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뉴스>가 단독 입수한 최원일 천안함 함장의 제1회 진술서(2쪽)와 제2회 진술서(3쪽, 2010.3.27), 그리고 자필기록(3쪽). 3건 모두 동일 필체다. [사진 - 통일뉴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 중령이 11일 법정에서 입을 열어 중요한 내용들을 증언했다. 이에 <통일뉴스>도 단독 입수해 두었던 최 함장의 제1,2회 자필진술서와 자필기록 등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최원일 전 함장은 11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3호에서 제36형사부(재판장 박순관)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의 천안함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최 전 함장은 사건 당시 천안함이 정상 경계근무 중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천안함에 장착된 소나(sonar, 음파탐지기)로는 어뢰 탐지가 불가능했다고 증언했으며, 사건 현장에서 사고원인을 ‘어뢰’ 피격으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연어급 잠수정, “시운전 중이라는 정보까지 받았다”

먼저 그는 사고 당일인 3월 26일 아침 북측 잠수함 정보 사항에 대해 “‘강도가 집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서 담배를 피더라’는 정도로 문자 및 정보를 받았다”며 “이는 평상상태라는 뜻이고 특이 동향은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연어급 잠수정이 몇 척 안 보인다”는 정보를 전파 받았지만 “그때 당시 경계태세 상황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 최원일 전 함장은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백서에서 예시한 '연어급' 잠수정. [자료사진 출처 - 백서]
그는 ‘연어급이라고 명칭이 정해져 있었느냐’는 변호인 측 신문에 “정해져 있다”고 답하고 연어급 잠수정에 관해 “배치 정보는 알고 있었다. 시운전 중이라는 정보까지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전날(25일) 풍랑주의보가 발효돼 대청도에 피항해 있었다”며 26일 당일에는 “5시 30분경 닻을 올려 6시경 백령도 서방에 도착해 정상 경비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사건 당시 서해상에서 진행 중이던 한미합동 군사연습에 천안함은 참가하지 않았다며 “독자적으로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확인했다.

천안함 소나 어뢰 탐지 못해, “MBC 켜놓고 KBS 보겠다는 것과 같다”

특히 천안함에 장착된 음향탐지 장비인 소나는 ‘AN-SQS58’ 기종으로 주파수 대역이 달라 어뢰공격을 탐지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MBC를 켜놓고 KBS 보겠다는 것과 같다”며 “주파수 대역에 들어오는 것을 탐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잠수함은 탐지를 제한적으로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소나가 수집한 음향의 자동녹음 여부에 대해서도 “그때까지는 (자동녹음이) 안 됐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사건 하루 뒤인 3월 2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이기식 당시 합참 정보차장은 “어뢰가 배쪽으로 오면 음탐기에서 포착할 수 있다. 회피하는 전술이 있다”고 답변한 바 있다.

최 전 함장은 신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북측) 공격대기 지점 인근”을 왕복 기동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 해군 초계함이 어뢰 발사를 감지할 수 없는 허술한 소나 장비를 갖추고 최전방에서 북측의 공격대기 지점 인근을 오가며 경계근무를 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이같은 믿기 어려운 사실에 대해 한 민간 전문가는 “천안함의 소나로는 어뢰를 탐지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안다”고 확인했다.

‘결국, 경계실패가 아니냐’는 신문에 그는 육군의 경계초소에서의 경계실패와는 다르다며 “우리는 항시 대기 상황에서 맡은바 임무를 철저히 다 했고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경계실패라는 말은 용납이 안 된다”며 “북한이 잘못한 것을 왜 여기서 다 책임져야 하느냐? 북한이 도발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1,2회 자필진술서, “큰 폭발음”
자필기록, “어뢰 같은데요. 함미가 아예 안 보입니다”


그는 특히 사건 당시 “뭔가 와서 쿵하는 느낌”이었다며 “22시 25분경에서 30분경 이원보 22전대장과 통화하면서 어뢰로 판단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민군합동조사단이 작성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이하 보고서)에는 통화시간이 ‘22:32~22:42’으로 기록돼 있다.(127쪽)

이같은 판단의 근거로 그는 “현장에서의 지휘관 판단”이라며 “충격의 느낌이나 함미가 두동강 난 정황,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판단했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통일뉴스>가 입수한 최 전 함장의 제1회 진술서는 “2125시경 폭발음과 동시에 몸이 30~40㎝ 뜨면서 우현으로 떨어짐. 당시 폭발음 청취시 정전”, “충격에 의한 폭발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큰 폭발음”이라고 기술돼 있다.

작성일이 3월 27일로 밝혀져 있고 첫 진술보다는 좀더 상세하고 잘 정리돼 있는 제2회 진술서에는 “2125시경 큰 폭발음이 함미 방향에서 들리며 의자에서 몸이 30~40㎝ 뜨면서”, “큰 폭발음이 청취되고 몸이 뜨는 것으로 충격에 의한 것으로 판단되나 인양후 정밀조사 필요”라고 돼 있다.

27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제1,2회 진술서는 모두 ‘폭발음’을 언급하고 있지만 ‘어뢰’라는 직접적 표현은 없다.

제1,2회 자필 진술서 외에 당시 상황을 가장 상세히 기록한 일자 미상의 2쪽 짜리 ‘침몰/구조 상황’ 자필기록에는 22전대장과의 통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어뢰’로 보고한 대목이 나타난다.

▲ ‘침몰/구조 상황’ 자필기록 마지막 부분. [사진 - 통일뉴스]
○ 전대장과 통화내용
“뭐에 맞은 것 같습니다.”
“뭔거 같애?”
“어뢰 같은 데요 함미가 아예 안 보입니다.”
“어디? 함미 어디부터?”
“연돌이 안 보여요” “고속정, RIB 빨리 좀 조치해 주십시오.”
“생존자는?”
“58명이고 다수가 피흘리고 못 일어나는 중상자가 2명입니다.”


그러나 이 자필기록은 내용은 가장 상세하지만 정식 진술서 형식을 갖추지 않았고, 글씨체도 가장 흘려썼으며, 작성일자도 기록되지 않아 검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내용은 보고서에도 전문이 수록돼 있어 합조단도 이를 주요 자료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제2회 자필 진술서 마지막 부분. 지문날인은 신원보호를 위해 수정했음. [사진 - 통일뉴스]
최 전 함장은 기자와의 대화에서 자필진술서에 대해 “자필로 쓴 것은 국방부가 조사했다”며 “다음날인 3월 27일 평택에서 썼다”고 확인했으며, “타자 친 진술서는 4월 초부터 합조단 조사에서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필기록에 대해서는 작성시점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3월 27일 진술서 작성시 참고용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통신장이 비상통신기를 이용해 “어뢰”라고 교신한 내용에 대해 “무선 통신기는 다 녹음이 돼서 2함대 사령부에 녹음 테입이 있다”고 증언했다.

고속정 도착시간, 법정증언과 자필기록 어긋나

그는 법정 증언에서 “고속정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며 “RIB만 요청했다”고 자필기록과 어긋나는 증언을 했다.

심지어 변호사들이 합조단 조사시 ‘고속정과 RIB를 요청했다고 진술했느냐’는 여러 차례의 확인 질문에 그는 “RIB를 고속단정이라고 알려줬는데 고속정으로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까지 말하며 “RIB만 요청했다”고 확언했다.

국방부가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이하 백서)에도 고속정 제235편대와 제233편대는 즉시 출항해 21:58, 22:10에 각각 현장에 도착했다고 기록돼 있으며,(48쪽) 이미 도착한 고속정은 천안함에 접근할 수 없어 인명구조에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RIB(고속단정, Rigidhuller Inflatable Boat)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필기록에는 “고속정 올 때까지 적이 도발할 수 있으니 몸 숙이고 조용해라 고속정 일단 기다리라”는 문단 바로 다음에 22전대장과의 통화가 이루어지고 “고속정, RIB 빨리 좀 조치해 주십시오”라는 문제의 대목이 나온다.

고속정 도착시간이 백서에서 제시한 시간보다 늦었든지, 최 함장의 자필기록이 거짓이든지 둘 중 하나는 틀린 셈이다.

“해군, 통상적 해난사고 ‘좌초’라고 쓴다”
이용기, 천안함 작전관에게 듣고 “‘최초 좌초’ 별표표시”

그는 당일 정상적인 경계구간을 왕복 운항했다며, “암초는 없는 지역이다”고 확언했다.

이 대목은 27일자 제2회 자필 진술서에서 “현장은 상시 작전을 수행하던 구역으로 암초나 해도상 장애물은 반드시 알고 있으며 사고발생 구역은 암초가 없음”이라고 진술한 대목과 일치한다.

또한 백령도에 근접해 운항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청해전 이후 북한군의 해안포 위협에 대비해서 음영구역이라고 설정된 곳에서 은폐차원에서 경비한 것”이라며 “대청해전 이전에도 북한군의 위협징후가 있을 때 지시에 의해 수차례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천안함 포술장이 최초 보고시 “천안인데 침몰되었다. 좌초다”라고 보고한데 대해 그는 기자에게 “졸업한지 2년 된 중위가 구조를 요청하려고 하는데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해난사고는 보통 상식적으로 좌초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정에서도 “해군에서 보통 좌초라는 말을 배에 문제가 생겨 가라앉으면 좌초라고 쓰느냐”는 변호인측 신문에 “해군에서는 통상적인 해난사고를 좌초라고 쓴다”는 입장을 고수해 변호인 측으로부터 질문공세를 받기도 했다.

▲ 이용기 씨가 3월 27일 군 관계자들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최초 좌초'와 별표를 표시한 상황도. 붉은 점은 천안함(함수) 위치로 들었다고 증언했다. [사진출처 - 아시아경제]
한편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 해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유가족 이용기 씨는 최 전 함장에 앞서 증인으로 출석해 사건 다음날인 3월 27일 오전 해군 관계자들이 브리핑 과정에서 ‘좌초’를 언급했다고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

이 씨는 “사고 다음날인 2010년 3월 27일 오전에 이원보 천안함 22전대장으로부터 ‘천안함이 (연봉바위쪽에) 좌초돼있다’는 말을 듣고, 평균수심 6m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천안함이 갔다는 것이 의문이 들어 오후에 천안함 작전관인 박연수 대위에게 ‘최초 좌초’ 지점이 어디냐고 물었다. ‘백령도 서방 몇 마일쯤’이라고 하길래 좌표를 찍으라고 했더니 해당 지점을 찍었다. 그 지점에 ‘최초좌초’ 별표표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최 전 함장은 ‘천안함이 사고 직전 별표지점 쪽으로 지나갔던 것 아니냐’는 신문에 “좌초라고 표기된 데를 지나갔을 수도 있는데, 거기는 암초가 없다”며 “(천안함) 홀수는 높이가 3m고 수심이 20m 이상인데 어디서 암반이 올라와서 박겠느냐”고 좌초설을 부인했다.

그는 검찰 측이 신상발언 기회를 주자 “전날 풍랑주의보 여파로 높은 파도 속에서 대청해전 이후 계속 경계작전을 수행하던 그곳에서 파도를 견디면서 정상근무를 하고 있었지 임의로 백령도에 갔던 것은 절대 아니다”며 “당직자들이 맡은 위치에서 근무복을 착용하고 철저히 임무를 수행하고 일부는 다음 당직을 위해서 잠을 자거나 독서, 운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결코 모두가 휴식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최 전 함장의 이같은 발언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천안함이 오후 8시까지 경계임무를 수행한 뒤 TV시청과 휴대폰 이용 등을 위해 백령도에 너무 근접 운항하다 좌초됐다는 설이 나돈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CCTV 후타실 사진, 마지막 장면 아니었다

▲ 후타실 CCTV 사진. 사고 직전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출처 - 보고서]
이날 최 전 함장의 법정 증언과정에서 합동조사단이 생존자들이 최종 촬영된 CCTV라고 보고서에 제시한 CCTV 사진이 사실은 최종 사진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211쪽)

사진을 확인한 그는 “바로 (사고)직전은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증언했다.

특히 함미에 위치한 후타실(체력단련실) 사진을 확인한 그는 사진에 나타난 총 6명 중 4명의 인적사항 만을 확인, 서면으로 제출했다.

보고서 사망자 명단(129쪽)에는 후타실에서 중사 1명, 하사 1명, 병장 1명, 상병 1명 등 총 4명의 시신이 수습됐지만 사진에는 하사 2명, 병장 2명, 상병 1명과 당직근무자 1명 등 6명이 나타나 있다.

▲ 천안함 함미 사망자 현황도. [사진출처 - 백서]
그는 사고 당시의 충격과 침몰과정, 그리고 조류의 흐름 등에 따라 시신이 수습된 장소가 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국이 마지막 CCTV 화면이라고 제시한 사진 속 병사 중에도 생사가 갈린 경우가 있을 수 있어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는 사고 발생 직후 천안함 승조원들의 핸드폰을 수거하고 함구령을 내렸다고 확인했으며, “너무 많은 말이 나올 것 같아”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증언했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 최원일 전 함장은 재판정을 나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원일 전 함장은 이날 재판 과정에서 함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며 떳떳함을 강조했지만 여러 차례 “답변하기 곤란하다”거나 “답변하기 싫다”는 식으로 피했으며, 피고인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의 질문에는 아예 답하지 않았다.

또한 수심과 암초 문제 등을 다루면서는 “서울 안 가본 사람이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비꼬는가 하면 좌초 여부를 따져 묻는 변호인 측에 “거기는 암초가 없다”고 언성을 높이다가 “너무 흥분해서 죄송하다. 자제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재판을 마친 후에는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미리 써온 입장 발표문 낭독을 통해 “자신의 집에 강도가 들어 가족이 희생되었는데 보험금을 타려고 자작극을 벌였다고 하면 참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저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 경계에 실패를 한 군인들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 우리 천안함의 명예를 훼손하고 숭고한 희생을 욕되지 않게 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재판정에서는 유족 대표 이정국 씨가 후타실 승조원들의 신분확인을 요구한 변호인단을 향해 “죽은 사람 가지고 뭐 하느냐, 니 **가 죽어서 그러면 좋아?”라고 비난하고 “두고 봅시다. 법 좋아, 대한민국”이라고 소리쳐 퇴정 당했으며, 다른 유족 한명도 “유족인데, 조심하시라고”라고 말하다 역시 퇴정 당했다.

심재환 변호사는 재판장에게 “변호인을 협박하는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하며 이정국 씨 등의 ‘감치’를 요구했으며, “지휘를 똑바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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