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열(중국 청화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북경소재 영문매체 제4언론 책임주필)

정기열 교수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부고 발표 사흘 후인 22일 평양에 들어갔다. 정 교수는 북녘땅 곳곳을 방문하면서 북녘동포들이 당한 대국상 기간의 모습들을 통일뉴스를 통해 몇 차례에 걸쳐 외부세계에 있는 그대로 전할 것이다. / 편집자 주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 하루 전부터 풀리기 시작한 평양 날씨는 지난 열흘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을 잠시 뒤로 물러서게 한 것 같았다.

전국 방방곡곡 김 위원장 초상이 모셔진 모든 곳들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몰려드는 북녘동포들의 절절한 슬픔과 아픔에 하늘마저도 슬퍼하고 아파한 것일까?

2천5백만 북녘동포들의 눈물 없인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최고지도자와 전체 인민 사이의 위대한 참된 사랑의 이야기에, 일찍이 인류역사 그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에 하늘마저도 감동했기 때문일까?

하늘마저도 절절히 비통해하는 북녘동포들의 몸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하늘이 그리도 무섭게 춥던 평양날씨를 영결식을 맞게 되는 평양시민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돕기 위해 온화한 날씨로 바꾸어 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달리던 야전열차’ 안에서 홀연히 생을 마감한 12월 17일 이전부터 마치 살을 에이듯 춥던 날씨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됐었다.

그러나 영결식을 하루 앞둔 27일 날씨는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추위가 한결 가시고 찬바람도 멎었다.

27일 저녁 10시경 취재를 위해 찾았던 김일성광장에는 여전히 지난 열흘 내내 그랬듯 수천 수만의 군중들이 운집해있었다.

추위가 한결 가신 이유 때문인지 평균 1-2시간씩 추모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보는 필자의 마음 또한 한결 가벼울 정도였다.

노동신문에 의하면 서거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19일부터 24일까지 1주일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된 김 위원장의 대형 초상을 찾아 추모한 횟수는 4천 5백만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추모의 발걸음은 줄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늘기만 했다.

김 위원장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마지막 지나갈 평양시내와 전국 방방곡곡 초상화가 설치된 곳들로 모여들 영결식 날의 추모숫자까지 합치면 아마도 장례 전 기간 전국에서 김 위원장을 추모한 숫자는 족히 모두 1억이 쉽게 넘을 것 같다.

12월 28일 2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

밤새 내린 함박눈은 오후 2시 시작하는 영결식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평양시내 영웅거리, 통일거리 등 영구차가 지나게 될 약 100리의 거리로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수백만의 평양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평양주재 각국 외교관성원들, 유엔 및 대북지원 국제기구 성원들, 28일 장례식에 참가키 위해 세상 곳곳에서 급히 평양을 찾은 해외동포들을 실은 길게 늘어선 차 대열이 영결식이 시작되는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가기 위해 평양체육관을 떠난 시간은 오후 1시경이었다.

그러나 평양체육관에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수산기념궁전까지 차량 대열이 가 닿았던 시간은 영결식이 시작된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영결식장 주석단 좌측에 본래 가있어야 했을 인원들은 부득이 기념궁전 광장 좌측 대열 끝부분에서 영결식장으로 이제 막 들어선 영구차량 대열을 보아야 했다.

외투, 목도리를 벗어 영구차가 지나갈 길에 깔아 드린 북녘동포들

그러나 외교관 성원들과 해외동포들을 실은 차량대열이 영결식 시간에 맞추어 가지 못한 이유는 영결식 전 평양시내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산인해의 시민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영구차가 지나게 될 거리거리에 끝없이 내리는 눈을 치우고 닦는 것도 모자라 그 거리들 위에 자신들의 외투와 목도리를 벗어 깔고 지어는 길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을 외투를 벗어 여럿이 나누어 옷을 펼쳐 들고 있는 시민들로 인해 차량 대열이 앞으로 헤치고 나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영결식 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향했던 차량 대열만이 경험했던 일이 아니었다.

영결식이 시작되어 평양시내로 마지막 길을 나선 김정일 국방위원장 유해를 실은 영구차량대열 또한 비슷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구차량 대열의 경험은 외교관 성원들과 해외동포들을 태운 차량 대열의 경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평양시민들이 영구차량 대열을 아예 가로 막아 나섰기 때문이다.

통곡, 비애, 슬픔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12월 28일의 평양하늘

연도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던 인민들이 “장군님, 가시면 안 된다!”고 “가시면 안 된다!”며 길 한가운데로 몰려나와 영구차 대열을 아예 막아 나섰기 때문이다.

영결식 뒤 호텔로 돌아와 TV보도를 통해 알게 된 사연들이다.

영구차량 대열은 끝없이 길 한가운데로 몰려나와 영구차량을 멈춰 세우는 북녘동포들로 인해 번번이 멈추어 섰다.

12월 28일 북의 수도 평양에서 거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을 경험하며 또 갖게 되는 생각이다.

수천 수만 년 인류역사에 오늘 2천5백만 조선인민이 “그리도 끔찍이 사랑했던” 자신들의 “경애하는 최고지도자”와 나누어 가진 것과 같은 “참된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가 이 세상 천지 그 어디에 또 있었을까 묻게 된다.

그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키 어려운, 상상을 초월하는, 눈물 없인 말할 수 없고 쓸 수 없는 북녘동포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대서사시 같은 역사가 인류역사에 언제 또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2011년 12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이 거행된 평양의 하늘은 2천5백만 조선인민들의 통곡과 비애, 슬픔의 아우성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북녘동포 대부분에게 아직도 현실 같지 않은 마치 무슨 악몽을 꾸는 것 같은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린 지 열흘이 지난 오늘 2천5백만 전체 조선인민은 당신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다함없이 흠모해마지 않던 경애하는 장군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영결’(永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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