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부의 30년 경과 공문서 공개의 일환으로 KAL858기 사건 관련 외교문서가 대량 공개됐다. 첫 번째 공문은 1987년 11월 29일 오후 3시 50분에 주 바그다드 총영사대리가 '당지발 KAL기 실종 보고'를 외교부장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전두환 정권은 수색 보다는 범인 추적과 인도에 주력했음이 32년 만에 공개된 외교부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이는 이 사건을 북괴 테러로 예단하고 대통령선거에 활용한 ‘무지개 공작’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가 이번에 공개한 30년이 지난 문서들 중 KAL858기 관련 문서는 1만 건이 넘는 방대한 것으로 주로 버마(미얀마)와 태국, 바레인 등 관련지역 대사관과 일본과 미국 등 관련국 대사관과 주고받은 공문서들이다. 일부 문서는 ‘공란’으로 남겨져 공개되지 않았으며, 공개된 문서 중 일부 문구는 검은 색으로 가려진 부분도 있다.

박강성주 박사가 행정정보공개를 청구해 확보한 외교문서들과 상당 부분 겹쳐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강성주 박사는 공개받은 외교문서들을 분석해 2016년 11월부터 <통일뉴스>에 연재한 바 있다. [관련기사 보기]

마유미, 신분 확인과 KAL 사건 연루 확인 못해

당시 외교부는 나중에 김현희로 알려진 ‘하치야 마유미’와 사망한 ‘하치야 신이치’의 신분을 확인하고, 이들을 북한과 연관지어 한국으로 압송해 오는데 외교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이들을 인도한 공식적 명분은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국가로 인도하는 국제관례 때문이었다.

이미 알려졌듯이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는 위조된 일본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12월 15일 한국에 인도하기까지 아직 정확한 국적이나 신원이 특정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하이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 사체를 확보하고 있던 바레인은 한국 정부의 조기 인도 요구에 “마유미가 KAL 사건에 연루 되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음”이라는 이유로 한국 인도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신이찌와 마유미가 사용한 AMPLE 독약물이 반드시 북괴제조라고 단언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 없음”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측 전언이다.(BHW-0339, V4.0105)

실제로 바레인 측은 마유미의 신원 확인 등 좀 더 구체적인 증거 제출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87년 12월 10일 ‘마유미’를 북한 공작원으로 보는 이유 등을 문서로 바레인 외교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독약 자살이 북괴 공작원 수법이고, 여권의 정교한 위조와 원발급자의 공산주의활동 경력 등을 꼽았다.(WSB-6765)

그러나 결국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 사체를 인도받은 결정적 근거는 마유미와 북한의 연관성이 입증됐기 때문이 아니라 ‘귀국주의 및 피해주의 선례’에 따라 자국민 피해가 가장 큰 한국에 범인을 인도한 것이다.

즉, ‘항공기상에서 행한 범죄 및 기타 행위에 관한 협약’(1969 도꾜협약)과 ‘민간항공의 안전에 대한 불법적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1973 몬트리올협약)에 근거해 버마 정부는 한차례 인도약속을 번복한 뒤 12월 14일 오후 간신히 인도에 응했다.[외교 교섭 경위 등 설명, V3.0166]

미국 대사관 제보로 태국 산악지역에서 ‘헛다리짚기’만

▲ 1987년 12월 10일 미군 P-3기에 의해 KAL858기 부유물이 처음으로 발견된 곳은 버마 안다만 해상 두 지점에서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외교부 공문서의 대부분은 마유미 한국 인도를 위한 외교부와 대사관 사이의 전문에 집중돼 있고, 정작 수색은 헛다리만 짚다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부가 의도와 상관 없이 ‘무지개 공작’ 보조역에 충실했던 셈이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등은 사건 발생 사흘 만인 12월 2일 ‘대항항공기 폭파사건 북괴 음모 폭로 공작’, 이른바 ‘무지개 공작’을 수립, “북괴의 테러 공작임을 폭로,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키로 방향을 정했다.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신분조차 확인되지 않고, KAL858기의 ‘실종’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북괴’에 의해 ‘폭파’됐다고 단정하고, ‘대선사업’을 위해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 12대 ‘대선’은 87년 6월항쟁을 거쳐 12월 16일 대통령 직접선거가 실시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다.

이미 권력의 꼭지점에서 이같은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외교부는 일본인 여권 소지 혐의자의 북괴와의 연관성을 흘리며 한국으로 인도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상대적으로 수색은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귀중한 사건 초기 수색이 엉뚱한 곳에서 진행된 이유도 확인됐다. 우리 정부는 태국과 버마의 협조를 받아 초기에 주로 태국 칸차나부리 산악지역을 집중수색하다 나중에서야 KAL858기의 교신이 끊긴 버마 안다만해역으로 눈을 돌려 부유물 몇점을 수거하는데 그쳤다.

외교부 문서에 따르면 ‘칸차나부리’ 지역을 특정한 정보를 제공한 인물은 트레버 에번스(Trevor Evans) 주한미국대사관 2등서기관이었다. “추락한 비행기는 방콕 서쪽 약 150마일 칸차나부리 지역에 있다”고 했고, “제보자는 상기 제보 내용을 금일(11월 29일이나 30일 추정) 16:30 주방콕미대사관 직원으로부터 전화로 통보받았다”고 비공식 문서에 기록돼 있다.[KE- -8 실종사고 관련 주 미국대사관 제보 내용, V1.0012]

결국 태국 산악지역에 추락을 목격했다는 여러 제보가 있었지만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태국은 일찌감치 항공수색을 중단하고 형식적인 내륙수색만 진행하며, 버마쪽을 수색하라고 권고하기에 이른다. 이때는 이미 두 혐의자의 자실시도 등으로 수색에 대한 관심은 가리워지고 있을 때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피해 가족 중 승무원 가족들은 12월 8일 성명을 발표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 실종KAL기에 대한 수색작업은 지지부진한 형편이고 KAL당국은 아직까지 탑승객들의 생사확인 및 추락위치조차 정확히 규명하지 못한채 안타까운 시간만 보내고 있다”며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인 수색 작업을 보고 회사측의 무성의하고 비과학적이며 체계없는 수색작업에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고 규탄했다.

실제로 KAL858기 관련 부유물이 처음으로 발견된 건 사건 발생 12일 만인 12월 10일 뒤늦게 수색에 참여한 미군 정찰기에 의해 버마 안다만해역에서 였다.[KAL기 실종사고, V5.0005]

이어 11,12일까지 부유물이 발견되고, 첫 부유물 수거는 “버마화물선(DAGON 1호)가 12.13 북위 13-45, 동경 97-26에서 노란색 LIFT RAFT(약 20X10 FEET)를 발견, 수거하여 12.14 저녁 랑군에 입항”한 것이었다.[RAW-0933, V5.0135]

‘무지개 공작’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

▲ 국정원 진실위가 공개한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에는 한국 방문 기록이 남아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기부를 주축으로 권력 핵심은 이미 12월 2일 무지개공작을 수립해 ‘북괴 공작’ 집행하고 있었지만 외교부는 마유미를 붙잡아 둔 바레인과 사고 추정지역인 버마와 태국 등에서 통상적인 사고수습을 진행했다.

한국 바레인 대사대리는 12월 2일 오후까지 “SHINICH의 사체 및 MAYUMI를 당초 입원한 SULMAMIYA 병원에서 12.2. 저녁 육군병원으로 이송한후, 육군병원은 외부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음. 금 12.2.출입을 시도해보았으나, 상부의 지시로 일체출입을 허용치않고 있다고 하는바, 일본대사관측도 접근치 못하고 있다함”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마유미 신분 확인은커녕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괴 테러’라는 단정은 이미 내려졌던 셈이다. 외교부 공문서에도 ‘공란’ 부분이 많이 남겨진 것도 단순한 인적사항 비공개 수준을 넘어 이같은 사정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외교부는 대통령선거 전에 ‘북괴 공작원’으로 단정한 마유미를 인도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12월 15일 김포공항에 마유미가 압송돼온 장면을 선거당일인 16일 조간 1면 기사로 채울 수 있었다.

박강성주 박사는 12월 10일자 문서를 특별히 주목한 바 있다. “마유미가 늦더라도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DA0799654, 43쪽). 안기부(현 국정원)의 이른바 ‘무지개 공작’ 문건이 아니더라도 12월 16일 대선 전 김현희를 전격 압송하려 했던 정부의 계획이 엿보인다는 평가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몇가지 의혹도 그대로 확인된다. 주일대사관은 “11.29-12.1. 간 바레인 리전시 호텔에 6회의 전화가 동경으로부터 걸려갔는바, 이것은 모두가 일본 보도기관이 걸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음”이라고 보고했지만 사건 발생 직후 마유미 일행이 바레인 리전시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기자들이 알기는 어려운 시점이었다.[JAW-7093, V3.101]

외교부는 “현지시간 11.30.(월) 16:00 주 바레인 일본 대사관에게 양인들의 인적사항 및 소재파악 요청하였음”이라며 “일본 언론 기관이 11.29와 30일에 하찌야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 사실 재확인 보고 바람”이라고 의문을 표하고 일본대사관에 재확인을 지시했다.[WJA-5508, V3.0148]

이 외에도 △11월 14일 일본 ‘나리따 공항’ 출국의 진실 여부, △하치야 신이치(추후 김승일)가 ‘주바레인 한국대사 명함’을 소지한 경위, △하치야 신이치의 한국 방문 기록, △유시야 UAE 참사관의 사건 하루전 ‘나우식 KAL858 부기장’과의 만찬, △마유미 일행의 바레인 체류 등 숱한 의문점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외교부 문서에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추가,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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