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지난 2005년 1월 27일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 제12조 근거해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의 지정과 선언만으로 될 수 없다.

4.3항쟁뿐 아니라 과거 탐라 시기부터 부침과 영욕의 역사에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척박한 돌무지 땅을 일구고 거센 바람에 맞서 싸운 제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앞으로도 평화의 땅으로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할 때만이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이다.

올해 4.3항쟁 63주년을 맞아 <통일뉴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제주를 잘 아는 한 지인(知人)과 함께 곳곳을 탐방했다. 헌신적으로 제주를 알려준 그 지인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다. 제주의 아픈 역사는 아직도 일상 곳곳에 뿌리 깊이 남아있다. / 편집자 주

제주도민 20만인데 일본군 7만이 들어오다

격납고.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본토결전’을 위해 제주도가 병참기지화 됐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일제시대에는 ‘본토결전’을 위해 제주도가 병참기지화 됐다. 제주도는 중일전쟁을 치르던 때는 일본에서 무기를 한반도로 옮기기 위한 중요한 통로였고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이 미국과의 본토결전을 앞두고 전의를 다지는 요충지였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다음으로 제주도를 함락시키고 본토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일본군은 제주도의 군사기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45년 2월 9일 일본방위총사령관은 미군과의 본토결전에 대비해 7개 방면의 육해군 결전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주도 사수 작전, 이른바 ‘결7호(抉7號) 작전’이다.

1945년 4월 15일 제주도 사수를 위해 제 58군사령부가 신설 편성됐으며 일본 본토의 부대를 비롯해 만주의 관동군 등을 포함해 종전 직전까지 4개월 사이에 무려 7만명이 넘는 병력이 제주도에 집결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많은 인원이 들어오다 보니 당장 먹을 것부터 부족했다. 당시 제주도민이 20만이니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제주도를 요새화 했는지 알 수 있다.

격납고들. 알뜨르 비행장 주변의 비행기 격납고들. 이 근처에만 20여개의 격납고가 산재해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제주 오름마다 각종 진지와 요새 건설

가마오름 땅굴입구. 일본군은 가마오름 지하에서 정상부까지 거미줄처럼 동굴식 갱도를 뚫어 놓았는데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어 입구와 출구를 가려내기 힘들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일본군은 제주도의 오름과 해안 100여개소에 각종 진지를 포함한 요새들을 집단적으로 구축했으며 제주시 용담동 정뜨르의 육군서비행장, 조천읍 신촌리 진드르의 육군동비행장, 교래리의 육군비밀비행장,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해군비행장 등 총 4곳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이중 제주시 용담동 정뜨르의 육군서비행장은 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쓰고 있다.

당시 일제는 징용이나 징병 외에도 비행장 건설, 진지구축을 위한 토굴작업에 16~60세 사이의 주민을 강제동원해 노역을 시켰다. 마을별로 인구수에 비례해 동원인 수를 할당하고 노역기간은 2개월여씩이었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들도 노역에 동원시키기도 했다.

비행장 건설, 산악지대의 진지, 해안의 특공기지 건설에는 비밀유지를 이유로 주민이 아닌 군인들이 건설했지만 제주도에 파병된 일본군인 수 7만여명 중에 2만여명이 조선인 병사였고 이들이 동원됐다. 또한 각종 진지와 요새 구축에 제주도 사람뿐 아니라 전라도 등 다른 지방 사람들도 징용되어 왔다고 했다.

▲ 가마오름 동굴입구.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알뜨르비행장 하루 4500명 강제 동원

알뜨르비행장. 서귀포시 대정읍에는 일제가 중국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이들 시설들은 어떠한 장비 없이 모두 사람의 손으로 건설됐으며 부실한 밥 한 공기에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2조각이 전부인 식사가 제공돼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귀포시 대정읍에는 일제가 중국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일본군은 송악산 해안을 특공기지로 건설해 각종 갱도진지와 고사포진지를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구축했다.

‘뜨르’는 제주 방언으로 ‘넓은 평야’를 의미하며 ‘알’은 ‘아래’라는 의미로 ‘위에’를 의미하는 ‘웃’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알뜨르’는 모슬봉 밑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모슬포비행장, 또는 알뜨르 비행장이라고 불렀다.

1931년 3월 제주 해군은 제주도 서남부 모슬포 소위 ‘알뜨르’에 제주도 항공기지를 건설하고 5년에 걸친 공사 결과 1400m×70m, 약 60만㎡의 비행장이 완성됐다. 기록에 의하면 알뜨르비행장 건설에 하루 4500명의 강제노동자가 동원됐다고 한다.

1937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곳은 1944년 10월까지 2차례의 확장공사를 진행했으며 이후 3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밭 가운데 덩그러니 그 잔해가 있고 또 주변에 시멘트로 지어진 대형 비행기 격납고가 그대로 남아있어 일제시대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군 시설 외에도 제주도의 특산물인 해산물도 강제적으로 채취해 갔다고 한다. 해조류인 감태를 재로 만들어 풍부한 칼륨 성분을 화학의 원료로 썼으며 정어리에서 기름을 뽑아내 글리세린이나 화약의 원료로 썼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감태를 채취하기 위해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초등학교 학생들도 항공기 대용연료가 되는 소나무뿌리 기름채취 등에 동원됐으며 항공기용 알콜 연료를 뽑기 위해 고구마 재배도 강제되었다고 한다.

가마오름 땅굴 2km에 달해

평화박물관 내부. 평화박물관 가마오름 땅굴진지에 당시를 재현해 놓은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일제의 잔혹한 참상은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위치한 평화박물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하요새인 가마오름에 위치한 곳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의해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산 속 깊숙이 어둠속을 등잔불에만 의지한 채 끝없는 배고픔과 채찍질을 당하며 삽과 곡괭이로 만들어낸 지하요새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해 제주도를 결사 항전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가마오름 동굴진지는 일본군이 제주도 서부지역인 모슬포 또는 고산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맞아 전투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시설인 것이다.

일본군은 가마오름 지하에서 정상부까지 거미줄처럼 동굴식 갱도를 뚫어 놓았다.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어 입구와 출구를 가려내기 힘들다. 이 군사시설에는 일본군 제 111사단 예하 제244연대 본부 및 주력부대, 포병부대, 전차부대 등이 배치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지하갱도의 길이는 1.2km에 달한다. 내부의 높이는 1.8~2m 정도이며 너비는 90~130cm 정도이다.

평화박물관 내부. 평화박물관 가마오름 땅굴진지에 당시를 재현해 놓은 모습,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평화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가마오름 땅굴은 인공적으로 구축된 동굴 형태의 군사 진지로 모두 17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입구는 33곳에 이른다. 다른 곳과 달리 3층의 미로형 구조로 이루어져 적으로부터 쉽게 발각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갱도 내부는 통로를 따라 크고 작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제주도 내에서 확인된 일본군 동굴진지 중 길이가 가장 길다. 지금은 갱도 내부 일부 구간의 통로에 당시 사령관실로 추정되는 10평 남짓한 방과 회의실·숙소·의무실 용도로 추정되는 다양한 시설 및 일본군 모형물 등을 설치해 일본 침략의 잔혹한 실상을 국내외에 알리고 있다.

이곳은 일제에 강제 징용돼 노역에 시달렸던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박물관장이 이 땅의 평화와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며 만든 곳이라고 한다.

▲ 가마오름 당시 사진.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제주 출신의 재일동포들

일제시대 사진. 평화박물관 내에 전시되어있는 사진으로 일제시대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일제시대 계속되는 착취로 제주도에서는 살기가 힘들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10년대 일제는 우리나라의 경제수탈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는데 1913년부터 1918년까지 강행된 토지조사 사업은 많은 제주민들을 토지에서 소외시키고 말았다.

광활한 중산간 지대와 관아 소유의 토지가 전부 총독부 소유로 넘어가면서 많은 제주민들은 경작권을 일순간에 잃었다. 특히 중산간 목장지대를 개간해 영원한 경작권을 갖고 있던 화전농민들의 억울함과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바다까지 장악할 일제에 의해 제주도민들은 삶을 위해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내부에서는 공업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일제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1910년대 금했던 일본으로의 도항을 1922년에 자유도항제로 바꾸고 다음해에는 제주와 오사카 사이의 직항로를 개설했다. 제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송악산 해안진지 동굴. 송악산 언덕 밑에 일제가 소형함정 등을 감춰 놓기 위해 인공적으로 뚫은 굴이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1934년에는 5만명이 넘는 제주 출신의 노동자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며 살게 됐다고 한다. 나 역시 일본의 재일동포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제주도 출신이 많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가 많아요. 지리적으로 가깝다보니 징용을 당한 사람들도 많고, 먹고 살기 어려워 떠난 사람도 많아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에는 일본에 친척 한둘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학교에 가면 그 옛날에도 키티 같은 각종 캐릭터 제품을 갖고 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이 보내준 선물이죠. 일본으로 간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착취와 어려움 속에서도 제주도에 남아 있는 식구들에게 돈을 부쳤는데 당시 제주로 송금된 돈이 빈곤을 깨고 제주 사회가 유지되던 동력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아픈 역사입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