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쟁이 영감

허술한 궤짝 안 버릴 터

=자식들은 땜장이 말라고 성화=

나 쓸돈 내가 벌어야지

4월 6일(목요일) (맑은 날씨)

 

○.... 오늘도 이 허술한 궤짝을 짊어지고 떨리는 다리를 끌어가며 아현동 마루턱을 한 바퀴 삐잉 돌았다. 그전과 같지 않아 점점 숨이 찬 것을 느낀다.

요전에 덜 받은 돈도 받을 겸 그 쪽으로 나갔다가 외상 땜질을 한 아주머니가 이사를 가버려서 허탕을 쳤다. 이 늙은 것을 일부러 속여서 몇 푼 안 되는 것을 떼어 먹으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 오늘은 5백환도 못 벌었으니 내일 쓸 염산과 납을 사려면 또 「순옥이」에게서 얼마 빌어야겠다. 광화문 어느 뒷골목 담벼락을 의지한 양지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았으려니 오후의 봄볕이 구멍 뚫린 너절한 양재기들을 흠뻑 쬐어주었다.

○.... 내 나이 벌써 환갑도 지나 후달이면 진갑이고 보니 자식들과 며느리까지 궁상스럽게 땜질을 왜 하느냐고 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면 성화를 부리지만... 제 새끼들 뒤치다꺼리에도 쩔쩔매는 주제에 언제 아비 돌볼 여유가 있을 것인가?

○.... 이 손과 두 눈이 성성한 궤짝을 메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쓰러지는 날까지 돌아다니며 구멍 뚫린 양재기를 알뜰히 때워 볼테다. 하다못해 손자 놈 연필 한 자루라도 내 돈으로 사서 쥐어줄 수 있고 목이 컬컬할 때면 내 마음대로 약주 한잔이라도 마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대문구 정동 28

양원식(梁元植, 62)

 

거리의 초상(肖像) (완)

거리의 초상(肖像) (완) [민족일보 이미지]
거리의 초상(肖像) (완)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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