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진 / 장기수

2016년 88세가 된 장기수 양원진 선생의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를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김익 전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이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양원진 선생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온 양원진 선생의 과거사를 통해 독자들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접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목 차

1. 곡절 많은 운명의 시작
2. 소년시절 - 부모님의 이혼과 친척집 더부살이
3. 이국땅에서 보낸 사춘기 - 중국 북경에서의 생활
4. 일본군대
5. 해방과 귀국
6. 탄압을 피해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I)

8. 이북에서 보낸 시기 -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
9. 통일사업
10. 옥중투쟁
11. 출소와 새 출발
12. 투쟁의 한 길로 - 투쟁의 최일선에 나서다
13. 못다한 이야기들

 

8) 열병에 걸리다

인제를 넘어가면서 우리가 후방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후방에 가면 식량에 대한 욕심을 좀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남은 식량을 내가 다 지고 다녔다. 4월 말경에 평안북도 영미에 도착해서 휴식할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우물가에 가서 옷을 벗었는데 오싹 했다. 미국놈 세균무기에 전염되어 열병이 발병했다. 열병이 발병했는데도 걸어서 정주군 마산면까지 갔다. 열병에 걸리니까 아무리 맛있는 것을 앞에 갔다  고 먹으라고 해도 입에 안 들어갔다. 식욕 자체가 아예 없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민가 웃칸에 갔는데 그 집 어머니가 저렇게 안 먹어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을 했다. 날이 밝아서는 빈집에 격리수용되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것이 정신이 없이 가물가물 하는데 연대장 간호사가 서울에서 진명여고 3학년 출신 연대장 간호사로 있었다. 서로 직접 대화는 안 해봤다. 나는 다른 대원 쉴 때 식량공작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한가하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다른 대원 휴식할 때 나는 한두 발짝 가서 바로 잠을 잤다. 36명 대원 중에 몇 달 지나니까 3-4명만 남았다. 몸이 건강하면 열병도 전염되지 않았다. 연대장 간호사가 새벽에 10리 이상 되는 거리를 와서 비상용 주사를 놓고 갔다. 그 덕으로 열병을 가볍게 앓고 일어났다.

1951년 5월초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의 청천강 부근에서에서 미국의 세균무기에 감염되어 20일간 열병을 앓고 겨우 회복되어 회복기 중대에 있다가 9사단으로 원대복귀 하던 중에 황해도 황주에서 6군단에 편입되었다.

부대가 3개월도 못 쉬고 서부전선으로 다시 동원되었다. 군관들은 모두 원대복귀를 해야 했지만 하사관과 병사는 주변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9사단과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다시 따라 나섰다가 원대복귀 못하고 6군단에 편입되었다.

나는 회복이 되기 전에 연대에 복귀해야 했다. 유격전 할 때 내가 우리 부대 모범이었는데 떨어질 수가 없었다. 고생 많이 한 우리 부대에게 원래 3개월 동안 평안북도에서 휴식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청천강을 건너간 것인데 그런데 다시 서부전선이 위급해져서 9사단이 내가 열병을 앓고 있는 동안 개성으로 이동해 버렸다. 황해도 황주 계선에서 낙오됐던 사람들 중에서 군관들은 원대 복귀하고 하사관과 병사들은 군단장 명령에 의해 6군단에 편입되었다.

나중에 6군단은 부족한 물자를 차용증을 써주고 충당했다는 것으로 인민의 재산을 차용한 불명예스러운 부대는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병사들은 전선사령부 전투부대에 편입되고 하사관들은 예비연대로 편입되었다.

9) 우마차운수중대

6군단 우마차운수중대는 100명 정도 규모였는데 마차 1대에 2명씩 배치됐다. 1951년 5월말에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면에 있는 우마차운수중대에 3개월 정도 출장명령을 받아서 하사관 3명 군관 2명 간호사 2명과 함께 출장을 갔다.

몽골에서 야생말을 원조해 준 것을 압록강변 의주에서 군마 조련하고 조련이 된 말은 각 부대에 배치하고 조련이 안 되는 악질들 74필의 말을 접수받으러 갔다. 말을 기르는 마사병들 소대가 있었다. 말은 민가의 외양간에 묶어 두고 있었다. 매일 말 훈련을 시키고 51년 몇 달 동안 나는 마량(말먹이), 소금 등 공급업무 등의 물자관리를 맡았다.

1951년 여름철 지나서 늦가을인 11월에 겨울옷(동북)을 못 타 입고 말과 같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다가 마식령산맥에서 미군전투기의 기총소사와 로켓포에 직방으로 맞아 부상을 당했다. 말이 도망가려고 하면 마차에 부딪혀서 사고가 나기도하고 자동차에 부딪혀서 사고가 나기도 했다. 어떻게 고생을 했던지 살고 싶지 않았다. 말이 논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버리면 마차에 실려 있던 소금은 다 녹아버렸다.

기진맥진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날이 밝아서 마식령산맥 저 꼭대기에서 비행기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 비행기가 마침 우리를 발견했다. 비행기가 오다가 이렇게 조금 방향을 바꾸면 나한테 조준한 것임을 알았다. 그걸 아는데 그러면 엎드리거나 피신해야 하는데 안했다. ‘에이 맞아 죽어버리지’라고 생각했는데 로켓포가 몸에는 안 맞고 앞쪽에 떨어져서 내가 저만치 날아갔다.

내 옆에 있었던 병사 하나는 허리에 관통상을 당해 허리가 꺾였고 나는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순간에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만져보니까 얼굴 한 쪽이 날아간 것 같았다. 그때 이제 장가는 다 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사에 있어서 장가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포복전진을 하려고 하니까 팔이 말을 안 들었다. 그래서 한쪽으로 기어서 고개로 올라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 마침 반쯤 무너져서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반공호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들어갔다. 팔에 감각이 없어서 보니 피가 나고 있었다. 미대를 풀어서 팔을 묶었다. 비행기가 45분 정도 기총사격을 하고 갔다. 인근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있어서 치료를 해주었다. 파상풍주사를 맞아야 안 죽는다고 했다.

인원을 동원해서 들것을 만들어서 야전병원으로 이동해서 주사 맞았다. 파상풍주사는 8시간 안에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열 몇 시간 걸려서 맞았다. 허리를 부상당한 다른 사람은 입원하고 나는 원대에 복귀했다. 우마차운수중대 일은 마음에 안 드는데 사람은 알고 사귀다 보니 헤어지기가 그랬다. 그래서 입원을 안 하고 거절하고 부대로 갔다. 부대장이 성질이 고약한 사람인데 나를 보고 나서 부대장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보고 “입원을 하지”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우마차운수중대는 가다가 많이 희생되고 나중에 희생자 생겨 병력을 보충했다. 원래 중대장이 직책이 군단 수의부부장이었다. 부부장이면 보통 직급이 중좌인데 당시 그 사람은 중좌가 아니라 상위(작은 별 3개)였다. 제 직급을 다 못 받고 있는데 동부전선에 와서는 우마차 운수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나는 다시 양덕에 가서 말들을 한 달 반 더 훈련시켜서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중대장이 양씨 성이었다. 이북에는 양씨 성은 별로 없었다, 씨족 관념은 배격의 대상이었다, 내가 다시 동부전선으로 가니까 피복창고장, 양식창고장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다 해직시키고 나에게 2개를 다 보라고 시켰다.

이를 두고 이후 안전부에서 나에 대해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렇게 되었는지 수상하게 여겼다. 기존 창고장들은 나이가 있고 구당원이었다. 나는 또 중대장과 3개월 출장도 다녀왔던 터였다. 중대장하고 성씨도 같았다. 한번은 안전부에서 만나자고 해서 심사를 하더니 남반부에 친척 중에 반동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친척 중에 공무원도 한 사람 없다. 다만 한국민주당에 있는 큰고모부가 우익이다”고 하니까. 안전부에서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하면서 “다 반동이 친척끼리 다 연결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해서 내가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데 왜 그러냐?”고 큰 소리를 쳤다.

그때만 해도 내가 별 볼일은 없었어도 안전부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때는 인식부족이었다. 내 눈에는 건달같이 껄떡거리고 일도 안하고 건들건들해서 그 사람들에게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 제도 같았으면 억울하게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출장 가서 3개월 동안 양덕에 가서 있으면서도 낟알 하나라도 부정을 저지른 것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하나만 보라고 했으면 몰라도 2개를 다 보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 부대가 해산되었다.

6군단은 황해도 황주에서 조직되었는데 새로 조직된 군단이라 자동차도 없고 없는 것이 많았다. 민간인 달구지, 소 차용증 써주고 빌렸다. 탄약이라든지 수송을 많이 했다. 가다가 폭격을 맞거나 공격당하면 마차가 파괴되어 못 돌려주었다. 그래서 인민의 재산을 차용해서 피해를 입혔으니까 그런 불명예스러운 부대는 인민군대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6군단은 해산됐다. 그래서 동부전선 내금강에 있는 전선사령부 예비연대로 가게 되었다. 당시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은 중국군 인민군은 중부전선 일부와 동부전선 맡았다.

10) 전선사령부 예비연대 하사관교도대대

1952년 초 6군단이 해산되고 전선사령부 직속 예비연대 하사관교도대대에 편입된다. 병사들은 모자라는 상황이라 다른 부대에 바로 배치되었는데 하사관은 남아돌았다. 그래서 전선사령부 예비연대 하사관교도대대가 만들어졌다.

1952년도 전선사령부 직속 예비연대 하사관교도대대에서 있은 일이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안하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로 응용을 했다. 훗날에 인민군대에 있을 때 겨울에 온돌방을 만들기도 했다. 1000고지였는데, 불을 때면 방안이 연기로 꽉 차서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아무도 해결하지 못해서 나를 불렀다. 나도 연기 빼는 방법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굴뚝을 빼는 데를 살펴보니 연기가 나와서 한 바퀴 돌아서 나갔다. 그래서 공간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길을 파고 아치식으로 넓혀서 그전보다 좀 나아졌다. 그래도 연기가 덜 빠져서 연통을 손봤다. 연통은 뜨거운 곳과 덜 뜨거운 곳의 차이가 생기면서 빨아내는 효과가 있었다. 굴뚝 높이가 지붕 높이보다 낮으면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압력차이가 생겨서 연기가 제대로 나가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굴뚝의 높이를 지붕 높이보다 높여서 바람의 영향을 안 받게 하여 방안이 연기로 꽉 차는 문제를 해결했다.

1952년 겨울에 동부전선 내금강지역에서 갱도작업을 했다. 갱도작업을 전문적으로 했던 사람들도 갱도가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나는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겁도 없이 작업을 하다가 허리까지 흙에 파묻히기도 했고 정말 열심히 갱도작업을 해서 표창도 받았다.

내금강 부근 갱도작전에서 1등을 했다. 당시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원산-청천강 계선으로 자르려고 했다. 그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고립된다. 그때 서부전선에는 중국군이 있었고 중부와 동부에는 인민군이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대비해서 52년도 겨울에 갱도를 만들었다. 인민군이 고립되어도 3개월 동안 갇혀 있어도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했다.

부대장 명령 감사는 표창장은 없고 구두로만 하는 것이다. 전 부대를 정렬시켜놓고 부대장이 연단에 올라가서 나의 이름을 부르고 전체 차렷 구령을 외친 다음 부대장이 경례를 한 상태로 바닥에 내려와서 이러저러 해서 ‘감사를 드립니다’하면 전 부대원이 만세를 3번 외쳤다.

11) 조선로동당 입당과 심장병

1952년 10월 전쟁 중 하사관교도대대에 있으면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입당심사를 통과해서 조선로동당에 입당을 했고 입당 후에 여러 이유로 의심이 더욱 심해졌다. 남쪽 출신 고학력자라는 이유로 박헌영과 이승엽이 미국의 간첩으로 의심받고 있었던 때라서 비판대에 오르기도 했다.

내가 민청 생활을 열심히 해서 남로당원 명단에 올라가 있었는데 조선로동당에는 입당보증인이 없어서 입당을 못하고 있었다. 전라남도 쪽에서 올라온 당원이 거의 없었다. 서울지역에서 올라간 사람들은 보증을 해서 입당을 했는데 나는 남로당원 명단에만 있었고 조선로동당에는 입당을 못하고 있었다.

유격투쟁 할 때 공을 많이 세워 정치부연대장이 입당을 하라고 했다. 대단한 영광이었다.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하늘에 별을 따는 일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내가 왜 구당원인데 신입당원으로 입당을 하느냐?”고 쏘아붙였더니 그 사람이 두 번 다시 권하지 못하고 가버렸다. 내가 예술적이지 못했다. 말이 굉장히 퉁명스러웠다.

그 후에 열병에 걸리고 낙오되어 다른 부대로 전전하다 보니 입당을 못하고 있다가 6군단이 해산되고 금강산 쪽에서 방어선 구축했다. 그때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원산하고 청천강하고 계선을 자르려고 했다. 그러면 동부전선이 고립되기에 그에 대비해 우리는 3달 동안 싸울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그래서 금강산에 전선사령부 쪽으로 10사람이 1개조로 굴을 팠는데 거기서 1등을 했다. 중간총화 할 때 나 혼자 주석단에 앉혔다. 그 직후에 부대가 해산되었다.

다른 부대에 갔는데 다른데 사람들은 부대가 해산될 때 문건을 가지고 와서 먼저 입당수속을 진행했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입당수속을 밟게 되었다. 사람들이 구두로 입당을 추천했고 민청에서 나를 보증해서 추천하고 다른 당원 한사람이 추천해야 하는데 당원이 없었다. 민청에서부터 낙선시키려고 학습수준이나 정치적 의식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양원진이 정치학습 많이 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내가 대답을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어려운 질문을 많이 했는데 내가 대답을 잘 해 버렸다. 그래서 소문이 ‘아 양원진이 공부를 많이 했다’고 연대에 소문이 났다.

그런데 대대에서 올라가니까 당위원들이 수첩에다 준비를 해가지고 왔다. 어떻게나 공격이 들어오던지 내가 얼어버려서 대답을 못했다. 그러니까 ‘뭐야 연대 민청위원장이 양원진이 공부 많이 했다고 했는데 이 정도냐’고, 야지를 놓고 그랬다. 그래도 거기서 부결이 안 되었다. 세포에서부터 당단체로 수속을 했다.

그때 1952년도니까 내가 24살 때인데 이승엽과 박헌영이 숙청될 때였다. 나도 그때 싸잡아서 당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양원진이가 미제 고용간첩이 아닌가, 어떻게 말 한마디 걸음걸이 하나가 트집을 잡을 빈틈이 없냐, 그건 사람으로서 그냥은 되지 않는 거다’라고 의심을 자꾸 했다. 너무 열심히 하고 결함이 없으니까 저럴 수 있냐고 의심을 했다.

나는 유격전을 할 때 모 주석의 인민노선에 대해서도 다는 못했어도 나도 저렇게 실천하자고 했다. 나도 아무리 힘들어도 책을 읽고 민가에 들어가도 캄캄한 새벽에도 마당을 다 쓸고 했다. 우리 전우들이 자기도 한 번 해보려고 해도 한 번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샀다. 그래도 증거가 없는 이상 양원진의 입당 수속을 하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정치부에서 어디를 제일 두려워하냐면 당단체가 아닌 일반 민청 비당원 대중의 시선을 제일 어려워했다. 양원진이가 제일 모범인데 양원진이를 입당 안 시키고 다른 사람을 먼저 입당을 시키면 정치부에서 불공평하다 이런 평을 받을까봐서 그랬다. 여하튼 취급했다가 떨어뜨리더라도 취급 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을 앞질러서 당원이 되었다.

세포에서 올라갔는데. 나는 역대 회의에서 그런 광경을 못 봤다. 반대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또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반박토론이 벌여졌다. 그래서 심지어는 중국에서 왜 북조선으로 오지 않고 남조선으로 갔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남조선 대학교 다니고,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토론을 하려면 준비를 잘 해 와야지 무턱대고 하면 어쩌냐며 그 당시 장개석이 치하인데 어떻게 북조선으로 올 수 있냐고 반박했다. 그렇게 해서 다 올라갔다. 대대로 해서 연대로 올라가서 전선사령부 꼬미샤까지 올라갔다.

꼬미샤는 당검열기관으로 당에 이색분자가 들어오지 않도록 검열하는 곳이었다. 최종적으로 거기서 판단하는데 나는 갔는데 검찰소장이 꼬미샤 위원장이었다. 그 위원장이 나를 1시간 30분 동안 개별심사를 했다. 그런데 질문하는데 대답을 잘 했다.

자습당원들의 자료에 시사문제가 나오는데 쏘련 19차 당대회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닌데 그걸 내가 다 빼지 않고 읽었다. 현실에 대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위원장도 자습당원으로 최근에 본 걸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신입당원이 그것까지 알겠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빠짐없이 대답을 잘 하니까 “야, 양 동무 공부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 성분에 대해 “내가 빈농입니까? 부르주아지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더니 위원장은 “양 동무는 빈농입니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류(후보당원)가 되고 나는 정당원으로 되었다. 꼬미샤 위원들이 22명이 있었는데 거기서 바로 거수로 결정을 하는데 전부다 만장일치로 정당원으로 결정되었다. 올라갈 때까지는 힘들었는데 참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못 올라가게 했는데 내가 당당히 입당을 해서 돌아왔다.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위에 당원들이 한 것이 아니라 세포 초급단체 당원들인 당단체 지휘관들이 한 거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꾸 나를 봐서 그랬던 것 같다. 레닌이 비판의 내용이 3%만 해당되어도 비판을 접수하라고 했는데 우리 1분대장이 당기밀을 누설시켰는데 나는 그때 3분대 부분대장이었는데 같은 하사관이니까 나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근무원들이 자기비판을 했다. 그랬더니 원래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다시 묻지도 않고 전부 나한테 꾸짖고 비판을 했다.

한참 시련을 겪고 있는데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동국대 나온 사람이 나를 좋게 봐서 “실망하지 말고 이때까지 해온 대로 열심히 하라”고 했다. 이 사람이 정치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정치군관학교에 추천되어 갔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되돌아 왔다. 돌아와서 내가 비판대에서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당신이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저렇게 당하고 있냐”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신병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과오가 있으면 비판을 받아야죠”라고 했다.

그 사람이 그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보라고 했다. 그 사람이 군관학교 가기 전에 민청위원장을 했다. 그래서 다시 토의가 되어 이해가 되었다. 양 동무를 잘못 봤다고 했지만 이미 나는 폐인이 되어 버린 후였다. 1953년 초 3월 봄 앞두고 눈 무릎까지 왔을 때 야전병원에 심장병으로 입원을 했다. 병명이 심장병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심장판막증이라고 했다. 나중에 퇴원증에 있는 병명은 심근류마티스였다.

이상하게 다리 힘이 없었다. 1000고지에서 민가까지 혼자서 출장을 보냈는데 날이 저물어가서 어둡기 전에 부대에 빨리 가려고 했는데 다리 힘이 떨어졌다. 한 발자국 올라가면 두세 발자국 물러서고 기진맥진해서 늦게서야 부대에 들어갔다. 중대장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해서 날은 저물고 마음은 급한데 산에 오르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그래서 군의소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까. 군의관이 다른 사람 같으면 일어나지도 못할 판인데 이 양반은 왜 이렇게 움직이냐고 했다. 뒤에서 중대장이 그 소문을 다 퍼트렸다. 그 사람 만나면 나에게 입원하라고 했다. 입원을 안 하고 있었다. 그 전에 나를 의심하던 정치일꾼들이 이제는 내 편이 되었다. 반대하던 사람들도 지원자로 돌아섰다. 없는 사람으로 칠 테니까 아랫목에 누워서 있으라고 했다.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군인이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안 나가면 다른 하사관이 나가야 했다.

입원하고 있다가 누워 있으라고 하면서 식당에 가지 말고 밥도 갖다 주고 절대 안정을 취이라고 했다. 한 20일쯤 지나니까 몸이 거뜬하고 기분도 날아갈 것 같이 좋았다. 그래서 퇴원을 요청했는데 안 시켜 줬다. 또 20일 후인 40일 때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요청했으나 또 거부되었다. 나는 더 있어야 한다는 걸 뿌리치고 퇴원을 했다.
 
회복기 중대에서 몸도 단련하고 해이된 규율도 세워서 본대에 가려고 했다. 거기에 있으면서 일부러 오전에 힘들게 일해 봤는데 오침 1시간 후에 얼굴이 부었다. 퇴원 후에 몸상태를 점검해보기 위해 오전에 벌목작업을 힘껏 해 봤으나 몸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아 이거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살을 할 수는 없고 전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선으로 가기 위해 당이동 수속을 요청했다.

4-5월경에 당이동 수속을 통해 1사단 쪽으로 이동했다. 나중에 연대참모부에서 민청위원장 빨리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지만 내가 이미 당이동 수속을 해버려서 못 데리고 갔다. 같이 입원했던 사람 중에서 군단 정찰대대 경상도 출신으로 전사인데(이등병) 호랑이 같은 사람이었다. 적진지에 들어가서 보초병을 자루에 씌워서 잡아오고 그랬다. 환자니까 시간이 많으니까 전투경험담을 많이 이야기 나눴는데 나는 상사고 그 사람은 전사였다. 내가 이야기하면 내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내가 고생을 안 한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상사면 보통 부소대장이라서 그 사람이 나에게 “부소대장 동무 참 거짓말도 잘한다. 생전 고생이라는 것은 못해본 것 같은 사람이 전투를 했다고 한다”고 했다.

회복기 중대에서 전선으로 파송을 하는데 병원 측에서는 위생병 한 사람이 따라가서 인수증을 받아서 대오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가는 동안에 50여명 정도의 인원 중에서 내가 계급이 높으니까 내가 지휘관이 되었다. 그런데 거기는 보통 지휘관이라고 해도 자기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없다. 무슨 결정을 하려면 회의를 해서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을 한다. 그날 밤에 행군을 해서 굉장히 위험했다. 강원도 산골은 신작로가 하나밖에 없다. 자동차가 거기로 다닐 수밖에 없다. 적들도 그걸 안다. 비행기가 상공을 배회하다가 자동차 라이트가 보이면 거기다가 기총소사와 폭탄을 막 떨어뜨린다. 밤에 행군을 해도 위험했다.

우리 인원이 대부대가 아니고 소부대니까 낮에 행군을 하는 것이 어떠냐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런데 중국 지원군 마차부대가 낮에 행군을 하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라서 마차로 막 달리다 보니 먼지가 피어올라서 적비행기에 금방 발견되었다. 그래서 공격을 받았다. 인민군대에서는 전투 중에 부상당하고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안 당할 수 있는데 당하는 것은 비상사고라고 했다. 낮에 행군하다가 희생되면 비상사고라서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 밤에 야간 행군을 하게 되어 있는데 낮에 행군을 하다가 공습을 받아서 책임감을 느끼고 나만 피신할 수 없었다.

은폐지를 분산시켰다. 그 광경에 대해 정찰병에게 “아 소대장이 말이야. 애기로만 보였더니 잘 한다”고 해서 나한테 반했다. 그래서 자기네 정찰대대에 가자고 했다. 도착하니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원대니까 원대복귀로 바로 가버리고 나머지는 심사를 받았다. 대열참모에서 심사를 받는데 나는 “군단 정찰대대에 보내주시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안 보내준다고 했다. 내 짐작인데 또 수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력 등을 봤을 때 전선에 지원해서 나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나중에 보병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때 나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2) 최전선으로

부대배치 후 1주일간 아무 일도 주지 않고 휴식을 시켰다. 부대장이 내 문건이 계류 중이라고 했다. 이때 아마 개인문건 검토기간이었던 것 같았다. 1주일 후 부소대장에 임명되어 부대에 배치되었다. 일주일 후에 나를 부소대장으로 배치를 했다.

전선으로 나와서도 군단 정찰대대에서 또 의심을 받았다. 하사관 교육부대에서 훈련만 받을 수 있었는데 왜 전선으로 지원해서 나왔냐? 남조선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기독교를 믿었다는 등의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정찰부대는 적군 진지 종심 깊이 드나드는 곳인데, 월남이나 귀순이 쉬운 곳이라서 더욱더 그랬다.

소대장이 나를 의심스러워했다. 사실은 의심스러울 짓을 내가 했다. 내가 귀환병이나 해방군사들 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나는 정치일꾼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은 신경을 별로 안 썼다. 그 사람들은 알아서 제대로 할 사람들이었다. 친해지려면 내가 먼저 내 속을 털어 보이고. 그 사람들이 물 길러 가면 같이 가고, 그 사람들이 옆에 지나가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나한테 이야기해주는 41살 먹은 아버지 같은 구당원이 있었다. 양원진이라는 부소대장이 참 잘하는데 우리 소대장은 왜 안 좋게 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소대장과 대화할 때 내가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소대장과 주거니 받거니 싸울 수 없었다. 소대장의 안 좋은 품성에 대해 당적으로 비판했다. 소대장은 일정 때 건달이었고 도박이나 하던 사람이 해방 후에 군대에 들어와서 밑에 사람들에게 말도 함부로 했다. 소대장 동무 하사관들한테 나무랄 때는 절대로 부하들 있는데서 하지 말고 하사관들만 모아놓고 비판해야 한다고 했고 하사관들 위신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소대장도 내 말을 듣고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또 안 되었다. 나한테 그렇게 해서 두 번째까지는 충고를 했는데 세 번째는 충고를 안했다.

중대장동 무에게 소대장에 대해 부소대장으로서 입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당원으로서 건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소대장과 있었던 일에 대해 다 이야기를 했다. 내가 떠나든가 소대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중대장이 듣더니 소대장에게 당신이 능력이 부족하니까 당신을 도와주라고 이 유능한 부소대장을 붙여줬는데 당신이 이 사람하고 그렇게 해서야 되겠는가고 이야기했다.

야간잠복 근무 때 대대장은 연락병도 안 데리고 혼자 왔다. 소대장은 굴 안에 있고 나는 참호 쪽에 많이 있었다. 대대장이 순찰 왔을 때 내가 보고를 하면 소대장은 만나 보지도 않고 만족하고 그냥 가버렸다.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표시였다.

미국 간첩이 아군 진지에 들어와서 정보수집해서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가 할 임무가 아닌데도 자원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처음에 소대장이 2분대장에게 임무를 주었는데 2분대장이 그 자리에서 안 나간다고 했다. 여기 나갔다가는 백번 다 희생만 당하니까, “우리 임무는 전투경계 임무이지 수색 임무가 아닙니다. 안 나갑니다”라고 했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나를 보내 달라”고 했다. 소대장은 안 된다고 했다가 다시 보내달라고 하니까 나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중대장에게 미뤘고 중대장도 대대장한테 미뤘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레시버만 하나 있었다. 중대장에게 연락하니 나는 모르겠느니 대대장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대대장이 누구를 데리고 가냐고 물어서, 소대장이 지적해준 사람 3사람 중에 한사람 빼고 2사람하고 간다고 했더니 승낙했다.

거기는 적하고 얼굴이 보이는 거리였다. 평지하고 가까운 곳에는 개울도 옆에 있었다. 적은 고지대에 있고 우리는 저지대에 있었다. 2인 1조로 위장을 하고 잠복근무 하다가 보일 때 철수 하면 위치나 이동로가 노출되니까 날이 밝기 전에 철수를 해야 한다.

대대장이 승낙하여 바로 출발했다. 원래는 보내려고 했던 인원이 총 4명이었는데 나는 2명만 데리고 가서 총 3명으로 원래 인원에서 한 명이 줄었다. 아군 측 진지는 낮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미군의 밤낮 없는 공습으로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아 숨을 곳이 없는데 적진지는 아군 측에서 꼭 필요한 때 외에는 포격을 하지 않아서 수풀과 나무가 많이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아군 수색조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에는 내가 믿는 사람을 배치하고 왼쪽에는 소대장이 추천한 사람을 배치했다. 오른쪽에는 적진지가 가까워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적에게 넘어갈 수 있는 위치였는데 나는 그 사람을 믿었던 터라 그 사람을 그쪽에 배치했다.

적진지에 가까이 가니까 발자국이 있는데 발자국 무늬가 인민군의 것이 아니라 적군의 것이었다. 인민군의 지하족 무늬는 두루뭉술했는데 유엔군 지하족 무늬는 인민군의 것보다 선명했다. 발자국을 따라가서 적들과 마주쳤는데 나는 혼자였는데 그쪽은 여러 명이었다. 서로 기관총을 겨누었고 적군이 먼저 쏘면 나도 쓰러지면서 총을 쏠 생각이었다. 나는 “너희들은 포위됐다. 항복하라”고 말했다. 의외로 적군이 순순히 총을 내리고 손을 들고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데 육박전을 해도 될 판인데, 육박전 직전에 적이 손을 들어버렸다. 그래서 그런 기회가 없었다. 잡아 놓고 보면 그놈들이 인민군이 잔인하다는 교육을 했는지 포로들이 그렇게 떨었다. 그러면 그냥 가서 끌어 안아주고 이제 죽을 염려 없으니까 걱정마라고 했다. 저쪽에서 투항 안하고 반항했으면 육박전을 했을 수도 있었는데 항상 먼저 손을 들어버렸다.

나는 양옆의 대원들에게 쇳소리로 신호를 보내 모이게 했다. 적 정찰병의 총을 수거하고 아군진지로 돌아오는데 총이 없는 포로병들이라 그런지 빨리 가서 천천히 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적 포로병들은 덜덜 떨었다. 나는 “이제 당신들은 살았소. 포로수용소에 가 있다가 전쟁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소”라고 말해주었다.

포로들을 데리고 가는 중에 적군과 아군이 다 지나다니는 작은 개울의 외나무다리에 갔을 때 아군들이 외나무다리 건너편에 오고 있었다. 평소에 미제 고용간첩으로 의심받아오던 내가 자진해서 적진지로 갔다 온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어 뒤따라 왔던 것이었다. 포로 4명은 이북출신 2명에 이남출신 2명으로 오키나와에서 미군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부대에는 포로 생포 전과가 없는 상황이어서 4명의 포로를 잡아온 것에 대해 참가한 대원들에게 표창을 받았다. 내가 책임자로 참가했지만 내가 데리고 간 대원들과 같은 2급 군공훈장만을 받았다. 내가 1급 훈장을 못 받은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고 좀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나는 이제 갓 들어온 부소대장이었고 대원들은 부대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점을 생각하며 내가 훈장 타려고 군대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부대에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은 사라졌다. 특히 소대장은 포로를 잡은 것으로 해서 각종 회의에서 평가와 칭찬을 받아서 그런지 나를 대하던 태도가 180도 달라져서 나를 치켜세워주고 나에게 무척이나 잘 해 주었다.

13) 정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 12시간 전에 비밀무전이 내려왔다. 갱도 안에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협정 몇 시간 전 양측의 격렬한 포사격이 벌어진 후 일순간 포성이 멎었다. 기이한 정적이 잠시 흐른 후 살아남은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멀스멀 고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몇 백, 몇 천 명의 목숨이 사라져간 봉우리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서울 진공전 때는 미친 듯이 앞장서던 남쪽 출신 의용군들에겐 고향에 돌아갈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총알이 빗발치던 민둥산 고지 남북에서 사병들은 남은 탄약을 사흘 동안 각자 2km 밖으로 옮겼다. 폭 4km 155마일 비무장지대의 탄생이었다.

비무장지대는 생각도 못했다. 대대장이 와서 소대장에게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굴에서 동발 기둥 세운 것을 3분의 2만 톱질해 놓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서 폭파하면 굴이 무너질 수 있도록 작업을 해 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병들이 오면서 우리 진지에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 그래서 나는 접전이 붙으면 ‘아, 이 고지를 내주려고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전화가 없어서 레시버 하나만 있었다. 항상 당번이 귀에 대고 있어야 했다. 저쪽에서 벨이 울리는 것도 아니고 연락이 오면 바로 받아야 했다. 최고사령부 명령이라고 해서 필기도구를 준비시켜서 정전협정 준수사항 10가지를 받아 적었다. 비무장지대 설치하는데 그걸 위해서 굴을 없애려고 했구나 생각했다. 3일 동안에 탄피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주웠다.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 많은 탄약 수류탄 이런 것 잔뜩 갖다놓았던 것 전부 높은 산을 넘겨 옮겨야 했는데 무지 힘들었다. 전쟁시기에는 총탄이 빗발쳐도 그걸 운반할 때도 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알이 날아올 걱정도 없는데 그렇게 힘들었다.

그때 내가 계속 말라리아를 앓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반지하 같은 데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 잘 먹은 것도 없는데 굴에서 나와서 평지에서 사니까 약을 안 먹었는데도 말라리아가 나았다. 무기에 아무리 기름칠을 잘 해도 굴 안에서는 녹이 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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