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진 / 장기수

2016년 88세가 된 장기수 양원진 선생의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를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김익 전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이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양원진 선생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온 양원진 선생의 과거사를 통해 독자들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접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목 차

1. 곡절 많은 운명의 시작
2. 소년시절 - 부모님의 이혼과 친척집 더부살이
3. 이국땅에서 보낸 사춘기 - 중국 북경에서의 생활
4. 일본군대
5. 해방과 귀국
6. 탄압을 피해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I)

8. 이북에서 보낸 시기 -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
9. 통일사업
10. 옥중투쟁
11. 출소와 새 출발
12. 투쟁의 최일선에서
13. 못다한 이야기들

 

12. 투쟁의 최일선에서

1)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경기남부평통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찾아왔다. 양심수후원회 정혜은 회원을 만나서 식사대접을 받고 경기남부평통사 현호헌 사무국장을 소개받았다. 그 후로 경기남부평통사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와서 서울평통사 고문이 되었다. 평통사에서 진행하는 각종 기자회견과 군축집회, 전쟁연습반대행동 등에 참가해오고 있다.

경기남부평통사에서 회원으로 활동할 때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1주일 동안 해군기지건설 반대 활동을 했다. 평택에 있을 때는 경기남부평통사 활동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서는 서울평통사 활동을 열심히 했다. 평통사에서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평통사 회원들과 간담회도 진행하고 총회에도 참여했다. 서울평통사 활동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미대사관 앞, 국방부 앞, 종합청사 앞에서 진행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평통사 회원들은 일관되게 공부를 많이 했다. 미군의 만행이나 군사훈련 등을 체계 있게 공부하고 지도일꾼들로부터 평회원들까지도 전부 일관되게 공부를 많이 했다. 평통사는 평화를 위협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는 적이 없고 미국정부 관리가 와서 한국정부 담당자와 회의를 할 때 기동성 있게 거기에 알맞은 기자회견이나 투쟁 등을 조직하는 것 보고 잘 한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은 미국이 하고 있는 군사훈련이나 세균전실험이 있을 때 그것을 반대해서 미군을 나가라고 하는 구호를 맨 앞에 세웠으면 하는데 그것까지는 안했다. 반전평화 투쟁하는 것 봐서는 미군철수 구호가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았다. 나는 미국을 배척하지 않는 통일운동은 가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2) 범민련남측본부

2010년 정도에 범민련 경인연합 고문을 맡아서 활동하며 각종 통일행사에 참가하고 자문을 요청하면 내가 아는 선에서 답해주고 그랬다. 2015년부터는 범민련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문단 회의에 나가고 있다.

내가 볼 때는 통일운동 중에서도 가장 분단의 원인인 미국을 배척하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자는 범민련 노선이 가장 나와 맞다. 통일운동은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평통사는 반전평화는 해도 미국 나가라고 하는 구호가 가끔 나오기는 하는데 일관되게 하지 않았다.

나는 학생운동 할 때 맨 처음 시작할 때 미국놈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생들의 하숙비인 쌀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반미투쟁에 나섰다. 시작도 나의 판단과 뜻으로 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범민련은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범민련의 주장이 집권세력들의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압의 예봉을 피하면서 위축되어 소극적으로만 해서도 안 되고 세련되게 사업해서 탄압을 피해나가면서 일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투쟁만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탄압의 칼날을 받으면 위축되고 합법적으로 활동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일을 정지하고 못하고 있으면 패배주의에 빠진다. 합법과 비합법을 조화롭게 하고 계속 조직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투쟁하다가 구속되더라도 새로운 조직을 계속 확장해야 한다.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재정사업이라든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탄압을 받게 되면 기존에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멈칫거리고 꽁무니를 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희생을 각오하고 해야 한다.

3) 양심수후원회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양심수후원회를 알게 되었다. 사회는 발전해 가는데 개인의 발전이 그에 못 따라갔다. 내 생각이 현실과 맞지 않고 뒤쳐졌다. 민주화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에 내 의식이 못 따라갔다. 다만 마음은 젊은 사람들처럼 열심히 하고 싶은데 몸이 영 안 따라 준다.

징역살이 하면서 어머니까지도 면회가 안 되었던 적이 있었고 영치금이나 편지 한 장 들어오지 못한 때가 있었는데 내가 탈옥기도를 했다고 무고를 당해서 고문을 일주일씩 당한 일도 있었다. 만약 그때 양심수후원회가 있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양심수후원회가 양심수들 한 사람 한 사람 챙기고 교도소 내의 부당한 대우를 파악하고 외부에서 싸워주는 것만으로도 양심수들에게는 큰 힘과 의지가 된다.

서울에 올라와서 양심수후원회와 민가협의 신년하례식, 총회, 월례강좌, 역사기행, 민가협 장터, 송년모임 등 각종 행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2010년 1월 양심수후원회 신년하례식이 있는 날 낙성대 만남의 집 2층 박희성 선생 방에서 양심수후원회 유영호 회원과 살아온 과정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 내용이 양심수후원회 소식지 통권 219호에 실려 있다.

양심수후원회에서 나는 임원도 아니고 고문도 아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이야기를 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운영위원들이 큰 일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일도 토의를 해서 잘 해주었으면 한다.

4) 6.15산악회

서울에 올라와서 6.15산악회의 매달 진행되는 산행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여했다. 참 좋은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회원들이 범민련이나 양심수후원회 등 특정 단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여러 단체 성원들이 조금씩 모여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여러 가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 하나의 구심점은 6.15정신이다.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리운 사람들 만나서 좋은 의견들을 나누고 좋은 행사를 조직해서 진행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뒷풀이 장소에 얼굴이라도 내비치고 싶지만 지금은 건강이 허락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한다.

6.15산악회 하면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6.15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산행을 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는 그 코스를 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니까 이를 악물고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자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산행을 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산행을 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지에서도 걷기 힘들다.

춘천 삼악산이 가장 좋았다.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한 산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세계 명산을 다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몽골과 베트남에 가봤는데 그 나라 산들은 웅장하기는 한데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하지는 않았다. 특히 서울의 북한산과 한강처럼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양 천도를 잘 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평양도 좋지만 이렇게 서울처럼 산과 강이 웅장하지는 못하다.

5) 코리아연대

2013년부터 코리아연대 젊은 활동가들이 우리 선생들과 간담회도 하고 지역에 초청도 해주었다. 코리아연대의 젊은 활동가들이 공안탄압을 받아 많은 이들이 구속이 되었거나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건강이 허락지 않아 면회를 자주 가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참다운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길에서 코리아연대 젊은이들은 전사 중에서도 돌격대로 표현하고 싶다. 그 사람들은 주저 없이 미국을 반대하고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싸우는 동지들이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선배라고 해서 깍듯이 귀하게 여겨준다. 나 자신은 송구하고 몸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그들과 동일하게 행동하고 싶다.

코리아연대 사람들에게 의견이 합쳐지지 않을 때 자꾸만 변명만 하려고 하지 말고 본신사업에 전념하면 시간이 지나면 진정성이 서로 인정될 것이다. 나는 ‘처음에 격렬했던 반감은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일에 매진하면 좋은 뜻에서 해결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도 공화국에서 오해를 받은 일도 수차례 있었지만 변명하지 않고 그냥 모른척하고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오해가 풀리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적이 있다.

나는 코리아연대 젊은 사람들에게 조직에서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 하고 사양하거나 빠지려고 하지 말라. 그 일을 하면 내 자신이 커진다. 대외적으로 내 자신이 성장한다. 힘들더라도 일을 거절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코리아연대는 이적단체로 판결 받아 해산됐다.

(편집 과정에 착오가 있어 3주간 연재가 지연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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