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진 / 장기수

2016년 88세가 된 장기수 양원진 선생의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를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김익 전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이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양원진 선생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온 양원진 선생의 과거사를 통해 독자들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접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목 차

1. 곡절 많은 운명의 시작
2. 소년시절 - 부모님의 이혼과 친척집 더부살이
3. 이국땅에서 보낸 사춘기 - 중국 북경에서의 생활
4. 일본군대
5. 해방과 귀국
6. 탄압을 피해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I)

8. 이북에서 보낸 시기 -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
9. 통일사업
10. 옥중투쟁
11. 출소와 새 출발
12. 투쟁의 최일선에서
13. 못다한 이야기들

 

13. 못다한 이야기들

1) 컴퓨터

내가 전자 부문에 아주 능숙하게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이 못하고 있다. 게을러서 인가 모르겠는데 이거 할 것을 다 해놓고 공부해야지라고 생각만하고 못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소질이 있는 것을 자만하여 노력을 안했다.

내가 나를 비판하면, 이것이 의무라고 누가 시켜서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잠을 안 자고도 했다. 그러나 내 자신의 공부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꾸 미루는 특성이 있었다. 하루 이틀이 한 달, 일 년이 되었다. 지금도 컴퓨터 공부를 해야지 생각은 하지만 자꾸 미룬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에 용산에 컴퓨터 쪽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이 학원도 아니고 서클처럼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다. 내가 소식을 듣고 배우러 갔는데 그날 마침 문을 닫고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다음에 와야지 하고 갔는데 다시 못 갔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전자계통에서는 제1인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컴맹이 되어 있다. 1947년도에는 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 보급을 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 아버지와 잘 아는 사람이 그 방송국을 접수했다. 라디오를 생산하는 부품은 다 있는데 스피커만 없었다. 마그네틱 자석에 코일을 감아 전기를 흘려보내 진동이 생기면 그것을 이용해 스피커 중에 제일 성능이 나쁜 마그네틱 스피커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현실적으로 말발굽 자석을 만들 능력을 갖춘 공장이 없었다. 일본 ‘무선과 실험’이라는 월간지가 있는데 가장 초보자부터 가장 전문가까지 다 볼 수 있는 월간잡지였다. 아버지가 그것을 구해서 1947년도 나보고 압전기 현상을 연구하라고 했다.

내가 북경에 있을 때 광석라디오의 모형 모터를 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무슨 원리로 돌아가냐고 물으셔서 내가 물리학에서 정의내린 유창한 문구를 쓰지는 못했지만 소박하게나마 설명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쇠붙이에다가 호일을 감아서 전기를 흘리면 전기자석이 생깁니다. 그러면 회전자를 만들어서 교류를 변화 시키면 전자석이 변화합니다. 그러면 한쪽으로 땡기고 또 다른 한쪽으로도 땡기면서 모터가 돌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압전기 현상을 이용해서 스피커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수정편에 음성전류를 흘리면 수정편이 진동하는데 그 진동을 기계적으로 전달해서 진동판에 연결시키면 진동이 음성으로 재생된다. 그 원리를 알기에 스피커 만들기를 시도했다. 수정편을 구하기 힘들어서 로쉐리염을 만들어서 자를 때는 실에 물을 축여가면서 잘라야 한다. 거기에 작은 소형 모터가 필요해서 나보고 하라고 했다. 그것만 완성이 되면 라디오가 생산이 된다. 그런데 그때 내가 우익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고 아버지는 광산경찰서에서 연행되어서 라디오 만드는 일을 결국 하지 못했다.

내가 대남공작원을 하면서 이북에서 천리마운동 할 때인데 무선통신기기에 대해 독학을 했는데 성능 좋은 소형 송수신기를 만들었다. 진공관 2관을 써서 수신기를 만들었다. 물리학이나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 분야로 나가려고도 했다. 이해력이 좋았다. 전파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내가 피아노 조율사가 될 때도 이해가 빨랐다. 음파나 전파나 파장의 성격을 같았다. 전파도 주파수가 다른 전파가 간섭이 일어나면 제3의 전파가 나온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복잡한 스마트폰을 가지지 말자가 아니고 그걸 가지고 장난이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다 보니까 많은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를 할 수 있었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피곤하고 힘들면 다음에 하자고 하면서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머리 쓰는 것을 잘 안 한다.

2) 가전제품 수리

가전제품 수리는 단순한 일이다. 옴의 법칙만 이용해도 가장 초보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보통 기계적인 단선이나 합선, 부속품의 불량, 접촉 불량 등이 대부분이다. 건드려봐서 고쳐지는 것은 필요한 곳에 나눠줬다.

한번은 모르면서 고친 것이 있다. 평양에 있을 때인데 반도체 나오기 전에 진공관 포터블 라디오라고 있는데 비너스관이라고 작은 진공관 5개를 쓰는 것이 있는데 회로 방식은 슈퍼헤테로다인 방식이었다. 보통 5구나 6구인데 반도체는 5석짜리 6석짜리다. 그 진공관 방식 라디오를 가지고 있을 때는 듣다가 누워서 켜놓고 잠들어 버리면 라디오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 버린다. 진공관 필라멘트 달구는 전지를 A전지라고 하는데 1.5볼트나 3볼트가 있었고 B전지는 아무리 적은 것도 80볼트나 90볼트 건전지인데 크기가 컸다.

어느 날 지도원이 내쇼날 일제 6석짜리 라디오를 가져다주면서 고쳐보라고 했다. 미군군대 통신기계 부속을 뜯어다가 그 부속을 이용해서 고급수신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어 준 적이 있다. 지도원이 깜짝 놀랐다. 안테나도 크게 달지 않았는데 서울방송이 잘 나왔다. S파 특성을 고려해 낮은 주파수부터 높은 주파수에도 감도가 좋게끔 동조시키는 것을 이용했다. 본인이 원하는 특성 주파수만 감도가 좋게끔 동조를 잡아놓으면 성능이 좋은 줄 안다. 안테나도 안 달았는데 이렇게 잘 나오냐고 했다.

평양에는 트랜지스터를 만드는데도 고치는데도 없었다. 일본에 여행 갔다 온 사람이 가져온 것이었다. 옛날에는 라디오가 리드선으로 납땜이 되어 있었는데 드라이버를 이용해 납땜 부분을 점검하다가 어느 지점을 건드리니까 라디오 소리가 났다. 납땜이 떨어져서 고장이 났던 것이었다. 납땜질을 다시해서 완전히 고쳐놓았다. 내가 라디오를 듣다가 잠들어 버렸는데 아침에도 소리가 계속 났다. 그래서 전류계를 가지고 얼마나 전류를 먹는지 확인해보니까 전류가 조금밖에 안 먹었다.

3) 건강

허리가 중증이다. 10여 년 전에 허리가 중증이라 수술해야 된다고 했는데 겁이 났다. 내 조카가 허리전문의였으면 맡기고 수술했을 것이다. 내 조카는 관절전문이었다. 그래서 수술은 안하고 주사요법으로 치료를 했다. 2번 치료했는데 되게 아팠다. 저녁이면 허리를 90도로 꺾어야 안 아팠다. 낮에는 사람들 만나야 하니까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4) 요리

밑반찬으로 명란젓과 같은 젓갈종류도 같이 먹지만 요리는 오직 김치찌개 한가지다. 그전에는 양배추와 상추 같은 채소도 먹었으나 의치를 하고 있어서 많이 씹으니까 영 불편했다. 평택 안중에 살 때는 음식도 4-5가지 해서 같이 먹었다. 내가 약간 신 것을 좋아하고 이것저것 조미료도 넣을 줄 몰랐다. 그리고 신김치를 찌개로 끓어먹으면 물리지 않았다.

5) 2차 송환

내가 감옥에서 전향서를 쓴 것에 대해 엄중하다고 생각한다. 절개를 지키고 내 사업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전향서 쓴 것을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계속 반성하고 시정하는 입장에서 계속 분발하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거기에 끼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주제넘게 내가 선뜻 가겠다고는 못하겠고 다만 가든지 못가든지 간에 전향서 쓴 사람으로서 양심이 있지 통일운동 열심히 해서 덜 부끄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6) 후대 활동가들에게

무슨 문제로 일반수들이 단식에 들어가자 보안과장의 위아래 입술이 다 터졌다. 보안과장은 나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단식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러나 가자고 했다. 내가 가니 단식을 주동한 주동자가 나를 보더니 감을 잡았는지 내가 한마디도 안했는데 반장님 내가 반장님 얼굴 봐서 밥 먹을래요 라고 했다. 내가 말 한마디도 안하고 얼굴만 보이고 갔는데 단식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교도소 측에 스포츠나, 연예 관련 내용이 방송에 포함되도록 요청했다. 그 후에 스포츠나 연예 방송이 나오면 일반 재소자들이 양 반장이 가서 뭐라고 했나 보다고 했다. 교도관들이나 재소자들이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일상생활을 진실성 있게 하게 되면 모르는 것 같아도 은연중에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이 될 때가 있다. 참 어렵다고 여겨지며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도 어느새 해결되기도 한다. 우리 지도자들이 참으로 나에게 감동을 주고 성심성의껏 나한테 해주었기에 나도 그 진실성을 느낀 것이다.

진실성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성장을 해오면서 어머니의 모습, 누나의 당부 등을 일생동안 회상하면서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별한 격식을 갖춰서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바람 쐬러 갔다가 한마디 하면서도 진실성이 있으면 감동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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