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작성 날짜를 알 수 없는 문서 하나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후원했던 어느 회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항공법에 대한 국제회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몇몇 국가들이 시작 연설에서 KAL기 사건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호주 대표단은 이 사건이 회의에서 공식 의제로 다뤄지는 것에 반대해야만 한다고(should oppose) 되어 있다(332쪽). 왜냐하면 이 회의는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지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4일에는 유엔 관리와 호주 외무부 사이에 사건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곧 있을 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국 회의에서 KAL기 사건에 대한 결의안 채택을 추진하며 이에 대한 호주 정부의 지지를 바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외무부 관리는 한국 정부의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 현재 외무부가 의견을 밝힐 입장에 있지 않으며, 1월에 발표된 장관의 성명서에서처럼 북이 개입했는지에 대한 증거 검토가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340쪽).

김현희는 1987년 12월 28일에 자필진술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진술서가 번역되어 첨부된 문서도 있다. 이 문서 시작부분에는 김현희가 어떤 상황에서 진술서를 썼는지 알 수 없다는(WE DO NOT KNOW THE CONDITIONS UNDER WHICH KIM WROTE HER CONFESSION)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서울에 도착한 지 9일이 지나 협조하기 시작했다는 한국 당국의 말을 근거로, 자백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적혀 있다(358쪽).

북 개입에 대한 증거

▲ 호주 외무부는 KAL858기 사건 관련 전체 문서의 4분의 1만을 완전 공개했으며, 그나마 공개 문서도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 제공됐다. 비밀정보기관과 관련해 전체가 삭제된 문서. [사진제공 - 박강성주]
1988년 2월 12일 문서에는 앞에서 언급된 국제민간항공기구 관련 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2월 8일 박상용 당시 외무부 부장관이 몬트리올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북이 KAL기를 폭파하는 데 개입되었으며 이는 국제민간항공협정을 위반한 범죄행위라고 말했다(365쪽). 그리고 이와 같은 한국의 입장을 미국, 영국, 일본, 스웨덴, 칠레 등이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같은 날 뉴욕에서 작성된 문서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아주 적극적인 로비와(INTENSIVE LOBBYING) 일본의 지지를 바탕으로 2월 16일 회의에서 KAL기 사건이 의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369쪽). 아울러 한국은 결의안 채택에 관한 투표가 이루어질 경우 9 내지 10 정도의 표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는데, 다만 투표를 통한 결의안 채택보다는 북의 테러행위를 강조하는 데 회의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되어 있다.

1988년 2월 12일에 작성된 또 다른 문서는 KAL기 사건에 대한 북의 개입 여부를 다루고 있다. 이 문서는 혹시 있을 호주 의회에서의 논의와 호주 부수상(LIONEL BOWEN)의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부분적으로 고려해 작성되었다(372쪽). 이에 따르면, 당시까지 확보 가능한 증거들은(그 출처는 문서에서 모두 삭제) 한국 정부의 수사결과가 상당 정도 맞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SUBSTANTIALLY CONFIRMS THE ROK INVESTIGATION). 구체적인 내용 부분에는 폭약과 관련된 항목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김현희가 설명한 폭약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당시 발견된 소량의 잔해의 분석 결과 아주 강력한 폭발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374쪽). 이 정보의 출처는 삭제되어 있는데,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폭발물의 흔적은 없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좀더 조심스럽게 검증되어야 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외무부는 1988년 2월 16일 기준으로 사건에 대한 호주의 입장을 내부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분적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문서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다양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북의 정보기관이 KAL기의 폭파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는 듯하다고(THERE APPEARS TO BE CONVINCING EVIDENCE) 판단했다(389쪽). 그리고 북에 의한 이러한 테러를 강력히 비난한다는 입장이었다. 사건 발생 이후부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호주는, 한국의 수사발표, 자체적인 검토 등을 거쳐 유엔에서의 사건 논의를 앞두고 이러한 판단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1988년 2월 17일자 문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가 끝나고 작성되었다. 호주는 사건 논의의 마지막 분위기를 북쪽과 다른 한 쪽, 다시 말해 남쪽-일본-미국-바레인 사이의 짜증스럽고 험악한 싸움으로(TIRESOME SLANGING MATCH) 묘사하고 있다(406쪽). 나아가 회의의 결과는 남쪽과 북쪽 모두에게 별로 이득이 되지 않았다고(LITTLE GAIN TO EITHER THE ROK OR DPRK SIDES) 정리한다. 개인적으로 KAL858기 사건의 전체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이지 않나 싶다. 북이 했든 누가 했든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 사건의 '승자'는 결국 없다는 생각이다. 굳이 승자를 따진다면, 분단이라는 상황 자체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같은 날 작성된 또 다른 문서에는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이 보낸 사건에 대한 국회결의안이 이장수 호주 주재 한국대사 이름으로 첨부되어 있다. 당시 국회는 북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을 처벌하고 KAL기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촉구했다(398쪽). 1988년 2월 19일자 문서는 남북-북남관계의 정치상황에 관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박세직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의 말이다. 박 위원장은 중국과 소련의 선수들에게 되도록이면 빨리 도착하라는 요청이 갈 수도 있는데, 이유는 그 나라 선수들이 오게 되면 북이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408쪽). 1988년 3월 4일 기준으로 호주 외무부에서는 한 편의 편지 초고가 작성되고 있었다. 이는 조기덕 당시 시드니 한인회장에게 보내는 답장이었다(435쪽). 외무부는 답장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사건에 대한 호주의 입장을 전달하려 했다. 당시 한인회장이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편지가 KAL기 사건에 대한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 1988년 3월 7일자 문서는 미국에서 작성되었다. 신원이 삭제된 어떤 이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KAL기 사건은 (평양에 있는 특정 정치 집단이 갑자기 꾸민 것이 아니라) 북이 몇 년에 걸쳐 오랫동안 계획해왔던(PREPARATION FOR SEVERAL YEARS) 것이라고 한다(438쪽).

1988년 3월 11일자 문서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회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문서에 따르면 KAL기 사건이 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국 회의 의제로 채택되었는데, 논의 과정에서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쿠바, 중국 등이 반대의견을 표시했다(446쪽). 회의와 관련된 또 다른 문서에는 한국이 이사국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대신 결의안을 올리기로 했다고 되어 있다. 호주는 이와 관련해, 만약 결의안이 서구 국가들의 지지만을 받는다면 이 문제가 서구-동구권 사이의 문제로(East-West issue)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적었다(454쪽). 1988년 4월 12일자 문서는 일본의 어느 월간지(MONTHLY KENDAI CHOSEN) 내용을 다루고 있다(514쪽). 이 월간지에 칼럼을 쓴 쿠니 아키라에 따르면 최근 소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중국이 북에 대해 사건과 관련된 해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칼럼을 쓴 이에 따르면, 북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는데 이 일이 정말 있었던 것인지는 문서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2012년, 사건 발생 25년

2012년은 KAL858기 사건 발생 25년이 되는 해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선거 등 중요한 정치행사들이 예정되어 있다. 1987년 당시에는 대선을 하루 앞두고 서울에 도착한 김현희가 선거에 일정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김현희가 25년이 지나 치러질 선거에서는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선거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으로 직접적이고도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 선거 같은 거대한 이야기들 속에 정작 115분의 실종자와 그 가족들 이야기는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1987년은 물론 그 이후에도 그랬듯이. 2012년은 과연 어떠할까. <끝>

(수정, 31일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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