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주최하고 평화3000이 후원한 ‘6.15공동선언 11주년 기념 통일뉴스 방북기 공모전’(5.21-6.20)에서 3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관련기사 보기]
'통일상'을 받은 리정애 씨의 '재일조선인 리정애의 조국방문기'를 3차례로 나누어 전재한다.
/편집자 주


▲ 1996년 8월 조선대학교 4학년 때 '조국강습'을 위해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사진제공 - 리정애]
조국에서 보낸 나날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 내 인생은 조선대학 편입과 조국방문, 그리고 남쪽 고향땅 체류를 통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조국방문은 내가 통일일꾼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남쪽에서 살 수 있게 되면서 우리 땅에서 직접 통일을 위해 이바지하고 싶다는 내 오랜 꿈은 이루어질 것 같다. 대신 또다시 조국 땅을 밟을 수 있는 기회는 없어졌다.

난생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은 것은 조선대학교(조대) 4학년 때인 1996년 8월말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 나라는 지금 살고 있는 일본이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나라를 몇 번이나 꿈꿔봤을까. 언제인가 꼭 가보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조선대학교에 편입하면서 그 기회를 얻었다.

사람들은 고등학교까지 죽 일본학교를 다닌 내가 왜 조선대학교에 편입했는지 궁금해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따로 선택권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우리말 습득과 조국방문, 이 두 가지 목적으로 편입을 결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는 졸업학년에 조국강습이 있었다. 우리말을 공부하면서 4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1996년 8월 24일 밤, 니이가타항을 향해 조대를 출발했다. 다음날 아침 니이가타항에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만경봉호와 만났다. 아주 멋지고 새하얀 그 모습은 틀림없이 우리 민족의 배라는 느낌을 주었다. 정확한 명칭은 ‘만경봉92’이며 초대 만경봉호와 삼지연호에 이어 92년에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진수한 화객선이다. 만경봉호 속에서는 우리 재일동포들을 환영해주는 ‘반갑습니다’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조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반갑다’는 말의 진 뜻을 마음속으로부터 느꼈다. 너무나 반가웠고 또 그들도 우리를 반겨줬다.

그 당시 재일동포들은 니이가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조국과 일본을 왕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2006년에 북쪽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는 것을 빌미로 일본 정부가 5년째 입항금지조치를 하고 있는 상태다. 조국방문을 하는 재일동포 학생들은 물론, 특히 북쪽에 가족과 친척이 살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1세 동포이신 내 보자기 선생님은 딸을 만나기 위해 1년에 한 번 만경봉호를 타고 방문을 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비싼 요금과 힘든 일정을 감수하면서 비행기로 왕래하셔야 하게 됐다. 언제는 짐을 부치려고 했더니 일본 세관에서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립크림을 찾아내 ‘사치품’이라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연세가 85살이 되는 선생님한테 버릴 수도 없다면서 편도 2시간이나 되는 공항까지 받으러 오라고 했다.

8월 26일 오후 3시 55분, 드디어 원산에 도착했다. ‘조국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갑판에 나가봤다. 난생처음으로 보는 조국의 모습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작달비 속에서 우리를 환영해주는 조국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찡했다. 만경봉이 부두에 계류되어 내가 내릴 차례가 왔다. 나는 크고 무겁고 게다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여행가방과 우산을 들면서 미끄러운 트랩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내 조국의 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을 때, ‘양발’이나 ‘양손’으로 밟는다. 나는 조대에 들어가 그 얘기를 듣자 꼭 ‘양발양손’으로 밟을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드디어 오랜 꿈을 실현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여행가방에서 손을 떼고 바로 양손양발로 조국 땅을 밟으려고 한 그 순간, ‘앗!’ 우산이 날아가고 무거운 여행가방은 트랩의 비탈 때문에 넘어졌다. 정신이 번쩍 드니 내 발은 이미 조국땅을 밟고 있었다.

입국수속은 간단한 것이었다. 북쪽은 재일동포 학생들의 국적이 조선이든 한국이든 심지어 일본이든 조선학교에 다닌다면 다 상관없이 입국시켜준다.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재입국허가서와 외국인등록증만 가지고 가면 입국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입국수속을 끝내고 원산을 잠깐 구경하고 우리 일행은 드디어 평양으로 향했다. 원산에서 평양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 친구들과 함께. 맨 왼쪽이 필자다. [사진제공 - 리정애]
우리 외국어학부 4반은 체류하는 40일 동안 그 버스를 타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면서 평양은 물론, 묘향산과 같은 평양 근교 관광지들을 돌아다녔다. 지도원과 버스, 비디오, 카메라 아바이들이 동행해서 우리를 살펴주었다. 남남북녀라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북남들은 잘생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아바이들도 나름 잘 생긴 편이었고 사람이 좋다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 속에서도 특히 지도원은 180이상 키에 성룡을 성형수술한 느낌의 배우같은 외모였다. 너무 멋있어서 얘기할 때마다 긴장해서 못하는 우리말이 더더욱 못하게 된 것이 기억난다.

개선문을 지나면 천리마동상이 보였다. 평양, 조국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후로 나는 조국에 있었던 40일 내내, 그리고 남쪽 고향땅에서 사는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됐다. 옛날부터 눈물이 많은 편이었고 감동해서 울 때도 많았지만 그 눈물은 단순히 감동의 눈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눈물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통일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나머지 목이 항상 마르지만 통일과 우리 민족만 생각하면 내 눈은 한시도 마르지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조국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특히 아침의 모습이 각별했다. 아침이 산뜻하다는 ‘조선’이라는 말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해돋이 색깔이 일본과 전혀 달랐다. 평양은 거리가 잘 정리되어 있고 모든 건물의 배치와 건축방식이 예술적이었다. 건물들과 그 구성이 너무 아름다워서 몇 시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길에 쓰레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도 없는지 참 깨끗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조선말로 쓰인 간판들이 참 신기했다. 간판과 구호들을 보면서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방문하기 전부터 내가 하는 우리말이 과연 조국사람들한테 통할까 많이 걱정했었는데 그것은 헛걱정이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말투가 이상하다고 웃거나 깔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4년 동안 배운 우리말로 조국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 평양 숙소로 사용한 평양려관에서 친구와 함께. [사진제공 - 리정애]
평양에서의 우리 숙박소는 음식이 맛있는 것으로 이름을 떨친 평양려관이었다. 나는 입이 까다로운 편이라 조대에 편입할 때 조대 식사가 입에 맞을지 나도 어머니도 많이 걱정했었다. 조국방문 때도 음식이 입에 맞을까 어머니가 많이 걱정했다. 어머니가 컵라면이나 일회용 음식을 가져가는 동포들도 있다고 듣고 가져갈 것을 권했지만 나는 조대 식사도 입에 맞는데 우리나라 음식이면 더더욱 입에 맞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걱정은 완전히 기우였다. 보통 배나 기차 음식은 맛없는데 만경봉호 식사부터가 맛있었다. 두 그릇을 먹었다. 담백하면서도 구수한 북쪽 음식은 나한테 잘 맞아 떨어졌다. 한마디로 뭘 먹어도 끝내줬다. 너무 맛있어서 매 식사시간이 기다려졌다. 매일 아침식사마다 밥하고 반찬, 그리고 빵까지 나왔다. 완전 풀코스였다. 팥죽이 나올 때도 있었다. 나는 먼저 밥하고 반찬, 그리고 빵을 먹고 후식으로 설탕을 넣은 팥죽을 먹었다. 매 식사마다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고 과식상태였다.

너무나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도 있었지만 식량난으로 어렵게 사는 북쪽 동포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음식을 남길 수 없었다. 내가 앉은 식탁은 언제나 그릇이 다 비었다. 식사 전에 주전부리를 먹어놓고 살찐다고 밥을 남기는 동무들도 있었다. 나도 간식을 먹긴 했는데, 그런데도 살찌지 않았다. 내가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서가 아니다. 조대 입학해서 우리말 100일간 운동 동안에 10키로나 살쪘는데도 조국에서는 전혀 살찌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매직이다.

내가 조국강습을 간 1996년은 ‘고난의 행군’ 속에서도 가장 어려운 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북녘 땅 어디를 가도 푸짐한 음식으로 대접해줬다. 재일동포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마음을 절감했다.

평양려관 식사도 맛있었지만 외식도 참으로 맛있었다. 옥류관 랭면은 진짜 끝내줬다. 나는 랭면 세 그릇에 아이스크림 다섯 그릇을 먹었다(그때는 아직 21살이었기에 가능했다). 옥류관 아이스크림은 우유냄새가 많이 났다. 실은 나는 우유를 못 먹는다. 유제품은 좋아하나 우유냄새가 나면 못 먹는다. 그런데 옥류관 아이스크림은 먹은 순간 내 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옥류관 아이스크림의 진한 맛과 평양려관 근처에서 파는 도넛의 소박한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북쪽 요리 중에서도 특히 오리고기와 감자요리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일본에 가서도 그 오리고기와 감자 맛을 오래동안 잊지 못했다. 일본에도 야생 물오리나 물오리와 집오리를 교배한 오리고기가 있는데 흔하지 않다. 일본에서 먹는 오리고기도 무척 좋아하지만 북쪽에서 먹은 그 오리고기 맛은 지금도 못 잊는다. 남쪽에 오면서 그나마 비슷한 것을 먹어봤을 때는 참으로 기쁘고 반가웠다. 특히 남편인 김익 씨가 오리고기 양념을 잘하는데 낙성대에서 선생님들과 평양소주를 마시면서 그 오리고기를 먹을 때는 진짜 행복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맛있는 오리고기의 오리가 청둥오리가 아니라 그 하얀 집오리 100%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사육담당으로 집오리를 사육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맛있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 조국에서 보낼 수 있는 날이 딱 40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밤에도 자는 것이 아까웠다. [사진제공 - 리정애]
평양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음식이 있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먹었다는 사실은 내 민족성을 증명해주고 조선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자극해줬다. 어느 저녁에 담임선생님이 원하는 동무들만 어디 식당에 가서 어떤 음식을 먹자고 했다. 그 음식이란 바로 단고기 풀코스였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들개에 쫓기고 우산을 깨물린 적이 있다. 그 후로 개가 무서워졌고 싫어하게 됐다. 개는 내 원수였다. '언제인가 그 원수를 갚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이번 기회에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물론 농담이고 이왕 평양까지 왔는데 뭐든 못 먹는가. 나는 우리말을 못하는 것과 김치를 못 먹은 것 때문에 조선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먹어보지도 않고 냄새나 모양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이 많았다. 김치도 먹어보지도 않았고 못 먹는다고 30년 동안 안 먹었다. 그런 내가 개고기와 같은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망설일 것도 없이 먹으러 갔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매직이다.

단고기 요리 코스의 시작은 오이와 단고기의 냉채였다. 맛있었다. 역시 조국에서는 모든 게 맛있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개고기를 먹으면 기생충이 생기니까 40도를 넘는 술을 마시면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 술을 거의 못했는데 선생님 말만 믿고 입술이 아플 정도의 센 술을 핥듯이 조금씩 마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술맛을 제대로 몰라서 술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지금도 아주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남쪽에서 운동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때와 자리에 따라 막걸리를 맛있다고 느낄 정도까지 성장했다. 소주는 아직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평양소주를 먹어보니까 나름 맛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북쪽 막걸리를 먹어보는 것이 내 소박한 꿈이 됐다.

코스 메인으로 구은 단고기, 마지막에 탕이 나왔다. 비린내도 안 나서 맛있게 다 먹어 버렸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속이 좀 안 좋은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큰일을 하나 해냈다고 할까. 나중에, 11년 후에 서울에서 보신탕을 먹었다. 장기수 선생님이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냐며 사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거절 못한 것도 있었지만 북에서도 남에서도 개고기를 먹었다는 그 찬란한 경험을 가지고 싶어서 먹어봤다. 남쪽에서도 꼭 먹어봐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다. 먹어보니 나름 맛있었다. 이때도 마지막에 좀 속이 안 좋아지는 느낌은 있었다. 기생충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 좀 들었다.

나중에 남쪽에서 사람들한테 담임선생님이 기생충 때문에 40도 술을 먹어야 한다고 했던 일을 얘기했더니 다들 완전히 속은 것이라고 했다. 작년 막내 동생 졸업식 때 조대에 갔다왔는데 그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도 못 물어봤다. 언제 다시 물어볼 기회가 있을까. 아무튼 북에서도 남에서도 개고기를 먹어봤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일이다. 청국장을 못 먹어도, 개불이나 번데기를 못 먹어도, 북과 남에서 개고기를 먹어봤다고 한마디 하면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조국강습 일정은 엄청 바쁘게 돌아갔다. 학교에 있을 때 날마다 자던 낮잠을 못 자서 잠이 완전히 부족했다. 피로가 많이 쌓여서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맛있는 음식과 기력으로 어떻게 버틴 것 같다. 사실 꾀병을 부려서라도 자고 싶었지만 조국에서 보낼 수 있는 날이 딱 40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밤에도 자는 것이 아까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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