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1988년 1월 15일, 안기부가 KAL858기 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북쪽이 바로 반박성명을 낸다. 북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내용이었다(비슷한 맥락의 성명이 1987년 1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박강성주,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 66-67쪽>).

이에 대해 정부는 (내가 알기로) 공식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88.1.15.자 북한 중앙 통신 성명내용에 대한 반박요지” 문건을 작성한다. 제44차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가 1988년 2월 1일부터 3월 11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는데, 정부는 이 자리를 통해 대북규탄 작업을 진행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문건이 제네바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보내진다. 자료 작성 주체는 대부분 안기부의 수사결과와 정부의 공식입장을 자세하게 풀어쓰려 노력했다. 예컨대 “객관적 물적 증거 결핍” 부분에서는 크게 잔해 발견과 블랙박스(비행기 뒷부분에 실린 오렌지색 물체로, 비행자료기록장치 FDR과 조종실음성기록장치 CVR로 구성)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물적 증거 부족 문제

▲ 외교부가 지난 3월 31일 30년이 경과한 외교부 문서들을 공개했고, KAL858기 사건 관련 문서도 1만건 이상이 공개됐다. “블랙박스는 인도양 심해저에 빠졌기 때문에 회수가 불가능하였음(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시에도 훨씬 근해에서 격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하였음)”(2017070040, 92쪽). [자료사진 - 통일뉴스]

먼저 블랙박스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블랙박스는 인도양 심해저에 빠졌기 때문에 회수가 불가능하였음(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시에도 훨씬 근해에서 격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하였음)”(2017070040, 92쪽). 바닷속 깊은 곳이라서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버마(미얀마) 사고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실종 지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수심은 40-50미터 정도로 그다지 깊지 않다. 또한 KAL858기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들을 건져 올린 버마 어부들 및 실종자 가족회에 따르면, 해당 지점의 깊이는 30-50미터 정도라고 한다.

1983년에 일어난 KAL007기 사건의 경우, 당시 소련이 알리지 않았을 뿐 블랙박스는 수심 170미터 정도에서 회수되었다(이후 누군가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블랙박스가 1992년 한국에 전달된다).

하지만 깊이의 문제를 떠나 중요한 것은, 당시 정부수색단이 겨우 닷새 만에 철수계획을 세우고 공식적으로 열흘밖에 수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블랙박스 탐지기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수색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전반적인 잔해와 관련해 정부는 “KAL기 사건 폭파를 확인해주는 사고 비행기 잔해(구명보트, 구급약품, 질소통등 총 13종)를 제시”했다고 말한다(91쪽).

여기에서 구명보트는 KAL858기 사건을 둘러싼 대표적인 의혹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겉은 멀쩡한데 안에 있는 수동펌프는 부서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폭파 흔적이 없을 뿐더러 이상하게 내장품만 파손된 상태여서 구명보트가 KAL858기의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사건을 재조사했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이 문제를 주목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대한항공의 장비탑재기록을 봤을 때 “구명보트(S/N 6046373)와 구명보트 내 질소탱크(S/N 16702P, 4183D8)”는 KAL858기의 것이 맞다고 한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 의혹사건편 下권(III)>, 441쪽). 구명보트는 비행기에 실렸던 8개의 보트 중 하나로 일등석 윗부분에 있었고, 질소통에는 대한항공 관리번호(KAL-NO, L-25 / S-25)가 찍혀있다고 한다(443쪽).

안기부가 임의로 추정했던 폭약

제네바 주재 한국대사관에는 “북한 동조세력의 허위주장에 대한 반박 요지” 문건도 보내졌다. “이진규 조총련 제1부의장의 기자회견”, “일본의 친북 언론”, “동구권 국가(미측 제보)” 등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이 가운데 폭약과 관련된 내용이 주목된다.

김현희 일행이 설치했다는 폭탄이 비행기를 구조신호 보낼 틈도 없이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느냐는 지적에 대한 답이다. “아측의 폭파 실험 결과, 350g의 콤포지션 C4 폭발물(사건에 사용된것과 동량, 동종의 폭발물)은 5mm 두께의 강판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릴 위력이 있고 10mm 두께의 강판에도 커다란 구멍을 낼 수 있음이 입증됨”(2017070040, 96쪽).

그러나 이미 알려진 것처럼, 무엇보다 김현희는 폭약의 종류와 양을 직접 진술하지 않았다. 안기부가 스스로 추정을 한 것인데, 이를 마치 김현희가 자백한 것처럼 발표했을 뿐이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470쪽). 따라서 정부의 반박내용은 설득력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겠다.

▲ 한국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KAL858기 사건을 논의하려는 계획에 대해 이른바 우방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의문을 표시했다(2017070040, 77쪽).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편 한국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KAL858기 사건을 논의하려는 계획에 대해 이른바 우방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의문을 표시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권위에서는 각국 내부의 인권문제만을 토의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면서 대외적인 테러행위에 대한 토의의 길을 열어준다면 여타 테러문제도 제기되어 서방측”이 바라지 않는 정치적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2017070040, 77쪽).

서독(독일)의 경우, 사건을 “인권위에서 거론함이 적절치 못하다는 견해가 EC[현 유럽연합] 회원국간에 지배적이며, 또한 확고하다고 판단”했다(121쪽). 일본도 북쪽이 “발언 또는 답변권 행사를 통하여 일본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특히 재일한국인 처우등 일본내 인권문제를 악의적으로 거론할 것이 예상되는바 … 답변권 행사를 통하여 해명하지 않을수 없으므로 험악한 논전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이었다(2017070041, 7쪽).

무리하게 추진된 유엔 인권위원회 논의

하지만 외무부는 계획을 적극 추진했고, 1988년 3월 3일 이상옥 당시 제네바 주재 한국대사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대북규탄 연설을 하게 된다. 북쪽의 반박은 3월 7일에 있었고, 이에 대한 한국의 재반박은 3월 10일에 이어졌다(이밖에 미국, 콜롬비아, 일본도 한국을 지지한 것으로 나온다).

유엔 인권위원회 차원의 성명이나 결의안은 없었다. 애초 정부의 “주요 목표는 대북한 규탄 발언이며 결의안 상정등은 고려치” 않았다고 한다(2017070040, 40-41쪽). 이는 우방국들의 반대와 인권위원회의 관례를 봤을 때 다소 무리하게 추진됐다고 할 수 있다.

KAL858기 사건 관련해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추진된 정부의 무지개 공작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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