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진 / 장기수

2016년 88세가 된 장기수 양원진 선생의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를 연재한다. 이 자서전은 김익 전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이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양원진 선생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온 양원진 선생의 과거사를 통해 독자들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접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목 차

1. 곡절 많은 운명의 시작
2. 소년시절 - 부모님의 이혼과 친척집 더부살이
3. 이국땅에서 보낸 사춘기 - 중국 북경에서의 생활
4. 일본군대
5. 해방과 귀국
6. 탄압을 피해
7. 전쟁의 포화 속에서 (I, II)
8. 이북에서 보낸 시기 -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
9. 통일사업
10. 옥중투쟁
11. 출소와 새 출발
12. 투쟁의 한 길로 - 투쟁의 최일선에 나서다
13. 못다한 이야기들

 

4. 일본군대

1) 일본군 군속으로 강제징용

1945년 17살에 소화일본국민학교 졸업 후 일본군에 징용되어 군속으로 끌려갔다. 군속의 근무 기간이 정해진 것이 없는데 일제가 패망하여 6개월 만에 일본군에서 제대했다.

군속은 용원, 고원, 고등관으로 계급이 나뉘어진다. 일반 병사와 같은 급인 용원, 하사관과 같은 급인 고원 그리고 장교와 같은 급인 고등관으로 나뉘어지는데 나는 용원으로 있으면서 사무병 역할을 했다. 그때 군속 월급은 군인들보다 많았다. 상등병이 30원 정도였는데 나는 80원 정도 받았다. 일선수당이 많이 붙었다. 중학교 나온 사람은 90원 정도 받았다. 고향의 어머니에게 세 번에 걸쳐 300원씩 총 900원을 송금을 했다. 원래는 그렇게 큰 금액은 송금을 안 해주는데 어찌어찌해서 겨우 송금할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한 번만 받았다고 했다.

여름에 두 달 동안 목총으로 총검술을 맹훈련해서 기술, 체력, 민첩성을 평가하는 부대시합에서 내가 북경시방위사령부 소속 500명 중에서 3등을 했다. 실제로는 2등정도 되는데 초년병이라 3등을 준 것 같았다.

내가 있었던 일본군대에서는 외래자용 큰 목욕탕과 직원용 작은 목욕탕이 각각 1개씩 있었다. 일본군인들은 매일 목욕을 했다.

일본군‘위안부’가 북경에 오면 여행증을 정리하기 위해 인솔자가 역전출장소에 들렀다. 나는 인솔자를 따라 나가서 50미터 정도 되는 먼발치에서 위안부들을 보았다. 15-20명 정도였고 내 나이 또래나 우리 누나 나이 또래였다. 위안부를 일본군에서는 군속으로 대우했는데 일본군인들이 줄을 서서 임시로 칸을 막은 천막에서 위안부들과 성교한 것을 이야기했다.

내가 근무한 일본군대는 북경시내에 있는 병참사무소와 역전출장소라 전투는 없었다. 나는 2층짜리 건물인 북경 역전출장소에서 2인 1조로 24시간 근무를 서고 아침 8시 교대를 한다. 하루 근무하면 다음날 하루는 휴식하는 식이었다, 쉬는 날은 상관들과 극장 관람을 자주 갔다. 고등과 나온 일본 상관(반장)이 시내 외출 나가면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상관이 한 번은 길을 가다가 나를 억지로 유곽에 밀어 넣었는데 내가 펄쩍 뛰며 뛰쳐나오기도 했다. 일본 상관이 극장표도 다 사주었다. 한 번은 내가 먼저 극장표를 사니 그것을 취소시키고 자신이 다시 표를 샀다. 결국 한 번도 내가 표를 산 적이 없었다. 봉급은 내가 더 많았다. 그 사람은 30원 정도였고 나는 84원일 때였다. 군인보다 군속이 수당이 더 많았다.

쏘련군이 참전해서 일본군대 최정예부대인 관동군이 쏘련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일본군대 북지파견군 중에서 최정예 부대인 북경에 주둔하고 있는 다끼부대가 만주로 갔다. 북경은 ‘신조부다이’라는 모두 나이 먹은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로 대체되었다.

2) 일본군 악질 상사

일본부대의 일본군인들 중에는 일반적으로 조선사람을 보면 이를 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보고 오히려 미안해서 조선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일본군인들도 있었다. 그 외의 일본군인들은 조선사람들을 별로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일본군인 중에 상사급인 사람이 나를 상당히 귀여워하면서 자꾸 나보고 지원병 나가라고 했다. 지원병 나가서 일찍 승진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했다. 그 사람은 상사부터 준위까지 승진해서 전시에 일본 천황이 집무하는 일본 대본영에 발령받아 바로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 사람은 평소에 술도 많이 안 마시고 언어나 몸가짐이 굉장히 진중했다. 함부로 여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일본군인들 중에 악질 상사 두 사람만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들에게는 두들겨 맡았지만 다른 일본군인들 하고는 잘 지냈다. 일본장교들 중에 제일 못된 것들이 소위나 중위였다. 굉장히 건방지고 사병들을 함부로 대하고 멸시했다. 대위쯤 되면 좀 점잖아졌다.

한 번은 내가 출장소 출입문도 못 잠그고 잠들어 버렸는데 어깨에 노란 견장의 장성이 와서 깨웠다. 나는 노란 견장을 보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벌떡 일어났는데 장성은 미안하다고 부드럽게 말하며 앉으라고 했다. 장성은 자기가 천진까지 공무집행지인데 친구 만나는 사사로운 일로 북경에 왔는데 여행증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점잖은 느낌이었다. 보통 장성은 부관과 연락병이 따라 다니는데 그 사람은 혼자서 왔다.

갑부와 을부의 2개조에서 갑부 반장이면서 총반장이었던 악질 야마쟈끼 상사가 쇠로 된 징이 박혀 있는 일본군화를 벗어서 내 얼굴을 때렸다. 한 대는 맞아도 두 대는 못 맞을 것 같았는데 양쪽에 한 대씩 맞아서 입에서 피가 많이 났고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었을 정도였다.

일본군 중사와 하사는 단검을 차고 상사가 되면 긴 칼을 차는데, 지급되는 관도가 있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명도(자기집의 가보)가 있다. 악질 상사 그 놈은 긴 칼을 차고 다니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놈이 얼마나 악질이냐면 중국군 포로병 18명을 칼로 목을 쳐서 그걸 사진 찍어서 자랑했다.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하려고 그 짓을 했다고 했다.

다른 일본군인들도 그놈을 싫어했는데 교대로 식당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 놈이 식당에 있으면 오른쪽 볼에 점이 있는 그 놈이 있다는 표시로 손가락을 오른쪽 볼에 갖다 대어 그 놈이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고 그 놈이 식당에서 나온 후에야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3) 탈영병들

병참 합숙소 2층의 일부는 고등관실로 장교들이 이용했고 일부는 직원내무반으로 사용했다. 1층은 단기투숙하는 하사관과 병사들이 이용했다. 육군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오면 원대가 있으면 바로 복귀하지만 원대가 멀리 가버렸으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때 병참합숙소 1층에 투숙 중이었던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기차를 타고 가다가 탈영을 했다. 탈영병들은 장개석군대나 팔로군, 왕조명 일본괴뢰정권 군대에 붙잡혀서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느 군대에도 안가고 고향으로 가겠다 말했다. 그러면 중국옷을 입혀주고 보내주었는데 결국은 걸어가다가 일본헌병에게 잡혔다.

나는 그때 민족의식이 있었다. 탈영병들을 접수하면서 발음을 들으면 조선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탈영병들을 숙소에 배치해 놓고 나서 조선사람들이 있는 방에 가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조선독립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네들은 나이가 많이 먹었는데도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어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칭찬을 했다. 나는 부대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 갔다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술도 사오고 만두도 사서 갖다 주었다. 하루는 이 사람들이 병참합숙소 1층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고성방가를 했다가 2층 고등관실에 있던 일본군 장교가 지나가다가 목격했다. 다행히 내가 1층에 있어서 나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서 내가 술을 사다 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장교는 “직원이 그런 걸 못하게 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했냐”며 나에게 주의만 주고 끝났다.

일본군은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는 상태로 팔로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왔어도 36시간 이후에는 무조건 탈영병으로 처리된다. 산동분견대에서 옥쇄하다 전멸당한 부대에서 살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이나 몸에 파편자국이 푸르스름했다.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어쩌다가 얼굴이 그렇게 되었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산동분견대에서 옥쇄하고 싸우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싸움도 잘 못하는 중국군대한테 당했냐”고 비꼬았는데 그 사람은 “아니다, 팔로군이 강하다. 팔로군들은 강냉이떡을 먹으면서도 포로들에게는 밀가루떡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징역 살고 나와서 자기 동료들한테 “팔로군이 대우가 좋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세 번이나 징역을 살았다고 했다.

4) 제국대학 출신 일본군인들

일본 망하기 전에 보충된 인원으로 이등병 몇 명이 왔다. 내가 보기에는 잘난 척 하는 것이 아주 건방져 보였다. 일본 사람들은 그 젊은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였다. 그들은 방 벽에 구호를 써 붙이고 회의를 자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제국대학 출신들이었고 대부분은 장교나 간부후보생으로 가는데 반전사상을 가져서 일반병으로 왔다고 했다. 일본이 망한 상황에서 팔로군 줄을 찾으려고 했다. 자기들은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본이 망하고 나니 그들은 아예 대놓고 써클을 조직하고 회의와 교양을 했다.

5) 일본인 여배우와의 첫사랑

어느 날 30여명 소녀들과 악장과 소도구 담당 남자들 몇 명으로 구성된 오사까소녀가극단이 왔다. 오사까소녀가극단은 유명한 다까라즈까소녀가극단보다는 수준이 좀 낮았다. 일본 본토에서 위문배우들이 북경에 오면 맨 처음 우리 구락부에서 공연을 하는데 북경시에 있는 일본 북지파견군사령부 군인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와서 관람을 했다.

그때는 내가 17살로 학교에서 단거리나 장거리 마라톤을 하면 전교생 중에 1등을 했고 일본군대에서 총검술을 했을 때도 3등을 할 정도로 아주 민첩했다. 나이도 내가 제일 어리고 민첩해서 그런지 나에게 무대 막을 걷는 일을 시켰다. 내가 무대 이쪽에서 저쪽까지 재빨리 뛰어서 장막을 걷으면서 마지막에 장막을 구석으로 던지면 객석에서 “와 멋있다”면서 박수를 쳤다. 배우들이 긴장하고 있다가 그런 나를 보았을 것이고 나의 첫사랑도 나를 보았을 것이다.

가극단이 다른 지역 순회공연을 하고 세 달 후에 다시 북경에 와서 송별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가극단의 일본 여배우가 내가 있던 내무반에 찾아왔다. 20살짜리 니시가와 시게꼬(예명 : 시게노)는 나에게 청혼을 했다. 시게꼬의 일본말 청혼을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야나가와 씨 나를 애엄마로 삼아주세요”였다. 나는 시게꼬에게 “내가 당신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조선사람이고 당신은 일본사람이다. 불행한 결과를 만들지 말자. 나는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피하고 저쪽은 울고불고 했다. 그때 나는 단편 애정소설도 못 본 상황이었다. 그 일본인 여배우가 탁구를 잘 쳤다.

나의 상관으로 노총각들 중에는 시게꼬를 짝사랑 하던 총각들이 많았다. 다른 병사들이 술을 먹으면 “너 애인이 누구냐”라고 나에게 농담을 했다. 가극단이 천진까지 갔다가 미국 잠수함 때문에 못가고 돌아왔다. 북경시내에 있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초대받아 관람을 갔다. 일본이 항복하자 가극단은 건설 중이던 북경 신시가지 북경시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노동자들 숙소에 집결해 있다가 1946년에 일본으로 떠났다. 떠나는 날 내가 전송가기로 약속했는데 그때는 연정이 불탔던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지만 어차피 맺어지지 못 할 거라 생각해서 약속을 어기고 전송을 안 갔다.

손목도 한번 다정하게 잡아보지 못했지만 그 여성이 첫사랑인 것 같다. 내가 31살 때 노총각인데도 예쁜 묘령의 여인에게 시선도 안주는 것을 보고 나중에 매형이 하는 말이 “너는 그때 마음의 정조를 다 바쳤는가 보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못 잊는다. 밤에 꿈을 꾸면 그 여자가 일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살고 있고 내가 찾아 헤매는 꿈을 꾼다.

나중에 재북평한국인중학교에 다닐 때 아직 교실이 없이 공원 같은 곳에서 중국어 수업을 받을 때 있었던 일이다. 첫사랑과 이별한 날 중국어 시간에 멍하게 있다가 세 번 주의를 받고 네 번째 불려나가면서 머리에 거미줄 걸린 줄도 몰랐다. 선생이 중국어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내가 잘 읽으니까 선생이 화가 풀렸는지 혼내지는 않았다. 나중에 일본인 친구집에 들렸더니 친구가 막 화를 냈다. 그 여자가 트럭이 떠나는데도 승차하지 않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다고 했다. 그 친구는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원고를 다 보여주는데 나에게만 안 보여줬다. 아마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라고 추측했다. 그 친구는 만주태생으로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사는데 편지왕래를 하다가 6.25전쟁 시기에 주소를 잃어버려서 연락이 끊겼다.

6) 일본군대에서 맞이한 해방

군대 입대하기 전에 아버지가 옛날 라디오 재생식 수신기 중에서도 장거리(고주파 증폭) 5구 수신기로 새벽에 계속 방송을 들으셨다. 모스크바 방송과 워싱톤 자유의 소리 방송과 모스크바 방송을 주로 들으셨다. 일본 사람들 중에서도 아버지와 뜻이 통하는 사람들 있었다. 아버지와 일본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출장소 야간 근무 중에 갑자기 전원 사무실로 모이라고 해서 갔다. 사무실에 전원 정렬해서 라디오로 천황폐하의 특별방송을 듣는데 잡음이 너무 심해서 방송내용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그 다음날 일주일에 두 번 하는 군사령부 군사훈련을 받고 오는 길에 부대에 가는 명령서를 수령했다. 명령서를 가져가면서 열어보니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제 방송이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우리 부대에서는 제일 먼저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악질 상사를 죽이려고 내무반 2층에 바로 올라가서 일본도를 들고 갔더니 그놈은 벌써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세 살 연상 동반 입대자와 함께 송별회를 했다. 일본군대에서 해방 후에 제대를 해서 재북평한국인중학교에 좀 늦게 들어갔다. 그때 나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민족의식만 있었다. 민족의식이라는 것도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강점하고 속국을 만들었느니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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