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준 통신원(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북한학 4학년)

 

▲ 3~4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민화협 연대모임에 민화협 통일공감기자단 대표 자격으로, 태어나서 처음 북녘 땅을 밟았다. [사진제공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11월 3일 오전 5시, 라디오에서 나오는 애국가를 들으며 경복궁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틀 간 진행되는 ‘금강산 남북 민화협 대회’에 민화협 통일공감기자단 대표(이하 청년 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트기 전인 이른 시각임에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는다는 설렘과 이유모를 긴장감, 그리고 그동안 품었던 북한에 대한 수많은 호기심으로 머리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내게 택시 기사님이 어디로 여행 가느냐 물었다. 짧고 굵게 금강산에 간다고 답하니, 놀란 듯 여러 차례 되묻는다. “예? 금강산에 간다고요? 거기 뚫렸습니까?” 친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금강산 구경하러 북한에 간다’는 메시지에 ‘왜 가느냐’, ‘어떻게 가게 된 거냐’, ‘안전하긴 한 거냐’ 등 수많은 물음표가 곧바로 날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 역시 방북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어안이 벙벙했으니 말이다. 스무살 중반밖에 안 된 나이에 직접 북녘 땅을 밟아볼 기회가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북쪽의 전형적인 모습과 똑같을까?’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상상하고 인터넷상으로만 접했던 북쪽의 모습을, 이틀간 직접 보고 겪은 그들의 진짜 모습과 비교해가며 이번 기행을 되새기고 싶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위주로, 직접 다녀온 금강산 ‘리얼 리뷰’를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남북 경계선 중간에 서서

▲ 외금강 호텔 창 밖으로 금강산 자락의 봉우리와 '옥류관면옥' 식당이 보였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고성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북쪽으로 향하던 버스는 군사분계선 통문 앞에 멈춰 섰다. 현대 아산 가이드가 “이곳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군시설”이라는 설명을 전했다. 저 멀리 산 능선을 따라 세워진 철책선이 보였다.

뉴스와 교과서에서만 보던 GOP(일반 전초)를 코앞에서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아무리 관계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북 경계는 긴장 상태에 있음을 체감했다. 잠시나마 방북에 대한 설렘보다 긴장감이 앞선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버스는 DMZ(비무장지대) 내부로 들어갔다. DMZ는 듣던 대로 자연의 보고 그 자체였다. 사방으로 백조가 떠다니는 고요한 호숫가와 넓은 억새밭이 펼쳐졌다. 날이 맑았던 덕에 돌산 풍경이 물가에 그대로 비쳤다.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신성한 구역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느새 아스팔트 도로는 비포장도로로 바뀌었고, 전봇대 역시 색과 그 모양이 바뀌었다. 같은 버스에 있던 대표단 일행의 말을 빌리자면 “80년대 즈음 자주 보이던 전봇대 모양새”라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생소하면서도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청년 대표단 일행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촬영 규정 상 풍광을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웠다.

버스가 돌연 멈췄다. 가이드도 분주해졌다. 드디어 북측 세관을 통과하는 차례가 온 것이다. 창문 너머로 털모자를 쓴 북측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총칼을 찬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도 서로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 우리가 묵었던 외금강 호텔의 외부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 외금강 호텔 숙소 내부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미리 작성해둔 휴대물품 세관 신고서와 모든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처음 밟아보는 북녘 땅이었다. 사부작사부작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없이 세관으로 향했다. 간이 화장실 앞 세관 입구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붉은 배지를 가슴에 단 군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워댔기 때문이다. 군용 트럭에 탄 채 우리 쪽을 응시하는 군인도 있었고,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대놓고 우리를 관찰하는 군인도 있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에 보조 출연자로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긴 기다림 끝에 세관을 통과할 차례가 왔다. 두꺼운 겨울외투를 가져오는 바람에 캐리어를 검색대에 잘 못 올리고 있자, 세관원이 다가와 “가만히 계시라” 했다. 대신 짐을 올려준 그에게 감사하다 전하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카메라 렌즈를 꼼꼼히 확인한 그는 또다시 말없이 가방을 밑에 내려줬다. 퉁명스러울 줄만 알았던 세관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무사히 버스에 올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측 사람과 대면했던 순간인지라, 여전히 가슴은 진정이 안 됐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초짜 청년’은 묘한 감정을 느끼며 드디어 금강산 관광 특구로 진입했다.

“오랜만입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남북 민화협

▲ 숙소인 외금강 호텔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봉사원 언니들이 일렬로 서서 환영 인사를 건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민화협 청년 대표단이 묵는 숙소는 ‘외금강 호텔’이었다. 호텔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봉사원 언니들이 일렬로 서서 환영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격한 환대’에 쑥스러움이 앞섰나보다. 함께 인사를 하다가 돌연 웃음이 터졌다. 내 앞에 있던 봉사원 언니들도 따라 웃었다. 짧은 첫 만남이었지만, 무장해제를 당하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고, 다시 설렘이 일렁였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남북 민화협은 ‘금강산 호텔’에서 그 회포를 풀었다. 북측 대표단의 환영사와 우리 측 대표단의 축사가 오갔고, 북측에서 준비한 환영 공연이 이어졌다. “오랜만”이라는 단어와 “친구”라는 말이 참 여러 번 등장했다. 다시 만나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으니, 좋아진 남북 분위기가 끊이지 않고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서로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 북측 기타연주자의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실용음악학과에 다니는 남동생을 위해 북측 연주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틀간의 여정을 끝낸 후 집에 돌아와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니, 북한에 관심이 없던 동생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북측 공연단을 살펴봤다. 악기는 뭘 쓰고 있는지, 연주 스타일은 대체로 어떤지 궁금했다고 한다. 동생 말에 의하면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고, 사용된 악기 역시 나름 좋은 모델이라 한다. 한복 입은 북측 연주단의 공연은 신기하면서도 낯설었지만, 언젠가 남북 음악 교류가 활성화 된다면 충분히 서로 합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꼭 북측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연주를 맞춰보고 싶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공연 이후 남북 대표단은 민화협‧노동‧농민‧여성‧청년‧종교‧교육 등의 부문으로 나뉘어 분과별 회의에 들어갔다. 청년 대표단도 각 부문 회의로 흩어져 서기 역할을 담당했는데, 내 경우엔 여성분과 회의로 들어가 김명숙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과 대면할 수 있었다.

▲ 여성분과 회의에 참석한 남북 대표단. 붉은 배지를 단 쪽이 북측 대표단이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공식적으로 청년 대표단은 회의 주체로 참여하진 않았다. 다만 회의장 내 학생 신분의 청년은 내가 유일해서인지, 북측에서 먼저 관심을 가지고 소개를 부탁했다. 학과 수업에서만 배웠던 여맹 간부 앞에서 당당히 자기소개를 했던 경험은 아마도 평생 잊기 힘들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얘기가 오갔다. 먼저 판문점‧DMZ 등 상징성을 간직한 곳에 여성교류센터를 설립하거나 남북 여성 바자회를 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만남을 지속해가자는 제안이 남측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북측은 두 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 공동선언 이행이 선행된 후 논의될 사안이라며, 궁극적으로 ‘제재 완화’에 대한 분위기를 여성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북 모두 두 공동선언 이행에 동의는 하고 있으나, 남북 여성 단체가 함께 실행할 구체적인 방안에 관해선 어느 정도 온도차가 있어 보였다.

북에서 보낸 마지막 밤

▲ 만찬의 차림표.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첫날의 마지막 행사인 만찬이 시작됐다. 각 테이블에는 남북 대표단이 섞여 앉았다. 우리 테이블에는 민화협 청년 대표단 5명과 언론사 촬영기자 두 명, 그리고 북측 청년기자 한 명이 함께 앉았다. 초반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무례하게 이것저것 질문했다간 상대방도 우리도 난처해질 수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북측 기자 역시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자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멀뚱멀뚱 어색한 채로 식사할 순 없었다. 우리 측에서 먼저 한 명씩 소개를 시작했다. 자기 순번이 돌아오자, 서글서글한 인상의 북측 기자는 수줍게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서른한 살의 김 선생(실명이 거론되길 별로 바라지 않을 것 같아 본 글에서는 ‘김 선생’으로 칭하였다)은 알고 보니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지리학과 출신이었다. 우리가 모두 놀라며 박수를 치자, 김 선생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참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었다. “반갑습니다! 짠!” 우리 테이블의 건배는 그렇게 시작됐다.

▲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 옥류관면옥에서 맛본 '랭면'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조심스럽게 가벼운 주제로 얘기를 이어갔다. 첫 점심으로 ‘옥류관면옥’에서 냉면을 먹었다 말하니 맛이 어땠는지 물어왔다. 느낀 그대로 전했다. 면발은 남쪽의 냉면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국물은 확실히 맛이 달랐다고. 남쪽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보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국물 간도 제법 맞고 진해서 좋았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평양에 있는 ‘옥류관’도 이렇게 큰지, 맛은 여기와 비슷한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김 선생이 엄지손가락을 장난스레 흔들며 답했다. “평양에 있는 옥류관이 진짜지요.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맛도 훨씬 좋습니다. 우리 인민들 사이에서도 아주 인기가 높습니다. 여기도 좋지만은… 남측 말로 하면 ‘짝퉁’이 아니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짝퉁 공격’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한 층 가까워진 틈을 타 물었다. “나중에 평양에 놀러 가면 같이 옥류관에 가주실 건가요?” 김 선생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선생들이 평양에 오신다면 제가 바로 대접하러 가야지요!” 그날 밤, 평양 출신 김 선생과 우리는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첫 ‘한반도 동무’가 되었다.

▲ 금강산 호텔 내 기념품 매대. 각종 과자와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다. 원화는 받지 않고 달러만 받는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 청년 대표단이 매대에서 산 기념품과 특산물을 한 군데 모아봤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잊지 못할 만찬을 즐긴 후, 외금강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곧바로 기념품점으로 향했다. 닫힌 문 앞을 서성이자 호텔 지배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야, 밤이 됐는데도 지치지 않나보구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배인의 도움 덕에 기념품점 문이 열렸다.

이것저것 구경하던 우리는 한 매대로 시선을 모았다. 금강산 뱃지, 라이터 등 아기자기한 관광 물품을 진열해 둔 매대였다. 공교롭게도 지배인이 서 있던 구역이었다. 너도나도 기념 뱃지를 사려 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서 있어서 그런가 여기가 여성 동무들에게 제일 인기가 높구나!” 북한식 농담을 호텔 지배인에게서 들을 줄이야.

이젠 그들도 우리도 서로가 익숙해진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거리감은 없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한반도의 한 지역일 뿐이었고, 민족 특유의 인간미는 남이나 북이나 다를 게 없었다.

기분 좋게 방으로 들어와 잠 잘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호텔 내 모든 불이 꺼졌다. 하나 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모두가 당황스러웠지만, 웃어넘기기로 했다. 전력이 나갔다는데 어쩔 텐가. 따지고 보면, 손님이 무턱대고 주인집의 전력을 마음껏 쓰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겠나. 이것 또한 하나의 추억으로 남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휴대폰이 없어 카메라 불빛에 의존해 더듬거리며 세안을 마쳤다. 커튼을 치러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 하마터면 놓칠 뻔 했구나. 창밖으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하늘을 방해하는 불빛이 없어 별은 더 빛나 보였다. 정전이 두고 간 선물이었을까. 서울에선 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이곳에서 넋 놓고 감상하다 잠이 들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올까요

▲ 바다를 품은 호수 '삼일포'의 모습. 날이 맑아 금강산 끝자락의 봉우리도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 남는 건 사진. 삼일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마지막 일정으로, 남북 민화협 대표단은 동해물이 갇혀 호수가 된 ‘삼일포’를 거닐었다. 수십 개의 봉우리가 둘러싼 이곳은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아직 단풍과 녹음이 공존하는 산 풍경은 여느 남쪽 산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특유의 글씨체로 적힌 안내 표지판과 바위 곳곳에 새겨진 체제선전 문구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북쪽 지역에 있음을 실감했다.

탁 트인 삼일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우연히 김 선생을 만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왠지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어 함께 사진 찍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옆에 있던 북측 관계자를 의식한 모양이다. 아쉬웠지만,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김 선생에게 카메라를 넘기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몇 번 카메라를 둘러보더니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눌렀다. 역시 기자는 기자다.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어준 김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허겁지겁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돌산을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다. 안전장치 없이 고지대에 있기를 무서워하는 내게 동행자들의 도움은 특히나 절실했다. 주로 청년 대표단이 함께 모여 산을 올랐지만, 이따금씩 붉은 배지를 단 북측 인사가 내민 손을 잡고 바위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옆 사람과 삼일포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기도 했으며, 봉사원의 즉흥 노래를 들으며 함께 박수를 치기도 했다. 남에서 왔든 북에서 왔든 서로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평화로운 산책을 이어갔다.

▲ 삼일포를 산책하다보면 곳곳에 새겨진 체제 선전문구가 눈에 띈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삼일포 산책 후 금강산 호텔에서의 점심 만찬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북측 관계자들의 모습이 이젠 낯설지 않았다. 혹시나 저 중에 김 선생이 있을까 유심히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기자 일을 맡고 있다 했으니 아마도 점심 직후 고위급 간부의 동선을 따라 먼저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결국 김 선생과는 삼일포에서의 인사가 마지막 만남이었다. 건강히 계시라는 말이라도 먼저 건넬 걸 그랬다. 여행 끝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지만,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북한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조금 더 아픈’ 아쉬움에 가까운 것 같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고작 몇 시간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했을 뿐인데, 뚜렷한 기약 없이 작별해야함에 마음이 아프다니. 먼 ‘친척’같은 느낌이 들었다. 직접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확실히 와 닿는다. 민족 분열의 아픔이란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북쪽 고성에서 남쪽 고성으로, 고성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김포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내려왔다. 그동안 글과 그림, 온라인 영상으로만 접했던 북측의 모습을 이틀 간 직접 보고 느끼다 왔다니. 상상 속 세상을 잠시 거닐다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후문에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맛집이 있다. 금강산 기행이 생각날 때마다 그곳이라도 들러야할 것 같다. 진짜 평양이 아닌 서울 ‘짝퉁’이지만 첫 방북의 기억을, 그렇게라도 되돌아보고 간직하고 싶다.

▲ 함께 산행한 북측 봉사원. 더 제대로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쉼터에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서희준 통신원]

더 많은 대한민국 청년들이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해봤으면 한다. 통일에 관심이 없더라도 부산, 전주에 놀러가듯 북쪽에 올라가 직접 보고 느끼다 왔으면 좋겠다. 그런 기회가 많이 주어지길 바란다. 통일의 당위성을 머리로 백번 생각하는 것보다, 직접 겪은 것들을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는 편이 훨씬 오래 와 닿기 때문이다.

김 선생과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기로 했다. 통일의 씨앗이 싹 틔우는 덴 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름대로 해나가다 보면, 훗날 다시 만날 날이 분명 올 거라고 믿는다. 왕래는 힘들지라도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평화로운 한반도 시대가 빨리 찾아오길, 아래로부터의 ‘정(情)’이 윗사람들을 움직이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우리는 이틀간의 금강산 여정에 잠시 쉼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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