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지난 2005년 1월 27일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 제12조 근거해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의 지정과 선언만으로 될 수 없다.

4.3항쟁뿐 아니라 과거 탐라 시기부터 부침과 영욕의 역사에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척박한 돌무지 땅을 일구고 거센 바람에 맞서 싸운 제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앞으로도 평화의 땅으로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할 때만이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이다.

올해 4.3항쟁 63주년을 맞아 <통일뉴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제주를 잘 아는 한 지인(知人)과 함께 곳곳을 탐방했다. 헌신적으로 제주를 알려준 그 지인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다. 제주의 아픈 역사는 아직도 일상 곳곳에 뿌리 깊이 남아있다. / 편집자 주

삼별초 최후의 거점, 천연의 요새 항파두리

항파두성.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성은 삼별초의 최후 거점으로 장장 6Km에 달한다. 항파두성에는 제주도민들의 아픔이 담겨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역사적으로 제주사람들에게 외지인들은 모두 적이었다. 제주도에서는 한 세기를 간격으로 삼별초와 여몽연합군, 몽골의 잔당인 목호와 고려군이 대격전을 벌였다.

삼별초가 처음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사> 원종 11년(1270) 11월 기해일에, ‘적이 제주도를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이전인 10월 말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는 삼별초의 주력이 진도에 있었으나 이들은 이미 제주도를 삼별초 최후의 거점으로 미리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최후 거점이 된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온 원종 11년 11월 개경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확보해 놓은 지역이다. 김통정의 지휘 하에 들어간 삼별초군은 먼저 방어시설의 구축에 힘썼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한 항파두리다. 바깥쪽은 토성으로 되어 있고 안쪽으로는 돌로 쌓여 있는 이중 성곽의 형태인 항파두리는 장장 6Km에 달했다.

항파두리 토성은 자연적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토성의 동쪽에 고성천이라는 건천이, 서쪽에 소앵천이라는 건천이 있으며 남고북저의 지형으로 북쪽은 토성 부근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동쪽은 완만하나 서쪽에는 단애를 이루는 하천이 있어 성을 쌓기에 천연적으로 적합한 지형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항파두리 토성은 성 만으로도 아주 견고한 요충이었으며 각종 방어시설 뿐 아니라 궁궐과 관아까지 갖춘 요새였다.

삼별초의 항쟁, 제주사람에겐 고통

살맞은 돌. 항파두성 남문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살맞은 돌'은 삼벌초의 용사들이 궁술을 연마하기 위해 과녁으로 이용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돌 곳곳에 화살을 맞은곳에 구멍이 나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그러나 1273년의 고려의 김방경 장군과 몽골의 혼도가 이끄는 1만2000명의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는 함락된다. 이로써 3년 여간 이어진 삼별초의 항쟁은 끝나고 고려는 원의 정치적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항몽유적지 안내책자는 “당시 세계최강국 몽골의 원 제국과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인 고려 무인의 드높은 기상을 오늘의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겨레의 가슴 속에 k주와 호국의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이곳 삼별초 유적지를 사적지(제396호)로 지정하여 1978년부터 연차사업으로 계속 복원해 나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삼별초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민족적, 자주적 항쟁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인은 정작 제주사람들에게는 삼별초가 고통을 주는 외지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삼별초가 처음 왔을 당시 관리들의 수탈을 해방시켜줄 존재라 판단하고 이들을 도왔습니다. 삼별초가 들어오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그나마 살만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삼별초의 주둔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항쟁에 동원되면서 그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장장 6Km짜리 성은 누가 쌓았겠습니까, 삼별초군이 제주에 들어오면 얼마나 들어왔을까요? 아무리 많아도 제주도민보다 많았을까요? 지배자만 바뀐 것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제주 사람들을 싸움에 끌어들여 제주도사람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죠.”

몽골, 100년의 지배

말방아. 몽골이 제주를 지배하는 동안 말을 비롯한 여러 문화와 풍습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말방아로 제주 농촌 지역에서 말을 활용해 곡식을 찧거나 빻을 때 사용한 농기구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삼별초가 진압된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간섭기에 들어간다. 몽골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1294년까지 탐라를 직접적으로 통치하고 고려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몽골의 일본원정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

고려가 제주도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던 반면 몽골은 제주도를 해양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아 일본 정벌을 준비한 것이다. 몽골의 지배가 10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제주도는 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지금도 제주에는 순수한 제주 방언과 우리나라 고어와 함께 눌(낟가리), 놈삐(무), 촐래(반찬), 살래(찬장), 테우리(목자)와 같은 몽골어가 남아있다.

몽골의 제주 경영이 시작된 이래 장기적으로 몽골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탐라 국립목장으로 몽골족들은 제주에 온 직후 천연적 방목지가 깔려있음을 한 눈에 알아채고 충렬왕 2년(1276)에 본국의 말을 갖고 와 제주 서쪽 수산평에 풀어놓았다. 몽골식 제주 목마장은 역사상 단일국가로서 최대의 판도를 형성한 몽골의 세계정복 사업에 필요한 전투용 말을 충당하려는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고 여기에 소, 양, 나귀, 낙타, 고라니 등도 길렀다.

그때 길렀던 말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제주도의 목축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제주에서 가장 심한 욕, “몽고놈의 새끼”

또한 몽골족과 제주도 사람들의 혼인은 유전자형질까지 바꿔놓았다.

당시 고려왕은 원 황실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고 왕위계승권도 원의 공주가 낳은 왕자가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고려에 왔던 몽골군 중에는 원이 고려 여자와의 혼인에 관한 지침을 하달할 만큼 고려 여자와 혼인을 한 경우가 많았다. 외부인인 몽골인들의 유입과 몽골인들과 제주민들 사이에 낳은 아이들로 인해 이 시기 제주의 인구가 급격히 늘기도 했다.

이들의 혼인은 몽골족이 제주도에 와 장기적으로 주둔한 원종 14년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이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성년이 되었을 충렬왕 20년(1294)무렵 부터는 하급 관리직 등을 맡으며 탐라 국립목장의 운영 등에도 참여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몽골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와 한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의 한 여인이 제주에 간 남자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인 ‘지주호트(제주마을)’가 아직까지도 몽골에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가지런히 수를 놓고 제주에 있는 님을 생각하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랠 길 없다.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찾은 내 님, 그리워함은 부질없구나”라는 노래가사는 제주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현재 남아 있는 사람에게 수를 놓아서 보내겠다는 몽골 여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제주가 몽골사람들에게 있어 얼마나 친숙하고 가까운 곳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혼과 100년간의 교류로 아직까지도 제주사람들 중에 체형과 얼굴이 몽골지역 사람들을 닮은 이들이 많다.

나를 안내해 준 지인은 “강원도로 군대에 가면서 처음으로 육지 생활을 했는데 나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놀랐어요. 제주도 사람들은 키가 작고 둥글넓적한 반면에 육지 사람들은 얼굴이 길쭉하더라구요. 나이 많은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 몽골 여성들의 모습이 나온다고 할까요? 뒷모습은 영락없는 몽골아줌마예요.”

몽골이 지배하는 동안 제주도 사람들은 갖은 수모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는 육지와 달리 가장 심한 욕이 “몽고 놈의 새끼”이다. 800여년이 지났지만 제주도에는 아직도 몽골에 대한 한은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의 관리, 성정을 펼칠 수 없었던 한계 가져

월대. 월대는 외도초등학교 동북쪽 외도천변에 인접해있는 평평한 대를 일컫는다. 도근천과 외도천이 합류하는 곳 가까이에 있으며 주위에는 500여년 된 팽나무와 해송이 외도천 위로 휘늘어져 있으며 경관이 좋은 곳이다. 마을에서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동쪽 숲 사이로 떠오르는 달이 맑은 물가에 비쳐 밝은 달그림자를 드리운 장관을 구경하며 즐기던 누대라는 뜻에서 월대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찾고 시문을 읇던곳으로 유명하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조선은 중앙 집권 관리체제를 확립하면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군, 현을 두어 지방마다 관리를 보내 지방통치를 강화했다.

태종 16년(1416)에는 종래의 17현 체제에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3읍 체제로 행정구역이 변경됐다. 중앙에서 내려온 지방관은 제주목에 목사, 정의현과 대정현에 각각 현감이 있었다. 제주목사는 정3품으로 병마, 수군절제사와 수군방어사를 겸하며 제도상 전라도 관찰사의 임무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지리적 특성상 교통이 불편해 관찰사의 임무를 일부 대신했다.

특히 수령의 임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으나 제주의 경우 가족과 함께 올 수가 없어 30개월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519년 동안 286명의 목사가 임명된 사실에 미뤄볼 때 실제로는 약 1년 10개월 정도였다.

중앙집권제가 강화되면서 세종 27년(1456)에는 토착지배층인 왕자, 성주제가 폐지되었고 그 세력이 약해져 향리로 변해갔다. 그러나 향리가 된 토착세력들은 제주 사정을 잘 모르는 지방관을 도우며 지역민을 다스렸는데 이런 상황을 이용한 향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인은 “제주도에 파견된 관리는 어떻게든 다시 중앙으로 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서열이 낮거나 한직으로 밀리면서 제주도에 파견된 것이고 또 짧은 임기에 따른 잦은 교체로 지방관들은 지역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태생적으로 제주도의 관리들은 지역민을 위한 성정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육지에서 온 관리들도 제주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외지인들은 모두 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라 말한다.

유배인들의 정신, 현대까지 이어져

연북정.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위치한 연북정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해 붙인 이름이라 한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조선시대의 제주는 그저 변방일 뿐이었다. 제주는 인물보다는 말의 산지였고 중앙정치의 희생자들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로 전락했다.

제주도가 유배지로 이용된 것은 원이 삼별초를 정벌한 직후 도적들과 죄인들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원은 제주도를 유배지로 삼아 도적과 죄수뿐 아니라 왕족, 관리, 승려까지 유배를 시켰고 원이 망한 후에는 명도 원의 황실과 반대파들을 유배 보내 제주도에는 다양한 성씨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배인들이 서울을 출발해 제주도에 오는 기간은 보통 20일에서 두 달 정도 걸렸으며 제주로 유배를 온 사람은 약 200여명 정도다.

제주에 유배를 온 이들은 정치인으로의 자격은 상실했지만 제주도에서 교육활동에 주력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하고 또 유배생활동안 쓴 제주의 풍속과 기후, 제주민의 생활사 등을 글이나 책으로 남겨 당시의 제주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이들 중 김정희는 8년 3개월의 유배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완성하는 등 탐라에서 새로운 문화를 개척했다. 추사 김정희는 박혜백, 강도순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을 길렀으며 수백 권의 서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육지의 제자들과 지인들이 제주를 부지런히 내왕토록 하면서 제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했다는 것이다.

연북정. 문헌 기록에 의하면 선조 23년(1590)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이라 칭했다가 선조32년(1599)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이라 개칭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조선 후기에 유배인으로 들어오는 거물급 정치인들은 제주민들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정권이 자주 바뀌던 시기라 유배가 풀려 다시 집권하게 되면 중앙과의 연줄이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장차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유배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지인은 “당시 유배를 온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왕에게 아첨을 하기보다는 소신껏 자기 목소리를 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제주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그런 유배인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지역색이 없고 냉정히 판단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정신도 유배인의 정신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똑똑한 유전자들이 이어져 제주도 사람들이 반골기질도 갖고 있고 똑똑한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유배인들이 제주도로 몰려오면서 이런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현지주민들을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죄인이 유배지에 보내지면 유배지의 백성들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제 제주3읍에 유배인들이 많이 몰리자 도적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말을 기르기가 힘들 정도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육지로 보내달라고 상소하기도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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