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1)

 

단선단정 수립반대는 당연

같은 민족의 운명 앞에 두고 이야기

 

1947년 4월 21일 새벽 11로 편성된 승용 자동차의 일군이 북한 삼팔도 선상에 놓여 있는 현역을 향하여 짙은 안개를 뚫고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제 조국은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의 최후순간에 서서 민족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에 즈음하여 부흥된 자기들의 임무의 벅참과 감격 속에 차중의 사람들은 누구하나 말없이 묵묵히 앉아 외계에 벌어지는 조국풍토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고요한 연도의 정숙 가운데 받아들어 총으로 목례하는 순경들의 가슴속에도 민족의 공감이 깃들여 있는 듯하였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개성을 통과하고 삼팔접경 여현에 도착한 것이 정오 못미처 수많은 겨레들이 안타까운 감정을 가슴에 안고 우리들 일행에게 환호의 만세로써 환영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에 한방울 눈물이 괴는 것을 느꼈다.

한 국토안에 가로 놓인 국경아니 국경 삼팔선을 중심으로 오십「미터」의 수충지대를 건너 삼팔선 북쪽 여현역 근방 준비된 일민가에 1차 여장을 풀었다.

남북협상의 발전형태로 전조선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일 벌써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되고 있는 중이었다.

여현역 구내에 대기 중이던 특별열차는 우리 일행의 지참으로 남용역으로 후퇴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시 소련제 지프 속칭 발발이에 갈아타고 남천까지 도착, 남천내고 특별열차편으로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일생을 해외풍상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싸운 노혁명가 김규식 박사, 원세훈, 최동오, 김명준, 윤기섭, 신숙 씨 등 면면에 약간의 병인의 빛도 보였으나, ?중에 만감교차하는 감회조차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우리들은 각기 지정된 숙소로 분산되었다. 평양시 상수리 특별호텔, 이곳이 백범 김구선생, 김규식 박사, 벽초 홍명희, 조완구, 엄항섭, 필자 그리고 권태양 및 수행기자 조선통신 최명소 등에 배당된 숙소였다.

김박사와 필자를 제외하고는 벌써 3, 4일전에 미리 도착하였다. 회의장으로 가기 전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김두봉 김일성 등이 예방을 왔었다.

김두봉은 과거 해외로 나가기 전에 연희전문학생시대에 김박사의 제자였다고 한다. 김두봉은 사제지예와 혁명선배에 대한 예로써 양김씨를 대하였고, 김일성을 양김씨에게 소개인사시켰다. 육척거구의 김일성의 모습을 눈앞에 놓고 대하게 되니, 민족의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타고 난 사람들이 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행로를 달리하여 살아왔을망정 공동의 민족의 운명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의 동정에 주목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라졌다.

같은 민족의 조상의 피를 노나받은 자손들이라면 추구하는 민족의 목표는 같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소박한 민족감정에서 그들을 대해보려고 했고,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았던 것이다.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일주일 동안의 토의의제. 1,남북조선에 있어 양군동시철퇴문제 2,남조선 단독선거(5.10) 단독정부수립반대문제

1항의 「양군동시철퇴 문제」는 지금이나 그제나 일실한 공산측 원칙으로 내세우는 문제인 것이며, 2항의 「단선단정 수립반대문제」는 그 당시의 민족주의자의 명분으로서는 의당 옳은 것이었다. 단선단정수립으로 인하여 국토양단과 민족의 분열의 비극을 초래한다는 결과를 예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한사코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와 1947년 제2차 미⋅소공위의 진전 상태와 그 결열 되었던 제 요인을 분석 검토해 봄으로써 이 문제의 정당한 비판과 앞으로의 전망 및 대책도 수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2차전이 종결되고 우리에게 부여된 삼팔선 문제는 우리 민족이 원하지 않는 조건이 미⋅소 양대세력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인위적으로 설정되었다.

양대국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설정된 여건하에서 또 재통일을 위한 기도가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결정인 것이다. (계속)

 

(필자 : 통일사회당무위원장)

송남헌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1)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1) [민족일보 이미지]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1) [민족일보 이미지]

第1次南北協商을 回想하며 - 저 山너머 統一은 있을 것인가 (1)

 

單選單政 樹立反對는 當然

같은 民族의 運命앞에 두고 이야기

 

一九四七년 四월 二一일 새벽 열한壹로 編成된 乘用 自動車의 一群이 北韓 三八度線上에 놓여 있는 峴驛을 向하여 짙은 안개를 뚫고 北으로 北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제 祖國은 國土兩斷과 民族分裂의 最後瞬間에 서서 民族 스스로 解決할 수 있는 唯一한 機會에 즈음하여 賦興된 自己들의 任務의 벅참과 感激속에 車中의 사람들은 누구하나 말없이 黙黙히 앉아 外界에 벌어지는 祖國風土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고요한 沿道의 靜淑 가운데 받아들어 銃으로 目禮하는 巡警들의 가슴속에도 民族의 共感이 깃들여 있는 듯하였다.

臨津江 나루를 건너 開城을 通過하고 三八接境 礪峴에 倒着한 것이 正午 못미처 數많은 겨레들이 안타까운 感情을 가슴에 안고 우리들 一行에게 歡呼의 萬歲로써 歡迎할 때 自己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에 한방울 눈물이 괴는 것을 느꼈다.

한 國土안에 가로 놓인 國境아니 國境 三八線을 中心으로 五○「미터」의 綏衝地帶를 건너 三八線 北쪽 礪峴驛 近方 準備된 一民家에 一次旅裝을 풀었다.

南北協商의 發展形態로 全朝鮮政黨社會團體 連席會議는 一九四八年 四月 十九日 벌써 平壤 牡丹峰 劇場에서 開催되고 있는 中이었다.

礪峴驛 構內에 待期中이던 特別列車는 우리 一行의 遲參으로 南用驛으로 後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시 蘇聯製 지프 俗稱 발발이에 갈아타고 南川까지 倒着, 南川내고 特別列車便으로 平壤으로 出發하였다.

一生을 海外風箱에서 오직 祖國의 獨立과 民族의 自由를 爲하여 싸운 老革命家 金奎植 博士, 元世勳, 崔東旿, 金明俊, 尹琦燮, 申肅씨등 面面에 若干의 病因의 빛도 보였으나, ?中에 萬感交叉하는 感懷조차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平壤에 倒着한 우리들은 各其 指定된 宿所로 分散되었다. 平壤市 上需里 特別호텔, 이곳이 白凡 金九선생, 金奎植 博士, 碧初 洪命憙, 趙腕九, 嚴恒燮, 筆者 그리고 權泰陽 및 隨行記者 朝鮮通信 崔明소 등에 配當된 宿所였다.

金博士와 筆者를 除外하고는 벌써 三, 四日前에 미리 到着하였다. 會議場으로 가기 前 우리는 暫時休息을 取하는 中에 金枓奉 金日成 等이 禮訪을 왔었다.

金枓奉은 過去 海外로 나가기 前에 延禧專門學生時代에 金博士의 弟子였다고 한다. 金枓奉은 師弟之禮와 革命先輩에 對한 禮로써 兩金氏를 對하였고, 金日成을 兩金氏에게 紹介人事시켰다. 六尺巨軀의 金日成의 모습을 눈앞에 놓고 對하게 되니, 民族의 기구한 運命을 지니고 타고 난 사람들이 다 各其 다른 立場에서 行路를 달리하여 살아왔을망정 共同의 民族의 運命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의 一擧手一投足의 動靜에 注目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라졌다.

같은 民族의 祖上의 피를 노나받은 子孫들이라면 追咎하는 民族의 目標는 같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素朴한 民族感情에서 그들을 對해보려고 했고, 理解하려고 애를 써보았던 것이다.

全朝鮮 政黨社會團體 連席會議 一週日동안의 討議議題 一, 南北朝鮮에 있어 兩軍同時撤退問題 二, 南朝鮮 單獨選擧(五.一○) 單獨政府樹立反對問題

一項의 「兩軍同時撤退 問題」는 지금이나 그제나 一實한 共産側 原則으로 내세우는 問題인 것이며, 二項의 「單選單政 樹立反對問題」는 그 當時의 民族主義者의 名分으로서는 宜當 옳은 것이었다.

單選單政樹立으로 因하여 國土兩斷과 民族의 分裂의 悲劇을 招來한다는 結果를 豫見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限死코 反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一九四六年 五月 第一次 美⋅蘇共委와 一九四七年 第二次 美⋅蘇共委의 進展狀態와 그 決裂되었던 諸要因을 分析檢討해 봄으로써 이 問題의 正當한 批判과 앞으로의 展望 및 對策도 樹立될 수 있다고 生覺하는 것이다.

第二次戰이 終結되고 우리에게 賦與된 三八線 問題는 우리 民族이 願하지 않는 條件이 美⋅蘇 兩大勢力에 依하여 强制的으로 人爲的으로 設定되었다.

兩大國에 依하여 人爲的으로 設定된 與件下에서 또 再統一을 爲한 企圖가 卽 모스크바 三相會議決定인 것이다. (繼續)

 

(筆者 統一社會 黨務委員長)

宋南憲

[민족일보] 1961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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