일보] 사건의 재판관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이회창 후보의 ‘대쪽’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면서 대선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대선 이듬해인 1998년 12월 20일에는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조용수의 묘에서 처음으로 공식 추모행사도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서도 [민족일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DJP연합(김대중-김종필 연합)의 한 축이 [민족일보] 사건을 일으킨 5·16 군사정변 세력의 2인자였던 김종필이었던 탓이다.
  
이러한 이유로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규명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결성된 2006년의 1기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으로까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11월 28일 자신의 첫 진실규명 결정을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으로 선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후속조치를 권고했다.

“국가는 법률제정절차에서의 위법에 대하여,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재판과정에서의 형벌불소급 원칙 및 증거재판주의의 위배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조용수의 유족은 2007년에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고, 법원은 1년이 지난 2008년 1월 16일 조용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 유족은 마지막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고, 2009년 9월 11일 서울중앙지법은 조용수의 유족에게 모두 80여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무려 49년이 지나서야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자행된 [민족일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것은 물론 억울하게 사형당한 조용수의 명예회복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자행된 조용수 사법살인 62주년에 즈음하여 그의 꿈이 잠깐이나마 펼쳐졌던 [민족일보] 사옥 터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글을 맺는다.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 새삼 곱씹고 있는 요즘, 한국현대사에서 독재정권에 의한 언론탄압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민족일보] 강제폐간과 조용수 사장 처형 사건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에 들러 ‘민족일보 사옥 터’를 둘러보시거나, 구글(https://maps.app.goo.gl/MfGcNhUgNoq2g9qc7)과 카카오(https://kko.to/R-MoNaxjaj), 네이버(https://naver.me/FTqa7O5B)에 들어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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