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열(중국 청화대학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북경소재 영문 제4언론 책임주필)

정기열 교수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부고 발표 사흘 후인 22일 평양에 들어갔다. 정 교수는 북녘땅 곳곳을 방문하면서 북녘동포들이 당한 대국상 기간의 모습들을 통일뉴스를 통해 몇 차례에 걸쳐 외부세계에 있는 그대로 전할 것이다. / 편집자 주

12월 22일 도착 이후 평양 모습

12월 22일 오후 5시경 영하 6도의 추운 날씨인 평양엔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마치 웃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입국사증 검사장에 들어서자 이전과 달리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날카로운 모습이 평양 순안 비행장을 들어서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핀다.

이것은 평양시내로 가는 도중에 있는 아마도 비행장과 시내 중간쯤에 위치한 군인경계초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방위원장의 서거와 관련 안팎의 온갖 적대세력들의 ‘대북 고립압살책동’을 철저히 경계하고 응징하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보인다.

공항에서 지난 20여 년 넘게 뵈었던 기억에 있는 몇몇 공항직원들께 유일하게 먼저 드린 애도의 인사는 “힘내십시오!”였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답하지 않으신다. 아니 못하신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모두들 눈가 주위가 퉁퉁 부어 있는 모습들이다.

12월 22일 오후 2시 5분 북경 발 평양 행 고려항공(JS 252기) 기체 안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경국제공항 제2청사 9번 출구 앞 대합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북녘동포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말을 조금이라도 붙이면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감히 제대로 인사도 못할 정도의 분위기다.

기체에서 옆자리에 앉은 젊은 북녘동포와 잠깐 대화했다.

덴마크에서 근무한 뒤 귀국하는 두 젊은 청년의 눈이 모두 뻘겋다. 그들의 눈가 주위 또한 부은 모습이다.

그들이 얼마나 울고 통곡해 했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키가 9척의 30대 초반 청년은 아예 밥에 손을 대고 있지 않아 “왜 안 먹는가” 물으니 “밥 먹을 의욕조차 없다”고 한다.

“힘내야 한다!”고 말하곤 곧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서 막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들에서 호텔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 역시 대동소이했다.

모두 깊은 슬픔과 비통함에 잠겨 있어 감히 인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눈도 마주치기가 어려워 목례만 간단히 하곤 지나쳐야 했다.

온 나라의 모든 것이 다 슬프고 절절히 애통한 모습 같다.

사람은 물론 지어는 길거리의 나무들조차, 순안 비행장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모든 길녘들조차 모두 슬프고 애통한 모습 같았다.

길거리를 지나는 북녘인민들 모습에서 또한 같은 한없이 슬픈 모습을 본다.

그러나 평양으로 떠나기 직전 북경공항에서 접한 남녘의 보수매체들에선 “추모는 도심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지방은 드문드문 하다”고 보도했었다.

그들은 과연 무슨 자료와 도대체 어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그런 일종의 날조된 허위사실을 언론보도라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에게 과연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있기조차 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도대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기나 하는 것일까 의문스럽다.

최소한의 예의와 양식조차 잃어버린 모습 같아 남녘출신 해외동포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안타깝다.

12월 22일 밤 10시 경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추모 관련한 녹화방송이 이어졌다

김 위원장의 마지막 몇 달이 된 최근의 현지지도 영상을 담은 기록영상들을 보았다

영상들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록영상물을 보는 내내 주체키 어려운 감정에 애를 써야 했다.

영상물 끝에 10월 어느 날엔가 찍은 ‘함남의 불길’과 관련된 기록영상물을 보았다.

함경남도의 모든 노력영웅들(과학자, 학자, 노동자, 농민, 여성 등), 먼 지방 각 부문의 모범일군들을 평양에 초대해 극진히 대접하고 환대하며 김 위원장이 그들 모두와 일일이 잔을 부딪쳐 축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엔 김 위원장이 평소 현지지도 때와 달리 평소에 잘 벗지 않던 색안경을 벗은 모습이 담겨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고 애통해했을 북녘동포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니 조선사람이 굳이 아니라도 누구든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맑고 열린 깨끗한 양심의 눈으로 그 영상물들을 보았다면 그가 누구든 어디에서 살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영상물 속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치 살신성인의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을 것 같은 모습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불사르듯 살다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생을 산화하듯 아니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일에 몰두했던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영상에서 북녘동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인민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가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한 호흡까지 어떻게 쓰다 생을 마감했는지 짐작키 어렵지 않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친에게 평생의 교훈이자 가르침이었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의 길을 그 자신 또한 가기 위해 그가 마지막 한 순간까지 혼신을 다해 어떻게 살며 일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인민들” 곁을 떠났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몇 달의 모습을 담은 영상물들 가운데는 그가 다음 날 아침 마치 다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몹시도 쇠약해 보였던 모습들이 여럿 있었다.

마치도 중병을 앓고 있는 회복이 쉽지 않아 보이는 심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의 심각했던 건강상태는 서거 이후에야 이곳 인민들에게 소상히 알려진 것 같다.

북녘동포들이 이리도 애통해하고 절절히 슬퍼하는 주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몸을 이끌고 생의 마지막까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민을 만나고 한 곳의 초소, 한 곳의 공장, 농장이라도 더 찾겠다”는 마치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어떤 단호한 의지 같은 것이 담겨 있던 현지지도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물을 보며 비통해하지 않을 북녘동포들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다.

영상물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도대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지도자가 김 위원장이 살았던 삶을 살다 생의 마지막을 마치 산화하듯 “현지지도의 길을 가던 달리던 야전열차에서 이른 아침 생을 마감한 지도자”가 역사상 또 있을까 궁금해진다.

다는 모르더라도 나름대로 알고 있는 세상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그가 살았던 삶과 비슷하게라도 살다 마치 산화하듯 생을 마감한 지도자는 흔치 않았을 것 같다.

그것도 1990년대 이후 ‘21세기 세계제국’의 지위에 올라 ‘지구촌 유일초강국’이란 명패를 내걸고 지구는 물론 우주공간까지 타고 앉아 마치 온 세상을 호령하듯 군림했던 오만한 세계제국 미국을 끝없이 굴욕과 양보(혹은 패배)의 나락으로 떨구고 했던 한 ‘위대한 지도자’를 또 다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제국적 지배질서를 온 세상에 강제했던 명실상부하게 인류역사상 최대최강의 제국 미국을 한치의 양보와 물러섬 없이 맞받아 처가며 미국주도의 제국주의국제연합세력과 당당히 맞서 그들과 포성소리 없는 치열한 대전을 끝없이 벌였던 지도자가 그렇게 쉽게 또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아서다.

그가 오늘 국가와 사람들 간에 서로 일정한 차이가 혹 있더라도 큰 틀에서 반제자주의 원칙을 견지하려는 여러 국가들(중국, 러시아, 쿠바, 베트남, 베네수엘라, 이란, 시리아 등)과 조직의 영도들에 의해서까지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치 자신을 불사르듯 살며 마감한 그의 마지막을 회상하며 갖는 단상이다.

북녘동포들이 울부짖으며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절규, 곧 김 위원장이 자신의 “한 생을 온전히 인민의 행복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바쳤다”고 말하는 그 주장은 공염불만은 아닌 것 같다.

중국, 러시아, 쿠바, 베트남, 몽고, 베네수엘라, 라오스 등 세상 여러 많은 나라들에서 보내온 조전내용들과 그들의 조문 모습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단상이다.

혹시 그들 또한 “달리던 야전열차에서 생을 마감한” 김 위원장의 죽음에서 어떤 숭고함, 경외심 같은 것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그는 죽음으로조차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다는 인민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마지막 호흡조차 온전히 인민들에게 바친 채 아무런 미련과 후회 없이 홀연히 인민들 곁을 떠났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인민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함께 그 어떤 마지막 유훈을 남기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북녘동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조선혁명’의 길을 멈추지 말라고 간절히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을 맞는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위한” 길, 특히 ‘인민경제발전’의 길을 멈추지 말 것을 그래서 초심과 신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라와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흔들림 없이 모두 하나로 “일심단결 하여 나라와 인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그 어떤 말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훈으로 남기려 했던 것은 아닌지 싶어서다.

그는 동시에 조선을 감히 넘보는 세상의 모든 적대세력들에겐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엄히 경고하는 말을 말없이 죽음으로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던 것은 아닌지 싶어서다.

그의 몸은 육안으로 보이는 세상에서는 오늘 비록 보이지 않고 사라졌으나 그의 유훈과 가르침, 북녘동포들 표현대로 ‘위대한 생의 흔적’은 중국지도부가 발표한 국가공식 조사에서의 표현처럼 어쩌면 이곳 인민들과 세상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영생하게 될지 몰라서다.

중국은 자신들의 국가조사의 마지막 문장을 영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He will be immortal.” 곧 김정일 위원장은 “영생할 것이다!”라고 썼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위대한 한 생’의 마지막 한 순간을 보는 것 같아 현실이 아닌 마치 영화의 어느 한 장면을 보는 듯싶다.

그의 마지막 몇 달을 담은 동영상 모습들 속엔 병든 쇠약한 모습만이 아닌 한편 몹시도 인자하고 참으로 다정한 함박웃음이 가득 담긴 모습 또한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절통하고 애석함이 이곳 북녘동포들 마음 속 깊이에 남아있는지 모른다.

동영상 속의 그의 환한 웃는 모습들 속엔 이제 머지않아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부모의 심정에서만 비롯될 그래서 몹시도 아련해 보이는 어떤 깊은 슬픔이 담긴 모습이 보인다.

오늘 많은 조선인민들 마음속에 그들이 이제야 들어 알게 된 김 위원장이 지난 2-3년 불치의 심장뇌질환을 앓았다는 소식과 그가 ‘현지지도의 강행군’을 쉬지 않았던 배경 그리고 그가 마지막 남긴 그 환한 웃음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그들의 마음을 그리도 아프게 하고 저리도 비통하고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살아계신 동안 당신의 숨이 한 호흡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 한 순간이라도 더 많은 곳을 더 많은 인민을 더 많은 사업장을 더 많은 초소와 작업장을 찾으셨던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북녘동포들을 이리도 더 절절히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들을 더욱 추동하고 고무하여 신심에 넘쳐 조국을 부강, 번영, 발전하는 자주적 통일국가로 건설해나가라!”는 가르침을 남기기 위해 “그토록 마지막까지 자신을 불태우셨구나!”라는 일종의 어떤 깊은 숭고한 깨달음이 대국상(大國喪)을 당한 이곳 북녘동포들 모두의 마음속에 그들의 심장 속 깊이에 경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없이 깊어 보이는 북녘동포들의 슬픔의 깊이를 도저히 가늠키 어려워 더욱 갖게 되는 생각이다.

평양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 김 위원장의 ‘태양상’이 모셔진 곳들에 추모의 발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들을 포함 스스로 수십 명씩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밤새 집단호상을 서는 이유와 까닭을 혹 바깥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하다.

추모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평양에 24일 밤, 눈이 내렸다.

그리고 혹한의 날씨에 길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 날 내내 지구촌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풍경을 보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너나 모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언 길을 묵묵히 까고 있던 풍경이었다. 평양시내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던 풍경이다. 이루말로 형언키 어려운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곳 동포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하나의 대가정’이라고 하는 말뜻을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된 풍경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생각과 의식보다도 영혼 속 깊이 그 어딘가에서 경험된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조선 앞에 끝없이 다가서는 그 어떤 난관과 시련, 도전도 타고 넘어 강성대국건설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 어떤 일념으로 그는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결국 2011년 12월 17일 이른 아침시간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가 최고지도자가 달리던 야전열차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아직은 인류역사에 전무한 역사를 남긴 셈이다.

12월 23일

서거 소식 뒤 몇날 며칠 자지 못하고 쉬지 못했던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래선지 일찍이 골아 떨어져 아침까지 모처럼 잘 쉬었다.

아침 밝은 시간에 만나는 조선사람들 모두의 모습은 어제 저녁보다 더 선명했다. 말을 걸면 마치라도 막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 있는 슬픈 모습들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존재가 이들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더욱 절절히 심장 깊이 경험케 된다.

거의 모든 남성들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 모습들이 가슴을 더 미어지도록 아프게 한다.

인류사에 이리도 온 나라 온 인민이 자기들의 최고지도자를 잃은 슬픔과 애절함에 대해 제 친부모 형제자식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보다도 더 절절히 더 괴롭게 더 아파하는 모습이 이 세상천지 그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김일성 주석이 홀연히 떠났을 때와도 같으며 동시에 그 때와는 무언가 참으로 많이 다른 그 어떤 다른 아픔이 그 때와는 또 다른 그 어떤 서러움과 애통함이 무언가 또 다른 절절함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이 “그리도 따르고 흠모했던 최고지도자”를 1994년 7월에 이어 오늘 2011년 12월 또 다시 홀연히 잃게 된 북녘동포들의 아픔이 너무도 애절하고 슬퍼 그들과 함께 울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이다.

아직은 상대적으로 연소하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일천할 20대 후반의 청년 막내아들에게 그리도 무거운 나라와 민족, 세상의 어려운 짐과 과제를 지운 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로서의 아픔과 염려, 애절함이 마치도 당신이 그리도 사랑했던 인민들 모두의 심장에 온전히 그대로 모두 전달된 것 같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국상을 당하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과 비통에 잠겨있는 북녘동포들의 슬픈 통곡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공부를 멈추지 않고 인민들과 군인들은 직장과 초소들에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곤 저녁나절엔 또 다시 태양상이 모셔진 전국 방방곡곡의 추모장소로 달려간단다.

혹 김 위원장 영상이 먼 곳에 있는 곳들에선 대신 김 주석과 김정숙 여사의 초상, 동상이 있는 곳들로 몰려가 추모의 눈물을 흘리는 이곳 북녘동포들의 애절하고 비통한 모습을 본다.

김 위원장을 추모하는 애절하고 비통한 통곡소리가 북녘의 밤하늘을 더욱 어둡고 춥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영상이 모셔진 곳들마다 예외 없이 양 옆엔 집단으로 길게 늘어선 집단호상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나이와 성별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나이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허리가 굽어진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다. 살을 에는 추위와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씩 호상을 자원해서 서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 부위원장이 지시한 임시로 몸을 녹이고 쉬는 진기한 풍경들이 곳곳에 설치되고 있다.

몸을 잠시라도 녹이도록 들어가 쉴 수 있는 대형 천막들이 초상화가 모셔진 곳들에 예외 없이 설치되고 있었다.

발동을 끄지 않은 대형 버스들 또한 초상화가 모셔진 곳들에 있다. 몸을 녹이는 또 다른 방안이다.

필자가 도착한 22일 저녁에 보지 못했던 모습들 가운데 또 하나의 새로운 풍경도 있다. 24일 밤 보았던 모습이다.

중간 중간에 밤늦은 시간에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흰색을 입은 모습의 사람들을 보았다.

조금 지나서야 그들이 자원해서 나선 주변 병원들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이었음을 알게 됐다.

오열하고 통곡하다 심장에 질병이 있으신 어르신들이 기절도 하고 때로 하도 울어 아예 기진해 일어나지 못하는 분들을 돕기 위해 병원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든 조치들이다.

밤을 새어 호상하고 늦은 밤 시간에 초상을 찾는 인민들을 위해 더운 물을 데워 봉사하는 천막도 여기저기 군데군데 세워지고 있음도 본다.

그리곤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우는 그들의 애절하고 비통한 모습을 보며 필자 또한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워 그대로 둔다.

그런 모습은 비록 평양시내만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마찬가지다.

조선중앙TV가 비쳐주는 전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의 모습은 예외가 없다.

참고로 북경 소재 제4언론은 조선중앙통신의 도움을 받아 수백 장의 사진들을 매일 새롭게 우리매체(www.4thmedia.org)에 올리고 있다.

제4언론의 모체인 4月媒體(중문)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중문매체엔 지난 9월 조선중앙통신과 기사교류 및 협력을 시작하면서 얻은 올 한해 내내 이루어진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올려져 있다.

마지막 숨을 달리던 야전열차 안에서 거두기까지 끝없이 계속된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곧 올리게 될 것이다.

참고로 제4언론의 평양취재 통신은 오늘의 제1신에 이어 12월 31일 이곳을 떠나기까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남녘과 해외동포들을 위해 이곳 북녘동포들이 당한 대국상 기간의 모습들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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