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고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전 작전관이 법정에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라고 증언해 천안함 사고지점이 바뀔지 주목된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역시 법정증언 시 수심 20m 이상을 언급한 바 있으며, 사고지점이 바뀔 경우 사고원인도 달라질 개연성이 높다.

박연수 해군 대위는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3호에서 제36형사부(재판장 박순관)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의 천안함 관련 12차 공판에서 천안함에 장착된 측심기에 나타난 수심은 “20m 내외였다”고 증언했다.

박 대위는 “배의 함교에 측심기가 있다. 항상 기동항해를 할 때 측심기를 계속 작동시켜놓고 수시로 확인한다”며 사고 지점 수심을 “20m 내외로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사건 최종보고서에서 “수심 47m”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특정하고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176쪽)

“수심 20m 내외”와 “수심 24m”

▲ 천안함 작전관으로 사건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대위가 9일 오후 증언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 - 미디어오늘 이치열 기자]
특히 박 대위는 “10일전 작전투입 됐다”, “같은 구역에서 계속 항해했다”며 약 6km 구간을 평균 시속 6~7노트(12km)의 속도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한 시간에 두 번 꼴로 당일에만도 30여 차례 왕복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해 그가 기억하는 “수심 20m 내외” 증언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최원일 전 함장도 지난 6월 11일 법정진술에서 좌초설을 부인하면서 “(천안함) 홀수는 높이가 3m고 수심이 20m 이상인데 어디서 암반이 올라와서 박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수심 20m 내외” 증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다른 정황도 있다. 사건 하루 뒤인 3월 2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이기식 합참 정보작전처장은 “어제 3월 26일 21시 30분 백령도 서남방 1마일 해상에서 아 초계함이 원인미상으로 침몰된 상황 관련 보고”라면서 “사고지점은 수심 24m”라고 보고했고, 29일 국방부 일일브리핑에도 24m, 30일 해양경찰청 보고에 25m가 등장한다.

사고지점 수심이 47m가 아니라 20m 내외라면 그만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해 운항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이라면 1.6km로 사고지점으로 발표된 2.5km 보다 훨씬 근해임을 알 수 있다.

대청해전과 “백령도 서남방 1마일”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은 28일 국방부 일일브리핑과 29일 국방부 민주당 당정협의회 보고, 심지어 사건 시간이 21시 22분으로 정확히 확정된 4월 7일 합조단 발표 시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군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나온 ‘정부 발표와 달리 천안함은 백령도 1㎞ 이내까지 근접했다가 10m 이내의 저수심 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 제보가 보다 신빙성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한 저수심 지역을 운항한 이유에 대해 최원일 전 함장은 법정 증언에서 “대청해전 이후 북한군의 해안포 위협에 대비해서 음영구역이라고 설정된 곳에서 은폐차원에서 경비한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박 대위도 “전년도(2009년)”에 “상급부대에서 ‘어떠어떠한 적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역을 바꿨다’라고 지시를 했고 지시에 의해서 바뀐 것”이라고 증언했다.

대청해전이 2009년 11월 10일 발생했고, 이를 교훈삼아 상급부대에서 백령도 음영구역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면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해역으로 항로를 설정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별표지점은 백령도에서 '1.12km' 거리
천안함은 왜 백령도 방향으로 유턴(변침)했나?

▲ 박연수 대위는 자신이 사고해역을 지목했다고 증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최초 좌초 별표지점을 특정해 구글어쓰를 통해 거리를 확인한 결과 1.12km로 나타났다. [사진 - 통일뉴스]
박 대위는 사고 다음날인 27일 유가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작성했던 작전도 사진 중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과 관련 “‘사고해역은 이 근방이다. 백령도 남서쪽 이 해역이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드린 적 있다”고 확인했다.

또한 유족 중의 한 명인 이용기 씨가 ‘최초 좌초’라며 별표로 표시한 지점과 관련 ‘별표지역을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느냐’는 변호인 신문에 “있다”고 답했다.

최원일 전 함장도 법정 증언에서 ‘천안함이 사고 직전 별표지점 쪽으로 지나갔던 것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좌초라고 표기된 데를 지나갔을 수도 있는데, 거기는 암초가 없다”고 통과 가능성을 시인한 바 있다.

박 대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이나 박 대위와 최 함장이 모두 통과 가능성을 인정한 별표지점은 백령도 인근 해역으로 박 대위가 평소 항로라고 증언한 ‘2~2.5마일’(3.2~4km)이나 합조단이 사고지점으로 발표한 2.5km 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다.

별표지점을 특정해(37-56-30N, 124-36-50E) 구글어쓰의 거리측정 기능을 이용해 측정해보면 1.2km 이내임을 알 수 있다.

▲ 천안함은 A지점(21:05시)에서 B지점(21:09시)으로 마지막 유턴(변침)을 했다. 신상철 대표는 바다 쪽이 아닌 수심이 낮은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신상철 대표는 박영선 의원이 군측으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KNTDS(해군전술지휘통제시스템) 좌표를 근거로 천안함이 마지막 유턴(변침)시 바다 쪽으로 하지 않고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대목을 지적했지만 박 대위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박 대위는 천안함이 정해진 작전구역 운항시 ‘1,000 야드’(0.9km) 정도의 범주 내에서 운항한다고 밝혀 실제로 천안함이 남동쪽에서 마지막 변침시 백령도에 상당히 근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신 대표는 <통일뉴스>와의 통화에서 “바람이 북서풍이면 회전반경(터닝써클)이 길어져 유능한 항해사라면 수심이 깊은 바깥 쪽으로 돌려야 한다”며 “항해 경험이 별로 없어 백령도 쪽으로 터닝해 결국 별표지점 같은 저수심에 들어선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수심 24미터라면 어뢰나 계류 기뢰 가능성 없어”

또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에 불과하다면 정부가 발표한 북한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 논리도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합조단은 최종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가스터빈실 중앙 좌현 3m, 수심 6~9m에서 고성능 폭약 250kg이 폭발하여 천안함이 피격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확언한 바 있다.

▲ 합조단 최종조사보고서 어뢰 공격도. 수심이 20m 내외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수심 47m 지점에서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수심 20m 내외의 지점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많이 다를 수 있다.

서재정, 이승헌 등 재미학자들은 2010년 10월 17일 합조단 보고서를 반박하는 보고서에서 “사고지점의 수심이 24미터라면 어뢰가 오작동 등의 이유로 해저에 충돌하며 폭발했을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어뢰나 계류 기뢰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대신 천안함을 타격한 원거리 폭발물은 해저에 고정되어 있거나 해저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폭발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 6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수명 박사는 어뢰가 천안함 선체 밑에 머무르는 순간 버블젯 폭발을 일으킬 확률을 0.0000001% 수준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분석했는데, 수심이 더욱 낮은 곳에서 절묘하게 적정한 수심에서 터져줄 확률은 더욱 줄어든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후타실 CCTV 김 모 병장은 생존자
박연수.공창표, ‘물기둥 보지 못했다’ 증언


이날 재판정에서 박 대위는 ‘항해하는 동안 백령도가 육안으로 식별가능 했느냐’는 질문에 “불빛이 육안으로 식별됐다”고 답했으며, 사고 순간 선광이나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합조단이 천안함 최후의 모습이라고 공개했던 CCTV 녹화 장면은 사고 한참 전의 모습인 것으로 확인됐다. 함미에 위치한 후타실 사진에 나타난 앞쪽 김 모 병장은 생존자로 확인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또한 최원일 전 함장이 유일하게 신상확인을 하지 않았던 후타실 CCTV 사진에 나타난 김 모 병장의 실명을 확인했으며, 김 병장은 생존장병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에 “사고 순간 (사진)이라면 맞지 않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우현 견시를 담당했던 공창표 하사는 사고 당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며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물벼락을 맞았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봉을 잡고 있었고 튕겨져 나가지 않았다”며 “발로 나무 난간을 밝고 있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파열됐다”고 설명하고 “허벅지까지 물이 찼다”고 증언했다.

공 하사는 ‘쾅’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었지만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구조물을 밟고” 함교를 지나 좌현 쪽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해 천안함이 단번에 90도로 기울었다는 박연수 대위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만일 천안함이 바로 90도로 기울었다면 우현에 있었던 공 하사는 그대로 바다에 수장됐을 것이다.

공 하사는 5월 24일부터 6월 2일까지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집단교육을 받았다”며 “6월부터 발령을 앞두고 적응을 위해 심리안정, 주로 정서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퇴원하고 나서 다시 자대배치 받고 나서 2010년 7,8월경 국방부에 가서 조사받았다”고 추가조사 사실을 밝혔다.

이날 공판에서 박 대위와 공 하사는 일부 사실관계 외에는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으며, 박 대위의 경우 증언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변호인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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